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기독수양관 구세군 콜라로이 센터
디와이(Dee Why)에서 모나 베일(Mona Vale)까지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크리스찬리뷰 4월호/2017   © 크리스찬리뷰

그곳에 서면 바다가 보인다. 그녀의 비문 앞에 서면 내가 보인다. 오늘 나는 '그곳과 그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시드니는 집값 비싸기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 2016년 시드니 중간 집값이 백만 불이 넘었다.
 
기차역이 가까운 역세권에 있거나 전망 좋은 집은 부르는 것이 값이다. 특히 시티와 가까운 지역이나 노던 비치(Northern Beaches) 지역은 말할 것도 없다.
 
노던 비치 중심부에 세계 3대 기독 수양관 중 하나인 '구세군 콜라로이 센터'가 있다. 남태평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콜라로이 언덕에 위치해 있어 호주인들뿐만 아니라 한인들도 이곳을 즐겨 이용하고 있다.
 
구세군 시설을 견학할 때도 반드시 방문하는 곳이다. 2016년 10월, 한국에서 온 10명의 구세군 사관을 안내하여 이곳을 갔다. 아름다운 센터를 보면서 이곳 역사에 대해 궁금해 했다. 나는 대충 들었던 이야기로 설명은 했지만, 사실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2017년 2월의 마지막 날, 구세군 역사학자인 데이빗 우드버리(David Woodbury) 사관을 '역사박물관'(Heritage Centre)에서 만났다. 구세군 역사박물관은 구세군의 유물과 역사 자료를 보관한 곳이다. 이곳에 가면 초기 구세군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박물관 안쪽으로 가면 설교하는 강대상이 있고, 그 밑에 술과 담배가 놓여 있다.
 
구세군은 술과 담배가 난무한 거리에서 탄생했다. 알콜 중독자들에게 교회로 오라 하지 않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 갔다.

▲ 콜라로이 비치 언덕 위에 위치한 호주 구세군에서 운영하고 있는 콜라로이 센터 입구.     © 크리스찬리뷰
 
그는 구세군 '역사회'(Historical Society) 회장이다. 역사회는 역사자료를 발굴하여 보관하고 교육함으로, 구세군의 역사 의식을 고취시키고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주는 기관이다. 데이빗 사관은 준비한 자료를 통하여 콜라로이 센터의 역사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궁금했던 사안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어느 구세군 사관의 'A Cup of Compassion'에서 시작되었습니다." 

Compassion이란 단어는 ‘긍휼’로써 Com(함께) + Passion(아픔)의 합성어이다. Compassion은 다른 사람의 아픔과 함께하는 것이다. 120년 전 아무도 돌보지 않던 늙고 병든 노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인 한 사관으로 인해 콜라로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호주 구세군의 유물과 역사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역사박물관에는 초기 구세군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강대상 밑에는 술과 담배가 놓여 있다. 구세군은 술과 담배가 난무하는 거리에서 탄생했다.     © 크리스찬리뷰

엘리자베스 젠킨스(Elizabeth Zenkins)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시작하여 1880년 호주에 상륙했다. 구세군이 시작된 곳은 남 호주의 수도인 아들레이드(Adelaide)이다. 1880년 초 아들레이드에서 감리교 전도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 '에드워드 손더스'(Edward Saunders)와 '존 고어'(John Gore)가 있었다.
 
고어는 집회 중 “1867년 9월 3일 부스 목사가 인도하는 스테프니회관 전도대회에서 개심하였다”고 했고, 손더스도 일어나 “나도 브래드포드의 기독교선교회에서 구원받았다”고 간증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구세군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1880년 9월 5일 주일 오후 식물원에서 '가로 전도'(Open Air)를 하고 아들레이드 시내의 노동연맹 회관에서 저녁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사관을 보내 줄 것을 영국에 요청하였다. 대장은 흔쾌하게 1881년 1월 5일에 토마스 서덜랜드(Thomas Sutherland) 사관 부부의 파송식을 가졌으며, 이들은 2월 17일 아들레이드에 도착했다.
 
그 후 구세군의 사역은 호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초기에 구세군은 시드니 시티 중심으로 사역하였으나, 엘리자베스 젠킨스 (Elizabeth Jenkins)를 만남으로 그 지경을 넓히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젠킨스의 아버지는 제임스 젠킨스(James Jenkins)이다.
 
그는 1802년 6월 13일 Coromandel 죄수선을 타고 시드니에 도착했다. 그는 열심히 일하여 정부로부터 지금의 노던비치(Northern Beaches)의 땅을 부여 받았다. 대부분의 땅을 딸인 엘리자베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준 땅 이외에도 가족의 친구였던 '알렉산더 맥도날드'에게 받은 땅이 있었다. 1825년까지 젠킨스 가족이 소유하고 있던 땅은 지금의 디와이(Dee Why)부터 모나 베일(Mona Vale)까지, 약 1만 8천 에이커(*편집자 주: 약 2천 2백만 3천2백 평, 1에이커= 약 1,224평) 정도였다.
 
엘리자베스는 결혼하지 않았다. 노년이 되어 거동이 힘들고 병들었을 때, 구세군 사관이 그녀를 발견하고 지속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긍휼한 마음으로 시작한 '작은 도움'이 그녀를 감동시켜, 그녀는 구세군 병사가 되고 땅의 일부를 구세군에 기부하였다.
 
그녀의 성격은 조금 괴팍하였고, 종교적으로는 극단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안식일에 배가 파선이 되더라도, 구조선이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구세군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단체라고 생각했다.

▲ 호주 구세군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구세군 창립자 윌리암 부스 부부의 인형.     © 크리스찬리뷰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암 부스'를 말세에 엘리야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보내 주신 사자라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는 구세군 ‘워터루 영문’ 아니면 ‘뉴타운 영문’에서 회개하고 병사 입대를 했다.
 
그녀가 주주로 있던 은행이 부도나자, 그녀는 구세군에 도움을 요청했다. 땅의 일부를 구세군에 기부하고, 은행 부채와 관련된 모든 의무는 구세군이 책임져 줄 것을 부탁했다. 구세군은 동의하고 그녀뿐 아니라 그녀의 가족들을 평생 도와 주었다.

▲ 1900년 6월 26일, 엘리자베스 젠킨스는 구세군에 자신의 모든 땅을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천국으로 갔다. 그 땅은 현재 디와이부터 모나베일까지 약 1만 8천에이커(약 1,224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인데 그 면적은 관중석을 제외한 보통 축구장 9천여 개에 달한다. 또한 이는 32평 아파트 68만 4천여 채를 붙여놓은 것과 같다는 계산이 나온다.     © The Salvation Army - Sydney Heritage Centre
 
1900년 6월 26일, 그녀가 83세 되는 해, '자신의 모든 땅을 구세군에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천국으로 갔다. 그녀의 유언에 동의하지 않는 몇몇 가족은 이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갔다. 오랜 법정 공방 끝에 법은 구세군의 손을 들어 주었다.

▲ 호주 구세군 역사 학자 데이빗 우드버리 (David Woobury)사관     © 크리스찬리뷰
 
엘리자베스 젠킨스의 묘비명

 
묘비명은 죽기 전에 자신이 남길 수도 있고, 죽은 후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의 삶을 기억하며 새길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있다. 
 
"내가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
 
해학가인 그의 삶을 좀 더 해학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번역이었다. 원문을 보면 의미가 조금은 다르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지"란 의미이다.
 
걸레 스님으로 유명한 중광은 “괜히 왔다 간다”라는 그다운 짧은 말을 남겼다. 작가 헤밍웨이는 "일어나지 못해서 미안하이"(Pardon me for not getting up)라고 했고, 철학자 칸트는 “내 머리 위에는 별이 빛나는 하늘, 내 마음 속에는 도덕률”이라는 자작 묘비명으로 유명하다.
 
대부분 묘비명은 후세 사람들이 망자를 기억하며 기록한다.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노무현 대통령의 묘비에는 그의 정치 소신이던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를 그의 추종자들이 새겨 두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묘비에는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는 성경 시편 구절이 새겨져 있다.

▲ 호주 구세군은 그녀의 가족묘를 만들어 주었다.     © The Salvation Army - Sydney Heritage Centre
 
엘리자베스의 묘는 콜라로이 센터 안에 있다. 구세군에서 그녀의 가족묘를 만들어 주었다.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엘리자베스 젠키스의 자선이 콜라로이 센터를 가능하게 했고, 세월을 넘어 수많은 생명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녀를 기리며 구세군에서 써준 글이다. 그녀는 갔지만 그녀가 남긴 유산은 지금도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가고 있다.

▲ 콜라로이센터 안에 있는 엘리자베스 켄킨스 여사의 묘. 그녀는 호주 구세군에 자신의 모든 땅을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겼으며 그의 자선으로 콜라로이 센터가 세워졌다.     © The Salvation Army - Sydney Heritage Centre
 
글 귀 아래에 "어린 아이들을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마 19:14)는 말씀은 콜라로이 센터가 어린이 캠프로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묘비명은 그 사람이 살았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 글이다. 자신의 묘비명을 생각해 보면,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결론이 나온다.
 
나는 한국에 갈 때마다 '양화진'을 들린다. 2호선 합정역에서 내려 7번 출구로 나와 10분 정도 걸으면 된다. 양화진에는 천주교 '절두산 성지'와 개신교 '외국인선교사묘원'이 있다. 이들의 무덤 앞에 서면 내가 보인다.
 
'종말론적인 삶'이란 열심히 살다, 그날을 맞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삶을 오늘 사는 것이다. 그날을 알고 오늘을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곳을 믿고 이곳에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다.

▲ 노던비치가 오늘날과 같이 발전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헤이 구세군 사령관 부부.     © The Salvation Army - Sydney Heritage Centre
 
제임스 헤이(James Hay) 구세군 사령관

노던비치(Northern Beaches)가 오늘날과 같이 발전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이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제임스 헤이(James Hay) 구세군 사령관이다. 그는 국제사관대학의 교장으로 봉직 중, 1909년 호주 사령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1909년 9월 6일 그는 부인과 함께 호주에 도착했다. 그가 부임할 당시 뉴질랜드는 호주 구세군의 일부였고 본부는 멜본에 있었다. 그의 재임기간 중 뉴질랜드는 1912년 분리되고, 호주는 1921년 시드니 중심의 동군국과 멜본 중심의 남군국으로 분리된다.
 
그는 군국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호주 전역을 순회하였다. 구세군 내에 개발되지 않은 땅이 있음을 발견하고. 처분하여 선교에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그 중 한 곳이 '노던비치'였다. 당시 엘리자베스 젠킨스가 남긴 땅은 지금의 ‘Dee Why에서부터 Mona Vale’까지였다.
 
땅은 호주 동군국, 남군국 그리고 국제본영으로 3등분하여 1913년부터 1928년까지 경매되었다. 그는 426개 건물을 샀고, 40여 개 사회사업을 새롭게 시작하였다.
 
그는 은퇴 후 멜본으로 돌아와 호주 정부와 지역 사회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51년에는 '공격적인 구세군정신'(Aggressive Salvationism)이란 자서전도 발간했다. 그는 구세군 최초로 50년 이상 근속한 사관이기도 하다. 96세에도 강의할 정도로 강건한 삶을 살다가 1962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지금 Box Hill 공동묘지에 누워있다.
 
그는 노던 비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주 정부에서도 이를 인정하여 노던 비치의 도로 명을 'Hay' 등 여러 구세군 사람 이름으로 지었다. 지금이야 노던 비치는 값비싼 지역이지만 당시 그곳은 그냥 부시(Bush)였다. 1911년 통계를 보면, Dee Why 지역에는 집이 5채가 있었고, 인구는 62명이 살고 있었다.

▲ 초기 콜라로이센터의 캠프 장면     © The Salvation Army - Sydney Heritage Centre
 
콜라로이 센터 캠프
 
구세군은 그녀가 기부한 땅에 다양한 사회사업을 시작하였다. 출소한 사람을 위한 시설, 알콜 재활센터, 양로원, 고아원 등등. 그녀가 최초로 기증한 땅은 병들고 탈진한 구세군 사관의 '휴양소'(home of rest)가 되었다.
 
콜라로이 센터의 역사는 19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은 호주 최초의 부시(Bush) 캠프가 열린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초기에는 텐트를 치고 캠프를 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건물을 짓게 되었다.

▲ 호주 최초의 부시 캠프장인 콜라로이 캠프장의 초기 모습..     © The Salvation Army - Sydney Heritage Centre
 
지금도 이곳에서는 다양한 캠프가 열린다. 구세군에는 SAGALA(Salvation Army Guarding And Legion Activities)라는 조직이 있다. 구세군 내의 '걸스카우트'나 '보이스카우트'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5살부터 16살까지의 남녀의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이에 따라 남녀 3단계로 구분된다. 이 조직의 목적은 아이들에게 △예수를 알게 하고 △자존감을 높여주고 △달란트를 계발하여 △인생을 무장하게 하는 것이다.

▲ 초기 콜라로이 캠프장.     © The Salvation Army - Sydney Heritage Centre
 
 SAGARA에서는 정규적으로 캠핑을 떠난다. 콜라로이 센터는 SAGARA 캠프를 위한 최적의 장소이다. 캠프를 통하여 수많은 아이들의 삶이 변화되었다.
 
'Red Shield 캠프'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무료캠프이다. 이 외에도 싱글맘를 위한 캠프, 경제적으로 어려운 청소년을 위한 캠프, 가정단 캠프 등 다양한 캠프가 열린다. 이중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캠프는  '음악캠프'(Music Camp)이다. 매년 음악캠프를 통하여 다양한 지역에서 모인 청소년들이 악기도 배우고 친교도 한다. 친구 사관 중에 음악 캠프에서 만나 결혼한 사람도 있다. 
 
"콜라로이는 저에게는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저는 음악캠프 때 아내를 만났습니다."

▲ 구세군은 호주 건국 200주년을 맞아 콜라로이센터를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1988년 5월 이바 버로스 세계대장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식을 가졌다. 사진은 개관식에 참석한 인사들이 야외극장에 앉아 있다.     © 크리스찬리뷰
 
200주년 기념사업 (Bicentenary Projects)

호주는 1788년 1월 26일이 ‘Australia Day’이다. 산업혁명 후 영국의 도시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도시빈민, 실업자, 범죄자, 알코올 중독자, 여성과 아동의 노동력 착취, 환경 오염 등의 예상치 못한 많은 사회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죄수들로 차고 넘치자, 대안으로 해외에 ‘유형 식민지’(Penal Colony)를 개척하기로 결정한다. 1776년 미국이 독립을 하면서 죄수들을 보낼 수가 없게 되자, 1788년 아더 필립(Arthur Philip) 선장의 지휘하여 11척의 배에 778명의 죄수(192명 여자, 586명 남자)를 포함한 약 1천500명의 인원을 탑승한 첫 함대가 시드니 항구에 입항하여 식민지 건설을 시작하였다.
  
구세군은 'Bicentenary Projects'란 이름 아래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콜라로이 센터를 대대적으로 개발하기로 했다. 구세군 본부는 물론이고, 모든 구세군 교회도 한마음이 되어 개발에 동참했다. 드디어 1988년 5월 26일 세계 대장인 '이바 버로스'(Eva Burrows)가 헬리콥터를 타고 콜라로이 센터의 역사적인 개관식에 참석하여 머릿돌의 커튼을 열었다.

▲ 현재의 콜라로이센터 전경과 아래는 초기 모습들..     © The Salvation Army - Sydney Heritage Centre
 
오늘날 콜라로이 센터의 시설은 대부분 이때 만들어 진 것이다. 그곳에는 숙식뿐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다.
 
현재 30개의 호텔 형식의 숙소가 있어 90명이 잠을 잘 수 있고, Cabins 형식의 50개의 방에 380명을 수용할 수 있다. 호텔과 Cabins을 합하면 470명까지 수용 가능하다. 센타 내의 체육관, 강의실 등뿐 아니라, 실외 시설로써 Archery, Rock Climbing, Abseiling, BMX, Dual Flying Fox 등의 시설이 10ha나 되는 센터 숲 속에 설치되어 있다. 가까운 곳에 콜라로이 비치가 있어 서핑이나 수영 등에 관한 교습도 하고 있다. 다양한 시설과 좋은 위치 때문에 90% 이상 구세군이 아닌 다른 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 콜라로이 센터로 올라가는 입구 왼쪽에는 엘리자베스 젠킨스 플레이스가 있으며, 이곳에는 양로원과 요양원이 함께 있다.     © 크리스찬리뷰
 
엘리자베스 젠킨스 플레이스
(Elizabeth Jenkins Place)
 
'구세군이 일반 교회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 나는 구세군의 세 가지 특징에 대해 설명한다.

"구세군은 신학적으로 감리교, 성결교와 같은 웨슬리아니즘 (Wesleyanism)이고, 실천적으로 전인구원(Holistic Salvation)을 강조하고, 조직적으로 국제적인 단체(Internationalism)입니다."
 
특별히 전인구원과 관련된 모토로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Heart to God and Hand to Men)', '한 손에는 빵, 한 손에는 성경'(One hand holding Bread, the other Bible)이 있다. 구세군은 영혼뿐 아니라 인간실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행동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구세군에서는 다양한 사회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긴급 상황 숙소 제공, 극빈 가정 보조, 구직 서비스, 중독자 회복 프로그램, 응급 서비스, 노인 간호, 난민 구호, 재난 출동, 전화 상담, 양로원, 요양원, 청소년 센터, 고아원 등이 있다.

▲ 사무실에서 바라 본 요양원 내부     © 크리스찬리뷰
 
콜라로이 센타 바로 밑에는 '엘리자베스 젠킨스 플레이스'란 이름으로 양로원과 요양원이 함께 있다. 엘리자베스 젠킨스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사용했다. 이곳 안내를 담당한 직원과 만났다. 보안상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리셉션에서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2013년 6월 15일 이곳을 새로 개관하였습니다. 시설이 낙후되어 새롭게 이곳을 단장하였습니다. 이곳의 수용인원은 약 50명 정도 됩니다. 이곳은 요양원과 양로원의 역할을 모두하고 있습니다."
 
입소 자격에 대하여 알고 싶었다.
 
"이곳은 정부 심사기준에 통과한 사람만 들어 올 수 있는 곳입니다. 일반적으로 은퇴하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오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녀는 나에게 센타링크에 접수하는 용지를 주었다.용지를 보니 소득과 자산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1페이지나 되는 서류를 옆에 두고 어떤 서비스를 해 주는지 물어 보았다.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입에 거품을 물며 자랑했다.

▲ 엘리자베스 젠킨스 플레이스 본관     © 크리스찬리뷰
 
"이곳은 의사와 간호사가 수시로 돌보아 주고, 24시간 비상 대기를 하고 있으며, 음식도 아주 잘나오고, 와이파이(wifi)도 잘 터집니다. 기독교 정신으로 돌보고 있고, 바닷가도 가깝고, 분위기가 아주 좋고, 치매환자들을 위한 특별 돌봄도 있고, 구세군 채플린이 있어 언제나 영적 상담도 가능하고 등등" 끊어지지 않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연 한국 사람이 이런 곳에 와서 적응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첫째는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고, 둘째는 음식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젠킨스 영내에 'Trigg Village'과 'Warringah Place Retirement Village'가 있다.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단어라서 발음하기도 어려웠다. Trigg과 Warrigah는 엘리자베스 젠킨스의 친척 이름이라고 한다. 그들을 기리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구세군 은퇴사관들이 살고 있는 Trigg Village     © 크리스찬리뷰
 
Trigg Village는 구세군 은퇴 사관이 사는 곳이다. 은퇴 사관들이 많아 이곳에 올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다. 구세군은 은퇴를 하면 정부 연금을 받고 산다. 정부가 은퇴연령을 높이면서 구세군도 어쩔 수 없이 은퇴연령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Warringah Place는 은퇴하고 혼자서 살 수 있는 분들이 계신 곳이다. 이분들도 '엘리자베스 젠킨스'에서 돌보고 있다.

▲ 사진으로 보는 콜라로이 센터(Collaroy Centre)     © 크리스찬리뷰
 
이제 '그곳과 그녀'의 이야기를 마감하려고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인터넷으로 그녀의 이름을 검색하여 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었고, 다만 구세군 시설을 통해서만 검색되었다.

▲ 초기 콜라로이 센터(캠프장) 모습들.     © 크리스찬리뷰

그녀는 개인적으로 사회에 남긴 업적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유산은 지금도 구세군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갔지만 그녀가 남긴 유산은 아직도 구세군을 통해서 일하고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있다. 작가는 갔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살아서 말하고 있다. 예수는 이 땅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남긴 것은 12제자뿐이다. 하지만 12제자가 세상을 변화시켰다.
 
이제 두 가지 질문을 던지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리고 ‘우린 비문에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 구세군 본부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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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3/27 [10:07]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