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망명자들

이안 패커/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6/07/25 [14:34]
이민, 차이 그리고 차별에 관한 지속되는 논쟁이 있다. 이 논쟁들은 난민들과 망명자들에 관한 논쟁에서 과열된 양상을 띠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 사안이 복잡하다고 인식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사안에 대해 우선순위를 가질 필요가 있다. 단 한 가지만이 중요성을 갖지 않을지라도 어떤 것이 우선순위를 갖는가?

  - 동정 혹은 긍휼
  - 안
  - 법과 질서
  - 국가의 안전 보장
  - 적당한 법적 절차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만약 기독교 윤리학이 주류문화의 관점으로 형성되지 않고, 당황시키는 반응으로 세상을 자극시킨다면, 기독교 윤리학은 이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망명자들이 불법적이지 않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합법적이며 그것은 호주가 국제협약들에 서명한 것에 기초하며 그것은 국제법과 유엔협약(United Nations Conventions)을 고수하는 일이다. 게다가 입국에 관한 의미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시민 불복종의 역사(a history of civil disobedience) 혹은 더 높은 법과 질서에 관한 도덕적 의무를 따르는 것(예를 들어, 본 회퍼와 독일 밖으로 유대인들을 구출한 일들),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 세계에 그리스도인의 경험들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권력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연약한 자들의 향한 정치적 남용에 관해 의심을 품어야 한다. 
 
망명자 문제를 정치화시키는 것은 비평을 위해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표명 특별히 도덕적 입장표명의 심각성을 인식해야 한다. ‘망명자들을 향해 의심’(suspected asylum seeker)이라는 언어적 부패는 도덕적으로 해로운 결과를 초래한다. 미디어는 대중적 선호도와 정치의 권력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
 
공동체는 그것의 ‘경계’(제한이 있는 집합, bounded set)를 설정하는 것에 의해 정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 통일된 중심 (중심 집합, centred set) 에 의해 정의할 수 있다. 누가 우리의 경계를 넘나드는지에 관한 염려가 있을 지라도, 우리는 국가의 반응과 정신(ethos)의 특징과 관련된 변화에 대해 염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혜에 기초한 접근, 즉 그들의 삶과 선교를 형성하기 위한 접근을 전형으로 보여야 하는 것과 공표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Q & A’로 풀어 본 결론

- 백호주의가 없어지게 된 특별한 계기나 사건이 있었나?
 
“아니다. 역사적 흐름 안에서 영국과 호주가 분리되는 과정 가운데 한 총리의 영웅적 결정 및 경제 정책 등의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결정된 것이다.”
 
- 호주 이민 신청 대기자만 백만 명이라는 얘기가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망명과 이민의 허가에 일관성 있는 정책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매우 문이 좁아졌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혜택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동질감이나 친밀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배려를 하기 원한다.
 
그러나 선교의 역사에서 볼 때, 선교사가 좋은 대접받았다고 역사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호의를 베풀고, 무슬림들에게는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이 반드시 옳다고만 볼 수 없다. 오늘의 무슬림이 내일의 크리스찬일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땅을 선교지 삼아 복음화시키는 것을 우리의 사명이라고 볼 때 이민 정책 역시 영적 책임감을 가지고 결정을 내려야 할 부분이다.”
 
- 호주는 언제쯤 공화제가 될까?
 
“공화국이 되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본다. 하지만 10-2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마도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후가 될 것이다.”
 
- 무슬림들이 너무 과격해져 가고 있으며, 호주는 물론 한국에서도 무슬림들의 예배처소가 점점 늘어간다. 이들에 대한 복음전도도 어렵고, 오히려 그들의 종교심이 더 강하다. 그들의 존재가 우리의 삶에 위협이 되고, 두려움마저 느낄 때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놓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무슬림을 구원하시길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무슬림보다 강하신가, 약하신가?’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한계는 어디인가?’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 중에 하나가 단기 선교를 가면 안전하고, 장기 선교를 가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먼 곳의 선교만을 선교라 생각하고, 가까운 곳의 선교는 선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 먼 곳의 선교는 지지하면서 내 이웃의 선교는 반대하는가? 이와 똑같은 생각으로 백인들이 자기 주변의 흑인, 유색인종을 차별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받을 심판의 기준을 생각해야 한다. 무슬림들에게 느끼는 위협감과 두려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선교의 사명이 있어야 한다.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백인들이 선교 역사에 있어서 반복했던 오류들을 우리 역시 반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그들이 강하고 선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보다 약하신가? 교회는 핍박 없이 성장한 적이 없다. 선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그 피 흘리는 선교사가 나와 내 가족이라면 반대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을 솔직히 하나님께 고백하고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 산을 저리로 옮길 수 있는 믿음을 말이다. 실천하기 어려운 부분에서 우리가 멈춘다면 사람들로부터 동정을 받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할 말이 없다.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고백하고 또 고백해서 우리의 믿음을 다져가야 한다.
 
무슬림의 기도처들이 계속 늘어갈 때마다 두려움이 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무슬림에 대한 두려움이 크지만, 그들을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다면 의외로 놀랄 것이다. 정과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우리가 선교를 안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우리에게 보내시겠는가?
 
런던에서 거의 하루에 하나씩 영국 성공회교회가 문을 닫을 때마다 3개의 교회가 새로 개척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개척 교회의 상당수가 이민자들 그중에서도 아프리카 이민자들, 그중에서도 상당수가 북부 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이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놀랄 일이 아닌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여러 가지 선교적으로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우리가 이를 바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 우리가 느끼고 있는 두려움, 우리가 갖고 있는 선교의 사명, 우리가 무작정 다 허용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강경파 무슬림들의 테러적 행위 등에 대해 우리가 어떤 입장을 갖고 대응해야 하는가?
 
“우리가 중요하게 구분할 것은 호주의 난민 신청자들은 대부분이 무슬림 국가에서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 무슬림 국가에서 핍박받은 사람들이다. 일단 이런 무슬림들에 국한하여 먼저 답을 하겠다.
 
이 문제를 잘 다루려면 왜 무슬림들이 호주에 오기 원하는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들이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떤 문제로부터 도망하려는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호주라는 나라에서 긍정적 부분을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긍정적인 부분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해 볼 수 있다.
 
첫째, 그들이 얻고 나누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둘째, 그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포기하고 변화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것에 기초해서 우리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들은 무슬림 사원을 짓기 원한다. 그곳에서 신앙생활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우리의 질문은 그 사원, 건물형태, 신앙행태가 우리의 동네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 같은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편으로는 종교의 자유 인정하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부분에서 너무 순진(naive)해서는 안된다. 그 사원이 신앙 생활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그 사원을 중심으로 극단주의자들도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를 해야 한다.
 
하나는 그들을 환영해야 한다. 거절하면 그들은 더 강경해지고, 자신들끼리 뭉쳐 극단주의자들이 될 것이다. 또 하나는 그들을 잘 감시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안보정책상 정부 차원에서 이미 그들 중에 강경파들에게 대한 감시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개인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무슬림을 배척하면 그들끼리 뭉쳐 우리를 대적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슬림을 배척하고 반대해서 무슬림이 그리스도인들이 된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사랑하고 친구로 삼아줘서 이란에서 온 강경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본 적이 있다. “
 
- 호주교회의 어느 담임목사가 교회를 무슬림에 빌려주었다. 무슬림도 우리 형제이고, 같이 대화해야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가 한국 사람은 잘 이해가 안된다. 호주 교단에는 어떤 일관된 입장이 있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내 양심을 따르는 것보다는 내 양심을 비판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어떤 일괄적인 원리보다는 사안별로(case by case) 보아야 한다. 만약 유대인들이 교회를 빌리기 원하면 우리는 우호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임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임을 부정하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발언을 한다면 그것 역시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지 않은가?
 
또 한편으로 우리가 교회만 성스러운 곳으로 여기는 것도 문제다. 하나님은 어떤 공간에 가두어 둘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전 세계가 하나님의 공간이므로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는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전에 목적, 어떤 내용, 무엇을 믿는가 등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등의 질문을 통해 그 상황을 선교적 기회를 삼아야 할 것이다.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고 건물 역시 우리가 보호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특정 그룹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용하기를 원하는가를 대화를 통하여 알아보면서 선교적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령 이단이 교회를 빌려 예배하려 하는데, 그 이단이 예수님의 부활을 거부할 때, 그들이 예배드리는 것을 당연히 허용할 수는 없다. 무슬림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건물을 빌리려 하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 우리의 ‘형제자매’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우리는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
 
“첫째는 양쪽 다 타협을 해야 한다. 기독교와 무슬림 모두 같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황금률(Golden Rule)을 적용해야 한다. 내가 그들에게 반대하는 것은 그들도 반대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허용하는 것은 그들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호주는 세속화된 국가이다. 그리스도인도 소수이고, 무슬림도 소수이다. 양쪽 다 다수는 아니므로 소수끼리 어떻게 타협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소수 민족으로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와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허락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만큼 우리도 허락받을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기도로 수업을 시작하는 것을 멈추었는데,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주장이 미국 남부에서 거세게 주장되고 있다. 지금 현재 미국 남부는 백인들이 다수이며 기독교가 강세다. 그런데 미국 이민정책상 타종교인이 많다. 따라서 공립학교에서 기독교의 기도가 규정(rule)으로 정해지는 것은 반대한다. 그것이 신앙의 자유라는 것을 공통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계속>

이안 팩커(Rev. Ian Packer)|몰링 칼리지 교수(사회윤리학), 호주복음주의연맹(Australian Evangelical Alliance) 공공신학분과위원장으로 8년 동안 섬겼으며, ‘기독교와 사회복음주의센터 - Ethos' 부회장으로도 일했다.

번역/권순영, 김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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