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헤브론병원’을 가다 (7)

캄보디아를 위해 울어줄 자 국민 98% 불교 신자, 절 생활의 중심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5/11/24 [15:31]
 
▲   수영로교회(부산)에서 파송한 한규현, 김성례 선교사 가정. 수영로교회는 3대 가정을 선교사로 공식 파송했다. 이들 가정은 2014년 12월 헤브론 병원에 파송되여 현재 언어 공부 중에 있으며 내년도부터 본격적인 의료 사역을 펼칠 예정이다.   ©크리스찬리뷰
 
 
캄보디아 새해인 쫄츠남이다. 쫄은 ‘들어가다’ 츠남은 ‘새해’를 뜻하여, 즉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캄보디아의 모든 국가적인 행사는 불력으로 계산되어있지만 쫄츠남만은 양력이다. 쫄츠남은 4월 13일에 시작하여 공식적인 새해라고 여겨지는 4월 15일까지 3일간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지만 휴일 앞뒤로 1,2주일 정도 길게 휴일을 즐긴다. 학교의 경우는 20일 정도, 직장의 경우에는 10여 일 가량 쉰다.
 
거리에는 캄보디아 국기, 불교깃발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수어스다이 츠남 트마이’ 플랜카드로 가득 찼다. 거짓말 아주 조금 보태서 캄보디아는 한 달반 전부터 축제분위기란다. 박수치고 춤추게 하는 캄보디아인들의 새해다.
 
캄보디아 새해 ‘쫄츠남’

 
▲   눈을 가리고 긴 막대기로 박을 터뜨리는 ‘레잉봐이끄임’ 게임. 박 안에는 밀가루, 물, 돈 등이 들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이날 오후 병원 대청소를 마친 헤브론병원 현지인 직원들이 스스로 주도하여 쫄츠남 잔치를 벌였다. 이들은 다양한 게임과 전통춤을 추며 물과 밀가루를 뿌리고 맞아주며 서로의 행복을 기원했다.
 
놀이는 ‘버엉꾼’으로 시작됐다. ‘엉꾼’은 식물의 한 열매로 잘 익었을 때 사용한다. 고동색으로 주먹만 하고 매끈매끈하여 동그란 모양이다. ‘버’는 던진다는 의미로 엉꾼은 던지는 게임이다.
 
우리나라의 민속놀이인 비석치기와 비슷한데 놀이방식은 남자팀과 여자팀으로 나누고 엉꾼을 2m정도 전방에 가로로 나란히 세 개를 세워둔다. 각 팀에서 하나씩 던져 세워져있는 엉꾼을 맞춰야하는데 처음에는 가장자리에 있는 엉꾼부터 맞추고 이긴 팀은 엉꾼을 두 개 가져와 상대편의 선수 무릎을 때린다.
 
다음으로 우리나라 수건돌리기와 비슷한 ‘레악껀사엥’ 놀이. ‘레악’은 숨기다는 의미이고 ‘껀사엥’은 수건으로, 수건을 숨기는 게임이다. 동그랗게 둘러앉은 다음 술래를 정한다. 앉은 사람들이 ‘수건을 숨겨라’는 노래를 부르는 동안 술래는 조용히 한 사람 뒤에 수건을 놓는다. 자신의 뒤에 수건이 있으면 그 수건으로 오른쪽에 앉아있는 사람을 때린다.
 
오른쪽에 앉은 사람은 재빨리 일어나 한 바퀴를 돌아 자신의 자리에 앉으면 된다. 만약 자신의 뒤에 수건이 있는 것을 모르거나 수건에 맞고도 돌지 않으면 지는 게임이고 술래가 된다.
 
이어 ‘레잉봐이끄임’게임이 진행됐다. 이 게임도 우선 술래 한 명을 정한다. 술래의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긴 나무막대기를 하나 쥔다. 술래는 높은 곳에 매달린 박을 찾아 그 박을 나무막대기로 깨서 박 안에 있는 물건을 받아야 한다. 박 안에는 밀가루, 물, 돈 등을 넣었다. 구경꾼들이 술래를 헷갈리게 하려고 다른 방향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박수를 쳐 유인하기도 한다. 원무과에서 일하는 김동균 선교사는 이 게임에서 밀가루 폭탄을 맞았다.
 
이와는 별도로 여기저기서 얼굴에 밀가루를 퍼붓는 밀가루 싸움도 일어났다. 이때 원무과에서 일하는 차승연(50) 선교사가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 병원의 모든 행정과 회계, 물품 관리 일들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차 선교사는 현지인 직원들에게 인기가 많다. 따사로운 마음으로 다가가는 차 선교사에게 그들은 마음을 활짝 열어준다. 현지인들이 오가며 살갑게 인사하는 모습에서 차 선교사에 대한 신뢰는 단단해 보였다.
 
그에게도 꿈과 인생의 청사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설계했던 꿈과 청사진을 모두 버리고 땅 끝을 향해 달려왔다. 그 용기,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제가 충무교회 청년부 교사였을 때 김우정 원장님이 청년부장 선생님이셨어요. 그때가 2004년이었어요. 청년부가 단기선교를 캄보디아로 다녀오면서 김 원장님이 캄보디아로 오시는 계기가 됐지요. 캄보디아 아이들의 눈망울이 계속 떠오르시더래요.
 
사실 저는 그전에는 해외선교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었던 일인데 경험 있는 학생들이 열심히 준비해서 봉사하는 것을 보고 감동이 됐어요. 저는 직장일밖에 모르던 사람이었거든요. 그 뒤로 우리 청년부가 일 년에 한 번씩 캄보디아로 단기선교를 오게 됐는데 네다섯 번 왔었나 봐요.
 
그땐 장로님이나 권사님 목사님 이런 분들이 아이들을 이끌고 오시고, 저는 중간 관리자로 아이들을 잘 돌보면 됐었는데 2010년 되니까 제가 청년부를 이끌고 와야 하는 리더가 되더라고요.
 
저희가 단기선교 갈 때는 6개월 전부터 스케줄을 짜서 훈련에 들어가고 기도회하면서 준비하거든요. 굉장히 힘들었어요. 이렇게 몇 번 오다보니까 한국에 돌아가서도 헤브론병원이 자꾸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없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은 사람의 뜻일 수가 없었다. 그때 그는 고교 시절 자신의 서원을 떠올렸다. 평생 봉사자가 되겠다던 약속이었다.
 
“안식년으로 헤브론병원에 일 년 동안 있게 됐어요. 영화필름이 거꾸로 돌아가듯이 옛날로 쫙 돌아가는데 정말 한 번도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난 거예요.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교 진학을 놓고 기도했었거든요. 그 당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하나님 저를 대학에 붙여주시면 제가 평생 봉사하겠습니다’ 그런 기도를 했어요.
 
그 후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고 감사한 마음으로 평생을 교사로 일했었죠. 저는 너무나 당연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환상을 보여주시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다가 아닌가요?’ 그런 마음이 들면서 엄청난 도전을 받았어요. 하나님이 평생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계시는구나.”
 
다시 시작한 제2인생
 
차 선교사는 본래 잘나가는 베테랑 디자이너였다. 그는 대학원 졸업 후 알만한 회사에서 광고디자이너로 일했다. 그 후 개인 사무실을 내어 일했다. “개인 비즈니스가 잘 됐다. 즐거운 때였다”고 회고한 그였다. 그런 일들을 다 뿌리치고 올 수 있을까? 하지만 선교사의 길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   헤브론병원의 안팎 살림을 맡아  언제나 분주한 차승연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이 문제를 놓고 3개월간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마음을 잡아주셔서 오겠다고 결심을 하게 됐지요. 그런데 먼저 해결되어야 할 일들이 있었어요. 저희교회는 출석 인원이 3백여 명 밖에 안 되는 작은 교회이거든요. 선교 헌금이 원장님과 헤브론병원에 집약이 되어있는데 저까지 선교사로 가겠다고 하면 선교비용에 대한 부담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파송교회를 정해야 되고 저를 파송해 줄 사람을 찾아야 되고 집안 일도 정리해야 되고 그런  세 가지 큰 일들이 남아있었어요.
 
또 한 가지는 단기선교를 일 년에 한 번씩 왔었지만 어느 기관이나 선교단체에서 선교사훈련을 받은 일도 없거든요.”
 
고민을 거듭한 그는 하나님께 표적을 구했다.
 
“제가 인계해준 교회 청년부 전도사님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어요. 아내가 총회세계선교부에서 실시하는 선교훈련을 받으려고 등록을 했는데 저까지 등록을 해주셨대요. 그리고 놀랍게도 저희교회 장로님들이 이곳을 찾아오셔서 교회가 나를 파송하기로 했다. 결정하러 왔으니 동의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마침 이 병원으로 컨테이너가 오는 게 있어서 그 편으로 한국에 있는 집과 사무실을 정리하여 짐을 부치게 됐고요.”
 
그 과정 하나하나가 놀라운 과정의 연속이었고 불가능했던 일들이 일사천리로 성사되었다.
 
“하나님께 문제들을 놓고 기도했을 때 모든 문제들이 다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헤브론병원에 장기 헌신자가 귀했어요. 환경이 그렇게 열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신뢰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선교지 생활은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했던 그는 이 과정에서 민낯의 자아를 발견했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깨달았다.
 
“처음에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수첩에다 10가지 정도를 적었어요. 그중에 하나가 한국에서 편집일도하고 책도 만들고 했으니까 선교지의 소식을 알리는 뉴스레터 지를 생각했었는데 막상 와보니까 그런 일은 뒷일이고요. 당장 급한 일들이 너무 많았어요. 내가 하고자하는 일은 나를 드러내는 일이니까 그런 일보다 병원에서 맡겨준 일들이 우선이다. 그런 마음을 주셔서 순종하면서 금전관리, 병원관리 등의 일을 시작했죠.
 
그런데요, 의사선생님들 위주로 형성되다보니까 구조라든지 조직이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아서 애를 먹었어요. 정말 기본적인 것들까지도 없는 거예요. 직원들 전화번호까지도 정리가 안 돼 있었죠. 그런 것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해서 정리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어요.”
 
감동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동안 구두로 이루어졌던 것들이 체계적으로 조직이 돼 운영이 되다보니까 선생님들이 굉장히 불편해하시고 가끔 부딪쳐요. 그래도 대학원까지 나온 내가 한국에 가면 교수도 할 수 있는데, 나는 고급인력인데 내가 여기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니 별별 생각이 다 들 때도 있었죠.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기도하게 하시고 말씀을 듣게 하셔서 제가 그동안 경험해 왔던 것들을 다 내려놓게 하시더라고요. 여기는 선교지다, 하시면서 바닥부터 시작하도록 만들어 주시더라고요. 사실 그동안 자꾸 내 경험을 얘기하게 되고 내 주장이 강했거든요.”
 
그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말씀과 환상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한 후에는 해야 할 일도 명확해졌다.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에는 위로와 힘이 된다는 사실도 인지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를 아프게 하는 것은 재정 문제이다. 철저하게 모든 진료가 무료이기 때문에 병원 운영비는 오로지 후원자들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
 
“저희가 작년부터 약간의 돈을 받고 있어요. 진료는 무료이지만 약값이나 수술환자인 경우 형편에 따라 돈을 받고 있는데 물론 낼 형편이 안 되면 받을 수가 없지요.  유료화를 하게 된 계기는 15년 20년 후에 캄보디아인들에게 이양하고 저희는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때 우리가 돌아가면 후원자들이 많이 끊길 것인데 자립할 수 있도록 키워 놓아야하는 것이 저희 숙제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 조금이라도 유료화를 시켜나가자, 그런 취지인데 의사 선생님들은 계속 깎아 달라고 하세요. 그리고 지금까지 후원받은 약품도 다 소진됐어요. 유효기간이 지난 약은 다 폐기했거든요.
 
이 나라에서 계속 적발하고 고발하니까요. 저는 그런 것들을 계산하는 상황인데 여태까지 하시던 대로 너무 긍휼한 마음으로 무료로 해달라고 그러세요. 수술비용이 몇천 불, 몇만 불 나오는데 가난한 사람들이야 100불도 비싸 50불로 해달라시는데 이런 것들이 너무 힘들어요.
 
원장님도요, ‘심방을 다녀보니까 형편이 다들 어려워서 차마 돈 내라고 할 수 없겠더라구’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  행정실(원무과)에서 사무에 열중하고 있는 차승연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차 선교사는 김우정 원장에 대해서 인터뷰 도중 뭉클한 감정이 솟을 만큼 애틋함이 배어 있었다. 기자는 돌아서면서 마음이 내내 울적했다.
 
이 땅의 크리스찬을 위해 울라

  
이날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으로암’ 춤이었다. 캄보디아어로 ‘으로암’은 춤이라는 뜻이며 ‘붱’은 동그라미라는 뜻이다. 이 춤은 여럿이 함께 동그랗게 서서 한 손은 위를 향하게 하고 다른 한 손은 아래를 향하게 해서 스텝에 맞춰 천천히 돌면서 추는 춤이다. 
 
▲    현지 직원들이 준비한 쫄츠남 잔치에서 현지 직원들과 합창하는 차승연 선교사(왼쪽) © 크리스찬리뷰
 
▲  쫄츠남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으로암’ 춤을 추는 현지 직원들과 선교사들    ©크리스찬리뷰
 
▲    밀가루를 뒤집어 쓴 김동현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  메콩강 야경 크루즈를 본지 취재팀과 함께 한 헤브론병원 선교사들    ©크리스찬리뷰
 

기자는 어느새 이끌리어 그들과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었다. 가슴에 가벼운 통증이 일었다. 순박함의 극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스스럼없는 천진난만한 모습들이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사랑과 기도의 마음은 인종이나 나라를 초월해 하나가 되는 것일까. 
 
어째서 이다지도 스스럼이 없는 걸까. 꿈에도 못 본 사람들, 생활이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인식이 다르고 국적마저 다르건만 앞집의 동생 같고 뒷집의 조카 같고.
 
그러고 있는데 간호대학 건축현장을 총감독하고 있는 윤갑상 선교사가 “쫄츠남 축제는 앞으로의 신랑감이나 신부감을 고르는 날이기도 하다”며 웃는다. 평소에는 젊은 처녀와 총각이 만나면 큰 일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때는 젊은 남녀가 함께 어울려도 괜찮을 때라는 것이다. 그들은 함께 모여 놀이와 춤을 추면서 서로를 눈여겨두기도 한단다. 그래서 옛날에는 쫄츠남이 끝난 후 결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축제는 한마디로 기자에게는 경이의 세계였다. 캄보디아의 다음 세대인 청년들과 함께 하니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었다. 헤브론교회 리닌(34) 전도사는 “쫄츠남 기간 동안 성도들이 고향을 방문하면 여러 가지 우상숭배에 노출되는 시간이라 특별한 기도가 필요하다”며 “이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 보니 헤브론병원 뒤쪽으로 절이 보인다. 캄보디아는 국민의 98%가 불교신자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정과 사회를 통해 불교의 영향력 아래서 살게 된다. 그래서 사원은 국민생활의 중심이고 교육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수만 개에 달하는 사원들, 승려 앞을 지나갈 때는 몸을 약간 숙이는 등 승려가 존경을 받는 나라. 이런 승려들이 황색 가사를 걸치고 아침에 맨발로 줄을 서서 사주를 받는 모습을 보면 선교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게 된다. 

 
▲  헤브론병원 뒷쪽 멀리 절이 보인다.    © 크리스찬리뷰
 
▲   진찰 받기 위해 헤브론병원을 찾아 온 스님.   © 크리스찬리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쫄츠남 축제는 시사점이 많다. 좋은 병원으로 소문난 헤브론병원이 선교병원이라는 사실은 현지인들에겐 충격일 수밖에 없고, 현지 크리스찬들에겐 자랑과 위로가 된다.
 
이날 김우정 원장은 모든 현지인 직원들에게 일 년 동안 수고했다며 상여금을 주고 모범사원에게 표창을 수여했다. 의사이며 헤브론교회 안수집사인 심콘(41)이 모범사원 표창을 받았다. 그는 프놈펜 빈민지역에서 희망 없이 사는 그저 그런 젊은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연히 소문을 듣고 찾아간 헤브론병원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   모범사원 심콘 안수집사(의사)에게 금일봉을 전하는 김우정 원장   © 크리스찬리뷰

 
헤브론병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그의 머릿속에는 “바로 이거야”라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찾아가 받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 헤브론병원에서 일하게 되면서 인생 설계가 달라졌다.
 
한국인 의료선교사에게 훈련을 받으며 꿈을 키우고 있는 그는 헤브론병원의 부흥을 통해 캄보디아 복음화를 바라는 ‘열렬 크리스찬’이다.
 
심콘은 “헤브론병원에 오기 전까지는 나밖에 몰랐다”며 “하지만 헤브론병원 생활을 통하여 더불어 사는 법을 익히면서 나라와 이웃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의료진의 나눔을 통해 힘을 얻었다. 헤브론병원의 나눔을 통해 캄보디아에 복음의 물결이 넘치기를 소망한다.”고 덧붙였다. 심콘은 아내 밴데이(36) 사이에 딸 다섯을 두고 있다. 이곳에는 심콘처럼 캄보디아의 복음을 꿈꾸는 사람이 많다. 이들을 위해 한국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관심을 쏟아야 할 때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뭉게구름 떠있던 파란 하늘 뒤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이내 비가 오기 시작한다. 번개와 천둥이 동반한 장대비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던 도로엔 새 몰골이 생기고 순식간 물바다가 된다.
 
캄보디아는 사계절이 변화 없이 우기와 건기로만 나뉜다. 연중 절반은 ‘스콜’이라 불리는 열대성 집중호우가 메콩 강을 범람시켜 전국토를 물바다로 만들어 버리지만, 건기에 접어드는 11월부터 그 이듬해 4월 초까지는 비가 거의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다.
 
40여 년간의 지루한 내전을 겪는 바람에 수로조차 없는 캄보디아의 대부분의 들판과 농지는 건기가 되면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지고 메마른 풀을 씹는 들판의 누런 소떼들도 뼈 부딪치는 소리가 날만큼 앙상한 몸을 들어낸다.  
 
우리 일행이 찾았을 때는 4월 초로 건기 막바지였다. 참지 못할 정도로 더웠다. 4월의 기온은 40도 안 팍. 망고, 두리안 등 열대과일이 푹 익어가고 있었다. 캄보디아는 과일을 대량으로 재배하는 과수원이 거의 없다. 각 집 마당에 심어놓은 과일들이 출하되는 것인데 그러기에 농약을 살포하지 않는다.
 
헤브론병원 숙소동 뒤쪽으로도 망고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김우정 선교사가 병원 건물을 지을 때 심은 망고나무들이어서인지 무척 애착을 갖는 듯했다. 김 원장은 망고나무를 가리키며 “올해는 망고가 많이 달렸다”며 “캄보디아 과일은 개량된 적이 없는 토종에 유기농으로 정말 맛있다. 식사 때 후식으로 맛을 보라”고 말했다.
 
팔순 할머니도 선교에 나서

 
한규현(46)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병원 숙소동으로 갔다. 한 선교사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전신으로 웃으며 더없이 반갑게 맞아주었고, 아내 김성례(40) 선교사는 동양적인 몸놀림으로 기뻐하며 집안으로 안내를 했다.
 
한 선교사가 아내 김성례 선교사와 어머니 김인숙 선교사(81), 그리고 두 아들을 데리고 캄보디아에 온 것은 작년 12월 21일.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온 가족 3대가 부산 수영로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다.
 
“수영로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 중 3대가 파송된 것은 처음이래요. 보통 어머니는 선교현장에 안보내시잖아요. 사역을 하는데 지장이 있을까 봐요. 그런데 이규현 목사님이 선교부흥회를 하시면서 선교는 3대가 하는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선교사로 나가면 당연히 자녀들도 함께 가는데 선교지에서 자녀들이 안정이 안 되면 사역이 어렵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건강이 허락돼서 자녀들을 봐줄 수만 있다면 그 자체가 선교라고 말씀하셨어요. 선교는 3대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희가 처음으로 3대가 나오는 선교사 가족이 됐어요.”
 
한 선교사 부부는 극기가 되풀이되는 언어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보통 2년은 언어훈련만 하고 사역에 참여하지 못해요. 그런데 헤브론병원의 상황이 급하니까 저희는 일 년만 언어공부를 하기로 하고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매일 아침 6시 30분에 나가 오후 5시 30분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김성례 선교사가 부끄러움을 타면서 말을 거들었다.
 
“우리 가정에서 어머니가 가장 큰 사역을 하고 있어요. 병원 수술실의 수술포와 환자복 세탁을 하시고요, 식당에서 음식 만드는 것도 도우시고 바느질도 하시고 굉장히 바쁘세요. 한국에서 재봉틀도 가져왔어요.”
 
할머니 선교사는 처음엔 ‘팔순 나이에 선교사로 동참할 수 있을까’하는 약한 마음으로 망설였단다. 그러나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자신감을 얻어 이제는 젊은 선교사 못지않게 의욕적으로 섬기고 있다고 했다. 

▲   헤브론병원에서 가장 연장자인 김인숙 선교사는 8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시간날 때마다 미싱을 돌리며 병원 살림을 돕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할머니 선교사는 “주님을 향한 마지막 봉사의 기회로 생각해 힘든 줄 모른다. 손자들과 아들 선교사 내외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일 역시 선교이지 않느냐”며 “열심히 중보기도 하는 일로도 가족을 돌보고 있다”고 웃음을 지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신병 한 선교사는 “처음에는 내가 이곳에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두려웠지만 지금은 친정처럼 편안하다. 앞으로 이 공동체에서 함께 사역할 일들을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설렌다”며 헤브론병원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다.
 
캄보디아 적응과 언어공부, 자녀교육 등 쉽지 않았던 시간이었을 텐데 지난 5개월을 회상하는 그에게서는 그런 어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신뢰가 깊어 단단해 보였다.
 
한 선교사는 22년 동안 부산국군병원에서 행정과장(소령)으로 근무하다 작년 6월 전역했다. 김성례 선교사도 간호장교(대위)로 국군수도병원에 근무하다 2008년 전역했다. 김 선교사는 전역과 함께 세계로 병원 중환자실에서 이곳에 오기 전까지 일했다.
 
“친구의 소개로 간호장교 소위로 근무 중이던 아내를 만났죠. 세 번째  만나는 날 제가 결혼을 하자고 프로 포즈를 했어요. 아내는 승낙을 했지만 장모님은 세례를 받지 않아 반대를 하셨어요. 사실 저는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선데이 신자였어요. 부랴부랴 한 달 만에 군대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가 선교사의 삶을 꿈꾸기 시작한 것은 2009년 부산의료선교대회에 참석했을 때다. 처음엔 아내 혼자만의 결심이었다. 

▲   선교사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헤브론병원 선교사와 현지 직원들로 구성된 주방팀. 왼쪽부터 박정희 선교사, 4번째 한헤숙 선교사 6번째 김인숙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아내가 2007년 의료선교대회에 참석하여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서원을 했다며 의료선교사로 나가자고 말했어요. 싫다고 했죠. 중령, 대령으로 진급도 해야 되고 돈 벌어서 아이들 교육도 시켜야 되고 미쳤냐고요.
 
사실 이때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을 때였어요. 그런 후 아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기도만 하더라고요. 그랬는데 2년마다 열리는 의료선교대회가 2009년 부산 호산나교회에서 있었죠. 아내는 ‘그냥 한 번만 따라와 달라’부탁을 하는 거예요.
 
당시 서울에서 근무할 때인데 선교가 뭔지도 모르고 참석을 했죠. 저는 그곳에서 세계열방에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계시는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한 선교사는 자신의 죄를 먼저 회개하고 감사기도를 올렸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과 전혀 상관없었던 그가 나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한 선교사는 선교대회 마지막 날에는 남은 인생을 주님께 바칠 것을 서원했다.
 
그는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선교사의 길을 택했다. 그러니 인간의 앞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는 그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요 택함을 받은 막중한 은혜이다.
 
이들 부부는 선교사 훈련을 받으며 아프리카로 단기선교를 다녀왔다. 그 후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선교를 두고 기도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생각을 변화시켰다.
 
“캄보디아로 단기선교를 오게 되면서 헤브론병원을 방문했죠. 이때 김우정 원장님이 병원에 행정 볼 사람도 필요하고 간호사도 필요하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이때 가슴이 울컥하면서 하나님이 이곳으로 부르시고 계시다는 것을 느꼈죠.”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캄보디아선교를 결정하게 됐다.
 
한 선교사는 강단 있는 어조로 말했다.
 
“선교는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전달을 하기보다는 겸손하게 배우고 인정하며, 삶 안에 화합하며 배워나가고 싶습니다.”
 
한 선교사 부부는 그동안 쌓아온 병원행정과 간호지식 등 노하우를 헤브론병원에 쏟아부을 생각이다. 이젠 국군병원 의무대장이 아니다. 간호장교가 아니다. 그들 평생에 처음으로 월급이 없는 일을 하게 되니 캄보디아 사람들과 비슷한 삶을 살아야한다.
 
천사같은 두 아들 진영(14)과 진석(13), 어머니 김인숙 선교사, 모두가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겠지만, 선교사로서의 사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부모들의 각오만 가지고 자녀들이 순탄하게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아이들은 거실 한쪽에서 재깔대고 흥겹게 놀고 있었지만 복음을 안고 나아가는 길의 쓰라림이 그 그림자 속에 진하게 새겨져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11년 전 캄보디아 아이들의 눈망울을 잊을 수 없어 병원 문을 닫고 캄보디아로 달려온 김우정 선교사와 이제 헤브론병원에서 사역할 천진하기만 해 보이는 다섯 가족의 사명을 지켜보며 무거운 마음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유한한 인생이여. 유한한 인생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리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어려운 숙제인가!
 
‘후드득 후드득’
 
도토리 수천 알을 쏟아 붓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졌다.〠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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