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테보다 피아니시모를

묵상이 있는 만남 (3)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3/08 [10:00]

아무리 좋은 소리라 할지라도 너무 커지면 소음이 된다. 목소리가 큰 사람과 대화를 하다보면 금방 피곤이 몰려오는 이유는 그것은 소통이 아닌 소음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연인들끼리 데이트를 할 때 사랑한다고 고함치며 말하는 경우는 없다. 
 





사랑의 언어는 절대로 포르테가 아니다

사랑의 언어는 작고 부드러운 피아니시모다. 사랑은 속삭임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언어가 필요 없는 단계로 나아간다. 그리고 눈이 또 다른 언어가 된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다. 만약 사랑한다고 소리를 지른다면 그 순간 사랑은 갑자기 연기처럼 저 멀리 사라지고 말 것이다.

성경 가운데 농염한 에로티시즘이 과감하게 표현되고 있는 아가서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사랑의 언어란 틀림없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부드럽고 작은 소리임을 말해 준다.

사랑은 표현된 언어이기보다 묵언에 가까운 밀어에 속한다. 사랑의 언어는 절대로 포르테가 아니다. 만약 포르테로 간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스토커일 가능성이 높다. 고가의 성능 좋은 오디오는 아주 작은 음, 마치 끊어질 듯한 음이 끊어지지 않고, 그럼에도 흔들림 없이 선명하게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작은 음을 선명하게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하이테크놀로지이다.  

성악가나 합창단들도 역시 큰 소리를 힘 있게 내는 것보다 미세한 소리를 섬세하게 안정감 있게 불러야 제대로 된 실력을 입증하게 된다. 소리의 절제가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세계적인 콘서트 홀일 수록 작은 소리, 작은 못 하나가 떨어져도 그 소리의 공음이 들릴 정도로 잘 지어졌다고 건축음향전문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아주 작은 소리 하나라도 소홀히 취급되지 않고 그 미세함이 공간의 구석구석에까지 닿아 울릴 수 있어야 훌륭한 뮤직 홀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런 홀에서는 연주자가 피아니시시모를 쳐도 구석진 곳에 앉은 청중까지 그 작은 소리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게 된다.

지금은 큰 것을 숭배하는 시대다. 큰 소리가 힘이라는 등식이 지배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큰 소리를 내어 보려고 애를 쓴다.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허위와 과장이 들어간다. 상업성 광고에서 자주 경험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이미 소음에 너무 지쳐 있다. 정작 사람들이 듣고 싶은 소리는 큰 소리가 아니다. 소리의 폭력을 즐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작은 소리, 감미로운 소리, 도무지 거부할 수 없도록 우리의 영혼을 파고 들어오는 소리에 목이 마르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귀를 기울여 듣고 싶어 하는 소리다.

작은 소리란 절제를 거쳐 정제된 언어다

작은 소리란 절제를 거쳐 정제된 언어다. 하고 싶은 말들이 쌓였지만 그것을 참아냄 끝에 밀려 나오는 한 마디, 그것은 마치 시어와 같다. 절제로 태어난 농축 언어인 것이다. 당연히 짧은 글 안에 무게를 잴 수 없는 파워가 실려 있다. 절제를 통해 만들어 낸 언어는 위압적이지 않고 부드럽기 그지없다. 만연한 설명은 생략되었지만 뭉클함이 느껴지는 것은, 하고 싶은 수 많은 말들을 안으로 집어 삼킨 후에 토해 내는 작은 외마디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폭력이 세상을 어둡게 하고 있다. 큰 소리를 이길 더 큰 소리가 덮치고 또 덮쳐 세상을 질식하게 만든다. 큰 소리들,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그리고 투쟁적 언어들이 비수가 되어 아군과 적군의 구별없이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럴수록 작은, 아주 작은 소리, 여리고 부드러운 언어의 훈련이 필요하다. 내면에 진리로 채워지기만 한다면 묵언으로 맑은 소리를 내는 법을 익힐 수 있다. 작고 여린 듯 하지만 거대한 소리, 상처 난 영혼의 깊은 곳을 터치해줄 십자가를 통과한 생명 언어가 샘물처럼 터져 나오게 해야 한다. 조금 더 낮게, 그리고 따뜻하면서도 명료한 목소리들이 하나 둘 모여진 곳에 평화로운 세상이 만들어 진다.

가끔 생명 걸 일이 있다면 그때 “포르테”를, 그러나 평화로운 일상을 원한다면 “피아니시모”로 나의 목소리를 조절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 본다.

 

이규현
시드니새순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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