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한 가지
장례의식
 
한길수/크리스찬리뷰
▲ 죽음이나 장례는 한 인간의 삶의 여정에서 마지막에 치루어지고 그 사람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 크리스찬리뷰


주변의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세금이고, 다른 하나는 장의사라고 한다. 그런데, 때로 세금을 피해가는 사람들도 있는 걸 보지만, 그들도 장의사는 피하지 못할 것이다.
 
90년대 중반 박사 논문으로 시드니 교포들의 건강과 의료 서비스 이용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고 가장 인상적인 인터뷰 중의 하나는, 당시 유일하게 교민들의 죽음에 관련된 모든 절차를 돌보아 주는 장의사를 만난 일이다.
 
당시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드물었던 나에게, 그분은 너무나도 숭고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다가 왔다. 남쪽의 먼 나라에서 삶을 다한 이들에게 필요한 마지막 의식을 베풀어 주는 그분에게, 그때나 지금이나 고마운 마음으로 가득한 것은 매한가지이다.
 
내게 시간을 내어 주신 그분께 고마웠고, 장의사를 방문한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작은 두려움과 긴장에 휩싸여있었음에 틀림없다.
 
호주에 여행을 왔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어간 젊은이, 그리고 호주의 교포 이민 1세대로 자신과 후손들을 위한 삶을 개척하고 좀 쉬면서, 안식의 삶을 누리려는 와중에, 건강검진을 통해 발견된 질병을 계기로, 곧 운명을 달리한 선진들의 삶의 이야기는 내가슴을 쥐어짜듯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나는 그 한 시간 인터뷰의 시작부터 끝까지 얼마나 긴장했던지 준비했던 녹음기의 포즈 버튼을 한 번 더 눌러야 녹음이 될 터인데, 그렇게 하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 마치 녹음이 되고 있는 듯, 한 시간 내내 빨간램프에 불이 켜져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알게된 그 장례 전문가는 흔쾌히 다시 인터뷰를 해주겠다고 하였지만 나는 미안해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곧바로 자동차로 돌아와 인터뷰 내용을 부지런히 기록하였다.
 
이런 실수는 나의 연구 생활 30년 동안에 있었던 단 한 번의 ‘사고’였다. 그만큼 나는 죽음이 나와는 거리가 먼, 아마도 오랜 세월 동안 밀어 둘 수 있을 것으로 치부하며, 무엇보다도 나의 죽음은 나를 위해서 나, 또는 나의 가족을 위해서라도 상상 불가능할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므로 그런 실수를 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 호주의 공원묘지는 대개 커뮤니티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을 뿐더러, 꽃과 나무가 가득한 정원처럼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 크리스찬리뷰


한국 뉴스를 그리던 시절
 
내가 그 연구를 하던 시기에 호주에서 한국 뉴스를 접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시드니에서 500km이상 떨어진 곳에 살았던 내게는 더욱 그랬다. 간혹 시드니를 방문하면 각종 교민 신문이나 잡지를 수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곳에 고국의 소식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에 방영이 끝난 텔레비전 드라마 비디오 시리즈를 대여해서 보고 있노라면, 한국 사회 구석구석의 다정다감한, 때로는 과거와는 사뭇 다른 인간 관계, 정치, 경제를 엿볼 수 있는가 하면, 드라마가 끝나면서 친절하게 ‘첨가’된 저녁 뉴스는 비록 1-2년이 지나서 뉴스가 아닌 ‘구스’이지만, 신문·잡지와는 다른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면서 한국의 인터넷 신문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뉴스까지도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으니, 우린 새로운 세상에 살고 있음이 틀림없다.
 
예전에는 '가요 무대'의 김동건 아나운서가, 언젠가는 그 프로그램의 비디오 테잎을 돌려볼 해외의 교민들을 의식하여, 매주 그 프로그램을 열면서 하는 인삿말은, “전국의 시청자 여러분, 해외 동포 여러분, 그리고 근로자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로 준비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요즘엔 이 인삿말이 텔레비전 뉴스 앵커도 자연스레 사용하는 어구가 될 만큼 해외 교민들의 한국 미디어 사용이 그들 생활의 중요한 일부가 된 것이다.
 
어느 날 저녁의 충격
 
2014년 어느 날 저녁, 여느 날과 같이 저녁을 먹고 설겆이를 하면서 한국 텔레비전 뉴스를 시청하였다. 그런데 뉴스가 끝나면서 흘러나오는 광고가 참으로 충격으로 다가 왔다. 그 광고 중의 하나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 xx상조에서 일하는 친구의 소득을 보고 깜짝 놀랬어요. 그때 저도 일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죠. 지금은 친구보다 더 많이 벌어요. 제 소득 궁금하시죠? 오셔서 확인해 보세요.” 직업엔 귀천이 없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광고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족들의 아픔엔 아랑곳하지 않고, 상조회사에서 일하는 직업이 얼마나 돈벌이가 잘되는지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광고 의도는 그렇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 사회가 금전 만능주의로 팽배한 곳임은 익히 생각하고, 알고 있는 바이었지만, 이는 분명 성찰이 필요한 한국 사회의 일면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장례문화에 대한 연구를 결심하게 되었다. 나의 사회문제 고발 정신에 발동이 걸리는 순간이었다.
 
위에 언급한 상조회사의 광고를 비롯하여 몇 개의 광고를 더 분석한 논문이 ‘장례자본주의’ (Funeral Capitalism)라는 제목 하에 ‘한국학연구 학술지’(Korean Studies, 하와이 대학)에 2016년 출판되었다. 이 논문을 시발점으로, 나는 현재 한국 현대사회의 장례문화를 단행본으로 출판하기 위해서 자료 분석과 집필 중에 있다.
 
이 책을 통해 다루는 요점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장례산업을 통하여 유린될 수 있는 인간의 존엄성, 바쁜 현대사회 속에서 부모에게 다하지 못한 ‘효’가 장례문화에 어떻게 표출되는지 살펴보고 싶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 인간의 죽음을 계기로, 그 사람의 장례식은 그 사람 생전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고 인식되는 점이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다 하지 못한 효도 때문에 발생된 불편함을, 늦게나마 보상하기 위한 자녀들의 정성은 이해될 듯 하지만, 이는 상조회사의 지나친 이윤 추구로 이어지는 현상이 문제인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그 사람의 가치를 잴 수 있는 척도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정말, 항상 그럴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인간이 가진 평가의 기준은, 진리와 정의의 주관자되신 하나님의 그것과 유사한 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면이 많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 만족스럽고 귀감이 되는 이민의 여정은 훌륭하고 만족스러운 장례문화로 이어진다.     © 크리스찬리뷰


중국 이민자들의 장례 문화
 
이렇게 시작된 나의 장례 의식에 관한 연구 불씨는, 급기야 나의 주요 연구 관심인 이민자들에게까지 옮겨 붙었다. 호주에 정착한 이민자들이 과거에는 시신이나 화장 후 잔여물이 고향 땅으로 운구되어, 매장 또는 납골당에 안치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다문화가 정착되면서 이민자들은 어떻게 장례 준비를 하는지, 호주에서의 장례의식은 이민자들의 고향에서의 전통과 호주사회에서의 전통이 어떻게 융합되는지에 대한 연구는 우리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멜번의 한 공원묘지를 찾아서 이런 연구의 중요성을 나누고, 그 공원묘지와 필자의 대학으로부터 연구지원을 받아 중국인 학자와 함께 중국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41명의 이민자들과 장례 전문가들을 만나, 면접 조사를 통한 연구를 12개월간 수행하였다.
 
연구 결과의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중국에서는 죽음이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통념 때문에, 최대한 피해야 할 토론 내용이라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은 사람들만이 장례를 준비하는 문화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주 속의 중국 이민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을 준비하고 자신의 장례식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소수 민족으로서 자신의 일을 돌볼 사람은 오직 자신 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묘지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묘지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의 공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으슥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곳은 두려움과 공포의 장소로 친근해 지기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호주의 공원묘지는 대개 커뮤니티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을 뿐더러, 꽃과 나무가 가득한 정원처럼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이 중국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장례식 준비를 주저하지 않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 지혜자 솔로몬 왕은 파티에 가는 것보다 장례식에 가는 것이 훨씬 의미있는 일임을 우리들에게 기록으로 알려 주었다.     ©크리스찬리뷰
 
세 번째는, 매장 친구/저 세상 친구(burial mate)에 대한 준비와 갈망이다. 이민자로 살면서 사귄 가까운 친구는 가족 못지 않게 각별한 친구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영어권에서 이민자로 살면서 하고 싶은 의견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서러움은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리하여 저 세상에 가서의 이웃은 중국 말을 할 수있는 이웃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친구들 몇 명이 함께 공원묘지에 가서 자신이 뭍일 매장지를 구입한다는 것이다. 매장지를 방문하여 “이것은 얼마입니까? 저것은 얼마입니까? ”하고 묻는 모습은 마치 시장에서 쇼핑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네 번째는, ‘효’의 인식 변화이다. 중국에서 ‘효’는 대부분 자식들이 부모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함으로써 그 문화가 유지된다. 물론 이런 측면은 호주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그런데 연세 드신 부모님들이 자신들의 묘지를 미리 장만하는 것은 자식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고 염려하기보다는 부모가 자식을 생각해 주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속내를 잘 들어보면, 자식을 생각하는 것 못지 않게 자신들의 장례가 자신들이 원하는 특별한 전통 방식에 의해서 치러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호주 태생으로 호주화 된 자식들은 부모들이 원하는 전통장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전에 부모가 장례의식에 관하여 남긴 부탁을 깡그리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에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여 과거의 전통문화와 새로운 문화는 세월을 거쳐 융합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들과 딸의 역할 변화이다. 중국에서는 부모의 장례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대개 장남이라고 한다. 그런데 호주에서는 부모에게 잘하고 가까이 지내는 자식이 결정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 자식이 “아들이냐 딸이냐?”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심지어는 묘지를 구입하고 가장 먼저 친구에게 얌차를 사주면서 이 사실을 알리고, 다음에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에게 알린다고 한다.
▲ 한길수 교수     © 크리스찬리뷰


왜 파티보다 장례식에 가는 게 의미있나?
 
내가 연구 프로젝트를 위하여 멜번의 공원묘지를 처음 찾았을 때, 나는 90년대 중반 시드니의 교민 장례 전문인을 만났을 때 느꼈던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도시 속에 위치한 공원묘지에는 마치 멜번 도심지에서 볼 수 있는 다 문화가 재현되고 있음에 놀랐다.
 
유대인들의 묘지, 무슬림들의 묘지, 중국인들의 묘지, 이탈리안들의 묘지, 숫자가 적어 한 곳에 모여있기보다는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한인 교포들의 묘지, 그리고 모자이크처럼 다 인종들이 섞여있는 모습등을 보면서 말이다.
 
이제 묘지를 방문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장례의식은 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의식이다. 의식 자체가 의미있게 치러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얼마나 의미있는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장례식에 반영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미있는 장례식을 위해서는 의미있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죽음이나 장례는 한 인간의 삶의 여정에서 마지막에 치루어지고 그 사람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결코 따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는 부분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지혜자 솔로몬 왕은, 파티에 가는 것보다 장례식에 가는 것이 훨씬 의미있는 일임을 우리에게 기록으로 알려주었나 보다. 다른 이들의 장례식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면모가 달라질 뿐이라고 “존 더람 피터스”와 같은 학자들도 이미 피력한 바 있다. 사람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도 않을 뿐더러 살아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기억됨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의 소통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국 이민자들과 비교하면 우리 한인 동포들의 경험은 어떨까?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유사할까? 한인 동포들은 죽음에 대해서 얼마 만큼 마음을 열고 대화하고 죽음과 장례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준비하고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족스럽고 귀감이 되는 이민의 여정은 훌륭하고 만족스런 장례문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빅토리아 정부의 공원묘지 기획
 
빅토리아 정부는 150년 전에 잘 기획된 공원묘지 덕분에 지금까지 매장지나 화장에 대한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매장지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새로운 기획에 착수하였다.
 
나는 주 정부와 협의하에 베이비 부머 (baby-boomer) 세대, 기독교인들 그리고 태평양군도 출신 이민자들의 장례의식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이같이 중요한 정부의 기획에 시민들의 의견이 심도있게 반영돼야 한다는 취지이다.
 
주 정부의 기획 그리고 시민들의 열망에 일조하기를 기대한다. 그동안의 어떤 연구 못지 않게, 나로 하여금 열정을 갖게하는 이유는 죽음과 장례는 그 누구도, 그리고 필자도 피할 수없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모두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한길수|멜번 모나쉬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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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25 [14:21]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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