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독자/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7/02/27 [12:23]
이 글은 호주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한 젊은 2세가 자기 희생의 삶을 살아온 부모와 신실하셨던 하나님을 떠올리며 적은 회상록이다. 이민 1세대 부모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할 기회를 미쳐 갖지 못했던 2세들을 대신해 이 글을 전한다. (편집자주)
 
1986년 12월, 나는 서울발 시드니 행 비행기를 타고 익숙지 않은 더위와 강렬한 햇빛이 내리쬐는 호주에 도착했다. 당시 5살이였던 나는 영문도 모른체 모든 친구들로부터 떠나와야 했다.
 
그때,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은 두꺼운 ‘보물섬’ 만화책을 놓지 않으려고 꽉 쥐던 내 손과 호주에 갓 도착한 나를 반기는 까치의 이상한 울음 뿐이었다.
 
당시 모든 이민자들처럼 우리 부모님도 가족을 위해 바쁘게 일하셨고, 새로운 나라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셨다. 어머니는 영어에 서툴어 항상 놀림감이 된 내가 어두운 얼굴이 될 때마다, 고국에서 누리던 편안한 환경을 버리고 온 데 대한 죄책감을 느끼셨다.
 
아들이 깊은 마음의 상처로 자신감을 잃을까봐 항상 걱정하시던 어머니. 그러나 내 고통이 어떠했든, 부모님의 희생과 고통에 비교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우연히 영어강좌 테이프가 든 상자를 발견했다. 호주 오기 직전, 몇 달 동안 끊임없이 틀었던 테이프. 따로 학원에 갈 시간도 없으셨던 아버지는, 그 테이프로 얻은 가장 기본적인 영어만 가지고 일터로 나가셔야 했다. 몇 년간 커뮤니티 영어과정에 갈 수 있었던 어머니는 그나마 더 나은 처지였을까?
 
새로운 나라에서 분주한 삶과 새롭게 만난 사람들 속에서 한국은 서서히 나에게서 잊혀갔다. 돌이켜 생각하면 너무 위험했던 주말낚시여행도 한 몫을 차지했다. 지금같은 이메일과 저렴한 국제전화가 없던 시절, 한국의 친척들과의 연락은 가끔 하는 편지나 전화가 다였다.
 
그렇다고 잊혀질 수 없던 그리운 고국.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한국인이라도 만나면 집에 불러 식사대접하기를 기뻐하셨고, 시드니에 온 지 한참 뒤에나 구할 수 있었던 한국과자를 먹을 때마다 어릴 적 추억이 다시 떠올랐다.
 
모든 것이 낯설던 시절, 호주에 좀 더 익숙해지려는 우리 가족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여기서 부모님의 확고한 신앙은, 예측할 수 없었고 항상 익숙치 않았던 수많은 도전 앞에서 나를 붙들어주는 닻이었다. 집안의 오랜 신앙유산은 전통으로만 남기보다는, 이국 땅에서 나의 존재를 정의하는 방향표였다.
 
한인교회는 사람들과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었던 연결점이자 기반이었다. 돌이켜 보면, 호주에 동화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아쉬움이 남고, 이러한 고민은 현재형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모탓을 돌릴 문제는 아니다. 자녀의 더 나은 환경을 위해 고국의 편안한 터전을 뒤로 하고 개척에 나섰던 용기만으로 감사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 호주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의 나이가 이제 내 나이가 되었다. 처음 왔을 때, 나보다 몇 년 먼저 온 친구의 안정된 모습을 한없이 부러워 하던 때가 이젠 가물가물해져 간다. 이제 내 아이들은 내 부모의 아이처럼 이방인으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호주 출생 증명서뿐 아니라 그 입에서 나오는 완벽한 영어, 완벽히 호주에 동화된 부모 덕에, 이 아이들은 더 많은 기회를 누리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시드니 외곽 블루 마운틴의 한복판에서 사천명 가까운 신앙인들과 함께 선교대회에 와 있다. 참석자 대부분은 앵글로지만 다양한 배경이 눈에 띈다. 같은 시간에 천삼백 명이 넘는 아이들은 따로 준비된 어린이프로그램을 통해 아브라함과 새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배우고 있다. 천국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많은 나의 부모 세대가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이민생활의 시작, 과정, 도전과 성과들을 돌이켜보면, 결국 이 모든 것이 내 의지 탓이라고만 감히 말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을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위대한 자비, 은혜 때문임을 안다. 내가 미처 이것을 깨닫지 못할 때도, 우리 가족이 모여드리는 예배 때마다 이런 찬송을 불렀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있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이 찬송은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가족 찬송'이기도 하고, 수많은 이민자 가정의 고백일 것이다.
 
이 고백을 가능하게 하신 부모님과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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