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Public Art)로 세상과 소통하는 김성종 화백

시대가 아플 때, 아트는 외면하지 않는다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17/06/26 [11:25]
▲ 크리스찬리뷰 7월호/2017 표지     © 크리스찬리뷰

모두가 함께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

'별이 빛나는 밤에'란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가?  당신이 중년의 나이라면 이문세가 진행한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떠올릴 것이다.

▲ 김성종 화백의 작품, 세월호 3주기 추모회 행사를 위한 포스터 원본.     © 김성종
 
그는 1985년부터 1996년까지 진행을 맡아 잠 못 이루는 젊은 세대들에게 꿈을 심어 주었다.  당신이 가요를 좋아한다면 어렵지 않게 윤항기씨가 생각날 것이다. "너와 내가 맹서한 사랑한다는 그 말. 사랑한다는 그말은 별 빛 따라 흘렀네. 별이 빛나는 밤에"
  
▲ 윤동주의 출생지 중국 용정의 명동 생가 담벼락에 걸려 있는 칠판.    

시인 윤동주 (尹東柱)

당신이 시를 좋아한다면 '윤동주의 서시'가 생각날 것이다. 그는 1917년 중국 길림성 용정의 명동에서 태어났다. 나는 2012년 그곳에 갔다. 그가 쓰던 방에는 빈소가 차려져 있었고, 영정사진 위에 '시인 윤동주 서기 66주기 추도'라는 글이 쓰여 있다.
 
그는 1945년 2월 16일 27세의 나이로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일본 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방에는 친필로 쓴 '슬픈 족속(族屬)'이란 시가 있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있다.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방 입구에는 '서시'가 걸려있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20
 
담벼락에 걸려 있는 칠판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청소 당번: 문익환, 지각생: 윤동주, 떠드는 학생: 송몽규" 문인환, 윤동주, 송몽규는 명동 소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였다. 집 옆에는 '명동 소학교'가 있다. 지금은 '명동 역사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용정 대성중학교에 가면 '윤동주 교실'이 있고, 문익환 목사의 사진이 걸려있다. "1918년 6월 1일 명동촌 출생, 1947년 한국 신학대학교 졸업, 그 후 한국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여 목사 겸 민주화, 통일 운동가로 활약 1994년 1월 18일 병사"
 
▲ 화가 빈센트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illain van Gogh)

당신이 그림을 좋아한다면 어렵지 않게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떠올릴 것이다. 이 작품은 고흐가 자살하기 1년 전에 정신병동에서 그렸다.  병동의 창을 통해 본 밤하늘을 보며 자신의 마음을 그렸다. 사실주의 화가는 보이는 것을 그렸다면, 인상주의 화가는 느끼는 것을 그렸다. 그래서 인상주의를 'Impressionism'이라고 하는 것 같다. 고흐는 37년의 불꽃과 같은 삶을 살았다.
 
나는 그의 작품을 직접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 가면 세느강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르부르 박물관'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강변 옆에 '오르세 미술관'이 있다. 오르세 미술관(Orsay Gallery)에는 원칙적으로 1848년부터 1914년까지의 작품만 전시하도록 되어있고, 1848년 이전의 작품은 '르부르 박물관', 1914년 이후의 작품은 '퐁피두 센터'가 담당하도록 분할되어 있다.
 
1848년은 프랑스 혁명이 있었던 해이고, 1914년은 1차 대전이 발발한 해이다. 이곳에는 사실주의 작가인 밀레의 작품을 비롯하여,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을 비롯한 19세기 인상파 작품이 유명하다.
 
고흐는 10년이란 짧은 활동 기간에 무려 9백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특별히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자화상은 친구인 고갱과 다툰 후 자신의 한쪽 귀를 자르고 그린 것이다.
 
그 후 그는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1889년 그곳에서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다. 영문 제목은 'The Starry Night'이다. 작품의 특징은 마을이 축소되고 밤하늘과 사이프러스 나무가 캔버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거대한 빛을 발하고 있고 꿈틀거리는 성운과 같은 것의 엉킴이 화면 전체에 비현실적인 장대한 운동감을 부여해 주고 있다. 그는 일기를 쓰듯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그리듯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그 무렵에 쓴 편지이다.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점은 기차를 타고 가는데 왜 창공에서 반짝이는 별들에게는 갈 수 없는 것일까?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서 간다는 거다." 
 
다음 해 그는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자화상을 많이 그린 이유 중 하나는 아무도 모델이 되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난하고 상처투성이인 외로운 영혼을 가진 고흐는 불꽃과 같은 삶을 살다가 '하늘의 별'이 되었다. '돈 맥린'(Don McLean)이란 가수는 이러한 고흐의 마음을 'Vincent'란 노래에 담았다. 그의 음악을 듣고 하염없이 울었던 화가가 있다.
 
▲ 김성종 화백은 ‘공공미술’의 뿌리는 시민들을 통해 태어났고, 시민들과 함께 ‘희노애락’으로 호흡하며 살아있는 민중의 아트라고 강조한다.     © 크리스찬리뷰

공공미술가 김성종(Samuel Keem) 화백  

그는 2006년 말 호주에 왔다. 한국에서 미술선생을 하다가 좀 더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하고 싶어 호주로 왔다. 그는 미술을 통해서 좀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한다. 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멀티미디어를 전공했다.
 
대학교 때 교수들의 영향을 받아 '공공미술'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지금도 '공공미술'을 가르치면서 배우고 있고, 배움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
 
2014년 한국에서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고 그는 한 달 동안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가족을 위해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아, 공연을 통해 시드니에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세월호 1주기부터 3주기까지 계속해서 시드니의 세월호 단체(416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드니행동)와 함께 행동했다.
 
▲ 5mx1m 캔버스 천 위에 세월호 종이배     © 크리스찬리뷰
▲ 고통 속에 절규하며 마지막까지 ‘엄~마’를 부르며 죽어갔을 아이들을 기억하며 시민들과 함께 제작한 ‘희망의 나라로’     © 크리스찬리뷰

3주기 때 고흐의 작품인 '별이 빛나는 밤'에서 영감을 얻어 대형 그림을 그렸다. 그림 위에 종이배를 펼쳐 별이 된 304개의 별을 부착하였다. 세월호에 수장된 304명의 고인들의 넋을 위로하여 희망의 나라로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의미로 '공공미술'을 시도한 것이다.
 
그가 좋아하는 문구는 '시대가 아플 때, 아트는 외면하지 않는다'이다. 그가 추구하는 작품의 세계는 '공공미술'이다. 6월을 시작하는 첫날 그를 만났다.

▲ 작품 마무리중인 김성종 화백     © 크리스찬리뷰
 
- 공공미술(Public Art)이란?
 
“공공미술의 뿌리는 '민중미술'이라고 보아야 한다. 공공미술은 한국에서는 신윤복 등의 계보로 보고, 이중에서 사회에 저항하는 미술이 '민중미술'이다.
 
광주사태 이후로 '민중미술'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 1980년 활발하게 활동을 하다가 문민정부가 출범하며 김영삼과 김대중 대통령 때 사라졌다가, 이번 촛불집회 때 민중미술한 사람들이 함께 했다. 예술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작업 자체를 현실에 두고 시민들과 같이 호흡을 한다. 나는 그런 것을 추구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나는 충격을 받아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기도하는 중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통해서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한국의 유가족을 위로하겠다는 의도로 공연을 했다. 교회 쪽에서는 정치적인 것과 연관이 되어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호주인들이 동참을 했다.”
 
1주기를 얼마 앞두고 시드니 세월호 단체에서 연락이 와서 같이 동참하게 되었다. 시작은 호주인들과 함께 했으나 그 이후로 한국 세월호 단체에 속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1주기 때부터 추모행사를 했다. 이것은 혼자 하는 것보다 교민들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교민이 연대하여 한 목소리를 낸다면 더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 아이들과 그림 위에 종이배를 펼쳐 별이 된 304개의 별을 부착하는 김 화백.     © 크리스찬리뷰
 
- '별이 빛나는 밤에'란 그림은 어떻게 선택했나?
 
“1주기와 2주기가 지나고 똑같은 것을 반복하다 보니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들도 점점 지치고 있었다. 3주기는 특별히 해야 할 것 같아서 유가족들을 모시고 위로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도 아파요, 우리 자신도 치유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게 되었다. 3주기 때는 힘을 집중시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을 시각적이고 감성적으로 위로하기 위한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그런 생각 중에 아내가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다. 맥린의 빈센트라는 음악을 들어보라고 했다. 나는 들으면서 많이 울었다. 이것을 모티브로 해서 행사준비를 하면 될 것 같았다. 내 의견에 모두가 찬성하여 행사준비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염원이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별이 추모의 방향을 인도했다.”

▲ 김성종 화백의 ‘꿈을 꾸는 소년’ (100호) 작품, 배고픈 소년의 해맑은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보여주고자 표현한 인물화.     © 크리스찬리뷰
 
- 평상시 고흐를 좋아했는가?
 
“누구나 그렇겠지만 작업을 하다 보면 힘든 순간들이 온다. 그때 생각나는 사람이 고흐이다. 나는 고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고흐는 물감 살 돈이 없어서 동생인 테오에게 지원을 받았다. 고흐는 늦게 그림을 시작했다. 선교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화가가 되었다.
 
그의 삶은 자살로 마감했다. 맥린의 노래를 들으면 간접적으로나마 고흐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생의 마지막 10년을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았다. 유명해지기 위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림을 계속 그리기 위해 그렸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그림을 통해 말하려고 했을 지도 모른다. 고흐는 마치 일기를 쓰는 것처럼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전에는 몰랐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고 그림을 그렸다. 이제 호주에서 풍경화를 그릴 때 '하나님은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그린다. 보이는 것을 그리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중심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니까,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 김성종 화백의 세월호 추모 퍼포먼스(시드니올림픽공원, 2014)     © 김성종
 
-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보이는 것은 이해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현대미술인 추상화는 작가의 생각보다 보는 사람의 생각이 더 중요하다. 관람객들은 보고 느낀 대로 결론을 내리면 된다. 퀴즈를 풀듯이 답이 하나가 아니라 보는 사람에 따라 답이 다르다.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작가들은 배운다.
 
전시회를 여는 목적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는 가를 알기 위해서이다. 현대 미술은 근대와는 다르게, 과거를 부정하고 미래를 추구한다. 예술이란 미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대예술은 갤러리 안이 아니라 밖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최근 오페라 하우스를 중심으로 도심 곳곳에서 화려하게 펼쳐지는 빛의 축제 '비비드 시드니'(Vivid Sydney}와 같은 것이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 아티스트의 목적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가?
 
“그렇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와 내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아트를 통하여 나누고 싶고 소통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을 '공공미술'이라고 한다. 공공미술의 중요성은 풍요로운 삶을 제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공공미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우르고 위로하고 새롭게 하는 것이다.
 
나는 저항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다. 시대가 아플 때 예술가가 외면하면 시대는 더 고달프다. 아트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들이 아파할 때 혼자 미술을 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아니다. 예술은 함께 하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것이 아트의 목적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 김성종 화백의 세월호 3주기 추모 퍼포먼스(하이드 파크, 2017). 별이 된 304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국화꽃 한 송이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국화꽃 한 송이’ 주제의 추모 퍼토먼스 아트로 헌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 공공미술과 민중미술은 같은가?
 
 “조금 다르다. 민중미술은 공공미술 안에 있다. 민중미술은 민중이 하고 싶은 말을 미술로 표현한 것이다. 미술은 언어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 'Art is language'라고 한다. 공공미술이란 미술을 통하여 사회참여를 하는 것이다. 시대가 복잡할수록 아트가 위안이 되고 에너지가 돼야 한다.
 
작가들은 그런 목적을 가져야 한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보다도, 대중을 향해야 한다. 아트는 '사유' (private)가 아니라 '공공'(public)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사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생계와 연관된 작가들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아트는 나눔이다.
 
- 영어 이름이 Kim이 아니라 Keem인가?
 
“내 영어 이름은 사무엘(Samuel)이다. 이름의 첫 자와 같은 뿐 아니라, 아내가 사무엘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아내의 성이 '임'인데 Leem라고 썼다. 아내는 Kim 대신 Keem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발음은 같다. 하지만 Kim보다 Keem이 부드럽다. 사람들이 한번 들으면 기억을 한다. 그래서 이름을 Keem이라고 쓰게 되었다.”
 
- 학원 이름을 ArtArk라고 지은 이유는?
 
“오래 전 신년 초에 목사인 큰처남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베드로는 그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다'란 말씀을 주셨다. 처남은 이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삶을 살기 바란다고 했다.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순종'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 순종을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내가 신학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때 나는 서원기도를 했다.    
 
"하나님, 그림 그리게 해주신다면 평생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 ArtArk 작업실에서 김성종 화백.     © 크리스찬리뷰
 
나는 아트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로 순종했다. 그래서 '아트교육과 공공아트'를 하는 것이다.
 
'ArtArk'는 정식으로 호주 정부에 등록되어 있다. 이 이름은 아무도 사용하지 못한다. '아트아크 예술학교'가 교육의 요람이 되기를 바란다. 아트를 통하여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 바란다. 아크란 법궤란 의미도 있지만 방주란 의미도 있다. 노아의 방주 안에서 새 역사가 만들어 진 것처럼, 이곳이 공작소와 요람이 되기를 기도한다. 많은 사람들이 배워서 사회에 기여하는 인물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물들이 이곳을 통해서 배출되기를 원한다.
 
일종의 학원이지만 학교처럼 운영하고 싶다. 한국에서 입시학원에 근무한 적이 있다. 선생 중에서 아이들을 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분개하니 학원이니까 그렇지 않냐며 말을 합리화했다. 설령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가르치는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아이들이 뭘 배우겠는가? 
 
'잘 그린다'와 '잘 표현한다'는 다르다. 나는 아이들이 잘 그리는 것보다 잘 표현하기를 원한다. 예술은 자기표현이다.”
 
- 특별이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나?
 
“10월에 발메인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나는 전시회는 하지만 판매는 하지 않는다. 전시회를 하는 이유는 대중과 소통하고 싶어서이다. 만약 내 작품이 많은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전시하기 위한 것이라면 공짜로도 줄 수 있다. 이곳에서 딱 한번 공모전에 출품한 적이 있다. 실험적으로 호주에의 미술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였다. 사실 나는 명예욕이 없다. 아주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내가 들어나는 일이 있다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통하여 더 많은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 작품의 영감은 어떻게 얻나?
 
“작품의 영감은 큐티를 통해서 받는다. 큐티할 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그린 여러 작품들이 작업실에 있다. 인터뷰를 끝내고 보여 주겠다.”

▲ 세월호 추모 행사 때마다 설치되는 김성종 화백의 작품(위). 아래 사진은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린 5.18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 화백.     © 크리스찬리뷰
 
- 작품의 방향성은 있는가?
 
“나는 다양성을 추구한다. 서양화든, 동양화든 상관없이 표현방법을 여러 가지를 택한다.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기법을 취한다. 심각한 이야기를 심각하게 말하면 듣는 사람이 괴롭다. 나는 무거운 소재를 가볍게 표현한다. 상대방에게 부담주지 않는 표현 기법을 택한다.”
 
- 미술이란 무엇인가?
 
“미술은 언어이다. 사람들이 말을 할 때 강하게 하거나 부드럽게 하듯, 나는 미술을 통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표현한다.”

▲ 인터뷰를 마친 후 ‘꿈을 꾸는 소년’ 작품 앞에서 김환기 사관(오른쪽)고 함께 한 김성종 화백.     © 크리스찬리뷰
 
- 가족은 어떻게 되나?
 
“나는 1968년생이고, 아내는 3살 연상이다. 37살 때 결혼을 했고, 7살 된 아들이 있다. 아내는 글을 쓴다. '호주한국문학협회', '캥거루 수필 동인'의 모임이 작업실에서 있다. 버우드에서 살 때부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는 않지만 다양한 글공부를 하고 있다. 아내는 글을 쓰고,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호주 오기 전 3년 정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교에 매여 있으니 화가로서 시간이 부족했다. 호주에 신혼여행을 온 것이 계기가 되어, 화가로서의 삶을 살기 위하여 호주에 오게 되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고민하는 것보다 결단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왔다.
 
돌아보면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는데, 아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되었다. 원래 임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아이를 선물로 주셨다.”
 
- 부모님의 신앙은?
 
“장인은 목사이다. 우리 집은 원래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집은 목포였는데 어머니가 정신질환에 걸렸을 때, 서울에 와서 조용기 목사의 기도를 받고 치유되었다. 그때 아버지는 서원을 했다. 만약 고쳐주면 남은 생을 주를 위해서 살겠다고 했다.
 
그 후 아버지로 인하여 가족은 물론이고 일가친척까지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아버지는 퇴근하고 오시면 전도하기 바빴다. 아버지는 아브라함의 역할을 감당하셨다.”

▲ 김성종 화백은 “아트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치유와 회복이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며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기를 원한다”라고 밝혔다.     © 크리스찬리뷰
 
- 앞으로 꿈이 있다면?
 
“아트를 통하여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 아트로 치유와 회복이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서원한 것처럼 끝까지 나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기 원한다.”
  
필자는 짧은 시간 동안에 참 좋은 사람을 만나 많은 것을 배웠다. 그가 말하는 '공공'(public)이란 단어는 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특별히 세월호 참사 이후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이란 단어는 더욱더 주목 받게 되었다. 이제 교회는 오랜 전통인 '개인적 기복신앙'과 '신앙의 내면화'를 넘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공공신학'에 집중해야 한다. '공공'(public)의 반대는 '사유화'(private)이다. '신앙의 사유화'란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되면 된다'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고 했다.
 
현장을 떠난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삶의 현장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다. 이제 우리는 '사적 신앙'에서 벗어나, '공적 신앙'을 회복해야 할 때가 되었다.〠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본부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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