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사회는 역사의 두 수레바퀴입니다

서울 연동교회 이성희 담임목사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6/07/25 [11:22]
▲ 크리스찬리뷰 1916년 8월 커버 페이지      © 크리스찬리뷰

이성희 목사, 그에 대하여 한 문장으로 소개하기가 퍽 어렵다. '신학과 영성을 겸비한 목회자' '교회 미래학자' '세계에서 유일하게 신구약 성경전권과 외경을 주석한 이상근 목사의 차남' '서울의 심장부 종로 한복판 122년 역사 교회의 담임목사' '탁월한 저술가' 외에 그가 맡고 있는 굴지의 단체장을 붙이면 나열하기조차 힘들 정도이다. 그만큼 그의 경륜과 영성, 그리고 지식과 저술은 한국교회를 견인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소나기를 훑고 간 햇살이 이 목사의 은빛머리를 기막히게 반짝이게 했다. 은빛머리 아래 안광(葭ホテ)은 그의 지성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를 은은하게 비춰주었다. 신앙의 명가에서 출생하여 유서 깊은 '명품' 교회와 행복한 목회를 해오며 은퇴를 2년 앞두고 있는 그를 대하니 한 시대의 전환점에 서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그의 신앙의 뿌리는 선교사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초기 선교사들이 큰 영향을 받고 그 선교사들이 세운  평양신학교 출신인 선친이 그의 신앙의 모태라면, 그 선교사들이 세운 연동교회는 그의 현재이다. 그가 연동교회를 통하여 사회로 파송하는 무수한 성도들은 또한 미래이기도 하다.
▲ 서울 연동교회 담임 이성희 목사는 현재 예장 통합측 부총회장으로 차기 총회(9월)에서 총회장으로 추대된다.     © 크리스찬리뷰

돈보다 더 좋은 것
 
먼저 그의 신앙의 모태를 살짝이라도 들여다 볼 필요를 느낀다.
 
“아버님의 삶을 통하여 사람이 사는 모습, 목회자의 삶을 배웠습니다. 아버님은 평생 살아가는 모습이 똑같았습니다. 항상 저녁 9시에 주무시고, 새벽 3시에 일어나셔서 주석 글을 쓰시다가 새벽기도 나가시고, 아침식사 하시고 심방이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다시 교회서 집필하셨습니다. 그렇게 반복하시니 사람은 당연히 그렇게 사는 줄 알았고, 우리 집은 자연히 밤 9시가 통금시간이었습니다.

평생 아버님은 잔소리 안하시고, 이것 해라 저것 해라, 일류학교 가라 이런 잔소리 안하셨습니다. 꼭 필요한 말만 하시는 분이었고, 말씀을 절제하시며, 말씀 많이 안하셨습니다.”
 
▲ 조선 말기인 1894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마삼열이 세운 연동교회는 1900년에 제임스 게일이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해 왔고, 교회는 1907년에 설립됐다.     © 사색의향기

신앙 명문가답게 유산도 특이했다. 유형자산이 아닌 무형자산이었다.
 
“제가 미국에서 박사과정 공부 시작할 때, 1985년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1945년 목사안수 받으셨는데, 목사안수 성역 40주년 맞이하셨습니다. 그때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치셨습니다. 은퇴한 목회자를 위한 원로원을 설립하는 기금으로 바치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 쓰신 주석서들이 많이 팔려 인세가 들어올 때마다 땅을 조금씩 사두었던 것과 저희가 살던 집이었습니다.
 
아버님의 마음은 그 재산 대부분이 전국의 교역자들이 주석을 사주셔서 들어온 돈이니 교역자들의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러니까 교역자들에게 돌려 드려 그분들의 노후를 위해 쓰이게 하자는 뜻이었지요.
 
물론 당시 저도 유학생 시절이라 돈이 많이 필요할 때 바치셨습니다. 저로서는 유산 한 푼 받지 못했지만, 그렇게 바치는 것, 대단히 감사했습니다. 돈보다 더 좋은  신앙 유산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종자돈으로 바치자  대구제일교회에서는 대구기독교원로원으로 3층짜리 아파트를 잘 지어 관리하고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사시니 높게는 못 지었습니다, 지금 20여 가정이 살고 계십니다.”
 
▲ 생전의 이상근 목사(오른쪽)와 아들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 그는 "사람은 저녁 9시에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하는 줄 알았다"며 아버지를 삶과 습관, 글쓰기, 목회와 설교의 멘토로 꼽았다.     © 국민일보

이 목사의 말을 듣고 보니 그의 가정은 청빈과 깊은 영성으로 둘러싸인 수도원 같은 이미지가 그려졌다. 
 
“아버님은 항상 깊은 사고를 하셨고, 말을 아끼셨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있었습니다. 바다보다는 산을 좋아하셨고, 산에 가시면 홀로 하늘과 나무와 개울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시곤 하셨습니다.
 
특히 개울물 흐르는 소리를 좋아하셨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의 영혼에도 늘 고요히 흐르는 물이 있었습니다. 침묵과 묵상은 아버님의 일과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깊이 듣는 삶을 사셨고, 말하기보다 듣기를 충실히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설교 준비는 언제 끝납니까?’라는 질문에는 어김없이 ‘설교가 끝날 때에 설교 준비도 끝나지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설교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끝날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므로 설교가 끝날 때까지 설교 준비는 계속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의 삶은 한없이 가난하였지만 한없이 풍요로웠습니다. 아버님이 처음 주석을 쓰기 시작하실 무렵 쓰고 남은 종이의 이면지가 원고지였습니다.  식사는 호화롭지 않은 소식(盒聨)이었고, 어릴 때 우리 형제들의 밥을 손수 비벼주시는 밥상의 주인이셨습니다.
 
아버님은 침묵과 묵상으로 사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목적지향적인 삶을 사셨습다. 외경 주석까지 다 쓰셨으니까요, 이렇게 집필하신 경우는 세계에서 유일합니다, 그 정도로 목표지향적인 삶을 사신 것을 보고 자랐기에 알게 모르게 배웠습니다.”  
 
▲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 가입을 둘러싼 의견 대립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으로 갈라졌다. 그 후 양쪽을 화합하려는 중재안은 실패로 돌아갔고 연동 측은 1960년 2월 17일에 첫번째 통합총회를 개회했다.

선친에 대한 강한 기억은 또 있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에 아버님이 서울 어느 교회에서 목회자 세미나 강사로 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는 남성의 헤어스타일이 장발일 때였습니다. 짧은 머리가 간첩의 상징이었을 때였지요. 어느 목사님이 아버님께 질문하셨습니다. ‘목사님, 목회자의 머리카락이 길면 장발이라 하고, 짧으면 간첩이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로 길러야 합니까?’ 지금 제가 생각해도 참 애매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잠시 묵상 후 이렇게 대답하시더군요.
 
‘목회자의 머리카락은 교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의 길이여야 합니다. 목회자의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옷이나 모든 것이 교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목사님의 말씀 외에 어떤 것도 교인의 관심을 끌어서는 안됩니다. 목사님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머리카락 길이가 어느 정도인지 전혀 교인에게 기억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이것은 아버님의 삶 그 자체였고, 간증이기도 합니다.”
 
그 부친에 모친의 가정교육과 뿌리 깊은 영성도 만만치 않았다.
 
“제가 어릴 때 가장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1953년도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미국유학을 가셨습니다. 전쟁 중 무지하게 가난한 시절이었지요. 한번은 어머님이 저에게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인데, 심부름을 하면서 돈을 떼먹고, 뭘 사먹고 왔습니다. 어머님께 값이 올랐더라면서 잔돈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님은 수건으로 본인 목을 조르며 ‘내가 죽어야지, 죽어야지"하면서 죽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아버님은 안계시고 어머님 돌아가시면 큰일이다.'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때 죽어야지 하는 어머님 92세로 아직도 살아계십니다. 아버님은 잔소리 한 마디 안하셨고 가정교육은 어머님이 다 하십니다. 제가 대학 졸업 후 15년 공부했는데, 단 1분도 주일에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어머님이 ‘주일에 공부하는 것 아니다.'라고 어머니는 가정교육을 철저히 하셨습니다.” 
 
▲ 호주한인기독교연구소가 개최한 제9회 시드니신학포럼에 주강사로 참석한 이성희 목사(앞줄 오른쪽 4번째)가 폐회예배 후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 크리스찬리뷰

마지막 효도
 
이렇게 그에겐 신앙의 멘토이자 사표였던 선친과의 ‘특별한 시간' ‘특별한 대화'도 찡한 감동을 준다.
 
“아버님은 소천하시기 1년 전부터 뇌종양으로 투병생활을 하셨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서 살고 있다 보니 아버님 곁에서 효도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병상에 계시는 1년 동안 열심히 대구에 드나들면서 아버님을 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효도할 시간을 주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병상에 누워계시도록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상에 계시면서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해주셨습니다. 병상에 계신지 5개월쯤 때부터 여러 번 천국을 경험하셨습니다. 한번은 제가 병원에 갔더니 아버님께서 천국에 가서 바울과 루터를 봤다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칼빈주의자인데 어떻게 루터는 보시고 칼빈은 못보셨습니까?’했더니 웃기만 하시고 대답은 안하세요. 계속해서 ‘아버지 예수님은 보셨습니까?’했더니 ‘못봤다'하세요, 제가 웃으며 ‘아버님, 다른데 다녀오셨네요'했더니 크게 웃으시더군요. 아버님과 저는 이런 가벼운 유머도 나누었습니다.
 
또 한번 천국을 보신 말씀을 해주셨어요. 계시록에 기록된 바로 그 광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아름다운 시내가 있고, 갖가지 실과들이 주렁주렁 열려있고, 감미로운 노래가 있는 곳이라고 하시면서 너무너무 좋은 곳이란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여쭈었지요
 
‘아버님, 그렇게 좋은 곳인데 지금 가고 싶으십니까?’ 그러자 ‘아니, 더 있다 갈란다. 천국이 아무리 좋아도 죽음은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숙제다.'하시는 거예요. 전 아버님의 솔직한 대답에 깊이 감동하였습니다.
 
뇌종양은 굉장히 아프다고 하는데, 아버님은 병상에 계시면서 단 한 번도 아프다거나 찡그린 적이 없으셨습니다. 아버님이 가족들을 위해 참고 계셨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선친과의 마지막 1년을 생각하면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고 회상했다.
 
“아버님과의 마지막 1년은 하나님과 또 다른 교제의 시간이었고, 이전에 맛보지 못한 영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가 천국이었고, 부활 후 40일간의 가르침이 천국이었고, 우리 모두의 믿음의 열매가 천국이지 않습니까? 아버님은 글로 천국을 쓰셨고, 말로 천국을 설교하셨고, 삶으로 천국을 건설하셨고, 마지막 병상에서 천국을 증언하신 것이지요.”
 
▲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에 위치한 연동교회 전경.     © 진흥

역사, 교회, 사회
 
평생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성장한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외국에서 온 한국 선교사가 ‘젊은이들이 많이 선교사로 가서 일해야 한다'는 설교를 듣고, 소위 필이 꽂혔다. 나도 선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목사가 되었다고 했다.
 
“사실 아버님은 저에게 의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버님은 형이 장자로 목사가 되기를 원하셨는데, 형은 실험심리학자로 뉴욕에서 미 장로교회 장로서 뉴욕 노회장을 지내면서 미국교회와 한국교회들의 가교역할을 잘 담당하고 있습니다. 형은 목사가 안되고 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의예과 지망했다가 실패했는데, 그때 의예과 떨어진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모르긴 해도 아버님 건강이 상당히 약하셨기에 저에게 의사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은 덕 보시려고 하신 게 아닌가 합니다. 목사의 길을 아버지로서 당연히 생각하실 수 있는 것, 결과적으로 제가 의예과 떨어진 게 하나님 뜻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고자 할 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아 빌립보로 가지 않습니까? 만일 바울이 자기 고집대로 갔다면 하나님 뜻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의 영에 순종했더니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이 가장 열매가 많고 좋았습니다.”
 
연세대와 장신 신대원을 마치고, 풀러신학교에서 신학석사(M.Th.)와 목회학박사(D.Miin)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신학교에서 교회행정학으로 신학박사(S.T.D.)를 마친 그는 영락교회 팀목회자의 일원으로 행정목사(교회내 행정에서는 담임목사 역할)로 부임했다.
 
“당시 영락교회 임영수 목사님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제의하셨습니다. 저 외에도 김동호 목사님(교육목사)과 함께 팀목회하자고 하셔서 갔습니다. 그런데 한국적 상황에서 장로님들이 이해 못하니 힘들었습니다. 사실 임 목사는 처음 의도와 열매를 못맺었습니다.
 
서양처럼 수평적인 사회가 아닌 한국의 전형적인 관료적 수직적 사고를 가진 교회에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 실험들이 필요합니다. 더구나 대형교회는 전문성 시대에 공동목회, 전문화 목회가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저희는 실험으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영락교회 사역 이후 소위 기독교방송 등이 자리잡은 한국 기독교의 메카지역으로 일컫는 종로 5가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894년 세워진 연동교회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경번역가이자 최초의 한영사전 편찬자이며, 천로역정을 번역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한 캐나다 출신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 선교사가 초대 담임목사로, 설립 122주년을 맞은 교회이다. 
 
▲ 장신대 목요 채플에서 설교하는 이성희 목사.     © 장신대

“게일 선교사님이 1대 담임목사님이시고, 제가 6대 목회자입니다. 4분이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교단 총회장도 다 지내셨지요. 담임목사 봉직기간이 평균 20년 정도인데, 제가 만 27년째 섬기고 있으니 저도 5번째 원로목사 될 자격이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교회 역사와 담임목사 교체비율이 정비례하는 현실에 비춰보면 분명 연동교회는 담임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특별한 신뢰, 특별한 교회전통이 있는 듯했다. 교회의 평화가 선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교회 안에 신뢰와 평화와는 달리 외부의 도전은 거셌고, 거기에 대한 교회의 응전도 처절했다.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결코 침묵하기는커녕 최일선에서 선도했다. 
 
“우리 교회가 훌륭한 것은 일제 강점시대에 독립 항일 운동의 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기미독립선언문을 쓴 최남선, 헤이그밀사 사건의 이준 열사, 월남 이상재 선생, 그리고 삼일운동 33인 중에 최후의 생존자인 이갑성 선생, 삼일운동 당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정재용 선생이 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삼일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교회였습니다.
 
당시 배후에서 독립자금 모집하던 애국부인회 역시 99%가 우리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독립운동하다가 감옥 갔던 여성, 독립운동에 앞장선 교회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독재 시절엔 제 전임이신 김형태 목사님께서 교회가 평화통일 사회정의 운동의 대부로 활동하셨습니다. 정보부(안부)에도 다녀오신 분이지요. 그런 김 목사님께서 2주일 전에 소천하셨습니다.
 
제가 연동교회 부임한 것은 문민정부 막 들어설 때였습니다. 그때까지 교회가 갖고 있던 사회성을 사회복지와 사회봉사로 눈을 돌렸습니다. 개교회로서 복지법인과 재단을 갖고 있으며 사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사회복지를 잘 따라주십니다.”
 
‘연동교회'라는 상징적인 교회 담임목사 역할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드러난 교회인 만큼 정말 역할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교회가 생각한 것보다 비중이 한국교회에서 큽니다. 한편으로 부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보람입니다. 잘 이끌어가야 겠다는 생각 많이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사회에 사회적인 교회되어, 사회로부터 칭찬받고 사회로부터 명판 받은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시드니신학포럼에 열린 콜라로이 컨퍼런스 센타에서 강의를 마친 후 산책하는 이성희 목사.     © 크리스찬리뷰

요즘 ‘개혁'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개혁이란 쉽게 말하면 목적이 아니고, 하나의 수단이고 과정입니다. 2019년도는 3.1운동 100주년 종교개혁 500주년 되는 해입니다. 1919년도에는 삼일운동 교회가 민족운동의 주체였지 않습니까? 최근 한국교회는 사회로부터 비난받고 있는데 이끌어가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선 개혁되어야 합니다. 다시 교회가 민족으로부터 사랑받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사회는 역사의 두 수레바퀴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그는 목회자가 미래안목을 가지고 앞서가는 것, 교인들을 앞서가면서 이끌어가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저는 미래학 공부를 하다 보니 앞을 내다봅니다. 앞서가면서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을 많이 제공하려 애씁니다. 사회에서 칭찬받는 좋은 사회인으로서의 크리스찬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만 ‘주여, 할렐루야!’가 아니고 배타적인 것이 아닌 비난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칭찬받는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리더십이란 비전을 보여주는 업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비전을 성도들에게 심어주고 항상 미래를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 합니다. 목회자는 사회 변동에 민감해야 하며, 영적 안목으로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하며, 사회 변동에 대한 영성적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 서재에서 이성희목사     © 국민일보

한국교계를 생각하며
 
한국교계에 대한 담론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국 교계의 거룩한 변화와 새로운 성숙을 위한 안타까운 몸부림들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기복적이라는 자타의 비판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 기독교사에 나타난 한국 교회의 모습은 기복적이 아닙니다. 1960년대에 제3공화국이 출발하면서 국가의 기조는 가난에서의 탈피였고,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로 바뀌었습니다.
 
경제성장이 국가의 시책이 됨으로써 교회도 잘 살 수 있다, 부자가 되어야 한다로 바뀌었습니다. 이전까지 한국 교회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예수 믿고 천당'이 전도요, 설교의 핵심 주제였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다시 교회의 본질적 영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최근의 신경영 기법에 의하면 미래인들의 구매 심리는 국적이나 상표가 아니라 품질과 가격이라고 합니다. 어느 나라 제품인가를 따져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싸고 품질이 좋으면 국적에 관계없이 산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경향은 교회를 선택하는데도 상당히 주효하게 적용됩니다. 교인들의 교회 이전의 이유 가운데는 이사와 결혼이 가장 큰 이유이며, 거리가 그 다음이며 교단이 달라서 옮기는 교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미래 교회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할 것입니다. 교회의 영성적 품질이 우수하고 가기가 쉬우면 교단과 교파에 관계없이 교회를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교회는 교단이나 교파의 프리미엄보다 교회의 영성적 질을 우수하게 해야 합니다. 21세기는 목회 기술이 아니라 목회 영성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목회자의 영성은 미래 교회의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부총회장으로 차기 총회장인 그가, 총회장이 되면, 한국의 장차 교단 책임자로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종교개혁 500주년에 한국교회 개혁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입니다. 그동안 물량적, 금권적, 성장일변도에서 좀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관행적인 일들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총회의 물줄기를 바꿔놓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임기 때 삼일운동 당시 1600만 인구 중 기독교인은 불과 20만 명, 1.3%밖에 안되었는데도 민족운동을 주도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때처럼 민족운동을 주도할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혁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당면한 사회적인 과제, 즉 이단, 이슬람, 동성애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외면하면 안됩니다. 교회의 중심 사명, 교단장으로서 외면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아주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래 교회는 자기중심적 교회관에서 타자에 대한 관심으로 그 중심이 이동할 것이란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동안 교회의 관심은 교회성장이었고 선교는 개인영혼구원 혹은 교회성장이라는 제한적 의미를 가졌지만 정보 사회에서의 교회의 관심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본질적 물음으로 전환될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의 개념도 개인구원이라는 제한적 개념에서 개인구원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통전적 개념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새로운 변형의 시도는 사회봉사로 교회의 관심이 전환될 것입니다.
 
‘디아코니아'는 ‘케리그마'와 ‘코이노니아'와 더불어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기능과 교제하는 기능과 봉사하는 기능은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중요한 기능들입니다. 사회봉사를 뜻하는 ‘디아코니아'는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 용어 아닙니까? 신약성경에서 ‘디아코니아'란 음식을 제공하는 일이었으나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남을 섬기는 것 전체를 의미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디아코니아'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인 덕목이요 피할 수 없는 과제이며 사명입니다.”  
 
▲ 시드니신학포럼에 열린 콜라로이 컨퍼런스 센타에서 마지막 날 강의하는 이성희 목사.     © 크리스찬리뷰

시간 속에 사용하시는 분
 
사실 2010년도에 교단 부총회장에 떨어진 경험이 있다. 대형교회 담임목사로서 소위 ‘자존심' 상할 만한 사안이었다.
 
“그게 더 감사한 게 지금 되는 게 훨씬 유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 속에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분이기에 실패도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실패에 대해서는 고통스럽게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성공 같은 실패도 많고, 실패 같은 성공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지, 내 계획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는 2008년도에 장신대 총장으로 선임되어 취임식 날짜까지 잡힌 적도 있었지만 교회에서 완강하게 반대하여 뜻을 굽히기도 했다.
 
“제가 계속하여 장신대에서 겸임교수로 가르치고 있었으니, 교회와 목회를 잘 안다고 생각하여 이사회에서 저를 총장으로 선임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갈려고 했습니다. 갈 마음을 다 잡고, 당회에 이야기하니 교회에서 못가게 하여 못갔습니다. 성도들이 반대하는데 끝까지 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위임목사가 될 때 교인 3분의 2의 찬성이 있어야 하는데, 모든 교인들이 반대하면 떠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목회자의 가정에서 평생 목회자로 살아온 그는 결국 교회를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2년 반 정도 있으면, 즉  2018년도에는 29년 섬긴 교회에서 은퇴해야 한다. 은퇴 후에는 두 가지를 하고 싶다고 했다.
 
“먼저 수도원 하나 만들어 목회자 평신도들에게 영성훈련, 영성적 삶을 훈련하고 싶습니다. 현대는 영성에 대한 관심이 극대화된 영성시대입니다. 앨빈 토플러는 ‘제 5의 물결은 영성'이라고 할 만큼 영성에 대하여 미래학자들은 한결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성이란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숨결과 더불어 사는 삶입니다.
 
어거스틴은 영성을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영성이란 ‘그리스도와 일체된 삶'을 의미하며 기독교의 영적, 종교적 차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성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합니다.
 
메리랜드 대학의 정신의학자 아더 워윅은 ‘사람은 확실한 것, 안전한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을 갈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성도들이 영성을 상실하지 않을 뿐더러, 사회에 영성을 제공할 능력을 항상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고믿습니다.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건강한 영성을 제공하지 못하는 오늘 우리 시대에, 좋은 수도원을 만들어 사회에 대하여 영성의 제공자가 되고 싶습니다.
 
또 하나는 선교사 지망생이었다가 선교사는 못되고 목회자가 된 것에 ‘거룩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우리 교단에 순회선교사 제도 교단에 있습니다. 선교사가 안식년이나 병고로, 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등으로 본국에 왔을 때, 그 빈 선교지에 한두 달 지켜주고 선교사들이 본국에서 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선교지에 교회, 좋은 정보와 신학 내용을 제공하고 싶습니다.” 

▲ 이성희 목사는 미래 교회는 자기중심적 교회관에서 타자에 대한 관심으로 그 중심이 이동할 것이란 게 그의 지론이다.     © 국민일보

목회, 이민교회
 
한국교회에서 전통적인 대형교회에서 탁월한 리더십으로 구설수는커녕 절대적인 성도들의 지지 속에서 목회해온 그는 목회의 기쁨과 고통을 들려주었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불신자가 믿고 고통 가운데서 즐거워하고, 말씀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 목회의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목회의 고통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상심하고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목회란 한 마디로 ‘사람 만드는 것'이라고도 했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것을 재창조하는 것, 영적으로 다시 바꿔주는 것"이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목회자는 머슴"이라고도 했다, "사실은 하나님의 머슴인데 사람에게도 머슴이면 좋습니다. 하나님의 머슴들이 사람들에게 왕노릇하다가 실패합니다"라고 경고했다.
 
그에게 신앙이란 한마디로 ‘맡기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알아서 하십시오.'하는 것이 신앙이지요.”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말은 “너무 성공주의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자기관리에 충실하고, 행복한 목회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가 행복하지 못한 목회자가 많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등 고전읽기를 강권했다. 영성책도 고전부터 읽으면 좋다고 하였다.
 
미국 이민교회의 경험이 있는 그는 디아스포라 한인 이민자에 대하여도 한없이 따듯한 말을 했다.
 
“현재 세계에 우리 한민족이 가장 많이 흩어져 있습니다. 172개국에 750만 디아스포라이지요, 유대인은 120개국에, 중국은 100개국에 4천만 정도 됩니다. 우리는 디아스포라 민족입니다. 디아스포라 본토에 돌아간 민족보다 굉장한 분들입니다.
 
기독교역사적으로도 70인역 번역 등에서 보듯이 디아스포라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지요, 세계선교의 관점에서 볼 때, 1.5세 2세들은 영어도 잘하고, 열정만 있다면 이민 교회들이 한국의 모교회보다 선교적인 역량이 훨씬 큽니다. 그리고 이민 사회마다 한인 신학교들이 있는데, 이민신학도 체계화할 때가 왔습니다. 서구권에서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독특한 민족성으로 발전시켜, 한국신학을 세계화하는데 훨씬 유리한 것이 한인 신학교이고 교회입니다.”  
 
▲ 본지와 인터뷰를 마치면서 이성희 목사는 “호주에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겨라"며 “호주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다。"라며 밝게 웃었다.     © 크리스찬리뷰

호주 교민들에게 격려도 잊지 않았다.
 
“호주는 올 때마다 참 좋습니다. 호주에 사는 것을 행복하게 여기십시오, 세계에서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 10대 도시 중에 호주의 6개 도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 좋은 도시들입니다.
 
호주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세계화시대에 이민자로 산다는 것이 방문객, 여행자가 아니고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이 중요한 사고입니다. 남의 땅 빌려 사는 것이 아니라 내 땅 하나님 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동사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