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사상을 아우른 기독교 지성

고신대 이사장 강영안 박사

글|송기태, 사진|권순형·윤기룡 | 입력 : 2017/03/27 [12:06]
▲ 손봉호·이만열·장기려 교수 등과 함께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창립한 기독교 철학자 강연안 교수.     © 크리스찬리뷰

강영안 이사장과의 재회는 정확히 25년 만이다. 당시 필자는 <빛과 소금>과 <목회와 신학> 편집 책임을  맡으면서 과외로 극동방송 ‘하나되게 하소서- 신앙논단’이란 화요 프로그램 MC를 2년 정도 맡았다. 두 잡지와 창간 때나 신설되는 방송 프로의 신선함을 위해서는 파격이 필요했다.
 
필자의 위치에서 취할 수 있는 파격의 형식은 ‘필진과 출연진의 세대교체’였다. 이곳저곳에 단골로 나오면서도 발전된 콘덴츠 없는 중진, 원로급들은 ‘예우차원’에서 한두 꼭지 의뢰하는 선에서 그쳤다. 나머지는 외국에서 학위 받고 귀국한지 5년 안팎, 35~45세 소장학자, 개혁주의, 학문성, 명성과 평판 등에 기준을 두고 아르바이트생들을 현장에 풀어 명단을 작성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 ‘한국 사람은 박사학위가 목적이기 때문에 학위만 받으면 더 이상 연구를 안 하기 때문에 5년이면 고갈되어 더 이상 나올 게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예상은 적중했고, 독자들(청취자들)은 환호했다. 이때 필자의 레이더망에 선명하게 떠올랐던 인물이 바로 강영안 교수(당시 서강대)와 옥스퍼드 출신의 유정칠 교수(경희대), MIT 출신의 노희천 교수(KAIST), 스탠포드 출신의 김정환(연세대) 교수였다. 이들의 원고는 더 이상 추고가 필요 없었고, 말은 그대로 받아 쓰면 책이 될 만큼 군더더기가 없었다.
 
사유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때 만난 교수들은 거의 모두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라, 공부가 좋아서 줄창 하다 보니 교수는 덤으로 얻은 열매’라고 할 만했다.
 
80년대 중반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윤여표(충북대), 최성재(서울대), 김일수(고려대), 한정화(한양대), 백종국(경상대), 김승욱(중앙대), 양승훈(경북대), 장순흥(KAIST), 차성도(강원대), 김경천(부산대), 조정일(전남대), 소영섭(전북대), 이웅상(명지대) 등 200여명의 젊은 교수들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기독교학문연구회, 기독교세계관동역회,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한국창조과학회 등의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한국 기독교 지성의 벨트를 탄탄히 넓혀갔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정부 기관장이나 대학 총장 등의 리더가 되어 신앙과 학문의 조화를 이루어 기독교적 세계관을 실현하며 기독교 리더십을 증명하기도 했다.
 
25년 세월의 더께에서 강 교수는 성숙을 넘어선 ‘완숙의 철학자’로, 신학교 이사장으로, 그리고 다가오는 9월부터는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은퇴하는 존 쿠퍼 교수의 후임으로 부임할 예정이라고 한다. 교수 재임기간 동안 논문 110편, 저서 15권에 공동저술 30권 정도 출판했으니 학문적 성취도 대단하다.
 
“나이는 단지 숫자일 뿐”이라는 말처럼 은퇴 이후에도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왕성한 활동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그를 만나 육성을 채록했다.

▲ (재)플라톤 아카데미와 이화여자대학교가 공동기획하고 SBS, CNBC가 촬영한 인문학 아름다운 삶과 죽음 방송 장면.(2015. 5)     © 크리스찬리뷰
 
빈촌의 흙수저
 
그는 중학교도 제 때 입학하지 못할 정도로 빈촌의 소위 ‘흙수저’ 출신이었다.
 
“저는 삼천포에서 자랐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열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시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두 남동생과 같이 지냈지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학교에 곧장 가지 못하고 한 해를 집에서 보낸 뒤 중학교에 올라갔는데, 먼저 믿기 시작했던 작은 누님이 저를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지금의 사천 동북교회(이전의 삼천포삼한교회)가 제 어렸을 때 신앙교육을 받은 교회입니다. 땅의 아버지를 여의고 하늘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지만, 하나님이 저를 불러주시고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확신과 기쁨은 고등학교 때에야 체험했습니다.
 
고신 측 학생신앙운동인 SFC 26회 동계수양회 때 당시 제일영도교회에 시무하시던 석원태 목사님의 설교에 감동을 받아 목회자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학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고려신학대 첫 정규과정 입학생으로 입학해 2년을 다녔습니다. 이때 차영배 교수님 강의 들으니 워낙 좋아서 화란(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을 공부하고픈 열망이 생겨 화란어 공부해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차 교수님에게 화란어 4시간 정도 따로 배우고, 혼자서 독학해 화란어 성경 읽고, 화란어 철학사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화란어를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신학교를 중퇴했습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 유일하게 화란어를 공부할 수 있었던 한국외국어대학으로 편입시험을 치러 옮겨갔습니다.”
 
외대에서 그는 평생의 롤 모델이 된 손봉호 교수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당시 손 교수는 화란에서 막 박사학위를 하고 귀국하여 외대 교수로 부임해 10년 동안 봉직하다 서울대로 옮겨갔다. 손 교수에게 기독교 세계관으로 화란의 개혁을 주도한 정치가, 신학자, 교육가인 아브라함 카이퍼를 비롯하여, 헤르만 바빙크, 헤르만 도예벨트와 반 퍼슨을 소개받았다.
 
그들의 책을 읽으며 신앙과 삶과 학문을 서로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지향하는 태도와 문화와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배웠다.
 
언어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와 외대와의 만남 또한 그에게 학문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외대는 여러 외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좋았다. 화란어, 라틴어, 독일어를 비롯하여 이전 고신에서 배운 헬라어를 비롯하여 12개 언어를 공부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산스크리트어 범까지 할 수 있었다.
 
“외대의 좋은 교수님들 밑에서 철학과 심리학, 과학사를 공부하고, 기호논리학, 일반논리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신학교의 아주 좁은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3학년 마치고 사병으로 입대한 군대 3년도 그에겐 공부의 기회가 된 시기였다. 훈련소 입소 2주만에 허리를 다쳤다. 
 
“창원 39사단 신병훈련소에서 다친 저를 의무대에 보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지휘관들에게 문책이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냥 내무반에 열외병력으로 남아있어야 했습니다. 그때 원어사전을 갖다놓고 철학책 원서 3권을 읽었고, 황산덕 박사님의 <형법 개론>, 손봉호 교수님의 박사학위 논문을 훈련소 내무반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칸트, 데카르트, 라이프리쯔, 훗셀, 비트겐슈타인 등 근현대 철학자들을 원서로 독파했습니다. 제가 전공인 칸트는 지금까지 한글로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보초 설 땐 현상학과 분석철학을 공부하고, 고참이 되어서는 번역을 했습니다. 아무튼 군대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드니개혁신학포럼에서 깅연하는 강영안 교수.     © 크리스찬리뷰
 
열심히 한 게 비결
 
그렇게 군대에서까지 시간을 선용한 그가 전역 후 복학하니, 마침 벨기에 정부에서 국비장학생을 선발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교육부의 지원조건이 현직 교수거나 현직 교사였습니다. 교사자격증도 있어야 하는데 저는 아직 학생이니 그것도 없었지요. 마침 외대 유급 조교 생활한 것을 알고, 주한 벨기에 대사가 우리나라 외무부 장관에게 유급 조교도 시험 칠 자격을 달라고 요청하여 시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굽이굽이에서 기막힌 역전의 일이 벌어진 그의 삶이었다. 그렇게 치른 시험에 합격하여 1978년 봄, 벨기에 정부에서 학비는 물론이고 생활비 책값까지 다 지불하는 전액 장학생으로 벨기에 루뱅대학교 철학과로 유학해 3년만에 학사 석사를 마쳤다.
 
철학을 이 정도 기한, 남들보다 2배 정도 빠른 속도로 마친 것은 그동안 원서로 다져놓은 내공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 비결을 물으니 들으나마나 한 대답이었다.  
 
“빠른 비결요? 열심히 한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지요.”
 
그렇게 하고나자 화란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서 장학금 준비되었다고 하여, 청년 시절부터 그의 로망이었던 화란에서 칸트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공부 중에 레이든국립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레이든에서 학부와 대학원 강의를 맡았습니다. 학부는 영어로, 대학원은 화란어로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강의하는데 ‘이러다 한국도 못가고 여기서 이러고 마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의준비를 하다 보니 논문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표내고, 막바지 논문 내고, 85년 10월 3일 개천절에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귀국하여 처음 간 대학이 대구에 있는 기독교계 계명대학교였다.
 
“그때 참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제 기억에는 철학과에서 가르칠 수 있는 과목을 다 교수할 수 있었습니다. 논리학에서 프랑스 분석과학까지 거의 모든 철학과목을 강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벨기에 루뱅에서 학사, 석사과정 3년 공부할 때, 모든 과목을 가르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닦아두었기 때문입니다.”
 
계명대에서 4년간 가르친 후, 1990년 서강대 철학과로 옮겼다. 여기서 좀 의아로운 생각이 들었다. 서강대는 명실공히 가톨릭계인데, 뼛속까지 개신교인인 그를 어떻게 임용했을까? 
 
“서강대는 학문성을 보지 종교성을 크게 고려하지 않습니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왜 개신교인이냐고 했을지는 모릅니다. ‘개신교 두목’이라는 제가 그곳에서 단과대학장 세 번, 학생처장도 했습니다. 그렇게 좁은 학교는 아닙니다. 개신교 장로인 것 다 알고 임용해 주었습니다.”
 
서강대 부임 이후 그의 기독교계 활동은 기독교학문연구회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두드러졌다. 흔히 기학연과 기윤실로 알려져 있는 이 두 단체는 90년대부터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와 더불어 기독교세계관 운동을 주도해왔다. 신앙과 지성과 삶, 이 셋이 서로 따로 놀지 않고 통합적으로 하나된 모습으로 살자는 운동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이 단체들은 당시 젊은 기독교 지성들의 깊은 담론을 풀어내는 지적인 출구였다.
 
이때 그는 <주체는 죽었는가>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 <강영안 교수의 십계명 강의>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등 학문과 신앙의 대화를 시도하는 주옥같은 저술들을 냈다. 한국철학회 회장도 지낸 그는 ‘원전주의자’라는 별명답게, 모든 저서에서 원문으로 읽지 않으면 인용하지 않는 엄격함으로 글을 썼다.
 
학문, 그리고 신앙
 
그렇다면 학문과 신앙의 갈등은 없었을까?     
 
“철학을 처음부터 하고 대립 구도 속에서 공부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학과 철학, 철학과 신앙사이의 갈등은 없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키에르게고르, 파스칼, 어거스틴 기독교 신학을 토대로 철학을 했기 때문에 신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묻습니다.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느냐고요. ‘과학적 설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인간의 투영이 아닌가? 만일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각자 그 짐을 짊어져야지 어떻게 예수에게 그 짐을 대신 맡길 수 있는가? 죽은 사람의 부활과 영생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 반론의 여지없이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답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철학도인 저에게 ‘왜 여전히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고 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기독교 신앙만큼 이치에 맞고, 지적으로 만족스럽고, 도덕적으로 신뢰할 만하고, 감정적으로 포근한 것은 없다’고요.
 
오늘의 사상계를 지배하는 자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세속적 인본주의가 만일 참이라고 가정해봅시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자연뿐이며 모든 것은 물질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자연주의자들은 말합니다. 참과 거짓, 선과 악, 옳은 것과 틀린 것은 사회적 약속이거나 인간 정신의 산물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가치 척도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주장들이 참이라면 기독교를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고 영향력을 끼쳤던 러셀의 결론이 맞을 것입니다.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원인들의 산물이며 사람의 출생, 성장, 사람이 가지고 있는 희망과 두려움, 사랑과 믿음은 원자들의 우연한 배열의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어떠한 정열도, 어떠한 용맹도, 어떠한 강렬한 사유와 감정도 내세에서는 개인의 삶을 보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세대의 수고와 헌신과 영감과 번쩍이는 천재성도 태양계의 종말이 오면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러셀의 주장입니다. 결국 아무런 근거,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허무주의’가 결론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수용할 때 우리는 세속적 세계관으로는 인정할 수 없는 몇 가지 근본적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컨대, 이 세계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의도와 계획과 목표가 있는 세계이며 우리 자신은 한낱 원자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적 존재이고, 참과 거짓, 선과 악도 단순히 사회적 약속이나 인간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의 본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들입니다.
 
또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기 때문에 우리의 열정, 노력, 수고와 헌신이 헛되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근거일 뿐 아니라 지식의 근거이며, 도덕의 근거이며, 현재와 미래의 근거입니다. 허무주의는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극복됩니다. 이것이 크리스찬 철학자로서 저 자신이 예수 안에서 소망을 갖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신앙과 학문, 그리고 문사철의 인문학이 특히 청년들의 ‘N포 시대'라는 일컫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청어람 아카데미, 플라톤 아카데미 등 한국의 여러 인문학 강좌 최고 인기 강사인 그의 경험을 통해 들어보자.
 
“어렸을 때 저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려울 때, 학비 벌기 위해 번역 알바를 하고, 힘든 유학과 군대를 거칠 때도 아버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아버지 생각이 크게 두 번 났습니다. 박사학위 논문 받았을 때 아버지가 보고 싶었고, 지난 연말, 12월 29일 큰아들 장가보낼 때, 아버지가 그렇게 보고 싶었습니다. 기쁜 일 있을 때 아버지가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엇보다 ‘아버지’로 기억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살아계실 때 저의 신앙생활을 철저히 반대하신 분입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자 교회를 자유롭게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하나님 아버지는 가부장적 아버지라기보다는 너무나 어머니 같은 아버지, 보살피고 섭리하시고,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저의 신앙경험으로는 그 당시, 그때그때 이런 저런 어려움, 불평할 때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상당한 시간 지나 보면 인도해 오심이 한 치도 빈 틈 없이 예비하시고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경험을 해왔습니다.
 
공부할 당시, 70년 중반부터 ‘이렇게 하여 취직이 될까 안 될까?’하며 취직이, 교수되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교수하기 위해서 공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공부가 재미있고,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박사, 교수도 되었습니다. 주위에서 교수 되기 위해 공부한 사람은 교수 되면 공부에 손 놓고 잡기 쪽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부하다 보니 교수가 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죽을 때까지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을 것입니다. 공부는 지속적으로 할 것입니다. 우선 읽는 것입니다. 이곳 시드니 올 때도 책 4권이나 가방에 넣고 왔습니다. 틈나면 읽으려고요. 제가 교수 은퇴한다니 누군가 ‘야, 이제 학문으로부터 벗어나 정말 좋겠다’는 문자를 보내왔는데, 교수 사역을 끝낸 것이지 공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지요.”
▲ 시드니개혁신학포럼에서 강연하는 강영안 교수     © 크리스찬리뷰
 
신앙과 지성
 
그리스도인이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 탐구 헤아리고 드러내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하나님도 생각하시는 분, 전지하신 분이기에 우리가 뭘 알려고 탐구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인 전지하신 하나님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적어도 알지 않고서는 신앙생활 제대로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예수님은 구주이시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알아야 받아들이고 그래야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에게 뭘 맡길 수 있습니다.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알려고 애쓰고 생각하고, 묻고 따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 전통이 너무 반지성주의입니다. 덮어놓고 믿으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믿었으면 알려고 해야지요. 그래서 신앙에서 지성과 이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성주의나 지성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신앙적 지성, 신앙적 이성이 가능합니다. ‘믿는 이성!’ 그건 제대로 하나님을 알고 신자의 삶을 살아가려면 얼마나 유용한 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신앙인이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학문하는 것인가?
 
“공부는 쉬운 것은 아닙니다. 당장 그 정의만 보아도, 서양의 ‘스터디’가 애쓰다, 힘쓰다, 노력하다는 뜻이고, 한자말 역시 애쓰다, 힘써 일하다 노력하다 외에,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내다 뜻입니다. ‘공부’라는 세상의 말들만 봐도, 힘든 것,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지요. 이렇게 힘든 공부를 어떻게 제대로 하려면, 저는 인문학 강의를 할 때 자주 드는 비유가 있는데 바로 ‘자전거 타기’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지식을 배우고 공부를 할 때 정보 획득을 최우선과제로 삼았습니다. 자전거를 보십시오. 자전거 원리와 구조만 수십 번 생각하고 외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자전거를 탈 수 없습니다. 자전거는 자전거에 올라타야 탈 수 있습니다.
 
철학을 해야 철학을 알게 되고, 신앙생활도 해봐야 신앙을 제대로 배우게 됩니다. 자전거 타는 것을 배울 때처럼 중요한 것은 ‘올라타기’입니다. 올라타면 비로서 문제가 생기죠, 넘어지고 깨어지고, 다치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해봐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올라타서’ 넘어지고 깨어지고 다쳐봐야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서 신앙이 성장하게 되지요.
 
정보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자전거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전거인지 승용차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올라타야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야 변화가 뒤따라옵니다. 단순히 정보(information)을 얻는 것이 아닌 변화(transformation)가 일어납니다.
 
지식은 정보에 머물지 않고 변화를 일으킵니다. 자전거에 올라타면, 지금까지는 자전거를 보고 이야기하던 사람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으로 변화되지요.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신앙생활에 ‘올라타면’ 이제까지는 신앙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변화’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그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자전거를 신나게 타는 것이지요, 공부도 하다보면 신나게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숙달되면 재미있고, 즐거워집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정보와 변화를 거쳐 즐김과 누림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지식, 제대로 된 앎은 ‘정보(information)-변화(transformation)-즐김과 누림'(enjoyment)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제는 신앙에 관해 말하는 단계에서 한 단계 나아가 신앙에 ‘올라타야’ 합니다. 그리고 즐기며 누리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도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이냐는 첫 질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1단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하고, 2단계 그분을 따라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3단계에 들어가 그분께 영광 돌리고 그분을 즐거워하고 그분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이나 공부, 우리의 삶이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못하기 때문에 삶 따로, 신앙 따로, 학문 따로 분리되어 사는 것입니다. 중요하는 것은 Learning by Practice, Learning by Doing, 즉 실천을 통한 배움, 행함을 통한 배움입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 학문, 우리의 교회생활에서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25년 만에 시드니에서 다시 만난 본지 송기태 목사(왼쪽)와 강영안 교수.     © 크리스찬리뷰
 
철학, 그리고 신학
 
그의 삶의 궤적에서 또 하나 호기심을 갖게 하는 게 있다. 철학을 공부한 후 신학을 공부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 일이지만, 신학을 하고 철학을 하여(종교철학을 제외하고는) 학문의 정상에 오르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다. 손봉호 교수와 그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목회자의 길을 걷는 것보다 철학자의 길을 걷고 싶다 하여 이탈한 배후에는 고신에서 배운 신앙전통에 있습니다. 화란의 개혁주의자 도예벨트가 강조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이란 표어를 중고등학교 때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학문 등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라고 배웠지요. ‘어떤 영역에서 일하더라도 그 일은 주님의 일이다. 반드시 목사 선교사가 되지 않더라도 학자로서 학문세계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다. 학문세계의 일이 주님을 섬기는 일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니 반드시 목사가 아니라, 철학자가 되어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철학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철학이 신앙에서 도움이 되었고, 그걸 통해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거나 좀 더 철학적으로 잘 알아들을 쉬운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설명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신에서 신학을 2년 동안 배운 것을 ‘가장 귀한 배움’이라고 생각하며,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고신의 이사로, 다시 이사장으로 다시 고신을 위해 일하는 것도 이런 고마운 마음, 빚진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사장으로 가서 그 고생하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답은 제가 고신에서 자랐고, 고신에서 신앙의 골격이 세워졌고, 신학의 개념이 체계화되었습니다. 특히 모든 만유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것을 고신에서 배운 부채의식으로 갖고 있습니다. 이제는 빚을 갚겠다는 생각으로 이사를 하다가 이사장 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30년 동안 철학교수로 왕성한 활동을 한 그는 2개의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다고 밝혔다.
 
“하나는 현대철학에서의 철학적 신론입니다. 20세기 초중반까지만 철학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철학에서 떠난 것처럼 보였는데, 최근, 20세기 후반부터 다시 묻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대륙, 현상학적 전통에서 하나님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영미 분석철학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신에 대해서 다시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과제는 이 두 전통에서,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한 데서 조합하여 제3의 길, 가능성이 있을지 모색하는 작업이 첫째 작업입니다.
 
또 하나는 기독교 철학자로서 관심은 일상생활의 의미를 되찾는 것입니다. ‘밥 먹고, 일하고 일상의 삶을 어떻게 기독교적 철학적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이지요. 여기에 관심은 이 땅에서의 삶은 일상의 성화라고 봅니다. 일상의 삶은 2가지 도예벨트가 이론적인 사유와 대립, 소박한 경험, 일상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일상의 경험이 하나님 지으신 창조세계 충만하게 어느 하나를 떼놓지 않고 통합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터전을 ‘일상’이라 부릅니다. 그 중요성을 강조한 하나의 전통은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프랑스 유대교 철학자이자 탈무드 주석가이지요. 그는 현상학적 관습으로 우리의 일상을 그려냈습니다.  
 
도예벨트의 일상의 강조는 개혁신학의 전통을 두었습니다. 루터 칼뱅이나 다 같이 신앙의 자리는 우리의 일상, 우리의 가정, 일터, 학교 등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삶의 자리, 이것이 우리의 자리고 이것을 거룩하게 성화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루터나 칼뱅은 우리의 일상을 하나님께서 관심 갖고, 역사에 개입하셔서 원래의 창조 모습 그대로 회복하신다고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죄로 인해 일그러진 세계, 왜곡된 창조세계를 회복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로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사역에 동참, 동역하는 삶입니다.
 
종교개혁이 가져다 준 가장 큰 교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일상의 삶과 영원한 삶을 이원화하여 영원은 값진 것, 일상의 삶은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 근거 있는 목표를 제시해 주는 그런 삶입니다.
 
이 두 삶은 분리해서 볼 수 없는 것이 일상에서 영원을 맛보고 일상의 의미를 영원성에서 보는 것이 신앙이 지향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과 철학
 
일상의 삶에서 기독교적인 철학은 이원론을 배격이다. 그리고 ‘자전거에 올라타 즐기는 삶’처럼 들린다. “신앙이 이 세상, 이 일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일상이 삶 가운데 살아가면서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 의탁 의존하고, 그분의 주권에 맡기고 신뢰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한순간일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 전체가 신앙입니다. 삶과 신앙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 맡기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갖고 있는 의미가 살아납니다. 교회는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세상, 창조세계입니다. 성도들이 성도로서 태어나고 양육 받고 훈련받고 치유받아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해주는 데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양육의 장소, 훈련의 장소, 치유의 장소입니다. 완전히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구비시켜 주는 교회공동체는 삶에서 너무 중요합니다,
 
물론 교회 중심주의나 교회주의에 빠지면 이 역할을 못하지요, 세상으로 파송하고 보내기 위해, 그 속에서 하나님 자녀로, 그리스도 몸으로, 하나님 백성으로 보내기 위해 성도들을 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누가 신앙생활 잘하느냐는 교회에서 제대로 양육 교육 훈련 치유받아, 세상에서 어떤 일, 무슨 일을 맡아도 그 일을 사역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그리스도 가르침의 영향을 발휘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 500년 전통을 통해 배운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일상, 하나님의 신비> <세상을 놀라게 하라> <모험으로 나서는 믿음> 등의 저서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친근한 호주의 신학자 마이클 프로스트(몰링칼리지 부총장)와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그가 9월부터 강의하게 될 칼빈신학교에서도 그에게 ‘일상의 철학이 기독교 관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등의 주제를 요청해왔다고 했다. 
 
“그 강의하면서 체계화 정리하는 기회로 삼아야지요”하는 그는 칼빈신학교가 있는 그랜드래피즈가 화란 개혁주의자들 타운답게 화란 개혁계 2, 3세들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곳엔 그들이 세운 세계 4대 기독교 출판사인 베이커, 어더만, 존더만, 크레겔이 있어 그곳 서점에서는 원래 가격에 70%나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다고 하며 좋아했다. 몇 년 전 교환교수로 가서 800권이나 책을 구입했다고 덧붙이면서. 
 
‘아직도 가야할 길’과 많이 남은 그가 길목에서 한국교회를 향해 들려줄 ‘깊고 넓고 맑은 철학적 목소리’를 기대해 본다. 〠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윤기룡ㅣ크리스찬리뷰 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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