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삶은 변증법이다
 
김환기/크리스찬리뷰
선교를 가면 선교 간 사람이 더 많은 은혜를 받는다. 왜 그럴까? '앎과 삶'은 변증법적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아는 4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 말씀 읽기(Reading), 둘째 말씀 묵상(Meditation), 셋째 말씀 기도(Praying), 넷째 말씀으로 생활하는 '말씀 관상'(Contemplation)이다.
  
관상(觀想)이란 문자 그대로를 해석하면 “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라틴어 contemplatio에서 유래된 것으로 ‘실체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 즉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삶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앎의 완성은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구약에서 '알다'란 단어는 야다(Yhada)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안다’는 '경험하다'이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인식론적 이성으로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다'는 말이다.
 
회중과 인도자
 
3년여간 이민수용소에 있다가 얼마 전에 나온 집사 부부를 만났다. 모습은 조금 초췌해 보였으나 수용소 안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그의 간증을 들으며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가 있던 곳은 외부 사람이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수용소 안의 크리스찬들을 위하여 '기도회'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동적으로 받았던 말씀을 이제 능동적으로 전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누기 위해서 말씀을 묵상해야만 했다. 그 후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기도회를 인도하면 할수록 자신이 더 성숙해 지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먼저 배워야 했고, 인도해야 했기에 성령께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배울 때보다 가르칠 때 더 많은 은혜를 받았다. '겸손한 인성'과 '하나님의 영성'이 함께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았다.
 
배움과 가르침

 
나는 신학교 첫 강의 시간에 이런 말을 한다.
 
 "저는 가르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배우기 위해서 왔습니다."
 
여기까지만 하면 너무 없어 보여 한 마디 덧붙인다.
 
"배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가르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은 농담처럼 듣지만, 이것은 분명 수업에 임하는 나의 태도이다. 나는 학교에서 가장 많이 배우는 사람은 ‘학생이 아니라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선생은 가르치기 전에 배워야 하고, 가르치면서 배우고, 가르친 후에 자기 성찰을 통하여 또 배우게 된다. 그리고 새롭게 배운 것을 그 다음 수업 때 적용하면서 또 배우게 된다. 가르침은 계속되는 '선순환'으로 더 많은 배움으로 나를 인도한다.
 
앎과 삶
 
'앎과 삶'은 어떤가? 프락시스(Praxis)적인 삶이란 ‘아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아는 것’이다. 프락시스란 구체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적인 지식'이다.
 
마태복음 16:27절에 ‘행한 대로’에서 ‘행함’ 곧 ‘실행’을 가리키는 단어가 ‘프락시스’이다. 앎이 없는 삶은 맹목적이고, 삶이 없는 앎은 관념적이다. 앎과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긴밀한 관계를 이루며 변증법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앎을 삶으로 표현할 때, 새로운 앎이 이루어진다. 새로운 앎을 실천할 때 또 다른 앎이 생성된다.
 
구체적으로 수영을 배운다고 생각하여 보자. 수영은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직접 물속으로 들어가 경험해서 배워야 한다. 물속에서 연습하다 보면 수영을 어떡해야 하나를 알 수 있게 되고, 그런 앎의 성숙이 더 수영을 잘 할 수 있게 한다.
 
프락시스(Praxis)적인 성장은 '삶 속에서의 앎'(Knowing in Living)과 '앎 속에서의 삶'(Living in Knowing)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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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9/26 [11:21]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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