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감동된 사람들

헬렌 맥켄지 선교사의 안장식과 그녀를 찾아온 사람들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3/30 [14:18]

▲ 지난 해 9월 1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헬렌 맥켄지 선교사는 사망 후 6개월 만에 흙으로 돌아갔다.     © 크리스찬리뷰
 
깊은 감동 주는 슈바이처의 삶


나는 어린 시절 슈바이쳐 전기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감동이 어찌나 컸던지 나도 크면 슈바이처처럼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는 어린 나의 가슴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 스승이었다. 이처럼 슈바이처의 삶이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그는 주어진 삶을 자신을 위해 누리지 않고 타인을 위해 살았다는 것이 아닐까?


▲ •경남 성시화 운동본부 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 헬렌맥켄지 선교사 유골을 들고 입장하는 루시(오른쪽)와 실라 •안장식을 집례하는 양성대 목사(오른쪽) •기도하는 구동태 감독(왼쪽) •안장식 전경<사진 위부터 아래로>    © 크리스찬리뷰

슈바이처의 인생을 뒤바꾸는 사건은 가족과 함께 프랑스에 갔을 때였다. 마을 한 복판에 세워진 브뤼아 장군의 동상 앞에 섰을 때 어린 슈바이처의 눈을 끄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장엄한 장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 쇠사슬에 묶여 있는 노예의 동상이 그것이었다. 깊은 슬픔에 사로잡혀 있는 노예의 동상을 통해 어린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인들의 아픔을 느꼈다.

 그러던 1886년 어느 봄날, 부활절 휴가를 보내던 그는 결심하게 된다.

 “나에게 주어진 평탄한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자!”

그 후, 그는 철저한 준비를 했고 음악, 종교, 철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그리고 평탄하게 살 수 있는 삶을 정리하고 아프리카로 향했다.

 
부모와 동생 곁에 묻힌 헬렌 맥켄지    

무더웠던 한여름의 더위가 가시고 어느덧 나뭇잎 사이로 가을바람이 불어오던 지난 3월 11일 오후 4시, 멜본 코벅에 위치한 묘지(Fawkner Crematorium Memorial Park)에서 찬양이 울려 퍼졌다.

 “다 감사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서. 그 섭리 놀라와 온 세상 기뻐하네.”

평소 헬렌(Dr. Helen Pearl Mackenzie, 한국명 매혜란)이 좋아했다는 찬송가사처럼 그녀의 96년의 시간들은 온 몸과 마음을 주님께 바친 삶이었다. 아버지 노벨 멕켄지(Rev. James Nobel Mackenzie)의 뒤를 이어 6.25전쟁의 참상으로 얼룩진 부산 시민들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드린 그녀. 그녀는 장래가 총망한 의사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평탄한 삶을 뒤로 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 가운데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녀로 인해 수많은 산모와 아이들이 생명을 찾게 되었다. 은퇴하고 고국인 호주로 돌아온 뒤에도 헬렌의 마음은 늘 한국에 있었다. 운명하기 전에도 한국과 일신기독병원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 생기를 띄셨던 기억이 난다.

▲ •조가를 부른 경남함안교회 현철승 목사 •유가족과 동료선교사들(왼쪽부터 원성희 선교사, 루시, 실라, 민보은 선교사 •땅속에 묻히기 전 헬렌의 유골•유골을 묻고 취토하는 루시와 실라<사진 위부터 아래로>     © 크리스찬리뷰

지난 해 9월 18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헬렌의 장례식은 작년(10월 9일)에 있었지만 그녀의 뼈를 묻는 안장식이 뒤늦게 열렸다. 그녀의 동생 루시와 실라, 가족들과 후배 선교사들 그리고 경남성시화운동본부 관계자들과 멜본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장식이 거행되었다.

“사람의 몸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줄로 압니다. 여기에 모신 유골은 비록 진토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부활하실 줄로 믿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다 

경남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 구동태 감독의 기도에 이어 멜본 딥딘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양성대 목사는 평소 헬렌이 좋아했다는 시편 90편(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의 말씀을 전했다.

 “이곳에는 우리가 성자처럼 여기는 헬렌의 아버지 노벨 맥켄지 선교사의 무덤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은 1956년도에 돌아가셨고, 저는 그 분들의 책을 읽어 보면서 몇 가지 편지들을 보았는데, 특별히 어머니 메리의 편지 글들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글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아름다운 성품, 하나님에 감동된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성품들이 많이 드러나는데 그 분은 1964년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노벨은 56년 전에 어머니 메리는 46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세월이 경점처럼 지나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쁨의 순간도, 고통의 시간도 다 지나가고 나면 한 경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젊은 날 분주했던 한국에서의 선교활동과는 달리 마지막 양로원에서 기나긴 외로움과 아픔 속에 지내야 했던 헬렌.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한때는 우울증과 싸우며 하나님께서 빨리 데리고 가시기를 원했던 그녀. 그랬던 그녀가 여기 한줌의 재가 되어 묻혀 있다.

▲ 선교사 초청 만찬 모임에서 양성대 목사가 경남성시화운동 본부 임원들을 소개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언니의 안장식을 지켜보던 실라는 한 뼘 남짓 남아 있는 빈 공간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 곳이 내가 묻힐 자리지요.”

그녀는 멋쟁이다. 지금도 비록 늙고 병들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지만 외출을 한다고 하면 십대 소녀처럼 들떠 머리를 단장하고 예쁜 옷을 갈아입는다고 야단이다. 간호사였던 그녀는 바누아투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을 했다. 난민 수용소에서 봉사하다 프랑스 첼리스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예뻤던 그녀도 세월을 막을 수는 없는가 보다. 그녀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가 돌아갈 자리를 미리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의 언니 헬렌과 가족들이 묻힌 그 자리 그 곳.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함께 하심이로다.”

맥켄지 가족들이 좋아했다는 시편 23편의 찬송을 김경혜 권사가 잔잔한 음성으로 부르며 안장식은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뭉개구름 사이로 파아란 하늘이 높게 뻗은 나뭇잎들과 함께 화답하였다.

 
▲ 경남성시화 대표회장 구동태 감독이 선교사들에게 선물을 증정했다     © 크리스찬리뷰

경남성시화운동본부 - 선교사 초청 만찬 모임 

안장식을 마친 우리 일행은 다음 약속 장소인 한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안장식에 미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포함해 한국에 파송되었던 호주 선교사와 그 가족들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날 모임은 경남성시화운동본부에서 선교사와 가족들을 초청하여 만찬을 나누며 120년 전 한국땅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이날 참석자(선교사 및 가족 15명)들은 70년대 한국성서공회에서 일했던 딕케넌 목사 내외, 80년대 장로교 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모스터스 목사(한국명 모성태), 언더우드 선교사 가문과 결혼해 이화여대 교회음악과 교수로 재직했던 원성희 선교사, 그리고 헬렌이 안식년을 맞아 일 년 동안 근무할 의사를 찾던 중 당시 영국으로 전문의 자격증 시험을 치르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민보은 선교사. 그녀는 동생 케서린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일 년만 있겠다던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후에 32년 동안 부산일신기독병원에서 의료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한국명 허준, 빌 포드 선교사. 그는 어느 선교사가 선교보고를 하는 것을 듣고 감동을 받아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는데 지원할 당시 장로이자 회계사였고 부산일신기독병원에서 행정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다음으로는 로번. 그는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볼랜드 선교사는 30년대 진주 지방에서 농촌계몽 활동을 했고 젊은이들을 키우는데 큰 관심을 가지셨던 분이다. 그리고 로빈의 동생 룻도 자리를 같이 했는데 그녀의 남편 해리는 모성태 목사 전임으로 오몬드 컬리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장신대 김이태 교수의 지도교수이기도 하다.

 
소중하고 귀한 분들 

비록 헬렌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아직도 한국 선교의 산증인들이 이렇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우리에게 큰 축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분 한분 모두가 우리에게 소중하고 귀한 분들이다. 그들 모두는 젊은 날 자신의 평탄한 삶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한국을 위해 고생의 길을 선택했던 분들이기 때문이다.

만찬 모임 후 멜본지역 목회자들과 경남지방 목회자들은 숙소 근처 커피숍에서 모여 이날의 소감을 나누던 중, 구동태 감독은 “이렇게 우리가 모이게 된 것은 우연도 아니고, 또한 우리의 의지도 아니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작년 10월의 장례식과 오늘 안장식에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사실 저도 이렇게 두 번씩이나 한국에서 오게 된 것도 놀라운 것입니다. 헬렌 선교사님을 잘 아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저를 비롯해서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을까요?”

▲ 동생 케서린의 옆에 묻힌 헬렌의 비문(오른쪽)에는“경외하는 의사요, 교육자요, 그리고 여성 건강의 대모를 기리며”라고 적혀 있고, 케서린의 묘비에는 “한국의 간호사, 조산사의 개척자요, 교육자를 기리며”라고 적혀 있다.     © 크리스찬리뷰

그리고 그는 얼마 전 한국에서 총회에서 이름이 있는 목사님의 장례식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 목사님의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최소 300명 이상 오리라고 예상하고 준비들을 했습니다. 꽤 이름이 알려진 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장례식 날이 되니 50명 정도도 오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도 놀랐습니다.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제 장례식에는 누가 찾아와줄까 생각해보지만 자신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끌 수 있는 건 우리의 명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헬렌 선교사님 장례식을 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건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헌신이었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걸. 저는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을 느꼈습니다”

그렇다. 헬렌은 부와 명예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았던 하나님의 딸이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하나님께서 사람도 감동케 하시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평탄한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자 복된 사람이리라.

결코 평탄함이 우리를 복되게 하지는 않는다. 얼마 전 중국 지하교회 교인을 만난 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분은 중국 공산당에게 핍박을 받고 있는 그들이 안타까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떻게 그런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실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고 한다.

 “저희들은 오히려 당신들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핍박과 고난도 없이 믿음을 지켜갈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평탄한 삶이 우리의 신앙을 견고케 하기보다는 오히려 나태함과 타락으로 이끌기 쉬운 게 사실이고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평탄한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즐기는 것이 아닌 헬렌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를 향한 그녀의 마지막 부탁으로 이 글을 맺으려 한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열 사람이 모이면 이십 개의 하나님의 손이 있고 천 사람이 모이면 이천 개의 하나님의 손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우리 모두 다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자”〠

 

글/정원준|멜번우물교회 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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