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신학에 필이 꽂이다

월드 디아스포라 포럼 국제대표 오상철 박사

송기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6/02/29 [11:01]
▲ 오상철 박사는 20년 넘게 이민자의 한과 눈물을 담아낸 이민신학자이다.                    © 크리스찬리뷰


오상철 박사, 그는 이민자의 한과 눈물을 담아내는 이민신학에 필(feel)이 꽂혀 20여 년 넘게 이민신학에 천착하며 이민신학을 개척해온 이민신학자이다.
 
그를 대하면 “길이 뚫린 데로 가지 말고 없는 곳에 흔적을 남기라”는 랄프 에머슨의 말을 실천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정글에 날 벼른 도끼 하나로 길을 내는 개척자의 길과 도구가 으레 그러하듯, 그는 이민자의 정글에서 이민신학의 길을 닦기 위해 그가 갈고 닦은 ‘선교신학’이란 도끼를 사면팔방 종횡무진으로 휘두르며 황무지를 개척했다.
 
산을 만나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겠다는 일념으로 그가 닦아온 이민신학의 길에 하나 둘 돌다리도 놓고, 징검다리도 놓고, 오솔길도 내고, 신작로도 닦으면서 이민신학의 후학들에게 서광의 빛을 비추게 한 이가 바로 그다.
 
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듯, 맨손으로 풀을 베듯 그렇게 개척해온 이민신학은 누구 하나 관심의 눈길은커녕 그가 닦아놓은 길 위에 꽃가마만 타려고들 하였다. 그래도 그는 행복한 이민신학자이다. 미화 10만 불 넘는 돈을 들여 이민교회의 실체와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북미주 전국한인교회 실태조사'를 했지만 본전은 고사하고, ‘날로 먹으려는’ 자료 수집가들은 고작 300불도 손이 떨려 내지 않으려고 하니, ‘돈 안되는 일만’ 가려서 한 것이다.
 
그래도 그는 행복했다. 그가 놓은 이민신학의 길이 누군가에게 디딤돌이 되고, 버팀목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근엔 조금 다른 기미가 보인다고 한다.
 
“지금 북미주 실태조사를 하고 방법론을 찾다가 결국 저를 만나서야 정점을 이루지요, 300불에 팝니다. 안 살  수 없습니다. 이민교회 모든 이야기들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마지막 논문 정리 못하다가 제 실태조사 보고, 마무리할 정도입니다.” 
 
그가 몸소 간판을 걸고 시작한 ‘미국이민신학연구소’는 작은 이민교회와 무임목회자들의 쉼터로 제공되면서, 탈진한 목회자들이 안식과 회복을 얻어 새로운 사역의 부름의 정류소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민신학의 정립을 위해 해마다 최고의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이민신학 포럼을 개최하여 그곳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아 <이민신학 논단>시리즈로 한 번의 집회로 끝나지 않고 소리를 잡아 활자로 엮어 학자들의 연구를 축척해가고 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으로 나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서 미국 교회사, 이민신학, 이민사회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주변신학에서 주류신학으로
 
“유학생에서 이민자의 길을 가니 아픔과 고난을 통해 몸으로 체득된 신학입니다. 학문적인 기쁨은 완전히 보석을 캐내는 것 같았습니다. 이상현 박사님은 ‘변두리 신학’이라고 했지만, 저는 주변신학이 아니라 주류신학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이민신학은 주변신학에서 주류신학으로 바뀌는 시기입니다,”
 
그는 책도 자료도 없는 길에 길을 내기 위해 모든 영문 자료부터 모아서 독파하기 시작했다.
 
“하와이대학에 이민 초기 자료, 도산 안창호 선생 자료 등이 다 있습니다. 하와이 연합감리교회 등에서 본격적으로 영문자료 보며, 아울러 이웃나라인 필리핀, 중국, 인도 등의 20여 개국의 이민 서적 몇 천 권을 읽었습니다. 학문, 개척자로서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10년을 연구하여 이민의 성공 스토리만 집어넣으려니 부족했습니다. 아프고 위로하고 힐링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쁨과 비전의 신학’으로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민신학은 이민교회 문화, 이민사회 문화, 백인문화, 다인족문화가 들어있는 신학입니다.”
 
이민신학 안에는 ‘한 인간의 아픔이 있다. 내가 아팠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라는 그의 체험적 신학이 녹아있다. 그리하여 그가 내건 ‘이민신학연구소’는 ‘이민 온 당신’을 연구하는 것이라는 지론으로 출발했다. 무수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들과 대화가 오가며 무르익어갔다.
 
“이민신학은 뭡니까? 이민자들 붙들면 남는 거 있었소?”
 
“저에 대해서 아세요? 너무 아는 척을 많이 하네요? 미국서 공부하면서 목회하면서 밥 굶어본 적이 있소? 나는 밥이 없어 굶어 본 적 있습니다.”
 
“한 수 가르쳐 주시오, 목회 해보니 안되네요.”
 
“설교 잘하는 것과 이민목회는 다른 거요. 이민자는 깊이 생각하지 마시오. 내담자 중심으로? 그래야지요, 그런데 두세 시간 상담하면 다 떠납니다. 비밀을 노출했으니 비빌 언덕이 없어 발목을 잡히니 다 도망갑니다. 힘들 때 상담했는데 발목 잡힐 줄 몰라서지요. 설교와는 관계없습니다. 그분들 다 당신이 떠나가게 했어요. 이민문화코드가 안맞습니다.”
 
이처럼 이론으로써는 도저히 설명이 안되고, 감당이 안되는 이민현장을 더 잘 이해하고 연구하기 위해 그는 이민신학 심포지움을 만들었다. 월드 디아스포라 포럼 2년에 한번 국제 포럼이다.
 
“본격적으로 상황과 아픔의 신학에서 아카데미로 바꾸었습니다. ‘당신들 경험을 이야기하지 말고 아카데믹 페이퍼를 읽어라’는 지론이지요. 앞으로 디아스포라 신학, 이민신학은 선택과목이 아닙니다. 이민신학은 주교재가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목회가 안되니, 이민신학은 다민족 선교학과 다문화학과, 여러 민족의 언어를 가르쳐야 합니다.  아니면 1세 신학교로 끝날 것입니다.”
 
그의 삶 자체가 이민자이다. 한국에 있어도 그는 ‘한국 사람’이 아니다. 한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강의 콘텐츠는 거의 모두가 디아스포라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디아스포라로 살아간다. 거꾸로 뒤집어도 디아스포라 학자이다. 자동차 홍수시대에 자가용 없이 굉장히 검소한 삶을 산다. 
 
“이민자의 삶을 가난하게 살았는데 사치를 안합니다. 음식문화가 발달해도 경건성 유지 위해 밥 한 끼 먹습니다. 저에게 이민신학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꾸로 뒤집어도 이민신학입니다. 그 외 하고 싶은 일이 없습니다. 이민신학자로서 주님나라 갈 때까지 계속 갑니다. 은퇴가 없습니다. 다른 것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면 당연히 안되지요.  하나를 깊이 파야 작품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민신학은 실존신학
 
“이민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영성의 생활화입니다. 어려운 사람은 무조건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 이민자들 주변에는 자존감 때문에 어려운 생활을 이야기 못합니다. 30년 되어 성공했으면 합니다. 50년 돼도 하지요. 그러나 실패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공했으면서도 고생한
이야기 잔뜩 늘어놓고 나눠주지 않으면 실패한 사람입니다. 사실 이민자들은 실패할 확률이 더 많지 않습니까?
 
고통을 경험했으면 다른 사람이 더 이상 실패하지 말게, 성공했으면 나눠주어야 합니다. 돈은 돌려야 합니다. 제일 가까이 있는 우리 교포들부터 도와야 합니다. 50%가 여기서 실패합니다.
 
동족의 눈물이 보여야 합니다. 동족의 아픔을 내 일처럼 느끼고, 진짜 방이 없으면 자기 집에 먹이고 재워야 합니다. 이민 목회자들도, 특히 유학생 목회하시는 분들 대부분 중간에 손 다 들고 나갑니다.
 
젊은이들은 투자대상입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하려면 자기 것이 없어야 합니다. 유학생 대상으로 캠퍼스 타운에 3~400명 모여도 쩔쩔 맵니다. 그런다가 한국 큰 교회에서 부르면 도망치는 사람 많습니다. 그 이유는 뻔하지 않습니까?”
 
이민신학은 실존신학이지, 이론신학이 아님을 그는 거듭 강조했다. 천국은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나눠주는 삶이라고도 했다. 꿈이 큰 사람이 아픔이 더 크듯, 한때 그도 큰 꿈을 품고 있다가 좌절과 아픔으로 죽음의 사자가 찾아오는 우울증을 6개월이나 경험했다고 했다.
 
“희망의 끈이 끊어지니 사랑밖에 없습니다. 이민신학, 이민목회는 자기 자리를 정자세로 지켜야 합니다. 저는 여기에 완전히 목숨 겁니다. 복음은 현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복음은 내용이 아닙니다.
 
이민 2세 중에 30%정도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다문화 사각지대, 치외법권 지역입니다. 저에겐 다음 세대, 다문화가 필생의 과제입니다. 사명에는 바이러스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면 빅 스폰서가 나타납니다. 사역자도 돈이 있으면 기도 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역사하십니다. 저는 다문화 다음 세대의 멘토링에 목숨을 걸려고 합니다. 젊은이들의 진정성, 영성을 일깨워야 합니다. 준비된 지도자, 세계적인 지도자, 젊은이들을 위해 투자하고 몸을 던져야 합니다.”

▲  알파 크루시스대학 한국학부 창학 20주년 기념 신학포럼에서 발표하는 오상철 박사.     ©크리스찬리뷰
 
 
리더를 잘 만나야 한다
 
그가 이토록 멘토링을 강조하는데는 사연이 있었다. 불교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5살 때 친구의 이끌림으로 성탄절에 부산 서대신교회로 갔던 것이 교회와의 첫 인연이다. 그 당시 10여 명 모이던 교회였다. 이후 성탄절마다 선물로 책받침, 공책, 지우개 연필, 흑사탕, 초클릿 등을 받았다. 주일학교 졸업까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지 못했다. 당연히 주일학교 멤버였을 뿐이다. 그러던 그는 하나님의 고교 2학년 때 영적 지도자를 잘 만나면서 새로운 전환점이 일어났다.
 
“전도사님 중에 고신대 출신 한 명이 계셨는데, 이 분이 우리를 다 뒤집어놓았습니다. 청도 동산기도원에 가서 다 뒤집어졌지요. 그때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리고 180도 삶이 달라졌습니다. 매일 아침 교회로 출근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당연히 ‘공부 안하고 예수한테 미친' 그를 그의 부친은 이해하지 못했다. 새벽기도 못 가게 문을 열면 소리가 나게 종을 달았다. 그는 종이 소리가 안나도록 휴지를 털어 막았다. 부친은 휴지를 떼어내면서 소위 ’오리지널 가정핍박‘을 받았다.
 
“가정핍박이 제일 어렵습니다. 당시 제사문제가 참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저와 동생은 절대 절 안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신학교로 가지 않았다. 먼저 광운대 전자공학과 졸업하고 공군 통신병을 지원했다.
 
“군대서도 하나님은 나중에 쓰시기 위해 얼마나 연단시켰는지요. 고참을 잘못 만나 군대서 밥을 잘 못먹었습니다. 직속상관 장기하사가 와서 교대해야 하는데, 오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니 점심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등병부터 일병까지 특별히 문제될 것 없는데, 기도하고 화장실에서 울고, 교회도 아예 못가고, 맞아죽을 정도였습니다.”
 
이때 5672부대 공군 예하 부대에서 정훈과에서 갑자기 군악병을 소집한다는 광고가 나고, 군악병을 차출했다. 그 즈음 대대 대항 군악가 건전가요, 전군대회에서 지휘를 했다.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하고, 성가대 지휘를 한 것이 큰 경험이었다. 그가 지휘한 대대가 1등을 했다. 그 다음날로 특명이 나서 공군 군악대로 전출되었다. 통신병에서 해방되어 간 그곳은 더 지독했다.
 
“무차별 기합을 받았다. 78년 그 겨울에 두 시간이나 엄청 얻어맞았습니다. 하나님의 모사였습니다. 딱 가보았더니, 300명이 줄 바터로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용기와 믿음이 생겼습니다. 큰 핍박 속에서 교회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당직사관부터 10여 군데 보고하는데, 크리스찬이라도 아무도 엄두를 못내는 겁니다.
 
제가 교회 갔다오는 그날 3백 명이 다 얻어맞는 날입니다. 남이 안하는 일을 많이 벌였지요, 믿음이 핍박 속에서 강하게 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교회 갔다 오면 쇠파이프로 맞아 한 달간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요일까지도 그랬지요. 6개월 동안 그랬더니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진짜 너는 미쳤다. 너는 마음대로 해라’하면서 내버려두더군요, 그래서 신우회를 조직했습니다. 직접 기타치고, 성가대 지휘도 했습니다. 좋은 장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저를 통해 은혜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장교들이 저를 ‘오 상병 이리와봐요’하며  말도 못놓아요. 관사 가서 전도하는데, ‘외출증이 없습니다’하면 그들의 전화 한 통이면 다 되었습니다. 외출증 없이 마음대로 오갔지요, 전 부대 복음을 전하면서 그 당시 제  별명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신앙의 연단을 거친 그는 장신 신대원 79기로 입학했다. 신학교 1학년 때부터 공부하면서 교사 수련회, 특별집회 등의 강사로 자주 불려 다녔다.
 
피아노 바이엘도 안 뗀 그가 200곡 이상 작곡할 정도로 천부적인 은사가 드러났다. 신대원 졸업 후 몇몇 교회 전도사를 거쳐 목사 안수를 받았다. 미국 유학을 가려던 차에 명성교회 교육부 담당목사를 모집한다는 신문공고가 났다. 100명이 지원하였는데 그가 뽑혔다. 명성교회 가니 교육부 5천 명을 맡겼다. 2배인 1만 명으로 부흥되니 그 다음엔 청년부를 맡겼다. 그곳에서 유례없는 부흥을 경험했다.

▲ ‘이민 교회 안에서 본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로 ’열강하는 오상철 박사  ©크리스찬리뷰
 
 
부흥 그리고 좌절
 
김삼환 목사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공을 채우기 위해 미국유학을 떠났다. 공부보다는 공부 외적인 문제가 괴롭혔다.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다. 여기서 이민자의 꿈과 좌절을 경험했다.
 
“절대로 이민자들의 아픔과 한의 이야기는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안되니, ‘학자의 길, 목회의 길 다 버리고 장사할 것이냐?’ 여러 기로 중에 갈등하고 고민했습니다.
 
보스톤대학 박사과정하면서 일 년만 더 다니면 되었어요. 아내가 ‘내가 김밥 말께 마쳐~’했지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달에 4천~4천 5백 불이 있어야 생활이 되는데, 하나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보스톤에서 뉴욕 어느 한인교회로 5시간 30분 운전하여 금요일 오후에 출발 10시 도착했습니다.
 
당시 1천500명 모이는 교회인데 토요일 한글학교, 아동부 그렇게 가르치고 1천300불을 받았습니다. 300불 가스비 제하면 1천 불. 그렇게 6개월 다니니 도저히 계산이 안됩니다. 5시간 차 타고 나면 온 식구들 머리가 하얘질 정도입니다. 결국 7년 만에 끝날 공부가 13년 걸렸습니다.”
 
그 교회와 에피소드도 많았다. 행복하게 시작한 사역에 부흥도 경험했지만, 결국 쓰디쓴 경험으로 소위 ‘새드 엔딩’으로 끝났다. 그곳에서 3시간 떨어진 곳, 뉴저지에서 한 시간인 에디슨에 교회를 개척했다. 그토록 큰 부흥을 경험했던 그였지만 6개월 동안 아무도 안오는 절망적인 경험을 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100% 성공했습니다. 여기서는 하도 되는 게 없었습니다. 이민교회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민신학은 눈물과 고통의 신학입니다. 80~90년대는 눈물과 고통의 신학이었다면 오늘은 비전의 신학을 더해야 합니다. 아픔과 고통의 시간 25년 이후, ‘플러스 비전의 신학’입니다. ‘기쁨과 비전이 있는가?’이지요.”
 
‘죽은 교회’에서 탈출하고픈 마음에 규모있는 이민교회에 담임목사 청빙이 있을 때, 몇 번 지원도 했다. 명성교회 지원 당시 100대 1의 경쟁률을 물리친 경험을 무색케 했다. 박사학위까지 가진 그에게 결과는 좌절만 안겨주었다. 
 
“꼭 1번과 2번 사이에 끼어듬, 서너 군데서 거의 결정되었다가 막판에 안되었습니다.”  
 
진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면서 국제 CCC 총재 빌 브라이트 박사 비서실에 전화했다. 빌 브라이트에게서 응답 전화가 왔다. 주스만 먹으며 비전을 함께 나누었다. 결과는 국제 CCC 산하에 있는 올랜드 인스튜트드 복음주의 신학교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7년을 그곳에서 일했다. 
 
다시 이민자를 위하여
 
안식년을 뉴저지에서 보내는데 장신 후배 부부가 찾아왔다. 일 주일 체류하겠다고 찾아온 그들은 이틀을 구경갔다오더니 진지하게 그와 마주 앉았다.
 
“여행 끝났습니다. 사실은 선배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요? 이야기 해보세요.”
 
“우리 두 부부는 기도하면서 금식하기 위해 왔습니다. 선배님 우리 한인교회 버렸습니까? 목사님 우리 한인교회는 무관심하고, 화이트들 하고 있다니요? ... 두 언어가 되는데, 목사님같이 다 준비된 분이 우리 한인교회를 버렸다, 결론이 우리 한인교회로 돌아오시오.”
 
“너무나 한국적이라 안맞소.”
 
이들과 헤어지면서 복도에서 마무리 기도하니, 이 두 후배가 “목사님 축복하겠습니다”하고 통곡의 눈물을 흘렸다. 통곡의 눈물로 한국교회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예스 하지 않으면 올랜드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도 그가 예스 안하니 돌아간 그들은 매일 거의 일년 동안 붙들었다.
 
후배의 애틋한 권유로 그는 메인 화이트 대상으로 교수생활하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이민신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실패, 성공 케이스보다 오기로 극복했다.
 
믿음이 아니라 오기와 투지로 극복했다. ‘진짜 목숨을 걸면 길이 열린다. 어설프면 밥도 못 먹고 공부는 끝난다. 이민자를 끝까지 돕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시작했다.
 
이민신학자로서 이민이란 한마디로 ‘고통’이라고 표현했다. 이민을 통해 배고픈 경험, 죽음을 넘겨본 경험을 해야 할 정도로 아픔을 절절이 체감했기에 그가 말한 ‘고통’이란 의미는 예사로운 무게가 아니다.
 
이민신학자가 되고 나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세상의 모든 영화로움을 떠나고 싶은 결정적인 마음을 주셨다고 했다.
 
“성령의 역사이지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인기 명예강사, 스타강사, 제 이름 알려지는 것, 이제 아무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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