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품을 수 있습니다
호주 선교사 서두화 목사 (Rev.Alan Stuart)
 
글|김석원, 사진|권순형
▲   서두화 목사   © 크리스찬리뷰

서두화 목사와 인터뷰를 5년 전에 한 적이 있었다. 서 목사를 만나기 전에 꼼꼼히 서 목사의 배경과 한국사역을 뒤져본 뒤라, 저인망을 훌듯 그렇게 그의 한국 선교사 경험 이야기를 모아 기사를 썼다.
 
그때 기사 작성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었던 것이 억울해서였을까? 다시 서 목사를 찾아가 인터뷰를 하자는 권 발행인의 제안에 한동안 시큰둥했다. 뭘 더 들을 이야기가 있을까?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는 들을 만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모를 뿐. 그래서 모든 이야기는 특별한 계기가 없이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베리 선교사 (Mr. Ashley Barry Colvin)가 몇 달 전 눈을 감았다. 서두화 목사와 함께 ‘호주선교사 열전’ 시리즈 기사의 주인공 중에 하나였던 베리 선교사. 또 한 명의 선교사가 우리 주변에서 사라졌다.
 
있을 때는 자주 찾지도 않았으면서 다시 볼 수 없다고 하니 조급해진다. 갑자기 그들에게서 놓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그래서 어렵게 시간을 내어 뉴카슬로 향했다. 더 늦기 전에 그들이 한국에 남긴, 그러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를 찾아서...
 
▲ 마산과 부산에서 11년간(1957년-1968년) 한국 선교사로 사역했던 서두화 목사.        © 크리스찬리뷰

초상화 그리는 재미에 산다
 
- 지난 인터뷰 이후 5년간 어떻게 지냈나?
 
“3-4번 정도 한국을 방문했다. 갈 때마다 부산장로회신학대학은 방문한다. 최근에는 300여 권 정도의 내 장서들을 학교도서관에 기증했는데, 잘 사용됐으면 좋겠다. 한국교회에 가서 설교도 했고, 통합총회 총무로 있는 변창배 목사도 만났다.
 
이제는 나 혼자 해외여행을 가지 못한다. 너무 나이를 먹었다고 여행보험을 받아주지 않는다. 아들이 시간을 낼 수 있으면 조만간 다시 갔으면 한다. 지난 번에는 내가 한국에 있던 60년대에 파출부로 일했던 분, 운전사로 일했던 분들을 밀양과 김해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때까지 살아있으면 좋으련만...”
 
- 91세라고 보기엔 아직 정정하다. 호주에서는 어떻게 지내나?
 
“2주에 한 번씩 지역 교회에 가서 설교하고, 교회 주변의 요양원에 가서 심방도 한다. 내 나이 노인들은 할 일이 없어 심심해 하지만 나는 바쁘게 살고 있어서 감사하다. 요즘에는 초상화 그리는 재미에 빠져 있다.
 
요양원에서 일하는 아들이 거기 있는 노인들 사진을 찍어다 주면 스케치하여 당사자들에게 갖다 주는 데, 다들 아주 좋아한다.”
 
서 목사는 자신이 그동안 그린 그림 폴더를 가져다 보여줬다. 이제는 하나씩 사라져가는 주변 사람들을 자기 손끝으로 직접 남기고 싶은 걸까? 2년 전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을 무렵, 우리 아들을 그려서 우편으로 보내주었던 적이 있었다. 정성이기 때문에 받기는 했지만 조금은 엉성했던 그림들. 그러나 이제는 상당히 그럴듯한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 서두화 목사가 그린 초상화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호주 지인 (No.602), 주현신 목사(전 멜본한인교회, No.287), 변은주 교수(부산장신대, No. 318), 박정혜 사서(부산장신대, No.323),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 No.322), 탁지일 교수 가족(No. 36), 김석원 목사(본지 편집부장, No.278), 박명화 목사(호주연합교회 NSW주총회장, No.158)그림 그리는 재미에 푹 빠져있는 서두화 목사(아래 사진)는 최근까지 600명 이상의 초상화를 그렸다.                           © 크리스찬리뷰

나의 가장 좋은 친구는 한국인들
 
- 한국 방문 동안에 특별히 기억이 남았던 일들은 없었는가?
 
“나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한국인들이다. 물론 호주 친구들도 좋지만 한국에 가면 정말 반가운 옛 친구들을 만나서 즐거웠다. 특히 한철동 장로가 기억에 남는다. 그는 내가 한국에서 일할 때 첫 번째 도우미였고, 그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내가 한국에 올 때마다 일부러 한국에 있는 딸을 보러 오는 일정과 맞춰서 나를 찾아왔다.”
 
서 목사는 지난번 방문 때는 전 멜본한인교회 담임이었던 주현신 목사가 시무하는 과천교회의 초청으로 설교까지 하고 왔다고 했다. 그의 호주 모교회는 원래 400명 정도였지만 이제는 40명도 남지 않았다며, 한국교회의 열심이 부럽다고 했다.
 
더 이상 교회를 가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는 호주, 그리고 교회나 복음에 대한 열심이 없어지면 관료 조직이 대신한다고 걱정했다. 나는 서 목사에게 한국교회도 그길을 똑같이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기 싫었다.
 
- 만일 타임머신을 타고 처음 선교를 시작했을 때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다르게 할 것 같은가?
 
“당시 나는 지혜나 리더쉽 같은 것은 부족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도리어 한국인 목회자들이 더 잘 준비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단지 그들을 도왔을 뿐이었다.
 
특히 선교 행정 같은 것은 너무 싫었고, 성경과 복음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좋았다. 내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일에 더 집중하고 싶다. 그외의 다른 이슈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이 질문을 나에게 다시 던질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신앙고백도 중요하지만, 정말 내 이웃을 돕고 있는가 여기부터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 호주사회에서 난민들을 푸대접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많이 아프다.’”
 
▲ 그림 그리는 재미에 푹 빠져있는 서두화 목사는 최근까지 600명 이상의 초상화를 그렸다.     © 크리스찬리뷰

기근과 전쟁을 피해 온 난민
 
- 그렇다면 호주 난민 문제의 핵심은 우리 안에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난민은 기근과 전쟁을 피해서 온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나우루섬으로 던져놓고 있다. 이것은 이제 호주가 기독교 사회가 아님을 보여주는 서글픈 일이다. 난민들을 거부하는 우리 사회가 특별히 악하다고 말하긴 힘들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신앙적인 반응은 아니며, 누구도 그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된다. 호주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너무 적은 수의 난민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터키와 이탈리아 같이 ‘끊임없은’ 난민대열을 받아야 하는 상황도 아니다. 우리가 받는 사람 정도는 돌봐줄 수 있어야 정상이다.”
 
- 호주가 원래 이랬는가? 아니면 최근에 갑자기 각박해 진 것인가?
 
“이것은 인간 본질의 문제다. 너무 우리 자신만을 챙기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최근 미국 플로리다에 닥친 태풍 때문에 많은 피해자가 나왔다. 그런데 사람들을 구조할 때 종교나 인종을 먼저 확인하고 구해주는가? 도움이 필요하면 일단 도와주지 않는가?
 
그러나 호주정부는 진정으로 다급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도움 주기를 주저한다. 교회조차도 자기만을 챙기는데 너무 신경쓴다. 다른 교회 사람이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배척한다. 최근 테러 때문에 오해를 받는 무슬림들도 우리가 품어야 할 이웃이다.
 
그러나 교회는 자기만 챙기고, 그러다 보니 자기 모순이나 자꾸 드러내고 있다. 최근 아동성학대 조사위원회가 밝힌 결과가 그 증거다. 교회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만을 사랑할 때, 더 많은 문제를 만든다.”
 
-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교회가 주변문화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기적이고 자기만 챙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교회는 달라야 하는데 똑같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 양지동산 초기에 양지훈련원생들과 함께 한 서두화 목사(뒷줄 오른쪽)와 신익균 장로(뒷줄 왼쪽). 서두화 목사는 신익균 장로를 양자로 삼았다.     © 크리스찬리뷰

동성 결혼 합법화,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 교회가 주변 문화와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특히 기독교와 다른 문화의 경우는? 최근 동성결혼 합법화 문제에 대해 걱정하는 한국교인들이 많다. 동성결혼이 호주의 보통 문화가 되어가는 현실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현실을 직시하자. 호주사회에는 이제 일반 결혼에서도 기독교적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지 오래 되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남으로 평생 동안 같이 사는 결혼 말이다.
 
정확한 정보는 모르지만, 평균적으로 호주 결혼은 7년을 간다고 한다. 물론 내 주변에는 60년간 결혼생활을 한 사람도 있지만 결혼하자마자 이혼하는 사람도 많다. 이점에서 이미 결혼이란 개념은 더 이상 기독교적이 아니고, 동성결혼도 마찬가지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 결혼이 합법화되면 동성애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걱정한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이라고 하면 성행위부터 생각하는 것 같은데, 결혼은 그 이상이다. 서로 이해하고 붙들고 힘이 되는 관계다.
 
내 주변에 아는 몇 동성애자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고, 우리가 누리는 건강한 결혼관계의 장점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점에서 이들이 동성결혼을 인정받으려는 데 반대하지는 않는다.
 
이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도 봐야한다. 이번 선거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은 이 문제를 절대가치 문제로 보지는 않고 인권문제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결혼한 부부 중 하나가 죽으면 나머지 한사람에게 당연히 상속이 된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에게는 이런 당연한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부당하지 않는가?
 
또한 여기에는 성경 해석의 문제도 있다. 우리는 동성애가 구약에 근거해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왜 비늘이 없는 문어 같은 것은 먹고 있는가? 그것도 율법도 금한 것이다. 여러 성경의 법들은 문화적 조건 속에서 주어진 것이다.
 
나는 동성애 문제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동성애자들은 좋은 사람들이고, 나는 이들이 침대 안에서 뭘 하려는지는 관심이 없다. 이들이 서로를 돌보고 장기적인 관계, 합법적인 관계를 원한다면 그런 권리를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일 동성애 결혼을 결혼으로 부르기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름을 불러도 상관없다. 이런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서 목사의 설명 앞에서 나는 그냥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전통 결혼관이 더 이상 사회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걱정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호주를 살아가며 윤리적 혼란과 기독교적 가치를 비웃는 현실을 맞딱드리는 기회가 잦아진다.
 
호주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이민자였기에 더 그럴까? 호주 법률상으로나마 결혼이 기독교적으로 남기 원하는 영적 절박함을 그는 이해할 수 있을까?
 
이미 전통적 결혼관이 소수자 의견이 되어가는 호주사회에서, 기독교적인 흔적을 지키기 위해 고민하는 내가 너무 속이 좁은 걸까?
 
▲ 호주장로교 선교부 마산지부 선교사 회의(1958년). 왼쪽 2번째가 서두화 목사 부인 문의덕 선교사이며 3번째가 서두화 선교사이다.     © 서두화
▲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예배에서 감사패 받는 서두화 목사 부부     © 크리스찬리뷰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
 
- 그 말은 복음이 문화를 따라야 한다는 말인가? 선교사로서 다른 문화에서 항상 복음을 전해왔던 경험이 있던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문화적 관습과 잘못된 행동은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남녀가 길거리에서 손을 잡지 않는 문화적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손잡는 게 문제라고 생각은 안했지만 이런 관습을 배려하기 위해 아내와 길거리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피했다.
 
물론 문화 안에는 우리가 비판적으로 대해야 할 잘못된 행동도 있다. 예를 들어 한국문화는 기본적으로 유교적이고, 유교문화의 가장 큰 덕목은 충성이다.
 
1959년 한국장로교회가 분열될 때, 나는 여러 곳을 다니며 화해를 시도했다. 그런데 일부 목사들은 자기가 속한 그룹을 위해 상대에 대해 말도 안되는 거짓말과 비방을 했다. 그들은 자기 그룹에 충성하기 위해 그랬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적이 아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이다. 만일 내 친구와 내 그룹만 사랑할 뿐 다른 그룹, 다른 인종, 다른 사람들은 거기서 제외한다면 그건 예수님의 정신이 아니다. 문화는 진리보다 먼저 할 수 없다.”
 

▲ 손수 운전을 하고 다닐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91세의 서두화 목사.                  © 크리스찬리뷰
▲ 부산신학교 교장에 재직중 서두화 목사     ©서두화

가장 좋았던 것은‘성경을 가르치는 일
 
-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의 기억과 경험은 이제 한국기독교사의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미처 남기지 못한 기억이나 이야기가 있으면 알려 달라.
 
“사실 많은 과거 사건들은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은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부산장신대에서 일할 때, 남쪽 출신과 이북 출신 간의 갈등이 아주 심했다. 나는 책임자로서 모든 보직을 해임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잘못했던 것 같다. 도리어 이들을 화해시키는 일을 했어야 했다. 
 
당시 나는 싸우는 사람들을 없애면 해결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식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나는 사임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나의 많은 실패 경험은 내 책임이었지 다른 사람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별로 많은 일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내가 관여하던 사역 중에서는 가장 좋았던 것은 학생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때 경험올 가지고 지금까지도 사역을 하고 있어 깊이 감사한다.”
 
생각보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답변처럼 좋은 경험만큼이나 아픈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가 뿌린 씨로 부산·경남 지방에는 여전히 그를 영적 아버지로 떠올리며 반기는 이들이 많다. 부산장신, 상애원, 그리고 여러 지역교회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고, 별것도 아닌 것으로 과장하기를 즐겨하는 시대에 서두화 목사는 여전히 겸손했고, 미안해 했고, 감사해 했다.
 
한국교회가 자신을 받아준 것을, 한국 친구들과 교제할 수 있었던 것을, 한국성도들에게 도전받을 수 있는 것을 기뻐했다.
 
하나씩 사라져 선교사들. 이들이 우리가 기대하는 영웅이나 정답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들의 마음에 빚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좋은 전도사도 설교자도 아니었다. 내 한국어가 그 정도가 안되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을 가르치고 학생들과 관계하는 것으로 축복받았다”라고 말하며 웃는 서두화 목사. 그의 그림으로 남는 것이 흐믓해지는 날이다.
 
▲ 서재에서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 서두화 목사.     ©크리스찬리뷰
 
▲ 서두화 목사 자택 거실에 걸려 있는 성구 액자와 그림, 담뱃대 등 한국에서 가져 온 기념품들.     © 크리스찬리뷰

에필로그
 
서두화 목사(Rev. Alan Stuart, 1926. 7.24)는 빅토리아 주 호삼(Horsham)에서 출생하여 멜본 스카치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942-1948년 멜본 하버트리스트에서 학생 기술자로 일했으며, 이 시기에 그는 멜본기술대학에서 시민공학 디플로마를 이수했다.
 
이후 서두화 목사의 간략한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1949-1953 멜본노동자위원회 제도공으로 일하면서 멜본대학 학사(B.A.)
·1954-1956 멜본신학대학 신학사(B.D.)
·1956. 8. 한국 선교사 지원
·1956 12.12 호주 장로교 목사 안수
·1956. 12-1957. 9. 쿠능하이츠 장로교회 목회
·1957. 7.27 리타 문로와 결혼
·1957. 10. 한국 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출국
·1957. 12.7 부산 도착. 마산에 근거를 두고 2년간 언어    공부
·1959말~1960초 통합과 합동 교단의 분열 시기에 선교사 화해 위원회 위원으로 노회들을 방문. 마산노회 경남성경학원에서 가르침.
·1960말 부산 이주. 부산신학교, 고등성경학원, 부산진교회 협력목사
·1961~1962 한국기독학생운동 사역
·1962 이후 수년 동안 상애원에서 나환자 사역
·1964 부산신학교 교장에 선출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이 직책으로 인해 그는 신학교를 주도하려는 노회 내부의 여러 파벌들 사이에 사로 잡혀 그가 강하게 소명감을 느끼던 교육사역에서 그를 멀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노회 교권을 갖지 못한 파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도록 했다. 이러한 긴장은 결국 효과적인 신학교육을 불가능하게 했고 서두화는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1968. 10. 남부 호주위원회의 지역 임원으로 호주장로교 선교부 청빙을 받고 그해 말 호주로 귀국.
·1973~1975 멜본한인교회 초대 담임목사
·1976 링우드 이스트교회 목회
·1983 왕가라다 교회 목회
·2001년 은퇴 후 뉴카슬로 이주
 
▲ 서두화·문의덕 선교사 결혼식 (1957. 7.27)     ©서두화
 
▲ 부산 상애원을 배경으로 두 아들과 함께 한 서두화 목사 부부     © 서두화

서두화 목사는한국인과 선교사 동료들에게 스스로 충실한 친구인 것을 보여 주었다. 그는 모든 행동 속에 진정한 겸손, 따뜻한 애정, 관대한 태도, 살아 있는 유머감각을 전달하였다. 〠 (‘은혜의 증인들’참조)
 
글/김석원|크리스찬리뷰 편집부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copyright ⓒ 크리스찬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입력: 2017/09/25 [10:47]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포토 포토 포토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