종교개혁과 혁명 사이

김환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5/10/26 [11:09]
10월의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주일'이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그 성당에 부착한 '95개항 반박문'이 도화선이 되었다.
 
종교개혁은 'Reformation'이라고 한다. 혁명 'Revolution'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혁명이란 기존의 질서를 깨부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자는 의미이다. 하지만 개혁이란 기존의 잘못된 질서를 수정하여 바로 잡자는 뜻이다. 루터의 의도는 가톨릭 내의 개혁을 원했지 혁명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95개항 반박문 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제안한 내용은 루터와 함께 비텐베르그에서 논의(Discussed)될 것이고,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은 편지로도 할 수 있다" 루터는 신앙 양심상 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 루터 자신도 사건이 이렇게 확산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면죄부(Indulgence) 판매
 
반박문의 대부분은 면죄부 판매에 관한 것이었다. 면죄부(Indulgence)란 돈으로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는 증서이다. 교황 레오 10세가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의 엄청난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고안한 모금 방법이다.
 
10월 31일을 택한 것은 가톨릭에서는 11월 1일이 '모든 성인의 날'(Solemnity of All Saints)이다. 이날은 천국에 있는 모든 성인들, 특별히 축일이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그러나 루터의 반박문에 아무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520년 루터가 3편의 논문을 발표함으로 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루터가 이 논문을 쓴 것은 가톨릭의 개선해야 할 여러 가지 점을 지적하며 ‘독일의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낸 ‘권면과 충고의 글’이다. ‘교회의 바벨론 유수’(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하고 2개월 후에 나온 글이다.
 
이 논문은 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성례관을 신학적으로 조리 있게 설명하고 반박한 글이다. 7가지 성례전에서 ‘세례와 성만찬’ 2가지로 줄여야 한다고 했다. ‘크리스천의 자유’(On Christian Liberty), “크리스천은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크리스천은 충성스런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는 이 두 가지 명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종의 자유’라고 역설했다.
 
파문(Excommunication) 당한 루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챨스 5세는 루터를 '보름스 국회'로 소환하였다. 루터의 지지자들은 가는 것을 말렸다. 이때 루터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마귀들이 보름스 국회의 기왓장같이 많을 지라도 나는 가겠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1521년 4월 17일 재판이 시작되었다. 트리에르 대주교의 고문관은 루터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 "그대의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들을 그대의 것으로 인정하는가?, 그대는 이 책들의 내용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첫째 질문에 루터는 자신의 책임을 시인하고, 둘째 질문에 하루 동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날 밤 루터는 많은 갈등을 했을 것이다. 다음날 법정에 선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의 증거와 공정한 논증으로 잘못된 것을 지적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현명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날 루터는 최종적으로 파문당했다. 이제 누가 그를 죽여도 살인이 아니다. 루터를 지지하던 프레드릭 영주는 비밀리에 루터를 자신의 성으로 데려와 보호해 주었다. 그곳에서 루터는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가 쓴 글들은 인쇄술의 발달로 유럽 전역으로 급물살을 타고 퍼져나갔다. 훗날 영국의 역사학자 '토마스 칼라일'은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 죽음을 무릅쓰고 출두한 일을 유럽 역사상 최대의 장면이며, 보름스 국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인류의 근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 구세군 한인사역(Korean Ministry) 및 수용소 담당관(Chaplian, Detention Cen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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