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전적 부패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全的 無能力: Total Inability)과 필수적으로 연결됩니다. 인간이 모든 방면에서 부패하여 있으므로, 그 스스로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의사도 없고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7절이 이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 곧, 죄악 가운데 있는 자연인 스스로 갖는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의 상태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법에 굴복하려는 의사도 없고, 또한 굴복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부패하여 죄 가운데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며, 허물과 죄 가운데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 성경의 진단입니다. 그러니 영국의 마틴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 1899-1981)의 진술처럼, 성경만큼 인간을 철저하게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종교나 철학은 세상에 없습니다. 불교나 이슬람교나 유교나 힌두교나,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모두 인간을 성경만큼 비관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모두들 인간에게 어느 정도 문제가 있고 그것을 고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저 나름대로 처방과 치유책을 내어놓습니다. 그러나 성경만큼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이 교회 내에서 점점 약화되고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전적으로 무능력하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가르침이, 죄악 가운데 있는 사람이 보기에 거북하고 역겨우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죄악 가운데 있는 보통 사람의 시각에서는 이런 가르침은 그야말로 불합리하며 불공정한 것처럼 보이는 법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가르침을 내어던지고, 사람의 구미에 맞도록 새로운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오늘날 현대 심리학으로부터 자존감(自尊感: self-esteem)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교회의 가르침에 적용시키는 예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고, 이런 가르침을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신자는 누구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됩니다. 물론 이해되는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요인들로 인해 좌절과 실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예가 다반사이니, 그들 스스로 자존감을 갖게 해서 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해주려는 의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추스르고 일어서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은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의 자존감을 높여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사람의 자존감을 완전히 땅에 떨어뜨리는 일부터 먼저 행합니다. 사람이 죄악 가운데 죽어 있으므로, 그 스스로는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가르치니 말입니다(엡 2:1). 이처럼 사람을 완전히 밑바닥까지 끌어내린 후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제시하는 것이 성경의 방식입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에 빠져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의 역사가 임하는 것이요, 이것을 ‘은혜’라 부르는 것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존감의 여지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요, 그 후에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의 은혜로운 역사를 통하여 그 인간을 지극히 높여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지위를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4-6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천천히 뜯어 살펴보기 바랍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 원광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주의영광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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