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는 순종이다 … 가정교회의 자연적 확장을 통한 선교의 비전

인터뷰|카자흐스탄 주민호 선교사

김석원/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6/02/29 [11:34]
▲ 카자흐스탄에서 사역 중인 주민호 선교사(오른쪽). 아내 손현숙 선교사는 급성 백혈병으로 투병하다 2012년 6월 1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주민호


오는 3월 1일부터 3일까지 가정교회 시드니지역연합 주최로 '가정교회 선교포럼 및 선교대회'가 시드니에서 열린다.
 
선교 포럼 강사로 가정교회사역원 선교간사이며 베테랑 카자흐스탄 선교사인 주민호 선교사가 호주를 방문한다. 기성교회 안에 선교의 열정과 비전이 말라가는 이 시대에   '가정교회' 모델을 통해 세계선교의 새방향을 꿈꾸는 주민호 선교사와 이메일 인터뷰를 가졌다.<편집자 주>

- 선교사로 지원한 동기는 무엇인가?
 
“대학교 입학과정에서 성경을 읽고 영접했다. 너무 늦게 믿었다는 생각에 전도에 열심이 컸다. 그러다 1982년 1월쯤,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8) 말씀에 큰 도전을 받았다. 지옥에 간 이들이 아직 살아있는 가족만은 이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원하는 절박한 소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구절이 우리 조상의 소리로 들렸다. 그러나 주변에는 복음전도자들이 이미 많다고 생각하고, 선교사로 부르시는 소명을 느낄 수 있었다. “
 
- 특별히 카자흐스탄으로 가게 된 이유는...?
 
“신대원 졸업 후 교단 선교사로 선교지를 찾고 있었다. 1991년 4월 6일 아침, 디도서 3:12-14 를 읽다 바울의 사역전략이 눈에 들어왔다.
 
‘전략적 거점지역에서 사역하라’ 바울은 달마디아지역에 접근하는 전략 요충지였던 니고볼리로 디도를 불렀다. 거기서 겨울동안 복음 훈련을 시켜 달마디아로 디도를 파송하고 바울은 감옥에 갇혔다. 당시 나도 미전도 종족, 그 중 무슬림계를 향한 소명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내가 읽던 책 ‘From Jerusalem to Irian Jaya’(서부 파푸어뉴기니) 에서 보여주는 복음전파의 흐름을 볼 때, 전략적 거점으로 카자흐스탄이 눈에 들어왔다. “
 
- 카자흐스탄은 기독교에 적대적인 무슬림 다수지역이기도 하고, 구 소련 이후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곳으로 들었다. 입국 후 정착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가기 전부터 카자흐족을 전도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입국도 선교사 비자가 아닌 다른 신분으로 입국해야 했다. 도착해서는 현지 친구 선교사가 사역하던 고려인 교회를 통해 고려인들과 많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이들도 ‘카자흐가 예수 믿으면 내 손에 장지집니다’라고까지 했다. 가까스로 카자흐족 친구를 사귄 뒤 전도를 시도했을 때도, ‘내가 예수 믿으면 우리 카자흐족을 배신하는 것이며, 친척과 주변으로부터 돌멩이에 맞아 죽을 것’이라는 답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카자흐에서는 전도가 안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을 다시 잡고, 개인 경건시간과 가족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변을 보면 선교지에 처음 간 선교사들이 흔히 겪는 경험 같다. 나도 이를 통해 많은 교훈을 얻었다.”

▲ 65차 목회자를 위한 가정교회 세미나(중앙아시아지역 목회자)에 참석한 최영기 목사(오른쪽)과 환담하는 주민호 선교사(가운데).     © 주민호
 
- 무슬림 선교지에서는 사회적 거부감뿐 아니라 정부차원의 박해도 흔하다고 들었다. 특히 반전 지배자인 기독교계 러시아인에 대한 반감도 커서 선교가 힘들다고 들었는데... ?
 
“정착을 위해 언어학 학생으로 등록 한 후, 비교언어학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1996년 ‘모국어’라는 민족주의 성향의 신문에 내 기사가 나왔다. 두 장 반이나 할애해서 '숫자적으로 소수인 카자흐인이 종교적으로 분리되면, 부족적 갈등보다 훨씬 부정적이다'는 식의 주장을 했다. 카자흐 선교를 자기 종족을 이간, 분리시키는 시도로 오해를 받은 것이다.
 
카자흐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들은 기독교를 (과거 자신들을 지배하던) 러시아인의 종교라고 여기고, 전도를 러시아인의 종교를 받아들인 것, 심지어는 러시아인이 되어 민족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가 개입된 과거 역사와 그 상처 때문에 현재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덕분에 나는 학위논문 심사 한 달을 앞두고 논문심사 거절 통보를 받았고, 교회에 조사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과 압박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동역자들의 기도로 견딜 수 있었다.”
 
- 카자흐스탄에서 어떻게 사역을 해 왔는가?
 
“한국에서 받은 선교사 훈련 내용보다는 매순간 현장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답을 찾아야 했다. 초창기에 태권도 사범, 세계언어대학교 한국어학 교수, 언어학 박사과정 학생 등 여러 명칭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다 태권도 수업과 영어 교실에 참석한 젊은이 중에 영접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본격적인 사역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필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으로 불러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 하루 세 시간 동안 제자 훈련을 하려고 했는데, 가면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한 번 모이면 여섯 시간 동안 지속되는 것이 기본이었고, 주 하루에서 이틀, 삼일, 매일로 모이는 시간이 늘어났다.
 
성경공부과 함께 삶을 나누는 시간을 좋아했다. 물론 제 아내가 정성으로 준비한 애찬도 큰 몫을 했다. 당시에 나는 그런 분위기가 편하지 않았다. 이후 한참 돌고 돌아 가정교회 사역을 접하고는 이런 모습이 가정교회와 다르지 않았음을 알았다.”
 
- 잘 되고 있었다면 굳이 가정교회 사역전략으로 방향을 바꾼 이유가 있나?
 
“말한 대로 이미 내 사역은 셀그룹 형식으로 자리를 잘 잡아서 성장하고 있었고, 주변에서 견학과 동역 제안도 많았다. 그러나 내 안에서는 몇 가지 고민이 있었다. 첫째, 성도의 삶이 변화하지 않는 것이었다.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은 너무 좋아하면서도, 삶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을 눈이 띄였다.
 
두 번째는 선교지 전도현장에서 벌어지는 혼란이었다. 당시 카자흐스탄에는 준비되지 않은 사역자들로 인해 문제가 많았다. 전도를 했다는데도 교회로는 전혀 연결되지 않은, 껍데기만 요란한 선교 사역에 질려있었다.
 
세 번째는 현지 지도자들의 도덕적 타락이었다. 이들을 급하게 세우다 보니 생긴 문제기도 했지만, 종말에 예고된 교리적, 도덕적 배교 현장을 엿보는 것 같았다.
 
이때 휴스턴 서울교회에서 열린 가정교회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 여기서 나는 내가 처한 현실과 너무 대조되는 경험을 했다. 복음을 정확히 말로는 설명하지 못하지만 복음 내용 속에 실제로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목원-목자-담임목사로 이어지는 팀전도도 인상적이었다.
 
피상적인 전도가 아니라, 대상을 복음에 충분히 노출시키고 준비되도록 섬겨서 열매를 따는 방식이 부러웠다. 거기다 몇 년 전부터 선교지와 한국, 미국을 아우르는 교회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정교회 네트워크가 대안인지 묻기 시작했다. 이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현지인 리더도 좋은 멘토를 가지고, 함께 가는 교회들이 생기면 영적으로도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정교회 사역으로 전환했고, 동역하던 선교사, 교회들도 기꺼이 따라나섰다.“

▲ 살렘교회 주최 목회자 세미나에서 최영기 목사(가운데)와 함께.     © 주민호
 
- 현재 사역하는 살렘교회은 해외 가정교회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알려졌다. 총 54개의 목장으로 이뤄진 탄탄한 목회와 현지에서 오랫동안 양육된 카자흐인 비보스노프 아이다르 목사와 공동목회를 하면서, 국제 가정교회 사역원 중앙아시아 선교간사로 허브 교회로 키우고 있다고 들었다. 이 교회가 선교 비전을 위해 현재 만나는 영적 도전과 비전은 무엇인가?
 
“살렘교회는 중앙아시아 선교의 허브교회로서의 최소한의 역할을 자임한다. 무엇보다도 안팎으로 방해가 많은 카자흐에서 가정교회의 모델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성도의 삶에서 변하지 못한 영역과 씨름하면서 영혼구원 사역에 나서는, 제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본으로 보이려는 것이다.
 
가정교회에 제시하는 삶공부 과정을 러시아어, 카자흐어로 번역하여 실행하고, 주변 교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에도 중요하다. 이미 '생명의 삶', '새로운 삶' 과정은 진행 중이고, ‘확신의 삶’이 번역, 출판을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역할은 세미나 사역이다. 이미 '목회자 세미나' 개최교회가 1개, '평신도 세미나'를 개최하는 교회가 4개나 생겼다. 이들 허브 교회들에게 모델을 제시하고 지원하는 것도 우리 몫이다. 세미나는 통역으로 진행되어야 해서 많은 과정을 개설할 수 없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세미나의 현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앙아시아를 넘어, 우크라이나, 러시아, 터어키, 아제르바이쟌, 북인도, 이스라엘까지 가정교회 사역이 확장되고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선교사 세미나나 다양한 현지교회 연합 컨퍼런스 강사 사역을 통해 이러한 연결점을 확대시키고 있다. 그러나 가정교회 네트워크의 확장 자체는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함께 일하던 선교사들이 사역지를 옮기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가정교회가 확산된다.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쟌이 그런 경우다. 이스라엘로도 비슷한 방식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교회 개척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확신이 생긴다.”
 
- 삶을 통해 모델을 보인다는 말은 생각처럼 실천이 쉽지는 않다. 선교뿐 아니라 일반교회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고, 앞으로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냉소와 비판이 커지면 커질수록 삶을 통한 선교로의 방향전환도 더 필요해 질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우리 동네는 성도의 가족, 친구, 이웃이 모두 무슬림들이다. 목장 모임은 그 공동체 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선교 기지다. 목장이나 초원별 연합을 통해 이들 공동체 내에서 구제 사역을 활발히 전개한다. 모든 민족을 제자삼으라 하신 선교사명에도 초점을 잃지 않고 있다.
 
매년 여름이면 카자흐스탄 국내 지교회와 주변 나라로 단기 선교 팀들을 보낸다. 올해도 경제적으로는 힘들 것으로 보이지만, 더 많은 교회들이 단독 혹은 연결시켜 단기선교로 보낼 것이다.”

▲ 주민호 선교사     © 주민호
 
- 몇 년 전 갑작스럽게 사모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여러운 시기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사랑하던 사람을 볼 수 없다는 사실, 선교지의 모든 상황에서 함께 하던 사람이 이제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날마다 그립고, 살아 있을 때 잘 해 주지 못했던 기억에 미안해서 많이 울기도 했다. 이때 교회와 선교부에서 딸 아이를 단기 선교사로 보내 주어서  함께 살아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와중에서 기도와 묵상 가운데 깨달음이 있었다. 아내에게는 이 땅에 사는 것보다 주님께로 간 것이 가장 행복한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아내는 일에 쫓기면서도, 시간만 나면 주님 앞에 앉아 있길 좋아했다. 급성 백혈병 투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내가 정말 그리워하고 바라는 바가 이것이 아닌가 싶다. 죽음은 상실만이 아니라 주님과 영원히 함께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은 죽음을 앞에 둔 성도나 가족들을 전과는 다르게 위로하고 응원한다. 그리고 함량 미달인 나에게는 채워야 할 분량이 남았다고 생각하고, 주님 만날 날을 사모하며, 먼저 간 성도들과 다시 만날 때 부끄럽지 않도록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 주목받던 '현장 선교사'들이 이제 후방 지원 사역으로 많이 빠지는 분위기다. 여전히 쉽지 않은 환경인 카자흐스탄을 떠나지 않고 현지에 남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는가? 현장 선교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
 
“‘가라’고 하셨던 주님이 ‘돌아오라’거나 ‘옮기라’고 아직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실 전에는 소명에 대해 많이 다루었지만, 지금은 순종에 대해 더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아내가 치료를 위해 한국으로 들어갔을 때도, 소천했을 때도 귀국하라는 권고가 있었다.
 
그러나 기도해 보니 사역지를 옮기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그 선교지로 나갔다. 나는 선교사나 목회자나 차출되는 것이지 자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물론 언젠가 본국으로 부르시는 때도 순종할 것이다.

▲ 생명의 삶 과정 1기 수료생들과 함께.     © 주민호
 
현지 선교 사역에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목장 사역을 직접해 보며 준비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복음전도, 제자화의 경험도 없이 선교지에 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국내에서 전도해 보지 않은 사람이 선교지에 간다고 갑자기 바뀌는 것은 아니다.
 
둘째로 우리가 할 사역의 대상 민족과 지역을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님이 선교사로 가라 하실 때 어떤 민족을 섬기라고 보내시는 지 분명히 확인을 받고 가야한다.
 
세 번째로 선교지와 현지인들을 섬길 수 있는 직업적 준비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 목사 선교사도 필요하지만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다. 선교지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일과 직업을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그런 면에서 일반 직업을 가지고 교회를 잘 섬기던 목자목녀같은 지도자들이 목사 선교사들과 함께 팀 사역을 같이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부르길라와 아굴라 같은 사람들이!”
 
- 감사합니다.〠

김석원|크리스찬리뷰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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