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타락•구속의 저자 알버트 월터스 (하)

세상을 바꾸는 작은 책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초석을 제공

김석원/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5/11/24 [12:23]
▲ 창조•타락•구속의 저자 알버트 월터스 © 크리스찬리뷰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출간 30주년을 맞아 캐나다의 기독교세계관 운동단체인 카두스와의 인터뷰 내용 두 번째다. 지난 호에 ‘창타구’의 출간 배경과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핵심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이번에는 출간 이후 나타나는 기독교계의 변화와 이에 따라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기 모든 이들에게 던지는 영적 도전을 집어본다.
 
한국의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를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펼치는 여러 기관들 중에서 카두스는 심도있는 연구와 특히 교육분야에 있어서 기독교적 가치관의 구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크리스찬리뷰는 카두스와 기사전제 양해를 얻어 지속적으로 협력할 계획이다.<편집자>
 
기독교 세계관과 신칼빈주의
 
BD: 그렇다면 책에 나오는 철학적 개념과 틀은 성경과 오랜 기독교 전통에 근거한 것이란 뜻이겠네요. (신칼빈주의의 역사가 보여주듯) 갑자기 1950년대에 유럽 한구석에 나온 것이 아니라, 훨씬 오래된 것이라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좀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AW: 여기에는 이 두 가지 만나는 몇 가지 접점이 있습니다. 제 관점과 창타구의 직접적인 뿌리는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신칼빈주의입니다. 신칼빈주의란 19세기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칼빈주의 재부흥 운동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신칼빈주의도 주어진 역사적 배경 속에서 기독교 역사 전체를 거쳐 흘러온 기본적인 흐름 중에 하나가 당시 19세기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여 표현된 특정 방식의 신앙 표현입니다.
 
이 흐름은 창조와 구속, 혹은 신학자들의 표현을 빌면 자연과 은혜의 관계에 대한 기본 질문에 적절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말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러한 답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패라다임들이 있어왔습니다. 그중 하나는 구원이 기본적으로 창조의 재회복이라고 강조합니다. 구원 역사란 창조를 다시 회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창조때부터 의도하셨던 식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성경에서부터 이어진 것입니다.
 
이레니우스, 어거스틴, 존 크리소스톰 등의 교부들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이후 16세기 틴데일이나 존 칼빈을 거쳐 수 세기를 걸쳐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화란 신칼빈주의는 이러한 흐름이,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 놓은 19세 모더니즘이 지배하는 역사적 환경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물론 이런 흐름 외에도 보다 이원론적인 흐름이나 보다 현실도피적인 흐름도 존재했습니다. 카톨릭방식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보다 넓게 국가교회 전통을 이어가는 카톨릭 교회도 있었구요.
 
BD:  철학자에서 성경학자로 전환하신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요? 저자는 (신칼빈주의의 아버지로 알려진) 아브라함 카이퍼가 세우고 그 전통에서 만들어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서 철학박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리디머 유너버시티 칼리지 종교신학 은퇴교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고, 해석학과 헬라어, 그리고 성경연구 관련 과목을 가르치셨네요. 이런 변화가 어떤 계기로 일어났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성경학 교수로서의 방향 전환
 
AW: 그럼 시계를 앞으로 약간 돌리지요. 원래 저는 칼빈칼리지 학부에 지원할 때는 불가지론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일 학년 때 믿게 되고 신학교에 가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목회에서 특히 철학의 중요성에 눈이 열리면서 철학을 공부했던 것입니다. 이때에도 성경학을 포함해 다른 부분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를 독학으로, 헬라어는 준비과정으로 했지만 별 비중을 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 신앙 계발을 위해 성경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ICS에서 가르치는 동안, 학생들이 배우는 철학 혹은 삶을 보는 관점이 실제로 성경에서 근거한 것임을 보여주는데 매달리고, 동시에 개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면서 전문가는 아니지만 관련 책까지 내었습니다.
 
실제로 그쪽 출간이 더 성공적이었습니다.  제 이력서를 보시면  다양한 성경연구 출간 기록이 나옵니다. 제 은사에 더 맞는 쪽이 아닌가 싶은데... 저는 언어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마도 성경연구가 나에게 더 맞게 느껴지는 또 다른 원인 같습니다.
 
또 다른 계기는 이것입니다. ICS에 있는 동안 저는 모든 학문이 연구 방법에 기반을 이루는 근본 이슈, 철학적 이슈가 있다고 강조해 왔고, 당연히 기독교적 방식으로 답을 구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추상적인 대상과 추상적 개념을 다루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내가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성경학 분야로 구체적으로 가서 그 분야에서 발전되어 온 학문적 성과에 반응하면서 제 고민을 실천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매력적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방향을 바꾼 이유입니다.
 
물론 당시 그 분야에 아무런 경력이 없는 제가 성경학 교수직에 초청을 받은 것은 거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들어간 곳이 리디머 유니버시티 칼리지였습니다.
 
당시 저는 성경학 출판물은 있었는데, 학교는 전례없이  “성경학 학위를 따오세요. 그러면 교수로 쓰겠습니다” 라고 제게 제의했습니다. 저는 성경학에 전념할 기회라고 생각했고 그 결정에 만족했습니다.
 
BD: 창타구가 출간된 후 30년이 지난 지금, 그동안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최근 사상적 흐름을 볼 때 창타구는 어떤 위치에 놓여있습니까?  
 
AW: 두 가지 주요 변화가 있었습니다. 첫째 복음주의계 전체, 더 나가서 정통기독교에서 속한 모든 전통들이(초대교회의 보편적 신앙고백을 따르는 모든 교회들) 이제는 기독교 신앙을 보다 포괄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복음주의계의 특징이었던 율법주의나 이원론과 반대 방향 말입니다.
 
이제는 진지한 신앙인들이 세상 문화와 학문세계에 더 마음을 열고, 세상도피적 태도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창타구’도 이런 분위기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변화는 문화 전반에 크게 일어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지식이 ‘각자의 상황’에 좌지우지된다는 생각을 포함합니다. 지금까지 시대를 지배해 온 계몽주의와 합리성 맹종과는 반대 방향이지요. 신칼빈주의와 카이퍼 철학에서도 전부터 줄곧 포스트 모더니즘과 같은 주장을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관점/생각이 개인, 혹은 역사나 사회적 조건의 산물이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로써, 모든 지식과 문화활동이 중립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이성•합리성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데서 출발합니다. 덕분에 현대 문화는 전반적으로 이성/합리성은 신뢰할하지 못하다는 태도에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창타구’의 인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궁극적인 진리가 존재하며, 모든 지식에는 ‘주관적’인 면과 동시에 일관된 ‘창조질서’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과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에도 동일하신 분입니다. 어쨌든 포스트모더니즘은 처음 이 책을 쓸 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성주의를 공격하는 것이 유행이 되어서, 제 이야기는 별로 새롭지 않습니다!
 
BD: 포스트모더니즘을 보면 그동안 창타구가 하던 이야기를 따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창타구의 독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AW: 몇 년 전 리디머칼리지에서 열린 기독교개혁주의교단 (CRC) 총회에서 였습니다. 당시 그때 저희 교단신학교인 칼빈신학교의 이사회장 마이클 르 로이가 어떤 지적 여정을 통해 개혁주의자가 되었는지를 인터뷰식으로 나누던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는 원인 중에 하나로 ‘창타구’을 꼽으면서, 청중 사이에 있던 저에게 인사도 하더군요. 그때 바로 제 옆에 앉은 사람이 다가와 말했습니다. ‘저는 남미 선교사인데, 저희 교회에서도 창타구의 스페인어 판을 가지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박사학위를 가진 신학교 이사장부터 남미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현장 사역자까지 창타구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창타구를 공통분모로 가졌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지금까지 창타구는 11개 언어로 번역되어 한국에서는 널리 사용되고 있고, 일본처럼 서구와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잘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전도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오빠가 창타구를 통해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는 여자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전 이 책을 안쓰면 안된다고 다들 압력 속에서 주저하며 썼습니다. 출판사는 제가 돈을 받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바람에, 매주마다 닥달했습니다. 완성된 원고조차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내주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계속해서 저를 놀라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에겐 감옥생활을 하던 중 그리스도인이 된 친구가 있습니다. 지금도 종종 만나는데, 하루는 자기가 자주 듣는 한 남아프리카출신 목사 설교에서 ‘창타구’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복음을 이렇게 넓게 보고, 제 창타구가 그런 흐름에 일정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서 놀랍니다.
 
BD: 어떤 면에서 창타구의 해외 출간은 세계기독교 자체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독자들도 이를 반영하는 것 같네요. 이 책은 기독교에서 벗어나고 있는 서구를 배경으로 하지만, 아프리카와 아시아 같은 곳에서는 기독교가 자라고 있습니다. 이제는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보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더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포스트 기독교 문화’ 환경에서 창타구는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어떤 도전을 하고 있습니까? 기독교가 다수종교인 지역에 사는 (서구인)에게와는 구별된 다른 도전이 있을까요?
 
AW:  아주 큰 숙제네요! 아마도 ‘다원주의’가 여기에 속할 것 같은데, 세속화되는 서구나 기독교화되어가는 제3세계 양쪽에서 더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다원주의란 구조적, 종교적 차원의 다원주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사회 자체는 원래 다중 구조로 되어 있지만 (교회도 수많은 사회내 조직/구조 중에 하나입니다), 종교는 다양한 구조를 모두 포괄하는 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종교 자체가 다양해지고 있으며, 사회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종교적 다양성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최근 변화 속에서 서구 신자들에게 가장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이 이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다원주의를 통해 배우는 또다른 도전은 삶 자체가 종교라는 점을 드러내 준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창조자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모든 환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또다른 강조점은 제도의 중요성과 시대적 시야를 넓히는 것입니다. 서구사회는 개인주의적입니다.
 
이에 반해 구조적 문제가 많은 조직 속에서 일하거나, 은행이나 경제제도, 혹은 (반기독교정서가 심한) 작가 세계 같은 곳에서 소금의 역할을 하려면, 유진 피터슨의 표현대로 “ 한 방향에서 하나님 앞에 인내심을 가지고 오래 복종할 각오’가 요구됩니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앙에서만 가르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당장의 답을 기대하기보다는 오랫동안 구조적으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려는 이러한 관점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전통들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BD:  이제 논의 방향을 좀 바꾸어서, 앞에서 다루던 방향과 구조 이야기로 되돌아 봅시다. 어떤 구조는 방향을 바로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자께서 ‘창타구’에서 제시한 방향이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생각방법에 문제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까?
 
AW: 다른 모든 기독교전통이 그런 것처럼, 개혁주의도 나름 장단점이 있습니다. 단점 혹은 위험요소중에 하나는 데이비드 반데넌이 지적한대로 세속화로 흐르기 쉽다는 점입니다. 온 세상을 향해 눈을 열고, 모든 세상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영화나 정치 등등 다양한 문화 활동에 참여하다보면 도리어 쉽게 세속화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런 위험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문화와 기독교의 대립을 강조하는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벗어나고, 종교적으로도 보다 넓은 범위에서 하나님의 나라 구현에 집착하기 시작하고, 사회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인들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다보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창조세계를 선하게 만드셨다는 생각에 빠져, 여전히 그리스도와 사단사이에 벌어지는 영적 전쟁이나 죄와 구원 사이의 갈등의 현실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험은 최소할 할 필요가 있지요.
 
그러나 위험이 반드시 현실이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제가 이책을 통해 표현한 개혁주의 신앙의 독특한 장점 중에 하나는 창조의 선함과 갈등 양면을 같은 비중으로 다룹니다.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증거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죄의 편만한 영향력과 파괴적 결과, 이를 기초로 구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강조점이 바뀌면서, 전에 우리가 가진 장점을 놓치기 쉽습니다. 이점에서 위험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생활을 이원론적으로 보는 관점, 혹은 “나와 예수’를 강조하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에도 비슷한 위험이 있습니다.
 
삶 자체가 종교라는 생각도 위험요소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별로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실제로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을 ‘구속’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고백’할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물론 위험 요소에도 조심해야 하구요. 그러나 어떤 싸움에도 이런 문제는 따라옵니다. 싸움, 전쟁은 당연히 위험합니다! 위험하다고 해서 싸우러 나가서 안된다고 할 수는 없지요.
 
BD: 예를 들어주십시요
 
AW: 영화 제작을 생각해 보십시요. 저는 기독교인들도 영화분야에도 나가서 일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영화계는 기독교적 가치를 지키기 매우 어려운 문화가 있습니다. 영화계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하는 식으로 몰아가는 엄청난 압력이 존재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영화계는 하나님의 선한 은혜가 발견되거나 기독교인들이 일할 자리는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영화계가 문제가 있어도 굉장히 의미심장한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뜻도 아니구요. 그러나 일단 그곳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전력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아마도 아주 조금씩 하나님 나라의 증거를 세워나가야 할 지 모릅니다. 영화계뿐 아니라 거의 모든 문화활동에서도 그렇고, 경제계를 그렇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신앙인들이 공동체로 같이 움직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는 많습니다. 어쨌든 위험이 있다고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BD: 근본적인 변화는 공동체를 통해 만들어지고, 공동체는 우리가 움직이는 방식을 형성하는 특정한 ‘의식’을 행한다는 주장에 공감하십니까?
 
AW: 그렇습니다. 바로 이점에서 조직 교회와 예배 공동체의 중요성이 확인됩니다. 동시에 창타구가 추구하는 방향이 만들 수 있는 문제도 여기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너무 교회중심적인 기존 문화를 너무 반대하다 보면, 교회의 역할을 우습게 대하고, 교회는 체스클럽, 국가 같이 사회적으로 중요성을 잃어가는 여러 제도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조직교회와 가정의 역할은 여전히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관점을 놓치면, 정말 영적인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BD: 신칼빈주의 전통 안에서도 공공영역에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합니까? 예를 들어 알라이스터 맥킨타이어가 말하는 ‘베네딕스 선택’ 같은 것 말입니다. ‘이제는 보다 작은 공동체들을 강화시키는 일에 집중해서, 이를 통해 공적 영역에 진출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창타구를 이런식으로 적용해도 됩니까?
 
AW: 예 그렇습니다. 역사적 상황과 다루는 제도의 종류에 따라 다른 전략이 적용되야 합니다. 저도 위 학생들에게 복음이 퍼저나갈 때 가장 먼저 세워지는 조직은 교회고, 이어 병원과 학교가 만들어지고, 결국 기독교 정치조직이 설 수 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기독교 종교의 성장과 함께 기독교는 다시 구석으로 몰리고, 학교나 병원에서도 밀려나 정부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남은 자리는 신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 소련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인들이 기도나 저항이 아니라 정치에 참여한다는 생각 자체가 전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도 사회분위기에 따라 상황은 많이 다릅니다. 이제는 정치뿐 아니라 교육같은 분야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더 노력해야 할 이유도 다 변화하는 상황 때문입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는 곳도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감호수용소에 잡아두기도 합니다. 운이 좋으면 처형되지는 않아도, 노동수용소에서 평생 살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기도와 소망을 가지는 것 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문화 변혁의 거창한 비전은 이들에게는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획은 이런 스케일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세속화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70살인데 고향 캐나다만 하더라도 지난 몇십 년간 엄청나게 (비기독교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다행히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반대로 기독교가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슬람도 같이 퍼지고 있지만 말입니다.
 
종교가 문화에서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서구인들의 생각은 세계 다른 곳에서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기독교는 사회에서 더 소외될 것입니다. 기독교 메시지에 귀를 여는 사람이 늘어나도 마찬가지입니다.
 
BD: 이 말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추어서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AW: 그러나 아무리 기독교가 문화적으로 약화되어도, 결국 (그리스도께) 복종이야 말로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BD: 다시 한번 이 명작의 30주년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또 다른 30년을 기대합니다.!     

김석원|크리스찬리뷰 편집부장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