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선교’의 장르를 도약시킨다

100년 만에 풀린 빗장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6/01/25 [11:45]
▲ 몰링칼리지 100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어 공개강좌 산파역을 맡은 정미연 교수가 본지와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올해 100주년을 맞는 몰링칼리지(Morling College, 이하 몰링)는 자타가 공인하는 시드니 2대 명문 신학교이다. “신학과 문학은 동일한 경험을 기술하는 각각 다른 두 표현”이고 한 도로시 세이어즈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보 예수> 등으로 한국에도 유명한 마이클 프로스트 박사를 비롯한 베스트셀러 작가인 교수도 여럿이다.
 
대부분의 교수들이 의사, 변호사, 심리상담치료사, 선교사, 목사 등 오랜 세월 전문직에서 갈고 닦아온 발군의 실력과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교수하고 있다.
 
몰링의 1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영어의 빗장을 풀고 한국어 공개강좌를 3월 15일~ 5월 31일까지(추계방학: 4월 12, 19일 휴강), 총 10주 동안 실시한다는 사실은 한인 디아스포라를 위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공개강좌의 산파역을 감당했을 뿐만 아니라 친히 ‘산모’로서 강의를 맡은 정미연 박사를 만났다. 그는 이번 강좌의 목표를 ‘이민사회를 신학으로 섬김’으로 규정했다.
 
“우리 디아스포라 이민사회에 계속 새로운 이민자들이 들어오고, 이민사회가 계속 커져갈 것 아닙니까? 그럴 적에 기독교인들이 올바르고 영향력 있는 관계로 가려면 신학교와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미국에서도 그렇고, 한인 디아스포라와 관계된 일을 하게 되면 늘 ‘2% 부족’한 것을 느낍니다. 1세대와 2,3세대가 신앙 공동체를 활발하게 하는 것이 교민 사회나 이민 온 나라에 미치는 영향으로 봐서 너무 중요합니다. 
 
‘언어는 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생각하는 데 있어서도 위대하고 효과적인 도구’라고 한 험프리 데이빗 경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언어는 민족의 혈통이고 사상의 옷’ 아닙니까? 앞으로 2, 3세대로 가더라도 우리 민족의 ‘마음과 정서의 언어’인 한국어로 신학교육을 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있다고 봅니다. 호주 이민사회에 신학으로 섬길 수 있고, 사역자들과 교민들을 뵈올 수 있는 이번 기회는 저에게 특권이고 축복입니다.”

▲ 정미연 교수가 몰링칼리지 로스 클리포드 총장과 담소를 나누며.     © 크리스찬리뷰
 
언어는 민족의 혈통, 사상의 옷
 
미국 이민 1.5세 출신인 그는 우리 민족의 특별한 것으로 ‘선교에 대한 열정’을 꼽았다. 특히 정년퇴직을 마치고 선교지로 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면서 그들을 교육하는 것이나 연장교육 목회자들에게, 질 좋은 신학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꼭 몰링이 아니라도, 그런 비전 아래 여러 신학교들이 한국어 프로그램을 개설하는 것은 퍽 고무적입니다. 이번에 우리가 개설하는 강좌는 현대 사회적, 윤리적인 이슈에 대해서 기독교적 대안을 모색하는 있는 분야입니다. 로스 총장님께서도 관심을 많이 갖고 계십니다.
 
특히 호주가 굉장히 개방적인 사회이고, 호주의 이민 역사가 짧은데도 많은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 긴장감이 팽팽합니다. 윤리적•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와서 모여 사니,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느냐가 우리의 관심사 아닙니까?
 
우리 이민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공동의 이슈를 가려 뽑았습니다. 저 혼자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는 우리 학교 교수진과 사계의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통역하면서 협력해서 하는 강좌입니다. 수업에 함께 참여한 우리 교민들과 토론도 하고, 실질적으로 의견을 내보며 기독교적 답변을 찾아가는 작업입니다.
 
호주 사회에서 우리가 투표권도 가지면서, 자녀들이 이민 사회에 침투하여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재 호주에서 통과되는 여러 법들과 일어나는 현상들을 바라보면서 호주 사회를 바라보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분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녀들에게도 어떤 기독교 윤리관을 가지고 가르쳐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이번 강좌에서 크게 다섯 가지 정도를 다룰 예정이라고 하였다. 교과서는 존 스토트의 <현대사회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New 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을 기본으로 오늘 우리 사회에 가장 민감한 이슈를 함께 고민하는 시간, 함께 정답을 찾아가는 여행시간이었으면 한다고 했다.

▲ 횃불 트리니티대학교 졸업식에서 총장 하용조 목사의 통역을 맡은 정미연 교수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함께 찾아가는 여행

“처음에는 윤리적 결정과정, 그리고 성경과 윤리를 다루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관 원리원칙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효율성 있게 소통하고 조율하기 위해 윤리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들은 무엇인가?’ 등 배경에 대해서 알아볼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정치윤리에 대해서 탐구해보려고 합니다. 이 윤리는 굉장히 광범위합니다. ‘자발적 이민, 난민 등을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이지요.
 
특히 저도 미국 이민 사회에서 자랐는데 대부분의 한국인은 자발적 이민입니다. 뭔가 꿈을 가지고 그 나라에서 얻을 것들을 생각하며 이민을 감행하지요.  그러나 난민은 추방되거나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이민의 땅에 정착하고 살아오면서 ‘무엇을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 속의 이스라엘도 자발적 이민이 아닌 난민 이민입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가서 빨리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데, 하나님께서는 집을 짓고 그 나라를 축복하라는 예레미야의 편지가 난민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포로로 이민 온 것은 아니지만 현대적 의미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각자 개개인의 사정에 의해서 이민 오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움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동하는 백성들을 통해 원주민 등 그 나라에 미리 와서 정착한 사람들을 복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이민자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오는 것도 좋지만, 특히 기독교 문화와 교회가 왕성하지 않은 나라에 전도와 선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기독교적 윤리로 살아가는 것으로 기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좋은 일입니까?
 
한국인이 이민 와서 호주가 더 아름답고 좋아졌다는 기독교인의 이민 가치관을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이득만 취하려고 하면 항상 소수민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고, 소수민족도 하나님의 백성도 이 땅을 축복하면서 기독교인의 윤리적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면 이들을 형제자매로 여기고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며 소수민족의 피해의식을 버리고 살아간다면 굉장히 축복이지요.
 
네 번째는 사역윤리를 다루려고 합니다. 평신도가 생각하는 것과 목회자들 생각에 갭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클래스 안에 다루려고 합니다. 평신도와 사역자의 구분을 초월해야 할 부분, 서로 성경을 보면서 성경 안에서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교회 리더십은 무엇인가? 행정관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격려되고, 세상에서 우리 교회 공동체를 바라볼 때 ‘저런 공동체가 있어서 참 좋다’는 평판, 교회 자체에 대하여, 소명에 대하여 서로 부족한 것을 기도하면서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임을 탐색해보려고 합니다.
 
목회자의 기본적이고 모범되는 라이프스타일은 목회이건 아니건 변치 않은 것인데, 목회자나 평신도가 서로의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함께 추구해나가는 것을 모색하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윤리는 설명할 필요 없이 중요한 주제입니다. 특히 호주가 너무 개방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부모나 교회보다는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것도 바른 성지식을 바르게 습득할 수 있는 통로가 크지 않다는 반증이지요.
 
성경에서 성과 결혼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들 가운데 귀하고 긍정적인 것이 얼마나 많은데 말입니다. 최근 호주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동성애 등에 대해 성경적, 역사적으로 심도 있게 다루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과 성에 대한 것은 수시로 바뀌어 왔습니다. 세대에 따라 바뀐 기준과 윤리를 성경적으로 바르게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동성애, 동성결혼 등은 비기독교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심각한 위협과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과는 너무 동떨어진 가치관, ‘인간 자체가 무엇이고, 인간이 가진 성에 대한 욕구, 성의 혜택과 자유를 기독교인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법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는 주입식 강의가 아닌 함께 고민하고, 공부하고, 토론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거듭 밝혔다. 
 
“기본적인 것들의 토대를 잘 짚어보고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정보 쓰나미 시대에, 기본적인 것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때에 근본적인 것을 잘 따져보고, 그것을 토대로 질 좋은 대화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신학으로 교민사회에 봉사하고, 함께 대화하며,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그와 대화를 할수록 “온전한 신학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 두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계속 보여주고,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의 렌즈로 보도록 한다”는 로드 그레그의 말이 생각난다.  

▲ 횃불 트리니티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파키스탄의 유일한 기독교 장관인 샤바즈 바티 소수민족부 장관. 그는 2011년 3월 2일 알카에다와 탈레반에 의해 암살당했다.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차별을 딛고
 
이민사회를 향한 애틋함이 넘치는 정 교수 역시 미국 이민 1.5세 출신으로 이민자의 아픔과 서러움을 뼛속까지 체험하기도 했다. ‘어려운 것은 다 잊어버렸다. 어려운 일에 대해서는 특별히 기억력이 안 좋다’고 하면서도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저는 성차별, 인종 차별을 대놓고 당했습니다. 미국에서 초년병 교수 시절, 강의 안내서에 있는 제 이름을 보고 학생들이 백인이 아닐 것이란 생각은 했을 것이지만 여자일 것이란 생각은 못했나 봐요. 첫 시간 강의에 들어가니 학생들이 제 앞에서 바로 나가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저를 동양인 여성이란 이유로 반대하던 사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보호하던 사람도 많았습니다. 나중에 한국 횃불트리니신학대학원(이하 횃불트리니티)에 부임했을 땐 한국에서 문화적인 차별로 고생했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 이민 초창기에는 더욱 심각한 차별을 받기도 했다.
 
“초등학교 마치고 이민 갔던 어렸을 때, 미국에서 인종 차별을 많이 받았습니다. 백인은 백인대로 흑인대로 차별했어요, 한국에 대해서 그 당시 그들이 알고 있는 이미지는 딱 하나였습니다. 6.25 때 벌거벗은 아이들, 길거리 걸인들의 사진이 전부였으니 그들의 무시는 오히려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차별의 난관’을 부모 양가 4대째 내려온 소위 ‘백 년 신앙’으로 헤쳐갈 수 있었다. 초기 선교사들로부터 직접 전도를 받은 조모와 외조모는 다 신식교육을 받았다. 집안이 기독교인답게 바로 서기 위해 일부다처제 없애고, 당시에 일만 생기면 흔히 하던 무당굿도 한꺼번에 정리할 정도였다.
 
특히 외조모는 가방에 약과 음식을 넣고 전도하다 돌아가신 것 같다고 회상했다. 아주 보수적인 신앙가정에서 성장한 일화를 한토막 들려주었다. 

▲ 정미연 교수     © 크리스찬리뷰
 
“제가 어렸을 때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초등학생들에게도 주일에 마을 청소하는 것을 시켰을 때 아닙니까? 저만 혼자서 토요일에 골목길을 쓸고 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만큼 부모님들은 주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실 정도였습니다. 월요일에 학교 가면 친구들이 선생님에게 ‘미연이는 토요일에 청소하고 교회 갔어요’하고 고자질 아닌 고자질을 하기도 했구요.”
 
이러한 가풍으로 그의 가문은 신식교육을 일찍 접했다. 경성제대 출신인 그의 백부는 한국의 미국 1세대로 저명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부친은 자녀 교육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에게 부친은 ‘큰 바위 얼굴’같은 큰 스승이었고, 멘토였다.
 
특히 이민자인 자녀들에게 ‘어느 국가로 가든지  인종차별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나 있다. 미국에서는 단지 이민자라는 이유로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신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고 한다. 그런 교훈으로 피해의식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이민자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아주 단호한 자세를 가졌다고 한다.
 
“한번은 회계사가 아버지 회사의 세금 보고서를 작성해 왔습니다. 거실에서 대화 내용이 회계사에게 다시 작성해달라고 하시더군요. 회계사는 부정한 방법은 아니지만 절세의 방법을 규모있게 작성해 오신 것 같았어요. 그때 아버지께서 심어주신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
 
내가 이민왔기 때문에 사실 내가 이 나라에 이바지한 것이 없소. 내 자녀들을 교육시키려 왔지만 어쩌면 이곳에 내 후손들이 시민으로 살아갈 확률이 많습니다. 그래서 세금은 정직하게 내는 것이 옳습니다. 무리해서 절세하지 말고 정직하게 계산해 주십시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저와 동생들에게 삶의 기본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남동생이 인종차별로 맞고 왔을 때, ‘맞고 오는 건 괜찮은데 때리고 오지는 말아라. 정말 훌륭한 사람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친구로 만드는 사람이지, 적대관계를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데 평범한 사람보다 잘 살아가려면 평화롭게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저랑 동생들에게 태권도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미국 아이들은 태권도를 한다는 소문만 들어도 때리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미국에서 살아오면서 실수도 시행착오도 많았다고 한다. ‘내가 대접받고 내 자손들이 대접받고 살려면 그만큼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살아야 한다. 의식을 바꾸지 않는 한 아무리 경제적 윤택함을 누려도 기독교인으로서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헌신, 인내,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가정의 가풍과 교훈이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부분이기에 더욱 시행착오를 참 많이 겪었다고 한다.
 
당하는 순간에는 억울하고 감정적으로 안 좋았지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갈 것인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아갈 것인가?’가 참 어렵지만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 워가 코리아 세계여성리더선교대회 기자회견에 참석한 정미연 교수(왼쪽)     © 크리스찬리뷰
 
신학의 지평
 
‘차별을 딛고 그는 텍사스 주립대 오스틴에서 정치사회학을 공부했다. 정치학을 공부한 것은 인권변호사가 되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법대를 가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험까지 다 치르고 신학교로 갔다.
 
신학교를 간 결정적인 계기는 어렸을 때 교회의 영향이었다. 위클리프 선교사로 훈련 받아 선교지로 가고 싶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었는데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가정교육의 영향도 있었던 것같다고 하였다. 
 
남침례교 선교사가 되기 위해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교로 진학하여 먼저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조직신학을 공부했다. 처음 꿈꾸었던 것과는 다르게 길이 열렸다. 모교에 남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여성으로서 조직신학자가 전 세계에서 거의 없었습니다. 여자로서 처음 강의했습니다. 이후 제 후배들 중에 한국인으로 교수로 채용된 남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것 같습니다. 어디에서 뭘 하든지 하나님께서 준비된 사람을 불러다 쓰시는 확신이 있습니다.”
 
박사과정 마쳐갈 즈음, ‘하나님께서 아시아로 부르신다’는 것을 중국에서 95년대부터 꾸준히 생각하고 있을 때 한국 횃불트리니티에서 교수로 제의해 왔다. 한국은 선교지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멈칫했다. 그러나 당시 횃불트리니티 김상복 총장이 정 교수 세대의 미국 교포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어른’이었기에 신뢰가 갔고, 횃불트리니티에서 가르치는 것이 좋겠다는 어른들의 권유가 있었다. 또 선교지와 가깝게 관련을 가지고 세워진 학교가 많지 않았기에 횃불은 여러 가지로 좋은 곳이었다. 연구 여건도 좋았고, 학생들의 장학금도 많았다.  한편으로는 한국사회 적응도 쉽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은 건전한 비판을 인신공격으로 들을 때가 많습니다. ‘일과 사람’의 분리가 안되니 정말 힘들지요. 특히 인권운동한다는 정치인들이 북한에 대한 무지, 탈북자와 통일을 너무 무시하는데서 놀랐습니다. 마음이 어려웠습니다. 미국에 자녀를 유학 보내도 미국을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도 많구요.”
 
횃불트리니티에서 방학 때마다 공산권과 동남아로 신학교를 방문하여 ‘신학선교’를 하면서 신학의 지평이 넓어졌다. 그렇게 행복이 가득한 세월 12년째 되는 해 다시 몰링 교수로 부임했다.

▲ 몰링칼리지 입구에서 정미연 교수     © 크리스찬리뷰
 
‘신학선교’의 쟝르
 
“몰링에 오게 된 계기는 제가 세계침례교연맹과 아시아태평양 침례교연맹 부총회장 중에 한 명인데, 학자로서의 대표성을 인정해준 것이지요. 호주의 학자들과 선교단체, 교단 지도자들과 수년 동안 같이 일해 왔습니다. 호주에서 계속 이곳 몰링으로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저는 아시아권을 제 선교지로 생각하기에 호주를 생각지 않았습니다. 한 번쯤 다녀오는 것이 여러 가지 개인적으로 좋고, 몰링에도 동양인 여자 교수가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겠다 하여 부임했습니다.
 
호주에 한인 이민사회가 점점 커져가니 로스 총장님께서 몇 년 전부터 계속 권유하셔서 횃불트리니티 일을 경험하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호주에 온 것은 오래 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교사명’을 이야기했다. 신학으로 선교하는 ‘신학선교’가 그의 선교 장르였다. 그는 방학 때면 아프리카, 동남아 등 제3세계 선교지 신학교에서 교수들과 학생들을 집중적으로 강의한다. 몰링에서 연봉을 받으니 선교 후원비 걱정 없이 선교한다고도 하였다. 
 
“선교지에 나갈 때마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갑니다. 제가 받은 달란트는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역지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을 가는 것입니다. 저는 교수가 아닙니다. 물론 대학에 교수로 부름 받았지요,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학생이 있고, 가르치는 사람이 필요한 곳이면 가야 합니다. 가르치는 것은 제 사명입니다. 박사 학위 있다고 대학만이 가르치는 곳은 아닙니다.”
 
수업이 끝나면 콩고, 인도, 케냐, 말레이시아, 미얀마, 네팔, 르완다, 우간다 등 선교지로 가는 것이 그의 일상사이다. 지난 12일에도 태국 신학교에서 미얀마 국경에서 난민들을 바라보고 어떤 방법으로 지원할 것인지 검토하고 돌아왔고, 인터뷰가 끝나는 다음 주(1월 25일)에도 피지로 신학선교를 떠난다고 했다
 
그럼에도 항상 북한을 향한 간절한 마음은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미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면서 소외자, 소수민족을 바라보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고 하였다.
 
그의 부모들도 자녀들을 유학시킬 생각만 했지 몸소 이민갈 거라는 생각을 못한 채, 이민을 떠났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런 마음을 품은 그의 남동생 가족도 중동지역에서 크루트족 언어 번역 선교사로 사역한다고 했다. 
 
“이민의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을 마련한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성경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픔, 차별, 불의한 경험들을 통해 성경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원동력, 수용능력, 주류 사회가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비판할 수 있는 자신감도 생기고요,  소외된 자들의 시각으로 보면 예언자들도 환영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유목인 난민, 인권 유린 당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할 정도로 연약한 자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입니다. 십자가만이 아닌 부활이 있기에 그리스도인은 피해의식에 있는 것이 아닌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핍박받고 순교하는 것이 아닌 예수님이 승리하신 방법이 십자가였기에 그 방법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정말 소수이고 약해서가 아니라 자신감이 기본입니다.
 
제가 여자라서, 싱글이라 남들이 무시하고, 동양인이라 무시할 땐 인간적으로 화도 나지만 상처는 받지 않습니다. 상처받을 시기는 지났습니다. 수많은 경험과 기도를 통해서 그런 일로 상처받지 않습니다. 아직 예수님 재림 이전,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어야 할 과정이지요.”

▲ 정미연 교수     © 크리스찬리뷰
 
신학은 헌신의 연료

 
‘신학의 본질은 인간학’이라고 했던가? 성숙한 신학자의 ‘상처받지 않는 인간학’에서 “자기 종교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신학이란 그 체험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아그네스 샌포드 이론이 흘러나오는 듯하다.

한 사람의 성숙에는 ‘8할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도 ‘만남의 축복’은 빼놓을 수 없다.
 
“저한테는 영향력을 굉장히 좋은 교수님들을 만난 축복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학업을 대하는 태도와 목적, 목표를 그분들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학문을 대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깨달아 교회를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학자가 되라는 것을 가르치기도 하고 몸소 보여주셨지요.”
 
미당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고 고백했는데, 정 교수를 키운 ‘8할의 바람(어려움)’은 무엇일까?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강연하는 정미연 교수.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방학 때마다 선교지로 가서 워낙 어려운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 그들과 대화하고 가르치다 보면 제가 어려운 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습니다. 태국에서도 실력이 있는데 난민이라 유학을 못시킨 것을 보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하루에 수백 명을 돌보는 의사가 있는데 단기 의료팀으로라도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는 사실도 너무 안타깝구요. 아주 간단한 마이신이라도 있으면 살 수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생명을 잃어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이번에 산모가 아주 간단한데 병원에서라면 살았을 것인데 정글에서 아이를 낳는 바람에 산모는 죽고 아이만 아빠가 데려나오는 것을 보니 제 자신의 어려움은 잊어버립니다. 사실 제 삶이 어려운 삶이 아닙니다. 싱글인데다, 동생들 다 성장 결혼했고, 어머니는 개인적으로 특별히 걱정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단조롭고, 사건 사고가 별로 없고 평범하기 때문이지요.
 
호주에서 우울증도, 문화충격도 있었는데, 일하면서 극복하는 것도 많습니다. 다행히 일 자체가 말씀이고, 학문이니 은혜이지요. 나머지 어려운 일들은 남들이 하는 식으로 풀고 있습니다. 일단 사람들이 가장 어렵고 걱정하는 것은 자식인데, 시댁과 자식이 없으니 그런 부분에서 단순합니다.”
 
그의 삶은 말씀에서 길을 찾고 그 말씀대로 걷는 것이었다. 성경에서 매년 묵상해야 할 말씀을 정하고 어떨 땐 그 말씀 하나로 한 해를 지탱한다고 했다.
 
“호주에서는 시편 23편을 계속 묵상한다고 합니다. 성경을 매일 묵상하지만, 그게 몸서리치게 깨달아질 때까지 묵상하려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 앞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7:7)라는 고백을 하고 싶고, 하나님께 듣고 싶은 한 마디는 ‘착하고 선한 종아 내가 너를 기다렸다’는 말씀이지요.” 

▲ 기독교선교횃불재단 이형자 이사장와 함께한 정미연 교수.     © 크리스찬리뷰
 
‘단조롭고 사건 사고가 없는 평범한 삶’이라고 고백한 그의 삶은 결코 단조롭지 않은, 일이 많은 범상한 삶이었다. 방학이 아닌 평일엔 강의와 저술에 진액을 쏟아부어야 한다.
 
“꼭 나와야 할 책, 출판하지 않으면 가르치는 내용이 부실해집니다. 그런데 시간을 그 쪽에 다 쏟기 어려운 면이 적지 않습니다.”
 
F. W. 훼이버는 “심오한 신학은 헌신에 가장 좋은 연료이다. 쉽게 불이 붙고, 일단 불이 붙고 나면 오랫동안 탄다”고 피력했는데, 꼭 정 교수를 두고 한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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