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 연안의 무역항, 인천

인천 차이나타운 방문기

김환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6/09/26 [11:50]
▲ 인천 차이나타운 패루     © 김환기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천만 관객을 향하여 순항하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날이다. 작전성공률이 5천대 1이라며 격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끝까지 인천상륙을 밀어 붙였다. 그의 작전은 성공하여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게 된다.
 
인천상륙작전은 2단계로 이루어졌다. 인천 앞바다는 수로가 좁고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하여 함대가 대규모로 이동하기가 어려웠다. 1차 밀물 때 월미도를 먼저 점령하고, 다음 밀물 때 인천반도에 상륙했다. 당시 월미도는 섬이었다.
 
필자는 군생활을 월미도에서 했다. 그때 그곳은 군사보호지역이었다. 월미도의 주요 지역은 군인들이 통제하였다.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방문한 월미도는 너무 달라졌다. 군부대가 있었던 곳은 관광시설로 변하여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사보호지역으로 올라 갈 수 없던 산도, 이제는 관광열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산 정상에 서면 인천항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운이 좋으면 리아스식 갑문으로 입출항하는 배들도 볼 수 있다.
 
▲ 인천 차이나타운 거리     © 김환기


인천 차이나타운 (China Town)
 
2016년 7월 20일 인천 차이나타운을 찾았다. 역사 위 간판에는 ‘인천역’아래 '차이나타운'이 쓰여 있다. 차이나타운은 관광지로 주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평일이어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차이나타운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붉은색은 중국을 대표하는 색이다. 중국 사람들은 붉은색은 행운을 가져오고, 액운을 쫓는 색으로 여긴다.
 
그래서 경사스러운 날이 되면 천지를 붉은색으로 도배한다. 결혼식이나 축하 연회 등에는 반드시 붉은색을 사용한다. 글씨도 붉은색으로 쓴다. 돈도 붉은 봉투에 준다. 시드니에 있는 차이나타운에도 붉은색으로 단장한 음식점들이 거리를 수놓고 있다. 차이나타운 양 입구에는 붉은색 기둥으로 만들어진 ‘패방’이라 불리는 대문 모양의 중국 특유의 건축물이 세워져 있다.
 

▲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자장면 집 공화춘.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에 있는 공화춘 식당 건물은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236호이다.     © 김환기


원조 짜장집 공화춘 (共和春)
 
차이나타운 내에 대한민국 최초의 자장면 집인 공화춘이 있다. 공화춘(共和春)은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에 위치하는 옛 중화요리 식당 건물이며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246호이다.
 
1912년에 개업한 공화춘은 대한민국에서 짜장면을 최초로 개발하여 판매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식당은 1983년에 폐업하였고, 2012년 4월에 짜장면 박물관으로 환골탈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짜장면의 역사에 대하여 모형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 공화춘의 자장면     © 김환기


'자장면'이 맞나? '짜장면'이 맞나?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국어사전은 이를 자장면으로 표기해 왔는데, 중국식 발음은 ‘짜지앙미옌’이다. 언어 순화 차원에서 된소리 사용을 자제한다며 현실음과 다른 자장면을 표준말로 정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짜장면'을 즐겨 써왔고, 그 발음이 중국 현지의 발음과 비슷할 뿐 아니라, 맛이 다소 '짜다'는 이미지까지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최근 국립국어 연구원이 표기법상 '자장면'도 맞고, '짜장면'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이층에 1830년부터 기록된 연도표를 보면 1912년 중화민국이 건국된 해, 대한민국에는 공화춘이 개업했다. 1983년 폐업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폐업이 아닌 이전이다. 이전한 공화춘을 찾아 갔다. 일반 짜장은 5천원인데, 공화춘 짜장은 배나 비싼 1만 원이다. 비싸지만 공화춘에 왔으니 공화춘 짜장을 시켰다. 음식 맛보다는 양으로 승부하는 나는, 주문한 짜장면을 보면서 본전 생각을 했다.   
   

▲ 인천항 야경.     © 김환기


인천 자유공원
 
차이나타운을 통과해서 위로 올라가면 인천자유공원이 나온다. 자유공원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1889년 무렵, 인천소재 외국인 거류지의 거주자들을 위한 공원으로서,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공원'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에는 원래 이름인 '만국공원'으로 불렸다. 1957년 김정렬 인천시장이 취임하면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자유공원에는 '한미수교백주년기념탑'과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다. 1882년 조선이 미국과 수교한 해를 기념하여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을 건립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은 1882년 5월 22일에 인천부의 제물포구 언덕에서 조인되었으며, 여기에는 관세에 관한 조항이 있어서 명실 공히 수호통상조약이 되었다.
 
‘강화도조약’에서 주장하지 못했던 관세의 권리를 찾아오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고, 관세 업무를 다루는 기관을 설립하는 계기도 되었다. 
 

▲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맥아더 장군 동상.     © 크리스찬리뷰


1957년에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UN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동상을 공원 동편에 건립했다. 맥아더 동상 인근의 광장은 인천 시가지, 인천항과 서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고, 일몰 석양을 잘 볼 수 있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몇 년 전에 보수단체와 진보단체 사이에서 맥아더 장군의 역사적 평가를 달리하면서, 철거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이념 논쟁에 개의치 않고 그날을 회고하며, 지금도 인천항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굳건히 서 있었다.


▲ 개항장 사랑방에서 만난 장애인 이웃들.     © 크리스찬리뷰


개항장 사랑방
 
차이나타운 내에 '개항장 사랑방'이 있다. '개항장 사랑방'은 경제적으로 취약하고 지역사회로부터 소외된 장애인, 노인, 저소득층, 사회복지시설 및 단체 등의 경제활동 참여와 아름다운 나눔을 실현하고 우리의 소중한 이웃인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개항장 사랑방'은 사단법인 '인천장애인능력개발협회'에서 운영하는 공간으로 장애인들이 당당한 사회인으로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곳이다. 개항장 사랑방 관계자들은 작년 10월에 시드니를 방문한 후, 홍콩을 거쳐 귀국했다.
 
필자는 인천 중구청 앞에 위치한 사랑방을 찾았다. 시드니에서 만났던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개항장 사랑방 카페에서는 자체적으로 개발한 다양한 물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시드니와 홍콩을 방문한 후 아이디어를 얻어 새롭게 개발한 상품도 있다.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협회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평생교육사업'과 '장애인 직업재활센터'도 가보았다. 저녁 7시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들은 퇴근하지 않고 내일 할 일에 대하여 의논하고 있었다.
 
작년에 시드니에 왔던 청년을 만났다. 이 친구는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잃지 않고 산다. 주님의 기쁨이 신체적 장애를 이기고도 남는 것 같다.
 

▲ 개항장 사랑방 전경.     © 크리스찬리뷰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들을 기쁨으로 섬기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니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우리 사회에는 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GNP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얼마만큼 따뜻하게 배려해 주는 가의 차이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자는 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진정 주님의 마음을 가진 자이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베푸는 자는 다 주님께 하는 것이다. 〠 

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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