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빚진 마음, 하나님 인도하심 따라 갈 것이다

캄보디아 왕립농업대학교 신기조 목사

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6/09/26 [11:39]
▲ 호주 선교사가 세운 일신기독병원에서 원목으로 일하다 캄보디아 선교사로 파송받은 신기조 목사.     © 크리스찬리뷰

‘한국 나환자들의 친구’로 알려진 맥켄지(Rev. James Noble Mackenzie) 선교사는 1910년 호주장로교 선교사로 한국(부산)에 와서 선교와 의료·교육 등 봉사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매견시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했다.
 
특히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맥켄지 선교사는 슬하에 네 딸을 두었는데 첫째 딸 매혜란(Helen), 둘째 딸 매혜영(Catherine) 두 자매는 1952년 2월 13일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여 부산진교회 유치원을 빌려 1952년 9월 17일 부산 좌천동에 일신부인병원(현 일신기독병원)을 설립하고 6.25 전쟁 피난민은 물론 산모와 아기들을 위해 많은 헌신을 했다. 
 
일신기독병원은 그리스도의 명령과 본을 따라 그 정신으로 운영하며, 불우한 환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육체적으로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봉사와 박애의 정신을 구현함을 설립 목적으로 삼았다.
 
이 병원에서 29년간 조산간호사로 일하다 원목실 전도사를 거쳐 목사 안수를 받고 원목으로 일했던 신기조 목사. 그녀는 호주 선교사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선교사로 헌신, 현재 캄보디아 왕립농업대학교에서 보건 간호사로, 그리고 일과 후에는 선교사로서 학원 복음화를 위해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그를 현지에서 본지 발행인이 만났다.<편집자 주>
 
▲ 일신기독병원 설립자이며 초대 원장을 지낸 매혜란 선교사(위 왼쪽)와 31년 6개월 동안 한국에서 의료 선교사로 헌신한 삶을 살아 온 민보은 선교사 (아래 오른쪽).     © 크리스찬리뷰

식지 않은 CCC 열정
 
- 일신기독병원(이하 일신병원) 개원 50주년이었던 2002년 9월 부산에서 만난 이후 14년 만에 캄보디아에서 만나게 되었다. 일신병원은 언제부터 일했고 어떻게 캄보디아 선교사로 오게 되었나?
 
“1979년 11월 조산교육을 받으러 갔다. 80년 10월까지 조산교육을 받고 11월부터 아기 받는 조산사로 일했다.  교육기간까지 7년 정도 간호사업부에서 일했다. 민보은 선생(Dr. Barbara Martin)이 교육을 맡았다.
 
나는 매 원장(Dr. Helen Mackenzie)이 호주로 돌아간 후 들어갔다. 당시 안덕희 선교사(Rev. Joyce Anderson)가 원목실에 있었다. 나는 2008년 12월 말에 병원을 사임했고 바로 다음 해 1월 캄보디아로 파송받았다.”
 
- 일신병원 50주년 당시가 전성기 아니었는가?
 
“내가 1996년 초에 신대원을 갔는데 그때 아기가 일 년에 1만 명 이상 태여났다. 그때가 최고점을 찍었다. 50주년 인 2002년에는 이미 분만선은 하향 곡선을 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조산간호사가 어떻게 목사가 되었나?
 
“내가 목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간호대학을 다닐 때 CCC 활동을 했는데 지금도 그때 갖고 있던 열정이 지속되면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식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것(목사)은 나와는 관계없는 직업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을 좋아하고 주님 따라 다니는 것은 좋아했지만 목사는 나와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산으로 조산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는 내 의지가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조산교육을 받고 선택을 한 것, 거기까지는 내 의지가 있어서 선택해서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1986년 어느 날인가 분만실 근무할 때 아침 예배에 참석하러 갔다. 당시 원목실에는 전도사가 계셨는데 어떤 분이 나에게 ‘예배 인도하러 왔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전도사가 계시다’라고 말하니 며칠 전부터 안나온다고 그랬다.  
 
나는 원목실과는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독 간호사로서 내 일만 하면 되니까. 그런 상태였는데 그 후 간호부장이 분만실로 찾아와서 나에게 ‘원목실에서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물어서 ‘왠 원목실은요?’라고 답했더니 ‘신 선생이 가면 어떻겠는가’라는 의견이 모아졌다는 겁니다.
 
나는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웃기만 했는데 또 다시 찾아와 묻기에 내가 결정할 수 없으니 집에 가서 부모님과 의논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때 아버님은 교회에 다니는 분이 아니었기에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다.    
 
▲ 일신기독병원 개원 50주년인 2002년 9월 17일 0시 40분에 태어난 희면둥이 아기(여)에게 분만 병동에서 축하행사를 갖고 장학금과 학용품을 수여했다.     © 크리스찬리뷰

‘하나님 원목실로 가라는데 어찌해야 할지 분별이 안되니 집에 가서 아버님께 여쭤보고 아버지가 허락하시면 하나님 허락인 줄 알고 가겠다. 이렇게 기도하고 집으로 갔다.
 
집에 가서 아버님께 ‘병원에서 원목실로 가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으니 아버님이 ‘너 거기 가면 밤번 근무하니 안하니?라고 물으셔서 ‘밤번 안해요’라고 말했더니 ‘그럼 좋다’라고 하셔요. 아버님께서는 간호사들이 밤에 근무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아시거든요. 내 생각엔 아버님이 원목실이 뭔지도 모르고 결정하셨는데 ‘후회 안하실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원목실로 가게 됐다.
 
그러나 그 전에 하나님이 작업하신 것을 후일에 알게 되었다. 원장님이 나를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말단 간호사인데, 나보다 신앙 좋은 선배 간호사들도 많이 있는데 병원 간부들이 나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한 번은 병원에서 귀신소동이 있었다. 어떤 간호사가 교육생과 연결되면서 조금 이상하게 되었다. 그때 원목실에 전도사가 있었는데 ‘귀신 쫓는 목회자가 있느냐?’라고 물어요. 그래서 한 사람이 연결되었는데 합동측 강도사였다. 같이 기도하고 모두 정상으로 정리되었는데, 그 강도사를 통해서 나를 기도 훈련시킨 것이었다. 
 
그가 기도하는 것을 보니까 나도 저렇게 기도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겼다. 개척교회를 하고 있던 강도사를 따라 교회에 가보았는데 온 성도들이 폭포수처럼 기도가 쏟아지는데 어떻게 저렇게 기도할 수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그때부터 부르짖는 기도를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부산진교회 종탑에 올라가 보지 못했는데 기도 장소를 찾다 그때 올라가 보니 종탑은 마루판을 깔아 놓고 기도할 수 있도록 너무 잘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소리지르며 기도했고, 지금 나의 목소리가 그때 기도할 때 바뀐 목소리이다. 이 목소리는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쉬지 않는다. 자다 깨어도 찬송 한 곡 부르면 목소리가 그냥 터지는 이런 목소리로 하나님께서 바꿔 주셨다.
 
그 후 병원에서 조산교육을 받은 간호사들의 수료식이 있었는데 전도사가 나에게 기도를 시켰다. 그때가 6월 말 수료식이었는데 그렇게 기도훈련한 것이 내가 생각해도 기도를 너무 잘했다고 생각한다.  전에도 후에도 그런 기도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때 그 기도는 나도 부러워했던 기도를 했고, 그러면서 수료생들을 위한 축복기도를 했는데, 대체적으로 수료식 때는 많이들 운다.
 
그런데 그날은 우는 사람이 없었다. 간호대학 동기에게 ‘그동안 잘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그렇게 기도해 주었으면 됐지 뭘 더 잘해 주느냐?’라고 그 친구가 말했다. 
 
▲ 농과대학 농작지 앞에서 신기조 목사.     © 크리스찬리뷰

원장님 이하 병원 간부들이 나를 기억했다면 아마 그때 그 기도가 아닐까? 내 이름을 기억한 것은 아니었다. 후일에 어떤 분이 내게 ‘어떻게 원목실로 가게 됐느냐?’라고 묻길래 지금과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아마 그때 그 기도가 그 어른들 기억 속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더니 ‘맞다’고 그래요. 기도 잘하는 간호사로 통했다는 거다. 내 이름을 기억했던 것이 아니다. 이름을 알 리 없었다. 그렇게 해서 원목실 사역이 시작됐다.
 
내가 원목실 사역을 겁없이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나를 CCC에서 순장으로 훈련시켜 놓으셨기 때문에 어제까지는 말단 간호사로 있었지만, 신학을 하지도 않은 내가 당장 아침 경건회를 인도해야 했다. 토요일까지 간호사로 일했는데 월요일부터 원목실로 들어가서 전도사가 아닌 전도사가 되었다. 그래서 사역을 시작했다.
 
아침 경건회를 인도해야 했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당시에는 병실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원장 이하 간부와 직원들이 참석했다. 다음부터는 조금씩 괜찮아졌는데 CCC에서 순장 훈련받은 것이 지금도 아낌없이 하나님은 다 사용하신다. 그것을 지금도 느끼고 있다.
 
부원장이던 장로가 ‘신 선생, 원목실에서 3개월만 해보아라. 3개월 해보고 간호사 하겠다면 돌려 주겠다.’ 그런 조건으로 원목실 사역을 하게 됐다. 그래서 3개월을 해보니 이것을 하려면 신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원장과 상의했더니 알아서 하라고 해서 부산장신대에 들어갔다. 신학교가 병원 바로 뒤에 있어서 오전에 병원 근무하고 오후에 야간반에서 공부했다.
 
야간반은 3학년까지 있었는데 졸업 후 휴학하고 그 후 4학년이 개설되어 학부를 마쳤는데, 당시에는 여자 목사 안수가 안되어 방통대에서 공부하면서 목사 안수가 가능하게 되었을 때 서울 장신대에서 다시 공부하고 그 다음에 계명대로 가서 코스웍까지 모두 마쳤다.”
 
▲ 일신병원에서 조산 교육시키는 간호사 매혜영 선교사.(왼쪽)     © 크리스찬리뷰

잊지 못할 기도와 성경공부
 
- 일신병원에서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면?
 
“직원들과 기도하고 성경공부했던 것이다. 결국 나도 살았고 그때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도 살았다. 이런저런 생각들도 있었지만 마음의 확신은 지금은 못만나도 자기가 맡은 역할은 모두가 다 잘 감당하고 있다는 것, 그때 그 기도와 공부했던 그것만큼 소중한 것을 잊을 수 없다.” 
 
- 호주 선교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늘 빚진 마음이다. 그분들에게 빚진 것도 빚진 것이지만 우리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복음을 받았고,  병원도 설립됐고, 나도 그 병원에서 사역을 했으니까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되나 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많은 호주 선교사들이 일신병원에서 일했는데 안덕희, 민보은 선교사는 장기 사역을 했지만 단기로 온 분들도 많았다. 앞서 얘기했듯이 원목실 사역을 하면서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었던 기억들, 지금도 그 친구들이 전국에 흩어져 자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 나는 캄보디아로 왔고 친구들은 한국에 흩어졌다. 
 
▲ 캄보디아 선교사로 왕립농업대학에서 사역하고 있는 신기조 목사. 그는 보건실에서 학생들의 건강을 돌보면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일과 후에는 자신의 집에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 신기조

내가 깨달은 것은 예루살렘교회를 보게 되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모여서 흩어지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스데반 사건을 통해 다 흩으셨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는 이곳으로 보내셨고 구조 조정 등 여러 가지 일로 병원 직원들이 아픔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을 보면서 만약 내가 일신병원에 계속 있었다면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100여 명의 직원들을 구조조정했다는데 평생을 살아온 친구들인데 내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먼저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매혜란 선교사가 나무로 직접 제작한 분만침대. 현재까지 일신기독병원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현대식으로 만든 것보다 더 실용적이라고 한다.     © 크리스찬리뷰

하나님 인도하심 따라 캄보디아로
 
- 캄보디아는 언제 어떻게 오게 되었나?
 
“이곳에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이 흔드셨다고 생각한다. 병원에 그대로 있었다면 이제 은퇴했을 텐데, 하나님이 흔드니까 나는 흔들렸고, 일신병원에서 캄보디아 선교사로 파송됐다. 사역지는 캄보디아 남부에 위치한 시아누크빌에 있는 라이프대학이었다.
 
나는 캄보디아를 잘 몰랐고 어느 간호대학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그곳에 가면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갖고 왔지만 한 달을 지내면서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시아누크빌병원 분만실에 가보았는데 말이 안통하니까 내가 할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캄보디아 말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잠 안자고 열심히 공부하면 쉽게 언어를 배울 것이라 생각했다. 프놈펜으로 와서 언어 공부하는 중에 그곳은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말씀을 듣고 라이프대학 사역을 포기했다.”
 
- 지금 이곳 대학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보건실에서 학생들의 건강문제를 상담하고, 필요한 약도 주고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치료약은 내가 쓸 수 없으니까 일반적인 감기, 두통, 소화제 등을 주는 정도다.넓은 의미로 ‘보건교육’이라 하겠다.”
 
▲ 부산장신대로 사용했던 부산진 일신여학교 건물. 이 건물은 지난 2013년 5월 2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     © 크리스찬리뷰

하나님이 일하신다
 
- 대학을 간단히 소개 달라.
 
“1964년 개교한 왕립농업대학(Royal University of Agriculture)은 폴 포트 정권하에서 학교 문을 닫았다 다시 열었지만 5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초창기에는 한국보다 훨씬 괜찮았던 대학이었다. 10개 단과대학이 있고 수업은 2부제(오전/오후) 운영된다. 금년부터 풀 타임 대학도 있고 토요일과 주일에는 집중교육을 한다.
 
한국의 대학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전에 공부하는 학생들은 오후에 다른 대학에 다니기도 한다. 그래서 졸업장을 2개 받게 된다.”
 
- 이곳에서 일하면서 사례도 받는가?
 
“자원봉사이다. 후원은 하나님이 하시고, 병원에서 일했기 때문에 교회 활동을 많이 하지 못했다. 직원예배볼 때 많은 목사님들이 오셔서 말씀을 전했는데 그
때 오셨던 몇 교회 목사님들이 협력선교사로 지원해 주고 계시고 개인적으로 연결된 분들도 있는데 어떻게든지 하나님이 연결해주셔서 일하고 있다.
 
일신병원에서는 언어 공부할 때 2년간 후원해 주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해주셨다. 라이프대학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일신병원 후원은 끝난 것이다. 병원과 선교회가 후원했는데 다 끊어지니까 좌절하고 실망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사실 그렇지 않았다. 어차피 거기서 책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파송했지만 병원에서 나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책임지는 분은 다른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님은 위로해 주셨다. 부산 CCC에서 만났던 분인데 후원이 딱 끊어지고 나서 그분이 나에게 100만 원을 보냈다. 개인이 100만 원을 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나님이 일하게 일하시는구나. 이렇게 응원하시는구나’그분을 시켜서 했는데 그래서 같이 은혜를 나눈 적이 있다. 더 재미있는 얘기들은 더 나이 먹은 다음에나 해야될 것 같다.”

▲ 부산장신대로 사용했던 부산진 일신여학교 교실.     © 크리스찬리뷰

학생들 키우는 보람된 사역

- 대학에서 일하면서 보람된 일은?

“학생들을 키우는 것이다. 그들이 예수 믿고 변하는 것, 아직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생각의 틀이 바뀌는 것을 볼 때 큰 보람을 느낀다.”
 
- 대학 당국에서는 이런 사역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는가? 
 
“물론이다. 외국인들을 관리하는 부서가 있는데 이력서 같은 것을 써내라고 했는데 모두 써 주었다. 목사, 선교사, 목회 상담, 상담 치료, 간호사라고 알려 주었다. 왜냐하면 아닌척하고 있다 후에 알게 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학교에서는 성경 가르치는 것은 안하고 있다.
 
예의를 지켜야 한다. 내가 잠깐 있다 갈 사람 같으면 있는 것 없는 것 다 쏟겠지만, 하나님의 선교는 장기적으로 보야야 한다. 내가 떠나도 한국에서 누가 오던지 안오던지 이곳에서 하나님의 복음은 계속 전파되어야 한다.”
 
- 앞으로의 계획은?
 
“없다. 이곳에 올 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냥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갈 것이다. ‘하루하루 살아요’가 맞다고 본다.”
  
▲ 인터뷰를 마친 후 보건실 입구 건물에서 신기조 목사와 본지 권순형 발행인이 기념촬영을 했다.     © 크리스찬리뷰

에필로그
 
캄보디아 왕립농업대학에는 수의과,  축산과, 삭품가공과 등에 4명의 한국인이  일하고 있는데, 대학교 안에는 수의대, 축산대, 고무나무에 대한 대학, 농기구 대학, 식품가공학대,  농업, 농업지역개발 등 10개 단과대학이 있다.
 
신 목사는 주일 오전에는 캄보디아한인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후 오후 3시, 자신의 집에서 현지 학생들과 예배드리고 있는데 예배 후에는 식사 교제를 나누고 영어 성경공부를 하며 학원 복음화에 열심을 다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우리는 멜본에 계신 민보은 선교사를  모시고 캄보디아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

글|사진= 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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