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사역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대구 동신교회 권성수 목사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7/06/26 [11:58]
▲ 17년 전 40대 후반, 척박한 불교 도시 대구 땅에 내려와 목회하는 동안 대구 최대 교회를 이룬 권성수 목사.     © 크리스찬리뷰

오래 전부터 대구는 불교 도시였다. 천년고도 경주가 가까운 탓도 있지만 대구 주변의 명산은 전국적인 명찰로 들어서있다. 대표적인 예로 비록 90년대 작품이지만 팔공산에는 불상 높이는 30m인 세계 최대의 석불이 버티고 있다. 분지 특유의 보수적인 도시는 유불선과 무속신앙 성이 견고했다. 
 
이러한 도시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도전했다. 1891년부터 부산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미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배위량)가 대구에 1893년 4월에 첫 발을 내디뎠다. 대구, 상주, 안동, 영천, 경주 등을 둘러보며 경상도 순회전도를 하던 베어드 선교사의 눈에 대구가 들어왔다. 1896년 4월, 베어드 선교사는 부산에서 대구로 선교거점을 옮겼다.
 
이때 구입한 한옥 네 채가 영남선교의 중심지가 된다. 대구 선교의 문을 베어드가 열었다면, 기틀을 잡은 이는 아담스(안의와) 목사다. 그는 베어드 선교사의 처남이다. 베어드가 대구로 부임한지 얼마 안 돼 서울로 발령이 나면서 그가 후임이 된 것이다.
 
1897년 11월부터 아담스는 본격적으로 대구선교를 담당하면서, 1898년 한옥 네 동을 교회당으로 만들어 남문안교회(대구제일교회 구 예배당)를 설립했다. 대구 최초의 교회다.
 
이후 6.25 사변을 거치면서 남하한 기독교인들이 합류하면서 한때 평양에 이어 제2의 예루살렘을 꿈꾼 적도 있다. 한국 음악의 선구자들인 현제명, 박태준과 근대 시문학의 개척자 박목월, 3대 주석가인 이상근 목사 등을 비롯, 선교사들이 세운 계성, 신명 등의 학교를 통하여 출중한 기독교 인물이 배출되기도 했다. 이들의 혁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구의 복음화 비율은 전국 평균을 밑돌고 있다. 
 
잘 나가던 교수
 
이처럼 척박한 대구 땅에 총신대 대학원장과 기획실장을 역임하고 유력한 총장 후보로서 활발한 집필, 번역, 강연활동을 펼치던 중견 교수가 17년 전, 화려한 스펙을 다 내려놓고, 대구의 800명 정도 되는 중형교회에 부임하여 오늘날 대구 최대 교회를 이룬 목회자가 있다. 그가 바로 대구 동신교회 권성수 목사이다.
 
필자는 그가 총신 교수로 막 부임했을 때, <빛과 소금> 기자로 있을 때 만났다. 이후 91년 말, 출판사 창업을 구상하고 있을 때, 그는 안식년을 맞이하여 횃불회관 부소장 자격으로 출퇴근 하고 있었다.
 
그는 재정적인 도움을 줄 만한 어느 유력자를 소개시켜 주려는 호의에서 만나기도 했다. 이후 필자는 호주로 오고, 그가 대구동신교회로 부임했다는 말을 들었다. 의외였다. 그는 당시 옥한흠 목사의 ‘총애’를 받고 사랑의교회 주일예배 설교(1~4부)를 맡아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랑의교회 차기 담임목사로 물망에 오른다는 소문도 떠돌고 있었다. 그의 인기는 서울의 몇몇 대형교회 청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5년간 기도를 드리는 동안, 서울의 여러 교회, 때로는 초대형교회에서도 청빙이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김의환 총장이 막아섰다. “내 오른팔을 왜 잘라 가시려 합니까!”
 
어쨌든 ‘좋은 자리(?)들을 두고, 하필이면 대구의 중형교회였을까? 만나자마자 그것부터 물었다.
 
 “돌아가신 김의환 목사님이 총신대학교 총장으로 계실 때, 저는 기획실장으로 재직했습니다. 기획실장이란 총장의 ‘오른팔’로 잘 보필해야 하는 자리 아닙니까? 당연히 학교의 현상을 정확히 보고 미래를 예측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미래학 서적을 손에 집어 들었습니다.
 
앨빈 토플러, 존 나이스비트 등이 쓴 책 30여 권을 독파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21세기는 ‘실천적 지식인의 시대’라는 것이었습니다. 21세기에는 이론적 지식이 아닌, 실천적 지식이 효과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총신에서 그때까지 14년간 성경해석학과 신약신학 분야의 여러 과목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의 강좌는 늘 인기만점이었고, 학생들의 만족도도 아주 높았다. 특히 로마서 강해를 듣겠다고 몰려든 신학생이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다른 교수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400명으로 잘랐다.
 
또 하나의 계기는 신학교 사은회 때마다 졸업생들이 와서 한마디 한마디 말하는 게 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교수님, 현장 목회와 신학에는 괴리가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하고 목회가 영 다릅니다.”
 
그에게는 이 말이 상당히 불편했다. 결국 신학이 목회 현장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표현이었다. 한두 명이 아닌 졸업생들이 자주 이런 얘기를 했다. 그의 마음에 ‘그래! 내가 한번 보여줄까! 목회와 신학의 괴리가 있는지 없는지, 정말 보여줄까!’라는 도전과 오기가 불끈불끈 솟아올랐다. 

▲ 동신교회 전경     ©동신교회
 
실천적 지식인

그가 신대원에서 공부하던 70년대만 해도 신학교수들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들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로 현장 목회를 하며 가르쳤다. 그런데 그가 교단에 섰을 때 신학생들은 달라져 있었다. 신학교는 목회자가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졸업 후 실제 목회는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아니라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먹혀드는 목회스타일’을 따라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는 신학교 강단이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 자신이 쌓은 지식을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실천하면서 가르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옵소서”
 
그러던 중 대구 동신교회에서 헌신예배를 인도했다. 두 명의 장로가 설교 후에 찾아왔다.
 
“교수님, 앞으로 총장이 되실 분이고, 제일 인기도 많으시고... 동신교회 오시라고 해도 안 오시겠지만 그래도 기도나 한 번 해 보이소.”
 
마음에 둘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서울 중심인 시대에, 서울도 아닌,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구는 생각도 해본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볍게 “기도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정작 이 문제를 놓고 기도했을 때, 동신교회의 무게감은 남다르게 다가왔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하나님의 몰아가심이 느껴졌다. 평소 학생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면 시골이든, 한국이든, 어디든 가야 한다”고 가르치던 그가 ‘아골골짝 빈들에도 골라골라 가오리다’하면 실천적 지식인이 되겠는가 하여, 결국 하나님께 항복했다. 그렇게 대구행을 결정했다. 1999년 연말의 일이었다.
 
주변에선 그의 대구행과 관련, 의견을 달리하는 목소리가 무성했다. 그의 멘토 옥한흠 목사는 생전에 그의 대구행을 ‘어리석다’며 만류하기까지 했다.
 
“총장하기 위해 3년 안에 목회 실험하다 떠날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했다(총신 총장 자격은 현장 목회 3년이 있어야 한다). 가족들도 모두 반대했다. 특히 부인이 울면서 만류하는 것을 극복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대구에 가서 목회할 만한 곳인지 한번 살펴보자고 제의했다.
 
대구에 내려가 교회는 둘러보았는데 부인이 교회 뒷산에 가보자고 했다. 동신교회는 8천여 평의 산을 끼고 있는데 있었다. 그 산에 올랐을 때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이윽고 부인이 말했다.
 
“당신이 왜 동신교회에서 목회하려고 하는지 이제 알 것같아요.”
 
동신교회 뒷산에 올라서 대구를 가로질러 경산으로 뻗어 달리는 달구벌대로와 대구의 상징인 팔공산을 바라보면서, 동신교회는 미래를 향해 큰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족 반대의 큰 강을 건넜다.
 
“그러나 막상 목회를 결정하고 대구로 내려올 때, 아내는 ‘딸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걱정이 태산 같았다. 자녀교육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고, 더 여건이 좋은 사람들은 외국으로 유학이라도 보내지 않습니까? 이런 시대의 조류에 역류해서 서울에서 대구로 딸들을 데리고 내려오는 저를 볼 때 아내는 정말 화가 많이 난 것 같았습니다.
 
아내의 우려가 사실로 드러났을 때 할 말이 없었습니다. 딸이 대구에 있는 중학교에 갔다 온 첫날 ‘국어 시간에 선생님의 말씀을 절반은 못 알아들었어요’하는 겁니다.  좀 과장된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선생님의 사투리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니 아빠로서 할 말을 잃었지요.  ‘아내와 딸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회준비           
 
이렇게 ‘안 된다. 안 된다’ 하던 대구행을 결정했다. 제2의 인생을 열어가는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철학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었다. 유학시절 늘 목회에 관한 경건서적들을 사 읽으면서 ‘교회를 위한 신학이 아니면 할 필요가 없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신학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나는 평생 교회를 세우는 신학을 하겠다’는 각오를 했던 그였지만, 막상 현장 목회에 부딪히려니 큰 부담이었다.
 
신학교 교수 시절, 사랑의교회 설교를 맡아 할 때, 그가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 후임이 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할 즈음, 하루는 옥 목사가 물었다.
 
“교수님, 목회하고 싶으세요? 목회가 뭔지 아십니까?”
 
그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다. 그러나 속으로 심한 모독감을 느꼈다. ‘목사님! 제가 증조할아버지부터 예수를 믿어 4대째 예수 믿는 집안에, 아버지가 목사님이에요. 그뿐인가요? 5형제 모두가 목사인 집안입니다. 게다가 저는 한국의 가장 유명한 보수적 개혁신학의 요람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교수예요!’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겉으로는 옥 목사의 질문에 “허허! 목사님, 저희 아버지도 목사이고...  저도 목회자인데 말이지요!” 두루뭉수리로 대합하며 화끈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옥 목사의 간단한 질문 “목회가 뭔지 아십니까?”라는 질문이 단순하지 않았다고 재해석하게 됐다고 했다.
 
“옥 목사님의 질문은, ‘목회 현장에서 교회가 확 뒤집어지는 것 같은 그런 고난을 당해보지 않고, 목회의 고난이 뭔지 아십니까?’하는 질문이었어요. 목회를 하며 ‘지독하게도 악한 사람이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변화되는 과정을 보지 않고, 당신이 훈련 목회가 뭔지 아십니까?
 
귀신에 들려 밤새 잠도 못자고, 가위 눌리고, 공포에 짓눌려 얼굴 색깔까지 바뀐 사람들을 예수생명을 가진 강한 용사로 만드는 목회가 뭔지 아십니까?’하는 그런 질문이었어요. 굉장히 깊은 질문을 하셨던 거죠.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질문이 이해가 돼요.”
 
그는 목회를 하며 가르치고 싶었다. 교인들의 ‘생각의 틀’을 바꾸고 싶었다. 신학을 목회에 접목하고 싶었다. 신학교 시절 김명혁 교수로부터 신학의 균형감각을 배웠고, 옥한흠 목사의 설교와 목회를 좋게 생각했다. 그래서 신학적 균형감감각을 갖고 옥 목사의 훈련목회를 기본으로 삼고 목회를 전개하면 일단 안전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성경과 성령의 균형을 잡은, 즉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해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BEST 목회철학’을 세웠다. 즉 Bible Exposition Spirit Transformation(성경강해를 해서 성령으로 변화시킨다). BEST!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을 성도들의 생각과 삶 속에 구축한다는 정확한 목표를 갖고 그것도, 쉽게, 재미있게, 생활에 적용하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기대했다. 지난 17년 동안 이 목표를 갖고 가르치고 훈련하며 한길로 뛰어왔다. 그러자 성도들의 삶 가운데 변화의 물결이 몰아쳐왔다고 한다. 그의 가장 큰 보람은 성도들의 변화다.  


▲ 권성수 목사 부부가 시드니새순장로교회 특별부흥집회에서 성도들로부터 환영받고 있다.     ©시드니새순장로교회
 
쉽고 재미있게, 생활에 적용하도록

 
장로들을 교인들의 일치된 의견이 나왔다. “목사님, 목회하는 동안 우리가 모두 변화됐습니다!” 예배 후에 성도들은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말로 끝내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바뀌었습니다’라며 자신들의 변화된 삶을 알려 주었다. 심방을 가도 마찬가지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이 했던 설교를 역으로 다시 듣는 분위기라고 한다. 강단에서 한 설교가 성도들의 삶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였는지, 그들의 입을 통해서 다시 듣는 경험은 현장 목회자만이 할 수 있는 짜릿한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성도들이 변했고 가족도 변했다. 관공서와 학교를 활용한 ‘시스템 전도’와 관계전도에 힘쓰며 부흥을 견인했다. 교회 주변에 즐비하던 유흥가도 자취를 감췄다.
 
그가 담임한 후 교회는 폭발적 성장을 거듭했다. 40대 후반에 대구동신교회에 와서 17년간 목회하는 동안, 8백여 명이던 성도들은 출석 8천 명 수준으로 급성장하여 대구의 대표적인 교회가 되었다. 예산은 17년 전보다 12배 규모로 커졌다. 변화하는 성도들과 함께 교회의 외형적 성장도 가속화하고 있다.
 
이전에 알던 ‘샤프한 신약학 교수!’ 권성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부드럽고, 완숙한 목회자 권성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기도와 설교에 생명을 걸고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생명사역을 위해 광인 정신으로 살아가는, 목양에 일생을 바친 목회자가 우뚝 자리했다. 그의 생각은 차가웠고, 가슴은 뜨거웠다.
 
인기 만점이던 신학교수가 목회를 하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동신교회에서도 그의 설교는 ‘인기’다. 이유가 있다. 그는 진리를, 성도들에게 쉽게, 재미있게, 생활과 연결해서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허무주의·쾌락주의·복음주의를, 예를 들어 이렇게 설명하는 거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먹어봤자 뭐 하냐, 다 병들어서 없어지는 건데, 다 지나가는데 뭐가 필요해!” 이러면 허무주의자다.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와, 이게 최고야.” 경상도 사투리로 “쥑이네, 쥑여!” 이러면서 “난 이 맛에 사는 거야. 딴 거는 필요 없어.”
 
이러면 쾌락주의자다. 그런데 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지나가긴 지나가겠지만 매순간 의미 있지 않나. 하나님 주신 것을 이렇게 즐기는 것이 감사한 거지. 그리고 내가 이렇게 즐기기만 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고 사명 감당하라고 주신 거 아니겠어? 사명 감당해야지.” 이러면 신앙이 되고 복음주의자가 된다는 것이다. 쉽게, 재미있게, 생활에 연결시켜서 가르치면 철학적 주제도 쉽게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설교할 때, 그의 시선은 거의 교인들을 향한다. 외워서 하기 때문이다. 매일 설교를 위해 글을 쓴다. 여기에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고 주석을 보고 같은 주제의 책을 참고해 살을 붙인다. 현실도 연구하고 자신을 살피고 기도한다.
 
부인의 모니터링도 받는다. 부인이 자신의 설교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 앞에서 설교한다고 한다. 10분 동안 축약한 요약 설교를 들려주며 부족한 부분을 점검받는다. 딱딱한 부분은 없애고, 성경적 근거가 약한 부분은 채워 넣는다. 부인이 일종의 코치이다.
 
날마다 설교의 내용을 묵상한다. 원고는 들고 나가지만 매일 묵상하는 말씀이라 거의 외운 상태에서 강단에 선다고 한다. 묵상하는 동안에 끊임없이 그는 자신에게 설교를 했기 때문에 강단에 섰을 때는 이미 네댓 번 설교한 상태가 된다. 설교 준비는 누구보다 철저하게 한다.
 
그는 “여기서 실패해 성도들이 설교에 감동을 받지 못하면 제자훈련은 율법주의나 고역이 된다, 설교에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이유다”라고 말한다. 요즘 그가 관심을 갖는 목회자는 ‘팀 켈러’다.
 
그는 팀 켈러에 대해 말씀을 보고 적용하는 눈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설교학에서는 그것을 Fallen Condition Focus, FCF라고 한다. 타락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파란 색깔을 ‘이건 파란색이니까 믿으세요!’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 옆에 하얀 색을 갖다 놓고 파란색을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생명사역을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목회해 온 그는 ‘생명 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2015년부터 그는 목회자 200~300여 명을 선착순으로 모집, 자신의 신학적 토양과 목회적 경험을 후배 목회자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하고 있다. 시드니에 온 것도 막 3차 생명사역 세미나를 마치고 왔다고 하였다. 
 
▲ ‘하나님의 사랑’을 주제로 열린 시드니새순장로교회 특별부흥집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권성수 목사.     © 시드니새순장로교회

생명사역

신학은 목회의 뼈대라는 소신을 갖고 있는 그는, ‘생각의 틀’을 성공 키워드로 꼽았다. 생각의 틀을 바꿔야 한국교회가 살아날 수 있다고까지 전망했다. ‘생명사역’의 일환으로 전개되는 생각의 틀 바꾸기 작업의 핵심은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일’이다. 교회에서 신학을 가르친다고 하면 ‘딱딱하고 지루하고 재미가 없고 생활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꾸는 것이다.
 
성경에 근거한 주제 중심으로 체계화된 신학사상인 성경적 조직신학을 생각의 틀 속에 조각해서 마음을 바꿈으로 생각과 감정과 행동과 습관과 인격과 인생을 바꾸는 것이 바로 생명사역이며, 목회자가 먼저 생각의 틀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학 교수 출신 그가 목회 현장에서 가장 안타까워했던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운동권은 들어가면 2개월 만에 혈서를 쓸 정도로 헌신합니다. 이단 신천지는 9개월 만에 정통 교인을 골수 이단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서 사람의 의식을 바꾸고 생각의 틀을 바꾸면 이게 인생을 바꾸게 되는 겁니다. 왜 이게 안 됩니까? 이유는 생각의 틀을 바꾸려면 체계적인 게 머릿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안돼서입니다.
 
신천지는 ‘이만희 재림주 만들기’라는 목표를 갖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 봉함된 비밀인 비유풀이, 계시록의 실상 등 교육 과정을 체계화시켜놨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그냥 이 책, 저 책,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 좋다고 하면 이것저것 갖고서 하니까 들을 때뿐, 목회자 자신은 물론 성도들에게도 체계가 잡히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제가 있을 때 막 흔들리는 거 아닙니까!”
 
바로 이 부분을 해결하는 방법이 신학과 목회의 접목이며, 이 작업을 통해 교인들의 생각의 틀을 바꾸고, 마음과 생활을 바꾸어 나가겠다는 의지다. 그는 이것이 적용된 것이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이며, 구원론과 교회론을 중심으로 성경적 조직신학을 체계적으로 새겨줌으로써 생각의 틀을 바꾸었다고 평가했다.
 
그가 강조하는 ‘생명사역’이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셨던 사역(마 9:35)으로,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사역이다. 사고의 틀을 바꾸면 생각이 변하고(知), 느낌이 바뀌며(情) 행동이 달라진다(意)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신학을 목회에 접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목회 현장은 신학이 무시되고, 방법론만 난무하다고 한탄했다. 그는 목회 현장에 만연된 신학무용론을 지적했다.
 
“신학이 필요 없다는 생각 때문에 교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신학 체계를 쉽고 재미있게 생활에 적용하도록 전달하는 게 목회자의 역할인데, 도리어 신학에 문제가 있다고 무시합니다. 마치 아기를 목욕 시킨 후에 목욕물만 버리는 게 아니라 아기까지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신학은 목회의 뼈대입니다.”
 
그는 “신학적 체계로 생각의 틀을 바꾸는 일은 본질적 사역과 관련이 깊다”며 이는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는 한때 오십견으로 팔을 전혀 쓸 수 없었다. 그러나 꾸준한 운동으로 천천히 회복했다. “본질 회복은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해야 가능합니다. 한꺼번엔 안 됩니다. 늦더라도 바르게 목회해야 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깊어지는 목회, 지금의 지혜와 심정으로 그는 만일 40대로 돌아간다면 자신의 목회 사역은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생길 거라고 말한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자신이 경험한 목회 노하우를 나누고자 생명사역 컨퍼런스를 개설했다.
 
“목회 현장에서 본질 목회에 충실하면서도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어요. 예수의 생명이 약동하고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람이 잘 나서 그런 게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한국 교회가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테크닉이 아니고, 기교가 아닌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삽니다.
 
생명사역도 그렇습니다. 목회 테크닉을 쓰지 말고, 본질, 본질! 예수님의 본질,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근거한 생명사역을 닮아가는,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 그런 목회를 하자는 겁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면 나도 살고 남도 살고 교회도 삽니다.”
 
이처럼 생명사역 컨퍼런스는 교회성장 노하우와 써 먹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설교의 트렌드와 설교의 동향과 방향을 짚어주면서 성령설교가 왜 필요한지를 소개했다.
 
“아무리 완벽한 설교라도 성령이 역사하는 설교여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설교자가 예수님과 같이 사는데서 성령이 임합니다. 일주일 내내 설교를 준비하면서 늘 주님과 교제하는 의식,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 기도와 설교에 생명을 걸고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생명사역을 위해 광인 정신으로 살아가는 권성수 목사     © 크리스찬리뷰
 
성장과정의 트라우마
 
인기교수, 완숙한 목회자로서 힘껏 달려온 그는 사실 ‘흙수저’출신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목회하는 부친과 어린 시절 떨어져 할머니 밑에 성장했다.
 
부친은 그나마 시골에 있던 재산 다 팔아서 전세방 두칸 얻고는 몽땅 교회에 바쳐 홍제동에 개척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마저 개척에 중추역할을 한 여 집사와 그녀의 불신 아들이 술 먹고 난동을 부리며 교회를 탈취하려는 통에 그의 가족은 퇴직 사례금커녕 그 흔한 전별금도 못받고 교회를 떠났다.
 
그 와중에 가족의 가난과 비참한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중학교를 겨우 마친 그는 고등학교조차 갈 수 없었다. 밤에는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하고, 낮에는 홍은동 길거리에서 ‘오꼬시’라는 쌀과자 장사를 하며 가난을 버텨나갔다. 
 
그밖에 신문팔이, 떡장사도 하고, 시장에 버려진 무와 배추 이파리를 주어다 쩌먹으며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하나님이 성도들의 삶을 예정해 놨다고 하는데 자신에게 이토록 가난한 삶을 살게 하신 걸까.
 
“아버지, 우리는 왜 가난해야 합니까! 목사는 왜 힘들게 살아야 합니까! 아버지는 왜 목회자가 되셔서 이렇게 사는 겁니까?” 더 답답했던 게 있었다. 5형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부친은 이들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한 것이었다. 부친에게 대들었다.
 
“아버지, 미치시려면 혼자 미치셔야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심지어 그의 형은 “목사가 되느니 장교가 되어 가족들을 다 사살하고 자결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5형제의 반항은 길지 못했다. 부친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자녀들의 반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셨다. 결국 5형제 모두 목회의 길로 백기투항하게 된다.
 
기도하는 아버지께 반항했던 둘째 아들, 그의 인생에서도 ‘기도’는 운명처럼 따라다닌다. 그의 인생의 어려운 순간과 고비마다 기도는 떠나지 않았다.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영문학과에 시험을 쳤지만 낙방했다. 2차였던 숭실대 영문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목회자가 되기 싫어 영문학을 전공하고, 도망다녔지만 기도하면 할수록 마음에 ‘목회직’에 대한 부담은 떠나지 않았다.
 
군 제대하기 전 ‘안전하게 제대하게 해 주시면 10일 동안 금식하겠다’고 기도했다. 안전하게 제대한 후 10일 동안 금식하며 그는 목회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그래도 현실은 나아지는 게 없었다. 총신대 신대원 시험을 치렀다. 그때도 기도했다.
 
‘만일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다닐 수 있게 해주신다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는 걸로 믿겠습니다.’ 그는 새벽마다 총신대학교 뒷동산에 올라가 기도를 드렸다. 시험 결과는 놀라웠다. 또 수석합격이었다. 찢어질 듯한 가난에, 휴학을 하고 2년 만이라도 직장생활을 할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하나님은 너무도 선명하게 인도하셨다.
 
그렇게 가난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유학 가서도 끝나지 않았다. 고생이라곤 모르고 성장한 중학교 교사 출신 부인은 봉제공장에서 손가락을 다쳐가며 일하면서 가사를 책임져야 했다.
 
결혼 후 7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없을 때 나와 아내는 사막의 모래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그와 인터뷰를 마칠 때 마지막으로 들려준 말이 여운처럼 남았다.    
 
“고통을 뒤집으면 은총이 보이더군요.”〠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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