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몰라도, 잊어서도 안된다

130년을 바라보며 선교 열정 다시 꽃 피우길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7/10/23 [10:18]
▲ 크리스찬리뷰 11월/2017 표지     © 크리스찬리뷰

지난 10월은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지 128주년이 되는 뜻 깊은 달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128년 전인 1889년 10월, 호주장로교회의 조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목사가 누이 메리 데이비스(Mary Davies)와 함께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함으로써 호주장로교회의 첫 한국 선교사가 되었고 한국 선교의 문을 열었다.
 
옛말에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는 말이 있다. 이제 우리는 한·호 선교 130주년을 바라보며 그 근원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그 옛날 조선에 가서 한 알의 밀알로 썩어져 간 초창기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한국 땅에 전해졌던 복음의 순수한 열정과 생명력을 다시금 되새겨보자. 
 
▲ 한국에 파송한 호주장로교회의 첫번째 선교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 (1889. 멜본). 조셉 핸리 데이비스는 호주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은 학식있고 열정적인 하나님의 종이었다.     © 크리스찬리뷰

도행전 속편의 현장
 
19세기 말, 조선은 예수라는 이름만으로 치를 떨었었다. 구미 열강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그때까지 굳게 닫혔던 쇄국의 빗장이 벗겨졌다고는 하지만, 예수를 금하는 국법은 엄연하게 살아있었다.
 
조선 땅의 몇몇 뜻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개화를 이루어, 무지와 몽매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굶주림과 헐벗음, 한번 전염병이 만연하면 수만 명씩 떼죽음을 겪으면서도 속수무책이었던 그 캄캄함에서 벗어나보고자 목숨을 걸었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역사는 갑신정변이라는 깊은 상처도 입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으로 어찌 그 다음의 일을 예측할 수 있었으며 해석이 가능했겠는가.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던 개화는 우리나라의 조정이 그렇게 결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예수의 사람들의 손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 데이비스 선교사가 설립한 코필드 그래머 스쿨 초대 교사들과 데이비스 교장(앞줄 가운데). 데이비스가 한국 선교사로 떠나기 전(1881-1889) 7년 동안 기초를 놓은 이 학교는 현재 멜본 지역에서 명문학교로 성장했다.                       © 크리스찬리뷰

병원이 개설되고, 길가에 널린 고아와 거지들을 모아들여 학교가 시작되고, 성경번역이 이루어지면서 우리 글이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한국 땅의 학교들이 거의 선교사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뜻으로 아로새겨 간직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데이비스, 맥케이, 아담슨, 맥켄지, 그리고 그 이름을 다 기록할 수 없이 많은 호주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찾아갈 무렵은, 이 땅 끝과 저 땅의 끝이 너무도 아득한 시절이었다. 그들에게는 젊음과 꿈과 인생의 청사진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때 스스로가 설계했던 꿈과 청사진을 모두 버리고 뱃길로 한 달도 더 걸리던 땅 끝을 향해 달려갔다.
 
조선을 찾아서 간 그들이 지니고 있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경책 한 권뿐이었다. 그들은 우선 이 땅에 만연하고 있던 질병을 씻어내기 위하여 환자들 속에서 살았고 고아 거지들을 모아다가 함께 살았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을 위하여 우리에게 목숨을 주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나이에, 혹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던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둔 채 더러는 ‘일찍 취하여 감을 입고’ 한국 땅에 누워있다. 
 
▲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호주장로교회(빅토리아장로교회)로 하여금 한국 선교를 계속하도록 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이에 1891년에 제임스 맥케이(Rev. James Mackay) 목사와 부인 사라 맥케이(Sara Mackay) 부부,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퍼셋(Miss Mary Fawcett), 페리(Miss Jeanie Perry) 등 세 사람의 미혼 여선교사 파송을 시작으로 40여 명의 여선교사가 한국에 파송됐다. 또한 1894년에 아담슨 목사 부부(Rev. Andrew & Eliza Annie Adamson)가 파송되었으며, 한국 선교운동에 크게 공헌했다. 이후 호주교회는 일제가 선교사들을 강제 추방한 1941년 전까지 78명의 선교사(해방 전·후 126명)을 파송하였다. 사진= (위 왼쪽부터) 제임스 & 사라 맥케이 목사 부부, 멘지스 양(Miss Belle Menzies), 퍼셋 양(Miss Mary Fawcett). (아래 왼쪽부터) 페리 양(Miss Jeanie Perry), 무어 양(Elizabeth Moore), 아담슨 목사 부부(Rev. Andrew & Eliza Annie Adamson).     © 크리스찬리뷰

데이비스의 한국생활 6개월
 
데이비스 남매는 1888년 8월 16일 금요일 저녁 멜본 시내 YMCA 홀에서 거행된 환송회를 끝으로 멜본에서의 모든 공식일정을 마치고 8월 21일 멜본을 떠났다. 이것은 한국으로 향한 첫 여행이자 그의 생애에서는 다시 는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여행이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시드니에서 며칠을 보낸 후 다시 8월 28일 증기선 ‘치난’(S. S Tsinnan)호로 시드니를 떠났고 이로부터 40여 일간에 걸친 길고도 지리한 항해를 끝내고 10월 2일 이른 아침 부산항에 입항했다.
 
부산을 둘러본 후 다시 출항하여 4일 오전 11시경에 제물포(인천)에 도착했다. 다음 날 아침 8시경 말을 타고 서울로 향했고, 도착한 첫날 의사 헤론(Dr. J. W. Heron)과 스크랜튼 부인(Mrs. Scranton) 등의 미국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어서 평안한 마음으로 서울에서 첫 밤을 지낼 수 있었다.
 
이때부터 서울에서 보낸 5개월간 데이비스는 한국어 공부에 최선을 다했다. 그에게 있어서 언어의 습득은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가장 긴박한 요구였다.
 
12월 26일자로 쓴 그의 편지를 보면 ‘조선말’공부에 바빠 가족들에게 편지 쓸 시간조차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원래 언어의 재질이 있었으므로 그의 한국어 실력은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5개월이 지난 때에는 일상의 대화는 물론 가벼운 설교까지 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 데이비스가 한국에 도착하여 한글 및 한문 공부를 하던 공책.     © 크리스찬리뷰

데이비스는 서울 지역에는 이미 선교를 개시한 선교부 외에 또 다른 선교사들이 입국할 전망이었으므로 바울의 선교원리를 따라 일단 선교사가 전혀 없는 지역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하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것은 부산이 한국의 관문일 뿐 아니라 일본과 인접해 있어 보다 더 효과적인 선교가 가능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1890년 3월 14일 누이를 서울에 남겨둔 채 어학 선생과 하인, 그리고 약간의 전도지와 약품 등을 준비하여 서울을 떠났다.
 
이제는 겨울도 거의 지났다고 보았던 그의 판단은 그의 안타까운 죽음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3월이라고 하지만 추위는 계속되었고 그해 따라 잦은 비가 겹쳐 먼 길을 도보로 여행하는 일은 안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서울을 떠난 그는 수원 등 경기도 지방과 공주 등 충청도 지방을 거쳐 경상도에 이르는 300마일에 이르는, 약 20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매우 절망적인 상태였다.
 
이 기간 동안에 전도활동은 기대 이상으로 성공적이었으나 무리한 도보여행으로 인해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곧 폐렴까지 겹쳐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사실 데이비스가 택했던 부산까지 이르는 이 도보 여행길은 그 당시 서구인으로서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무리한 여정이었다. 유독 추웠던 3월의 기후와 불편한 잠자리, 맞지 않는 음식은 허약한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으나 복음을 위해 감내해야 할 몫으로 보았기에 멜본을 떠나 시드니, 홍콩, 일본을 거쳐 한국에 이르는 긴 여정과 서울 도착, 언어 공부, 선교지역 답사, 부산에 이르는 여정 그리고 그가 죽기 불과 5일 전인 1890년 3월 31일까지 기록된 8개월간의 일기 속에는 어떤 형태의 불평도 찾아볼 수가 없다.  도리어 전도자의 벅찬 감격이 그의 행로를 따라 언급되고 있을 따름이다.  

▲ 데이비스가 선교지역을 결정하기 위해 부산으로 답사여행을 가던 중 한글로 기록한 일기 부분과 선교여행 지도.     © 크리스찬리뷰

데이비스의 죽음이 남긴 것
 
데이비스가 부산에 도착한 날은 4월 4일 금요일이었다. 이날도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 당시 부산에 있던 유일한 서구인이었던 캐나다출신 선교사 게일(Dr. J. S. Gale)이 데이비스가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달려가 자기 집으로 옮겼다.
 
게일과 데이비스 이 두 사람은 함께 기도했다.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살든지 죽든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라고.
 
일본인 의사가 와서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다음 날인 4월 5일 오후 1시경 데이비스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한국에 온지 6개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 땅을 밟은 지 꼭 183일째였다. 우리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너무도 짧은 생애였으나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는 가장 적절한 때였다.
 
게일은 데이비스 시신을 부산항이 굽어  보이는 부산진 뒷산에 안장하였다. 그의 장지는 후일 호주장로교의 한국 선교부를 위한 약속의 땅이 된 셈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데이비스의 묘지는 사라지고 없다.
 
2000년 3월 현장을 찾았던 기자의 취재수첩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데이비스 선교사가 한국에서 순직하자 빅토리아 청년연합회가 그를 기리어 호주장로교(빅토리아 장로교) 총회회관 건물 벽면에 설치한 추모 명판.     © 크리스찬리뷰

취재진은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와 함께 데이비스 묘소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데이비스 묘가 간 곳이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좌천동 금성고등학교 뒤쪽 어디쯤 되리라 짐작할 뿐 찾을 길이 없었다. 본래는 넉넉하게 언덕길이 되었음직한 넓이의 길이었던 것이 그 철옹성 같은 콘크리트 아파트들이 곳곳에 세워지면서 길이 없어지다시피 했다.
 
“묘지가 있었는데요. 아십니까?”
 
사람들은 그 질문자체를 알아듣지 못했다. 묘지는 무슨 소리며 외국인 묘지라니 무슨 잠꼬대인가 하는듯한 표정이었다. 마치 존재하지도 않은 어떤 땅을 찾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혹과 부끄러움이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그 근처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데이비스 선교사 묘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더듬고 살펴보아도 찾을 길이 없었다.
 
“묘지가 있었는데 아십니까?”
 
묻자니까 대답하는 사람은 성의도 없이 내던지듯이 말했다.
 
“몰라요”
 
우리는 그렇다고 단념하지 않았다. 미련을 가지고 기웃거리며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 초량마을(부산 영주동) 뒷산에 있던 데이비스의 무덤. 재개발로 인해 이들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1895년 촬영)     © 크리스찬리뷰

한 번 생각해보자. 데이비스 묘지가 증발해 버렸다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참으로 우리의 안목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교회와 신자들이 그것을 제대로 지킬 줄 몰랐다는 것은 아무리 반성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과연 우리 후손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데이비스의 죽음과 함께 그의 누이 메리도 폐렴으로 얼마간 고생했으나 헤론 의사의 치료로 회복한 다음 한국을 떠나 그해 7월 18일 멜본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값진 초석이 됐다. 부산 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한 그의 죽음으로 호주장로교회의 부산. 경남선교가 시작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데이비스의 죽음은 크게 세 가지 면에서 호주의 교회로 하여금 한국 선교를 계속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였다. 첫째로는 호주교회로 하여금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고 그의 희생을 기초로 한국 선교 운동을 계승해야 한다는 자각을 심어주었다.
 
그리하여 5월 5일 멜본 시내 스카츠교회에서 거행된 데이비스의 생애를 감사하는 기념예배에서는 한국 선교가 중단될 수 없는 사명임을 확인하였다.
 
둘째로는 친목과 교제를 위해 시작된 청년연합회로 하여금 선교사를 파송하는 조직체로 새롭게 거듭나는 기틀을 세워주었다.
 
1890년 7월 23일 소집된 집행위원회에서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 지원하는 일을 계속해나가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891년에는 제임스 맥케이(Rev. J. H. Mackay) 목사 부부를, 1894년에는 앤드류 아담슨 목사(Rev. A. Adamson) 부부를, 1902년에는 커렐 의사(Dr. H. Currell) 등 2진을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셋째로는 한국 선교를 위해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를 조직하는데 동기를 부여해, 1890년 8월 25일 정식으로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가 조직됐다. 이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는 처음부터 선교운동을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고 “여성들에 의해서 여성들을 선교하는 단체”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는 1891년 세 사람의 미혼 선교사인 멘지스 양(Miss B. Menzies), 페리 양(Miss J. Perry) 그리고 퍼셋 양(Miss Fawcett)을 시작으로 하여 약 40명의 여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하는 등 한국 선교운동에 크나큰 공헌을 남겼다.
 
이때로부터 호주 교회는 일제가 선교사들을 강제 추방한 1941년 전까지 선교사 78명(해방 전·후 126명)을 파송하였다.
 
▲ 초기 호주 선교사들이 구입해 살던 초가집. 여선교관으로 사용했으며, 왼쪽 세 번째가 맨지스 선교사, 여섯 번째가 무어 선교사, 오른쪽 세번 째가 페리 선교사이다.(부산 1891~1893)     © 크리스찬리뷰

지역 복음화에 힘썼던 초기선교
 
부산지방에 있어 호주장로교회 역할은 대단했다. 이들을 통한 자선사업, 교육사업과 성경교육 등을 통한 신앙교육, 전도사역들은 지금의 부산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특히 ‘일신기독병원’을 통해 기독교의 사랑을 전파했으며 수많은 교회를 개척, 민중들에게 소망과 새날을 주는 희망으로 작용했다.
 
부산의 기독교 못자리라고 볼 수 있는 곳은 두 곳인데 영선현과 부산진지역이다. 영선현은 영주동에서 초량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부산진지역은 지금의 좌천동, 범일동을 비롯한 일대이다. 1890년대 초 부산진 지역의 인구는 약 3천5백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곳이 호주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의 못자리가 된 것이다.
 
데이비스가 사망한 후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는 1891년 10월, 제2진 선교사 5명을 파송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일본인 거주지에 기거하다가 영도에 있던 영국인 세관원 헌트 씨 집으로 옮겨가 살았다. 그러다가 힘겹게 한국인 주택을 매입했는데 이곳이 지금의 부산진구 좌천동이다. 바로 이곳에 선교관을 세움으로 호주 선교사들의 거점이 된 것이다.
 
이국인의 생활과 이들에 호기심을 가진 탐문객이 호주 선교사들의 집에 찾아오기 시작했고 이들과의 접촉은 교회의 기원이 되었다. 이 교회가 지금의 부산진교회(1891년 창립)이다.
 
여선교사들은 세 명의 한국고아를 집으로 데려가 돌보기 시작했다. 1895년에는 소녀들을 모아 주간학교를 시작했고 그 학교의 이름을 ‘날마다 새롭다’ 라는 뜻의 ‘일신’이라고 지었다. 여선교사들이 여성교육을 중시한 것은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부인들과 어머니들이 반드시 교육되어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 호주 선교부 사역지 진주의 과거(1909-1933, 위 사진). 휴 커를 선교사가 세운 진주교회, 호주 선교부 진주 사역지의 현재, 휴 커를 선교사 기념관(아래 왼쪽부터).     © 크리스찬리뷰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진주(1903년)와 마산(1909년 현 창원)지방에 선교부를 설치했다. 그 후 통영(1912년)과 거창(1913년)에 잇달아 선교부룰 설치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교회. 학교. 병원 등을 세워 경남지역 복음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당시 부산선교부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나환자(한센씨병)들을 돌보는 사역의 시작이었다. 천형병(天刑病)으로 알려질 만큼 나병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병인데 당시 한국에는 많은 나병환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적절한 치료나 보호 없이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위한 사역은 필요하고도 적절한 사역이었다.
 
나환자들을 위한 사역은 1909년 10월 영국 구라선교회가 상애원을 창설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환자수용소(상애원)가 부산(남구 우암동-현 감만동)에 건립되었고 이듬해 곧 1910년 한국에서 최초로 개원했다. 그런데 나환자수용소가 호주선교부로 이관되었고 1910년 2월 파송된 맥켄지(Rev. Noble Mackenzie) 선교사가 이 일에 책임을 맡게 됐다.
 
맥켄지 선교사는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15년간 뉴 헤브리디(New Hebrides) 선교사로 일한 바 있었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게 된 것이다. 그는 비록 목사 선교사였으나 일정기간 의료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 역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환자들을 돌보는 중임을 맡게 되었다.
 
어떻든 이렇게 시작된 나환자수용소는 처음 20여 명으로 시작됐으나 점차 그 수가 증가되었다. 1911년에는 50여 명으로, 1914년에는 80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이후는 650여 명의 나환자를 수용하는 나환자 정착촌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한센인(나병환자) 복음화를 위해 상애원 내에 상애교회를 창립했다. 부산 용호동에 자리 잡았던 상애교회는 지역개발로 인해 정관신도시로 이전, 2004년 4월 창대교회로 교회명을 개명하고 입당예배를 드렸다.
 
▲ 한국 나환자들의 친구 제임스 노블 맥켄지 선교사(1940년)     © 크리스찬리뷰

선교 초기 정신 어떻게 이어갈까?
 
이 일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민족적인 사랑의 빚임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우리는 선교 128주년을 자축하면서도 우리가 지고 있는 복음의 빚에 대하여 혹시 소홀하지는 않았는지, 신앙의 옷깃을 바로 여미고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할 때에 이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호주 땅에 우리를 심으신 뜻은 무엇인지 이 땅의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우리 자신을 가차 없이 채찍질해 가며 자성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래서 혹 여행을 한다면 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인 ‘신앙유적지’도 한번 관심을 가져보는 게 어떨까. 부산 경남지방에는 호주 선교부의 선교 거점으로 사용했던 유적지들이 많다. 기독교 역사현장을 걸으며 육체의 안식과 내면의 신앙도 점검해 보자. 대표적 기독교 유적지를 소개한다. 
 
▲ 호주장로교 선교회가 1905년 4월 15일에 건립한 일신여학교     © 크리스찬리뷰

△일신여학교
 
1895년 호주 선교사들이 설립한 일신여학교는 한국이남 최초 여학교로 부산지역 3.1운동의 출발점이 됐던 곳이다. 1919년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부산지역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2010년 4월 5일 원형 복원한 뒤 부산광역시 역사기념관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났다. 현존하는 부산 최고의 근대 건축물이다.
 
여기에는 120년 전 신교육을 받던 여학생들의 모습과 항일운동 및 당시 기독교자료 등이 전시되고 있다. 일신여학교 학생 중에는 광복 후 2.4.5.6.7대 국회의원으로 여성정치계를 이끌었던 박순천 씨, 1930년대 애정소설 ‘찔레꽃’을 쓴 김말봉, 일제 강점기 대표적 항일운동 부산방직 파업을 주도했던 박차정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 1919년 3.1운동과 관련하여 부산지역에서 최초로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일신여학교 제1회 졸업사진.     © 크리스찬리뷰

그런데 일신여학교 건물이 부산광역시지정 역사기념관으로 태어난 데에는 가슴 뭉클한 사연이 숨어있다. 기자가 권순형 발행인과 처음으로 호주선교사들의 선교현장을 찾아 나선 것은 2000년 3월 3일이었다. 크리스찬리뷰 창간 10주년 기념특집으로 ‘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를 찾아서’라는 연재물을 기획하고 부산, 마산, 진주, 통영, 거창, 산청, 거제, 함양 등 호주 선교사들의 선교 현장이었던 지역을 일일이 발로 뛰면서 취재하였었다. 그런데 17년 전 일신여학교를 취재했던 기자의 수첩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잘 알려진 대로 부산 동구 좌천동은 호주 선교부의 복음의 못자리이다. 특히 좌천 1동 768번지에 있는 장로교 부산신학교의 건물은 옛 '부산진일신여학교’로 부산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구한말의 현대적 건물이다.
 
호주선교사들이 건립한 서양식 건축물로 전국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사실 이 건물은 1895년 10월 5일 호주장로회 여자선교연합회가 파송한 맨지스 양에 의해 세워졌다. 그러므로 이 건물은 기독교가 처음 전파된 곳이며 호주 선교부가 부산 경남지방 선교를 처음 시작한 곳으로 종교적 성지도 된다. 그런데 곧 매각되어 모든 이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질 운명에 놓여있으니 안타깝다. 
 
▲ 2003년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된 부산진일신여학교를 방문한 호주 선교사와 가족들이 교실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여기에는 호주 선교사들의 감동적인 눈물이 배어있다. 눈물이라는 감성적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호주 선교사들의 피와 흔적이 곳곳에 서려있기 때문이다.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서려 있어서 선교사들의 체취가 우리의 영혼을 감동시킨다. 
 
권순형 발행인과 기자는 자리를 박차고 달려갔다. 일신여학교 건물이 매각된다니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부산일보 김상훈 사장과 부산기독교방송국 임현모 총무팀장을 만나 우리의 취지를 설명했고 그들은 흔쾌히 서둘러 도와줄 것을 약속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가 다시 부산을 찾았을 때 부산진일신여학교 건물은 복원 공사를 마친 후 역사기념관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바로 보물이다.>

▲ 용호동에 있던 상애원(상애교회)입구     © 크리스찬리뷰

△창대교회
 
이미 언급 했듯이 1909년 영국 구라선교회가 세운 상애원은 한센인 복음화를 위해 상애교회를 창립했으며, 1911년 호주선교사인 맥켄지 목사가 상애원을 인수, 선교 사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늘 난 두 명의 남성과 한 여성 나환자의 수용을 거절해야 한다. 수용 인원이 넘쳐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종일 내 마음이 아프다. 7명의 남자와 3명의 여자가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줄 물병을 들면서 정말 큰 영광이라고 느꼈다’
  ‘여자가 다리를 절며 우리 집에 왔는데 달걀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그건 우리 병원에서 나병을 치료받고 가져온 감사의 선물이었다. 우린 썩어가는 그녀의 다리 한쪽을 절단했고 의족을 만들어줬다. 18세 처녀였다’
 
맥켄지 사역 초기 일기이다. 그의 나환자 사역은 1939년 은퇴를 할 때까지 계속됐다. 맥켄지가 호주로 돌아가자, 나환자들은 맥켄지를 기념해 ‘한국 나환자들의 아버지’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 정관 신도시로 이전하여 신축한 교회당과 낙원대 실버타운 전경. 2014년 4월 창대교회로 개명하고 입당예배를 드렸다.     © 크리스찬리뷰

용호동에 자리 잡았던 상애교회는 지역개발로 인해 정관 신도시로 이전, 2004년 4월 창대교회로 교회명을 개명하고 입당예배를 드렸다. 특히 1992년에는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가 전도사로 부임, 한센인을 돌보는 사역에 동참하기도 했다.
 
맥켄지 선교사는 종종 신자들에게 “여러분 내가 아들이 없어서 내 후임을 물려주지 못해 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내가 약속할 것은 내가 딸이 셋 있는데 꼭 의료공부를 시켜서 한국으로 보내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결국 나환자 사역은 못했지만 맥켄지 선교사의 딸들이 부산 일신병원을 설립했다.
 
상애원 사역에도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바로 전쟁이었다. 세상 가운데 사랑과 본이 됐던 상애원도 어지러운 시대상황을 피해가지 못했다. 상애원은 1941년 미일 전쟁으로 폐쇄되는 위기에 처했다. 당시 일본의 속국이었던 우리나라는 힘이 없었다. 일본은 상애원에 이전 명령을 내렸다. 이에 상애원은 결국 강제 철거를 당하게 된다.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갈 곳 없는 성도들은 총독부의 강제 이송명령에 따라 소록도로 이송됐다.
 
이후 교회가 다시 재건되기까지는 4년의 시간이 흘렀다. 1945년 예장통합 경남노회의 지원으로 박애원교회로 재건되었다가 상애원교회로 복명하게 된 것은 1946년이었다. 교회는 또 다시 이전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용호농장 개발계획이었다. 새롭게 닥친 교회의 어려움 앞에 성도들은 한마음으로 기도했고 결국 현재 교회가 위치한 정관 신도시에 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주 당시 성도들은 자신이 받은 이주 보상비의 십일조를 바쳤다. 여기에 그동안 하늘로 돌아간 성도들의 유언으로 남긴 유산헌금들이 더해졌다. 이렇게 해서 정관면에 3천31평 규모의 대지를 구입해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낙원대 실버타운도 함께 지었다.

▲ 호주에서 가져온 붉은 벽돌로 지은 창신학교 현대식 교사 상량식     © 크리스찬리뷰

△창신학교
 
1908년 순종황제의 인가로 개교한 창신학교는 당시 호주 선교사였던 아담슨 목사와 마산 최초의 교회 지도자들이 기독교선교와 신교육, 구국운동을 위해 설립했다. 마산지역 사립학교 중 정식 인가를 받은 학교로서는 창신학교가 최초이다.
 
그러나 일제는 전국 사립학교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1908년 8월 26일 칙령 제62호령(사립학교령)을 공포하였는데 이 법령은 반일사상의 온상으로 여겨 온 사립학교(특히 기독교계)를 통제, 간섭하기 위한 법령이었다. 이 법이 공포되자 마산포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아담슨 선교사는 창신학교를 정규학교로 개편하기로 하고 학교 설립 허가원을 제출하였다.
 
그 결과로 1909년 8월 19일자로 학부대신의 ‘사립 창신학교’의 설립 인가를 받게 되었고 초대교장은 호주 선교사 손안로(Rev. Andrew Adamson, 1894-1914)였다. 그러나 1939년 7월 20일 일제의 탄압으로 강제 폐교되고 말았다.                                             
 
그리고 광복 이후 창신초급중학교로 재건되었고 90년에는 창신고등학교, 91년에 창신대학이 세워지면서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 1990년 이전하여 복원한 창신학교 건물     © 크리스찬리뷰

그런데 1914년 안란애(A. W. Allen) 호주 선교사가 창설한 창신학교 7인조 밴드는 유명했다. 한강 이남 최초의 밴드부로 서양음악을 경남 지역에 보급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여기에 축구부와 야구부까지 만들었다.
 
당시 가죽공이 귀해 연습할 때는 새끼줄을 뭉치거나 헌옷을 말아 축구공을 만들어 짚신발로 공을 차게 했는데 이것이 마산 축구와 야구의 시작이었다. 당시 창신학교에서는 일본을 이기려는 방법의 하나로 체육을 중요시했는데 그 종목 중 하나가 야구였던 것이다.
 
▲ 2003년 준공한 신 캠퍼스(합성동)     © 크리스찬리뷰

창신학원 교정에는 호주에서 가져온 붉은 벽돌로 지은 창신학교 현대식 교사가 보존되어 있다. 1924년 12월 교사가 완공되었을 때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는 이 학교를 D. M. Lyall(한국명 라대벽, 창신학교 2대 교장) 기념 남자중등학교라 명명했고, 호주 빅토리아정부는 이 교사 사진을 넣어 우편엽서를 만들었다.
 
▲ 1952년 9월 설립한 일신부인병원은 L형의 현대식 4층 건물이 완공되어 1956년 3월 2일 낙성식을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일신병원

일신부인병원이 설립된 것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9월이었다. 당시 한국으로 파송된 두 자매, 헬렌 맥켄지(Helen Mackenzie)와 동생 케더린(Catherine) 맥켄지에 의해서였다. 매혜란으로 불린 언니는 산부인과 의사였고 매혜영으로 불린 동생은 간호사였다. 
 
‘한국 나환자의 아버지’로 불렸던 제임스 노블 맥켄지의 장녀, 차녀인 두 남매가 가난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시작한 의료시술이 지금의 일신기독병원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당시 전쟁의 상처가 도처에 산재해 있었고, 거리에는 아이들과 보호받지 못하는 여인들이 고난의 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전쟁은 모든 이에게 고통스런 것이지만 특히 여성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매혜란 선교사는 한국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다리 밑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여자를 보았다.
 
그 엄동설한에서 변변한 담요 한 장 걸치지 못한 채 아이를 출산하는 것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는데 이것이 일신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들은 부산 동구 좌천동의 일신유치원 한 구석에서 문을 열었다. 

▲ 제임스 노블 맥켄지 선교사 가족 사진(1931, 부산)     © 크리스찬리뷰

아버지 노블 맥켄지 선교사는 한국에서 사는 동안 네 아이를 얻었는데, 첫 아이가 1913년 10월 진주에서 출생한 헬렌, 곧 매혜란이었다. 1915년에는 둘째 아이 케더린, 곧 매혜영이 태어났다. 바로 이 둘이 후일 아버지를 이어 한국으로 선교사로 가게 되었고 일신병원을 세워 저들의 생애 가장 소중한 부분을 이 병원에서 의사로 간호사로 그리고 의학교육, 조산원 양성 등을 통해 봉사의 일생을 살게 된 것이다. 막내 짐은 두 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고, 현재 부산진교회 묘지에 묻혀있다.
 
▲ 일신기독병원 설립자 흉상. 원장 매혜란(왼쪽, Dr. Helen Mackenzie), 매혜영(Miss Catherine Mackenzie).              © 크리스찬리뷰
▲ 일신병원 조산교육 제12기 수료 기념(1968. 1.30). 앞줄 오른쪽 두 번째 원장 매혜란 선교사, 민보은 선교사, 매혜영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언니인 매혜란은 미국 북장로선교사였던 평양의 마펫(마포삼열 Samuel A. Moffett)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는데 1921년부터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초등학교 교육을 받았다. 그 후 호주로 돌아와 멜번의 장로교 여자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한 후 1933년 멜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다.
 
1945년에서 1950년까지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했으나 중국의 공산화로 중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라고 회상했다. 1952년 2월 부산으로 온 그는 그해 9월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 최근 좌천동 일신기독병원 전경     © 크리스찬리뷰

동생 매혜영은 호주 선교사 라이트(예원배)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이 둘째 딸도 평양의 외국인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고 호주로 돌아온 후 멜본의 아동병원에서 간호사교육을 받고 간호사가 되었다. 그도 언니와 함께 중국선교사로 가게 된다. 중국에서 철수한 후 언니와 함께 일신 부인병원을 설립했다.
 
이 병원은 65년이 지난 지금 부산에서 유수한 종합병원으로 발전하였는데, 설립자인 매혜란, 매혜영을 비롯한 제2대 의료진으로 한국에 파송되어 일신병원에서 30년(1964-1995)이 넘는 기간 동안 일한 바바라 마틴(Barbara Martin) 등 많은 선교사들의 수고와 봉사가 어우러져 오늘의 병원이 된 것이다. 

▲ 맥켄지 화명 일신 기독병원     © 크리스찬리뷰

맥켄지 자매가 미혼이었듯이 바바라 마틴도 미혼으로 한국에서 일생을 보냈다. 마틴은 15살 때 선교사 소명을 받았는데 멜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맥켄지 자매가 훈련받았던 퀸 빅토리아 병원에서 수련을 받았다. 1963년 산부인과 전문의가 되어 이듬해 1964년 부산 일신병원으로 가서 맥켄지의 안식기간 중 임시로 일하려고 생각했으나 임시가 아니라 그로부터 무려 31년 동안 일하게 되었다. 일신기독병원에는 맥켄지 기념관이 있다.

▲ 한·호 선교 120주년을 맞아 호주 선교사와 후손들이 일신기독병원 맥켄지 역사관을방문, 민보은 선교사가 감사기도를 하고 있다. (2010. 10. 5)     © 크리스찬리뷰
▲ 한·호 선교 120주년을 맞아 개관한 경남 선교 120주년 기념관     © 크리스찬리뷰

△경남선교120주년기념관·호주 선교사 순직묘원
 
창원시 진동면 창원공원묘원 중앙공원에 나란히 위치해 있다. 2010년 10월 2일 개관한 경남선교120주년기념관에는 부산과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호주선교사 126명의 사진과 유품이 보관돼 있다.
 
기념관 뒤편 작은 연못 너머에는 호주 선교사 8명의 순직기념비와 묘원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경남이 배출한 4명의 순교자 기념비도 순직 호주선교사들과 나란히 함께 자리하고 있다.
 
호주 선교사 묘원 조성은 창신대학 강병도 총장(현 학원장)의 관심과 열정으로 시작됐다. 그는 부산·경남 지역을 위해 헌신하다 순교한 선교사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데 대한 미안함이 많았다. 묘원이 조성되기 10년 전부터 자료를 수집해 왔고 호주를 수차례나 방문하면서 호주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추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2005년 10월 창신대 내에 ‘호주선교사 순직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 예배를 드려 이름까지 묻혀버린 선교사들의 존재를 다시 세상에 알렸다. 
 
▲ 창원공원묘에 조성한 호주 선교사 순직 묘원에서 호주 선교사와 가족들이 헌화했다. (2010. 10.2)                           © 크리스찬리뷰

기념동산 부지는 창신대에서 희사했고 취지문이 담긴 기념비를 포함해 기념비 9개를 제작했다. 여기엔 호주 한인교회도 도왔다. 크리스찬리뷰사가 한인교회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했고 9개 교회에서 각각 1천 500달러씩 보내왔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행적과 정신을 제대로 알리려면 선교사 묘원이 절실했다. 그러다 무학산 기슭에 홀로 묻혔던 맥피 선교사의 무덤 앞에 경고문 한 장이 붙은 것을 발견했다. 이장하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맥피 선교사는 마산의신여학교 초대교장으로 취임, 독신으로 경남지역 신여성교육을 위해 26년을 봉사했던 선교사로서 56세에 별세했다. 
 
▲ 호주 선교사가 설립한 창신고를 방문한 호주 선교사와 후손(2010. 10.2)     © 크리스찬리뷰

그는 경고 문구를 보면서 선교사 묘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도 미안한데 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니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강 총장은 백방으로 자리를 물색하던 중 마산공원묘원 내 한 장소를 발견했다. 조용했고 자리도 안성맞춤이었다. 기도하면서 세 번을 보러갔고 마산공원묘원측에 제안해 허가를 받았다. 공원묘원 신성용 이사장은 이 천국의 풍경에 감동하여 묘원 부지를 경남성시화운동본부에 선뜻 헌증했다. 이렇듯 강 총장이 열정을 쏟게 된 것은 창신대학이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창신학교에서 유래됐기 때문이다.
 
이밖에 데이비스가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 선교사 파송식을 가졌던 멜본의 스카츠 장로교회를 방문할 수 있다.
 
1888년 세워진 이 교회에서 많은 파송예배가 드려졌다. 그리고 아직도 생존해 있는 호주 선교사들, 후손들을 찾아 감사와 위로를 전할 수도 있겠다. 그분들이 얼마나 감동하시겠는가?
 
또한‘호주맥켄지한센선교회’가 벌이고 있는 ‘한센인 돕기를 후원할 수 있고, 캄보디아 헤브론병원의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위한 ‘희망 나눔 운동’에도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 최근 캄보디아 헤브론병원에서 심장수술 받은 어린이와 부모들(2017. 9.)     © 크리스찬리뷰

에필로그
 
최근에 캄보디아 헤브론병원을 다녀왔다. 취재 중 쓴 일기를 보면서 하나님이 내게 왜 그렇게 많은 은혜와 감동을 주셨는가 생각해봤다. 다른 사람과 그 은혜와 감동을 나누라는 뜻인 것 같다. 나눔으로써 진리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은혜를 대하는 가장 이기적인 태도가 ‘나만 누리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한계도 여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크리스찬은 자기가 받은 은혜를 누군가와 나눠야 한다. 그것이 크리스찬의 의무다. 한국교회에는 큰 은혜가 있었다. 그런데 그 은혜를 교회 안에 가두기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헤브론병원은 2007년 9월 6일 김우정 원장을 비롯한 4명의 한국인 의료선교사들이 연합해 세운 무료병원이다. 년 5만여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진료를 받고 있는데 새벽 2시부터 줄을 서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헤브론병원의 분위기는 한마디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스러움에 감싸여 있다. 목회자이든,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든, 좌절에 빠져 생의 의미를 잃은 사람이든, 세상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든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은 헤브론병원의 신앙과 가르침에 저도 모르게 동화된다.
 
김우정 선교사에게 왜 어려운 길을 가느냐고 물었다. 한마디로 왜 사서 고생하느냐고.
 
“10년째 캄보디아에서 선교사역을 하면서 대한민국이 그냥 이뤄진 게 아니고 120년 전 조선 땅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의 피와 땀이 쏟아진 곳이란 걸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조선에 온 선교사들 중 1/4이 의료선교사였다는 것을 알고 많아 놀랐으며 그들이 한국 아이들을 건강하게 길러줬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분들이 하는 일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을 졌으니 한국이 살만한 때 그 빚을 갚으면서 살겠다고 결심한 거죠.”
 
이 장엄한 외침이 한동안 웅 웅 울리며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 찌든 기자의 모습이 들킬까봐 조마조마했다.
 
선교여행을 통해 익숙한 자리를 벗어나길 권하고 싶다. 헤브론병원을 방문하여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에베소서 5장10절 말씀을 시험해 볼 수 있다. 그곳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재료로 성경의 말씀을 실험해 볼 수 있다. 기자가 경험한 교훈이다. 〠
 
<*표지사진= 부산·경남 지방 최초의 부산진교회 장로와(1904. 5.27) 제2대 담임목사를 지낸 심취명 목사(1914. 1.13) 
 
글/김명동ㅣ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ㅣ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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