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 고 정우성 목사 2주기 추모 특집 | 인터뷰 박성곤 장로(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장로)

‘오직 예수, 오직 복음’의 정우성 목사

글|정윤석, 사진|강민석 | 입력 : 2016/02/29 [11:26]
▲ 고 정우성 목사와 무한 신뢰 관계를 가졌던 박성곤 장로. 그는 정 목사의 고교 4년 선배였지만 한 번도 정 목사에게 선배 행세를 하지 않았고 목회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정 목사를 존경했다고 회고했다.     © 강민석


“무신불입, 무심지도(無信不立, 無心之道)의 마음으로 우리는 통했습니다.”
 
박성곤 장로(77.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는 시드니순복음교회를 개척한 고 정우성 목사와의 관계를 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신의가 없으면 뜻을 세울 수 없고,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는 정우성 목사와의 관계는 ‘신뢰’, 그것도 무한 신뢰가 뒷받침돼 있었다고 회상했다.
 
박 장로는 정 목사의 홍성고등학교 4년 선배다. 그러나 박 장로는 한 번도 정 목사에게 ‘선배 행세’를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정 목사가 후배임에도 그에게선 ‘오직 예수’,  ‘오직 복음’의 진한 향기가 풍겨나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 장로는 목회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정 목사를 존경했다고 주저없이 말한다.
 
둘 간의 일화는 많다. 회상하는 중간중간 박 장로의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건강 문제로 주사를 맞아야 하는 일이 있었어요. 생명이 걸린 매우 중대한 일이었는데, 그 주사를 맞느냐 안 맞느냐 여부를 한국에 와서 결정할 때, 정 목사는 말했어요. ‘내가 주사 맞고 안 맞고는 박 장로가 결정해 주십시오.’” 생명이 오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 앞에서도 정 목사는 박 장로에게 무한 신뢰를 보냈다.
 
2009년의 일이었다. 정 목사가 쓰러졌다. 한국의 병원에 입원했다. 40일 동안 박 장로는 매일 오전부터 저녁까지 경기도 일산 화정에서 병원까지 하루 4시간의 이동 거리에도 불구하고 매일 찾아가 정 목사의 병수발을 했다.
 
차도가 보이지 않자 박 장로는 자신이 아는 또 다른 병원으로 정 목사를 옮겼다. 다행히 옮긴 병원에서 원장은 “32일이면 완쾌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실제로 정 목사는 32일 만에 일어섰다. 그 후 퇴원하는 정 목사를, 사역을 위해 시드니로 다시 가야 하는 정 목사를, 박 장로는 휠체어에서 환송했다. 사실 정 목사가 퇴원하기 전 박 장로는 과로로 쓰러졌었다.
 
40일 밤낮에 걸친 병 간호, 박 장로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누적된 피로로 급성 뇌경색이 와서 갑작스레 쓰러졌고 깨어나니 병원이었다. 결국 같은 병원에 입원했다. 박 장로는 입원하고 정 목사는 퇴원하는 묘한 상황이었다. 병원에서도 동고동락을 같이 한 셈이다.
 
박 장로는 정 목사의 1979년 시드니순복음교회 개척은 ‘콘크리트에 헤딩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런데도 정 목사는 불도저처럼 저돌적으로, 용맹한 군인처럼 밀어붙이듯 교회를 개척해 2014년 소천하기까지 35년간 29개 지교회, 7개 지성전을 설립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순복음 고유의 영성으로 교회 성장과 부흥을 이뤘다고 평가한다. 박 장로는 이런 정 목사에 대해 “사람들은 정 목사를 전쟁터의 전사같다고 하지만, 저는 ‘정’이 참 많은 사람으로 기억합니다”라고 말한다. 교인들의 영주권 신청 문제와 결부된 일이라면 그는 자신의 일처럼 두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고 한다.
 
1989년엔 교회를 통해서 영주권을 신청하도록 해 교회 성도뿐만 아니라 타교회 성도 및 불신자까지 500명이나 영주권을 신청했고 교회에선 77일 연속 철야기도회, 40일 작정 새벽기도, 정 목사는 매월 1일부터 3일까지 3일 금식을 실시했다. 결과적으로 500명의 영주권이 일괄적으로 발급되는 전무후무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2009년, 박 장로가 정우성 목사를 안내하면서 차를 타고 갈 때의 일이다. 박 장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호주 퍼스로 이민간 한 성도의 전화였다. 3억 원을 갖고 갔는데 한마디로 거의 다 털릴 지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고 한다.
 
“박 장로님, 나, 한국으로 돌아가야 겠어요. 짐 받을 곳이 없는데 짐 좀 받아주세요. 그리고 귀국하면 일자리도 알아봐 주세요.”
 
박 장로는 알았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바로 옆에서 이 통화 내용을 듣던 정우성 목사가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박 장로님, 그 성도의 짐을 한국으로 보내지 말고 시드니순복음교회로 보내라고 하세요. 그리고 귀국하지 말고 시드니로 오시라고 하세요.”
 
결국 이 성도는 시드니에 정착하게 됐고, 영주권까지 금년에 받게 됐다며, 정우성 목사의 ‘정’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정이 있고 신의가 있기 때문에 박 장로는 정 목사가 시드니에서 한국에 오는 날에는 모든 일정을 뒤로 하고 그를 섬기고 안내하는데 올인했다. 그것이 박 장로에겐 최우선의 일이었다.

▲ (사)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가 수여한 세계성신상  ‘세계선교’ 부문에서 수상한 정우성 목사 부부와 기념 촬영한 박성곤 장로.(앞줄 오른쪽 3번째)     © 크리스찬리뷰
 
정 목사는 남에 대해 나쁜 얘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떤 경우에도 남 얘기를 하지 않았다. 박 장로가 건드려 보았다.
 
“목사님, 스트레스 받지 말고 말 좀 해보세요!”
 
그러면 충청도 사투리로 정 목사가 천천히 말했다.
 
“그건 말해 뭐해유.”
 
고집도 적잖게 있었다. 장로들이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도 정 목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면 고개를 숙이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 행동 하나로 일은 ‘아닌 것’으로 정리된 것이다. 그런데도 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시드니순복음교회 장로들은 한국에 있는 박 장로에게 상의하는 국제전화를 했다.
 
“장로님, 이번 일은 꼭 해야 하는데 목사님이 요지부동이에요.” 그러면 박 장로는 다시 정 목사에게 국제전화를 해서 부탁했다.
 
입이 무겁고 검소한 정 목사의 마음은 오직 예수에 꽂혀 있었다.
 
“정 목사는 병석에서도 입버릇처럼 말했어요. 사도행전 1:8을 읊었어요. 그리고 소천하기 전 병환 중에 있었지만 발음이 어려운 가운데도 늘 강대상에 올라가 설교를 하려 했어요. 마지막 열정의 한 방울까지 강대상에서 쏟아부으려 했던 거예요.“
 
박 장로는 ‘만남’에 대해 말했다. “정 목사님은 홍금란 사모님을 참 잘 만났어요. 그분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됐고, 목회자가 됐다고 할 수 있어요. 저 또한 정 목사님을 만난 건, 큰 축복이에요. 그분을 1989년 알게 된 후로 매년 연하장을 보냈어요.
  
마지막에는 늘 ‘무신불립, 무심지도(無信不立, 無心之道)’라고 붓글씨를 써서 보냈어요. 2014년 소천하시고 지난해 연말에는 연하장을 보내지 못했네요. 매년 보내던 연하장을 쓰지 못하니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아픕니다.”
 
박 장로는 2014년 정 목사가 소천하기 2주 전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호주로 달려갔다. 생각보다는 건강했다. 이틀 머무는 동안 네 번을 면회하고 작별 인사를 할 때 목사님도 울고, 박 장로도 울었다.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다.
 
그 후 부음이 들렸고, 시드니순복음교회 후임인 김범석 목사가 담임목사로 취임할 때 호주에 가서 박 장로는 정 목사의 무덤을 찾았다. 박 장로는 그의 무덤을 감싸 안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생명이 걸린 문제 앞에서도 박 장로를 신뢰하던 그 사람, 맨땅에 헤딩하기 식으로 시드니에 교회를 개척해 대형교회를 이뤘지만 언제나 소탈하고 검소했던 그 사람, 그래서 늘 연하장을 보내며 존경을 표시했던 그 사람은 이 땅을 떠났지만 박 장로에게 만남의 축복이 무엇인지 알게 해줬다. 그 만남의 축복이 언젠간 또 이뤄지리라.

▲ 정우성 목사를 만난 것은 큰 축복이었다고 간증하는 박성곤 장로       © 강민석
 

박성곤 장로는 1939년 연변에서 태어났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6.25한국전쟁의 와중에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복음은 빵과 함께 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하교하던 중에 길거리에서 너무 배가 고파 무를 캐서 먹다가 탈이 났다. 쓰러져 있는 그를 누군가 업고 그의 집으로 박 장로를 옮겼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십자가였다. 박 장로를 업어줬던 분은 교회의 목사였다. 그리고 빵을 줬다. 언제든지 배가 고프면 교회에 오라고 말했다.
 
배가 고파서 찾아갔던 어느 날 교회는 텅비어 있었다. 박 장로가 교회 부엌의 솥을 열어보니 빵 7개가 있었다. 군침이 돌았다. 집어 먹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돌아서 나오는데 목에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호미를 들고 밭을 일구던 목사님이 교회로 들어오고 있었다.
 
“배 고프지?”
 
“네!”
 
“빵 줄게!”
 
목사님은 박 장로에게 4개의 빵을 줬다. “
 
언제든지 배가 고프면 교회로 오렴”
 
그건 박 장로에게 복음이었다. 이게 박 장로 신앙의 시작이었다. 이때 믿음을 가진 것을 계기로 그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장로로서 오늘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글/정윤석|크리스찬리뷰 한국주재기자
사진/강민석|국민일보 사진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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