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은 로마의 9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10대 황제 티투스(디도)에 의해 정복되고 파괴되고 불탔다. 로마군의 사령관으로 길을 떠났던 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돌아와 모두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오래 다스리지는 못했다. 티투스는 불과 2년 정도였다. 천벌을 받았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예루살렘 전기>를 쓴 시몬 몬티피오리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별명이 노새꾼이었다고 말했다. 황제의 위엄에 걸맞지 않은 그 별명은 그의 보잘 것 없는 지도력에 대한 놀림이거나 아니면 그의 막대한 재산이 군대에 노새를 팔아 모은 것이라는 소문을 뒷받침한다는 해석을 덧붙인 것은 아마도 예루살렘을 파괴한 자들에 대한 유대인의 원한을 드러낸 것일 터이다. 내가 보기에 베스파시아누스는 노새꾼은 아니다. 평민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보통은 아니다. 유세비우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가 네로의 특명을 받고 지중해를 건너와 갈릴리부터 평정하기 시작했을 때 갈릴리 지역의 유대군 사령관은 유세비우스였다. 전투 끝에 유세비우스는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그를 네로에게 전리품으로 보내고자 하였다. 그때 유세비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베스파시아누스여 나는 큰 물결의 전령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저를 네로에게 보낸다니 이유가 무엇입니까? 카이사르, 곧 황제가 될 사람은 당신과 당신의 아들입니다.” 유세비우스의 예언대로 황제가 된 그는 파괴된 로마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았다. 특히 재정 확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는데 공중화장실을 세워 입장료를 받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오줌세를 받는다고 비아냥대는 반대파를 향해 <돈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라고 일갈했고 그 말은 무게있는 속담이 되어 오늘까지 널리 통용된다. 티투스는 그의 장남이다. 아버지 덕분에 제대로 교육받고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네로의 명령으로 유대의 반란군 진압에 나선 아버지를 따라 출정하였다. 진압작전 중 아버지가 황제가 되자 아버지를 대신하여 작전을 지휘하였고 마침내 70년 9월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성대한 개선식을 가졌다. 그의 개선문이 지금도 남아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으나 치세 동안 온갖 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즉위 두 달 뒤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하여 폼페이가 매몰되고 로마에서는 대화재가 발생하고 이탈리아 전역에 전염병이 돌았다. 겨우 2년을 다스리다 죽었는데 그의 나이 불과 41세였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유대도 사정이 많이 변했다. 총독 체제에서 대행왕 체제로 갔다가 곡절 끝에 다시 총독 체제로 환원되었다. 어느 정도 자유는 있었지만 늘 살얼음 위를 걷는 분위기 였다. 당시의 총독은 플로루스라는 사람인데 몹시 우매하고 탐욕적이었다. 그가 미진한 세금을 보충한다는 핑계로 성전고에서 금화 17달란트를 빼내어 착복하자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격분한 유대인들이 봉기하여 로마군인들을 쫓아내고 예루살렘을 해방시켰다. 소식을 접한 네로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성심을 다해 매진하였고 작전중 황제로 추대되어 로마로 돌아갔다. 아들 디도가 남아 임무를 완수했다. 예루살렘을 장악한 열심당등 매파들은 격렬히 저항했다. 전선에서 이탈하는 주민들은 무자비하게 죽였고 심지어 일사각오를 다짐한다며 식량마저 불태우는 바람에 굶어죽는 사람이 싸우다 죽는 사람보다 더 많았다. 로마군도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착착 공성장비를 구축하였다. 몰래 성을 빠져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붙잡아 십자가에 매달았다. 드디어 전투가 시작되었다. 70년 8월 10일 예루살렘 성전이 불탔다. 9월 8일 시가전이 거의 마무리되었다. 9월 20일 유대인들이 항복하였다. 로마군인이 들어와 성벽과 건물을 무참히 파괴하고 불태웠다. 성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예루살렘에 약 270만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사망자만 무려 110만 명이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수님이 안타깝게 그 이름을 불렀던 때로부터 불과 40년 후였다.〠 최성은|시드니선민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