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에서의 섬김, 이보다 큰 축복과 행복은 없습니다

임기 마치고 귀국한 이봉행 사건사고 담당영사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3/08 [10:02]
변함없는 모범생

 그는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이다. 필자가 그를 3년 전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강인하게 각인된 인상은 그 옛날 까까머리 고교생들이 입던 검은 색 교복의 후크 하나, 맨 위의 단추 하나도 풀어놓지 않고 꽉 잠근 모범생이었다. 기율부장이 골탕 먹이기 위해 철저하게 검열해도 트집 하나 잡히지 않을 만한 모범생이었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범생이’들이 갖는 ‘꽉 막힘’ ‘굼뜸’ ‘꼴통’ ‘외골수’ 등의 이미지와는 전혀 반대이다.

오히려 유연성있는 해결사에 가까운 모범생 이미지이다. 어떤 문제를 갖다 줘도 씩 웃으며 해결해주고, 남몰래 자기 등록금 털어서 가난한 친구들 도와주는 소위 공부짱, 운동짱, 인격짱인 모범생 이미지란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그의 삶 자체가 언제 어디서 만나든, 어느 모로 보든 매무새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범생이’였다.

 
▲ 낮은 곳에서의 섬김을 통해 지난 해 ‘발로 뛰는 영사상’ 수상자가 된 이봉행 영사는 3년 임기에 1년을 더 연장하여 교민사회를 위해 봉사하다 귀국했다.     © 크리스찬리뷰

그가 바로 이번에 3년 임기에 1년 더 연장하여 시드니 교민을 위하여 멸공봉사하다 고국으로 귀국한 이봉행 사건사고 담당(경찰) 영사이다. 떠나기에 앞서 만찬을 겸한 만남을 가졌다. 짧지만 결코 짧지 아니한 ‘시드니의 세월’이었다. 그가 시드니에 처음 왔을 때 필자를 만나 들려준 말이 경구처럼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중요한 일은 항상 크게 생각 없이 이루어지더군요.”

경찰에 입문하고, 결혼하고, 시드니로 오게 되는 것을 비롯하여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이 심각한 갈등과 고민을 통해 이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작아 보이는 일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들이 ‘나비효과’를 가져와 큰 결과를 가져오고, 인생의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는 그의 고백이었고, 간증이었다.

시드니에 첫발을 디디게 된 것도 ‘작은 공고문’ 하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89년 경찰에 임용되고, 2005년에 총경으로 승진했다. 경찰대학 5기생으로 5년 전에 총경 승진한 것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총경으로 승진하지 못한 선배들이 즐비한 현실에 비춰보면 ‘승진 KTX'를 탄 것이나 다름없다. KTX 속에서 그는 바깥구경을 하다 해외 주재관 모집공고를 본 것이다.

“마침 시드니에 자리가 있었습니다. 경찰 업무만 맡다보니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국내업무만 아닌, 재외국민 7백만 시대에 재외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유학차 가본 경험이 있어서, 가본 경험이 없는 시드니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2006년 2월 16일, ‘호주의 대한민국 첫 경찰주재관’의 테이프를 끊었다.

“첫 주재관이란 사명감은 항상 기쁨이면서 부담이었습니다. 초석을 잘 놓아야 조직에 누가 안되고, 시드니 총영사관 내에 자리를 잘 잡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시작했습니다.”

 
▲ 바쁜 공무중에도 불구하고 시드니 14기 두란노 아버지학교에 참가한 이봉행 영사가 찬양하며 율동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그는 부임하자마자 의미 깊은 일을 맡아 동분서주해야 했다.

“제가 부임과 동시에 호주 연방경찰(AFP)과 대한민국경찰청이 MOU를 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2006년 6월, 캔버라에서 당시 이택순 경찰청장과 마이클 조셉 킬티 호주 연방경찰청장과 MOU를 체결한 것을 의미있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호주 교민의 수가 12만 명인데, 그 중에 4만 명이 워홀러들입니다.

제가 처음 호주에 올 때 교민이 75,000~80,000명에서 급증한 것이지요. 그 중에 75%가 시드니 중심의 NSW에 거주합니다. 특히 워홀러들의 급증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들은 언어가 서툴고, 문화차이, 잦은 이동성, 익명성의 보장으로 사건 사고에 많이 관여됩니다. 피해자도 속출하고 말입니다. 이런 때에 호주경찰과 MOU를 맺어 법집행기관 간에 교류 협력체제를 구축한 것은 재외국민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정치, 경제, 문화, 체육 쪽에서만 교류가 이루어졌던 것에서 한 단계 높아진 것이지요.”

또 재임기간 중에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세 차례(노무현 대통령 2회, 이명박 대통령 1회)나 치러내기도 했다.

그는 서울 경찰청 근무 당시 신우회장을 할 정도로 언제 어디에서나 신앙의 색채가 강한 ‘원색적인 크리스찬’이었다. 그만큼 시드니 초대 경찰영사로서 ‘크리스찬이란 거룩한 부담감’이 있었다고 하였다.

 
사건과 함께, 교회와 더불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제가 크리스찬인 것을 알고 있으니 그만큼 조심스러웠습니다. 임기를 마치면서 크리스찬으로서 많은 교회들에게 사랑의 빚을 진 게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호주가 남한의 77배이고, 우리 교민들은 케언즈나 노던 테리토리까지 호주 전 지역에 다 퍼져 계십니다. 저희 관공서 손길은 NSW주 중심으로 움직이기 쉽고, 그런 오지에서 사건 사고가 나면 미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지역에 따라서 한인회 등에서 역할을 대행해 주는 시스템도 있지만, 오지에는 한인회조차 없습니다.
 
 
▲ “사람과 사건!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함수관계를 가진 이 현장에서 인간의 죄악성을 리얼하게 경험하게 된다는 이봉행 영사     © 크리스찬리뷰

그런데 그런 오지에도 선교사님들이나 교회는 있어요. 그런 곳에서 큰 사고가 나면 초기 대응이 참 어렵습니다. 이때 교회와 선교사님들과 네트워크가 되어 일을 처리하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숙식을 제공하고, 심지어 장례까지 치러주는 등 눈물겨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항상 사건 현장에서 교민들, 유학생들과 함께 울고 웃어야 했다. 사람이 있는 곳엔 항상 사고가 있고, 사건이 터지기 마련이다. 한국에서든 호주에서든 당연히 겪는 일이고, 세상에서도 교회에서도 예외 없이 겪는 일이다. 그가 시드니에서 4년 동안 처리한 사건만 1,100여 건이나 되었다. 첫해 170여 건, 이듬해 275 건, 3년째 365 건, 그리고 작년엔 333건을 처리했으니 하루 평균 한 건 꼴로 사건, 사고가 터진 셈이다. 그 중에 사망 사고가 작년에 22건을 비롯해, 그가 재임하는 동안 총 65건을 처리해야 했다. 여기서 그는 의미깊은 말을 했다.

“일반적으로 외교관의 신분상 특성은 주재국의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하이클래스를 많이 상대합니다. 같은 영사이면서 저는 90% 이상 범죄자, 피해자, 사고를 당한 사람, 부랑아가 된 사람, 더 이상 오갈 데가 없어 찾아온 사람들이니 각종 사고와 각종 불행의 요소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면 강퍅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정신이상자처럼 밤에 반복적으로 전화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다른 중요한 영사 업무도 많은데 경찰영사의 경우 대부분 리스크 매니저먼트로 스트레스 레벨이 높은 업무입니다. 본질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지요. 그분들을 감사로 받아들였습니다. 가장 낮고, 힘들고, 어렵고, 돈 없고, 죄 짓고, 불행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일이지요.

가장 존엄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 분들이 바로 그런 분들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리얼 크리스찬으로서 저런 사람들과 함께 가고, 도와주고, 그들을 통해 저 자신이 성숙해지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제 업무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가장 성경적인 일이란 열린 마음으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리한 몇 사건만 보아도 참으로 기구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아파해야 했던 그의 따뜻한 마음이 엿보인다.

 
사람과 사건

 “2006년 말, 성매매 여성이 시드니의 호텔형 아파트에서 목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불법 체류자였고요. 부친은 한국의 대형 교회에 출석한 적이 있고, 큰 음식점 프랜차이즈를 하다 파산했습니다. 생계형 성매매였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 여성이 ‘선불금 사기’를 몇 번이나 치고, 이곳까지 와서 오게 되었습니다. ‘성매매, 불법체류’ 여성이 외국 땅에서 당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조건 두 가지를 갖춘 것입니다.
 
 
▲ 지난 2월 25일 본국으로 귀국한 이봉행 영사는 충주에 있는 중앙경찰학교 교무과장으로 부임했다.     © 크리스찬리뷰

영주권을 위해 베트남 남자와 결혼했지만 잘 안됐습니다. 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만 자살해 버렸습니다. 한국의 부모님들에게 연락해도 너무 가난해 올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뜻있는 분들에게 연락해 보니 마침 부친의 친구가 울릉공 순복음교회 김수경 목사님 남편이었습니다. 목사님 내외분과 저, 이렇게 셋이서 장례를 치르고, 화장하여 한국으로 보내 드렸습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그 여성은 미스코리아감이라 할 정도로 워낙에 예쁘고 매력적인 인물의 27세 여성이었다고 한다. 참으로 한 많은 ‘한국의 딸!’ 자칫하면 외국 땅에서 잊혀질 뻔했던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자리에서 예배도 드리고, 따뜻하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또 한 케이스는 공부하러 왔다가 학자금을 도박으로 다 날리고 역시 불법체류가 된 32세의 남학생이다.

“가족들이 5년 동안 못만났으니 실종으로 처리된 케이스입니다. 이 친구를 2년간 추적하여 건설현장에서 찾아냈습니다. 집으로 돌려보내 새로운 인생을 살게해 줬는데, 집에서는 죽은 자식 찾은 것처럼 기뻐해요. 한 사람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하는 계기가 된 의미있는 경우입니다.”

작년에는 호주, 한국 언론에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다. 뉴턴 농장에서 남녀 워킹홀리데이 학생이 밤새도록 술 마시고 차를 몰고 가다 익사한 사건이다.

“둘 다 결손 가정으로 아픔이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 아픔을 술과 이성으로 발산하다 처참하게 죽음을 맞은 사건입니다.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운 사건인데, 특히 남학생의 경우 지방 교회에서 사찰로 일하는 홀어머니의 마지막 희망과 같은 외동아들이었습니다.

그 어머니 역시 경제여건상 올 수 없는 여건이었습니다. 장례식을 치러줘야겠다는 감동이 왔습니다. 알고 지내던 교민 기업인에게 부탁드려 그분이 장례비를 전액 부담하시고, 유가족 체류비까지 신경 써주시고, 교회의 도움으로 큰 위로를 해드렸습니다.”

사람과 사건!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함수관계를 가진 이 현장에서 그는 인간의 죄악성을 리얼하게 경험한다.

“제 업무는 경우에 따라서 범죄자들이 죄의 대가를 지불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복지행정보다는 규제행정에 관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때 어떤 범죄자들은 자기 이익이 침해되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반격해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때로는 친분있는 ‘유력자’들을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경우도 있고 말입니다.

특히 성매매 브로커들은 그런 ‘유력자’들과 카르텔처럼 친분관계로 진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조작하고, 신분을 세탁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라면 제가 가진 직무권한으로 진실을 낱낱이 파헤치고, 정의를 세울 수 있지만, 외국에서는 수사권한이 없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낮은 곳에서의 섬김

그는 크리스찬으로서 재외 근무 의미가, 한국에서는 직무환경이 다른 것을 통해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직접 민원인들을 대하고, 민원인의 아픔과 고통을 뼈저리게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만일 한국에 있었다면, 경찰서장을 할 것인데 그러면 함께 일하는 많은 직원이 있습니다. 업무환경이 여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요. 그렇지만 여기서는 직접 민원인을 만나고, 현장에 같이 가서 아픔도 같이 하면서 페이퍼 워크도 해야 합니다. 밤에 퇴근해서도 수없이 걸려오는 민원전화를 처리해야 하고, 그런 중에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더 낮고 낮은 곳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느끼고, 그렇게 했더니 낮은 곳에서의 섬김, 그것보다 더 큰 행복과 축복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를 총경으로 승진시켜준 당시 허준영 경찰청장에게 “제가 승진한 것은 제 명예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저보다 더 낮은 사람을 위해 사용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한 것을 상기하며, 시드니에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기쁘다고 하였다.

이런 ‘낮은 곳에서의 섬김’을 통해 그는 작년도에 재외동포신문이 전세계 동포사회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영사 6백 명을 대상으로 현지 동포사회 추천으로 선정하여 주는 ‘발로 뛰는 영사상’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1,2차 심사와 내부 검증 작업을 거쳐 최종 9명이 오른 그는 손선홍 독일 본 영사와 함께 제 5회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수상 이유는 “사건 사고가 많은 호주 한인동포 사회를 위해 자신의 휴일을 반납할 뿐만 아니라, 주로 어려운 동포들을 위해 헌신한 점이 인정됐다”고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앞서 밝힌 어느모로 보나 ‘모범생 이미지’를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아니 이제는 이미지가 아닌 실상으로서의 ‘모범 경찰, 모범 영사’인 그의 모습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발로 뛰는 영사상’의 심사위원들(조남철 방송통신대 교수, 이광규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유재건 전 국회의원, 조항록 상명대 교수, 이효정 세계한인 유권자 총연합회 여성부 대표 등)의 면면을 볼 때 객관성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시드니에서 1막 2장의 세월을 보낸 그는 이제 귀국하여 충주에 있는 중앙경찰학교 교무과장으로 부임했다. 이곳은 본청 직속의 신임순경과 전의경 교육기관이다. 학교의 3대 골격인 총무과(행정지원), 교무과, 학생과 중 가장 중추적인 학생들의 학사일정관리, 교수 요원들이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도록 관리·지도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고 하였다.

“한 나라의 미래가 교육에 달렸듯이, 경찰의 미래도 신임경찰의 교육에 달려있습니다. 95~97년도에 그곳에서 교수 요원으로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그곳으로 가게 되니 기쁨과 기대도 있지만 동시에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이 있습니다. 먼저 성경적 원리로 제 마음의 밭을 깨끗이 하고, 모범이 되는 삶으로 확실히 교수요원들에게 본이 되고,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불신자 가정의 ‘쉰둥이’로 출생하여 공부 하나는 모범생답게 잘해낸 그는 형들에게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하던 때 담임교사가 경찰대학 원서를 써주며 가라고 하여 자의반 타의반이 아닌, 타의가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한 채 경찰대학에 입학한 것이 인생의 첫 전환점이라고 하였다.

두 번째는 25세 때, ‘장로, 권사 집안’ 출신의 한 여성을 만나면서, 그 여성이 신앙이 없으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완고함에 이끌려 순전히 타의로 교회 출석하여 신앙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 시작했다.

특히 가치관이 바뀌었다고 하였다. 좋은 일에 타의로 이끌림을 받을 때 거부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온유함’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본인은 정작 인식하지 못하는지, “중요한 일은 항상 크게 생각없이 이루어지더군요”라고, 다소 싱겁게 한 마디 하던 그의 모습이 4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름다운 삽화로 남아 있다.〠

 

글/송기태 (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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