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칙령은(Edict of Milan) 313년 5월 반포되었다. 서방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동방황제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만나 중요한 몇 가지 사안에 합의했는데 그 중에는 기독교에 대한 신앙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허용하고 압수한 교회와 신자의 재산을 돌려 주며 손해는 국가가 배상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 발표는 동 로마의 니코메디아에서 했지만 밀라노 회동의 합의라는 점을 고려하여 사가들이 <밀라노 칙령>이라 이름하였다. 기독교가 공인된 공의 반은 리키니우스 몫이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영광을 독차지했는데 그가 로마를 재통일하고 기독교에 기여한 바도 적지 않았던 탓인지 큰 반발은 없었다. 밀라노 칙령의 원문은 남아 있지 않다. 락탄티우스의 <박해자들의 죽음에 대하여>라는 글에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311년 이미 갈레리우스 황제에 의해 교회에 대한 박해가 중단되고 기독교 신앙이 허용되었으나 밀라노 칙령으로 인하여 이 흐름은 불가역적인 것으로 확고해졌다. 그러나 제국이 준 신앙의 자유가 모두 유익했던 것은 아니고 불가피하게 따라온 폐해들도 많았다. 313년 공인된 기독교는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국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 콘스탄티우스와 어머니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달마디아의 총독으로 있다가 서방의 부제(副帝 /카이사르)가 된 사람이다. <기번>의 <로마제국 흥망사>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키가 크고 몸집이 당당했다. 각종 군사기술에 능했고 전시에는 용감했으며 평화시에는 온유했다. 젊은이다운 활기찬 정신은 몸에 밴 신중함으로 조절되었다. 야심만만한 청년이었으나 쾌락의 유혹에는 무감각한 것처럼 보였다. 백성들과 군인들은 그를 사랑하여 장차 카이사르가 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에 대하여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이다. 헬레나는 여관주인의 딸로 태어나 콘스탄티우스와 결혼하여 콘스탄티누스를 낳았으나 남편이 서방의 부제로 발탁되면서 강제로 이혼당했다. 헬레나는 그 쓰라린 시절을 믿음으로 견뎠고 묵묵히 아들이 재통일된 로마의 황제가 되기까지 기도로 후원하였다. 아들의 밀라노 칙령 배후에는 어머니의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다. 콘스탄티누스는 늘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싸웠다. 왜 그는 싸워야 했을까. 로마제국은 광대했다. 광대한 제국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이탈리아의 로마에 앉아 있는 황제가 제국의 구석구석까지 제대로 통치하기란 불가능했다. 급한 일이 생겨도 신속한 대처가 어려워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게다가 걸핏하면 지역의 군사령관이 황제를 참칭하고 반역을 일으켰다. 이 난점을 개선한 사람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이다. 그는 로마를 동서로 분할하고 각 지역에 2명의 황제, 즉 정제(아우구스투스)와 부제(카이사르)를 두어 통치케 하였다. 정제의 유고시 부제가 대신하며 황제 간의 의견차는 선임황제가 조정케 하였다. 동방에 자리잡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서방의 정제로 막시미아누스를 선임하였다. 두 황제는 각각 부제를 임명했는데 동방의 부제는 갈레리우스였고 서방의 부제는 콘스탄티우스였다. 콘스탄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이다. 아주 매끄럽게 돌아가던 이 시스템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양위 이후 삐걱대기 시작하여 18년 동안 5번의 내전을 겪는 반목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여러 명의 황제들이 융기와 침강을 거듭하면서 패권을 다투다 콘스탄티누스가 천신만고 끝에 서방의 정제가 되고 마지막으로 동방의 정제 리키니우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로마를 재통일하였다.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밀비안 다리였다. 콘스탄티누스가 독실한 신앙인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가 임종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들어 이 의문을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가 순수한 신앙인으로서 기독교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제국을 다스리는 정책으로써 기독교를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 최성은|시드니선민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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