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루스와 종이 그리고 한지

김환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7/10/23 [11:57]
▲ 필자가 이집트(카이로)에서 구입한 파피루스.     © 김환기

이집트 나일강에서 자라는 풀인 '파피루스'(Papyrus)는 '종이' (Paper)와 '성경'(Bible)의 어원이 되었다. 인류는 초기에 돌, 금속, 찰흙 외에 동물의 가죽이나 뼈, 나무껍질, 나무, 대나무 등에 기록을 남겼다. 그 후 종이와 가장 비슷한 것은 이집트의 '파피루스'(papyrus)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파피루스 내피를 얇게 만들어 가로와 세로로 맞추어 놓고 끈기가 있는 액체를 발라서 강하게 압착한 후, 잘 건조시켜 기록 재료로 사용했다.
 
파피루스는 매끈한 한쪽면에만 글을 쓸 수 있고, 접으면 부서지기 때문에 둘둘 말아서 두루마리 형태로 보관했다. 또한 파피루스 줄기는 바구니, 그물, 샌들 등의 재료가 되기도 했으며, 한데 묶어서 건축용 기둥으로 쓰기도 했다.

파피루스(Papyrus)

파피루스(Papyrus)의 ‘내피’(Inner Balk)가 '비블로소' (Biblos)이고, 파피루스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지역 이름도 '비블로스'(Biblos)였다. 그리스에서는 '파피루스' 를 '비브로스'라고 불렀으며, 비브로스는 그리스어로 책이란 뜻의 '성경'(Bible)의 어원이 되었다. 
 
'바이블'(The Bible)은 라틴어의 비블리아 (Biblia)에서 나왔고, 이것은 헬라어 비블로스(biblos)의 복수형이며 '책' (Book)을 의미한다. '서지학'(Bibliography)이나 ‘장서가’(Bibliophiles) 등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종이가 없던 고대 시대에 글은 대부분 '파피루스'나 짐승 가죽을 부드럽게 해서 만든 '양피지'에 기록했다.
 
파피루스는 고가(高價)이며 보관이 어려워, 중국에서 종이가 전해지면서 기록물로 자취를 감추고, 관광지에서나 찾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집트에 갔을 때 ‘카이로 박물관’ 앞에서 파피루스를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집요하게 나를 따라 다니며 사라는 것이다. 결국 그가 처음 부른 가격의 1/3 정도를 주고 샀다. 물건을 살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흥정해서 50명에서 10명까지 깎았던 '협상의 달인'이다.

▲ 《왕오천축국전》 영인본. 신라 성덕왕 때 승려 혜초가 인도 5국 부근의 여러 나라를 순례하고 그 행적을 적은 여행기이다.     © 김환기

종이(Paper)

종이는 중국 후한 때 '채륜'이 발명했다. AD 105년 채륜은 행정와 종교 문서를 보급할 목적으로 종이를 개발하여 황제에게 보고하여 포상을 받았다. 채륜이 발명한 제지술은 나무껍질, 헌 어망, 비단, 낡은 헝겊 등을 절구통에 찧어 물을 이용하여 종이를 만드는 것으로 지금의 ‘초지법’(抄紙法)과 같다.
 
기존의 방법과 달리 다른 재료들을 혼합하여 사용하였으며 초지를 위한 편리한 도구들을 개발하여 종이 제조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방법을 대중화시킨 것이다. 값싼 원료를 이용하여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고, 사용하거나 휴대하는 데에도 기존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리했다.
 
이후의 중국 왕조들은 그의 발명을 비밀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제지술이 한국과 일본에서 나타난 것은 7세기에 이르러서였다. 한편 당나라는 종이를 서방으로 수출까지 하고 있었다. 당나라와 사라센 제국 사이에는 실크로드를 둘러싼 전투가 탈라스(Talas) 지역에서 있었다.
 
당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여 몇 천 명만이 탈출할 수 있었다. 사라센 기록에 따르면 투르키스탄 지방 탈라스강 근처에서 벌어진 이 ‘탈라스강 전투(Battle of Talas)’의 많은 포로 중에 포함되었던 제지 기술공들이 아라비아인들에게 제지술을 전파하였다고 한다.

▲ 한지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한지 테마 파크’     © 김환기

한지(韓紙, HanJi)

한지가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600년경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한지는 섬유를 잘게 갈아서 만드는 중국의 제지법과 달리 긴 섬유를 두드려 균일하게 만드는 방법을 독창적으로 개발했다. 고려시대는 한지가 가장 왕성하게 발전한 시기로 국가적으로 닥나무 재배를 널리 장려하기도 했다.
 
당시 불교의 성행으로 불경을 만드는 데 쓰이는 종이 사용량이 크게 늘어난데 따른 것이다. 한지는 '닥나무 껍질'을 가공하여 손으로 만든 종이를 일컫는 것으로, 조선 말엽 서양식 기계로 제조한 종이를 '양지'(洋紙)라고 하고, 고유의 종이를 '한지'(韓紙)라고 불렀다.
 
한지는 고려시대부터 그 명성이 높아 중국인들도 제일 좋은 종이를 '고려지'(高麗紙)라 불렀다. 실제로 중국의 자금성에도 '고려지'가 사용됐고 청나라 건륭황제가 말년을 보낸 '권근제' 역시 고려지로 도배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궁 창고 안에 보관 중인 고려지가 본래의 색과 모양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한지는 각종 공예품으로도 활용이 되었다. 우리 생활에 필요한 소품들로부터 큰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만들어진 공예품으로, 보통 한지공예, 지공예, 종이공예라 칭하고 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염색기법을 활용하여 색한지를 만들어 공예품을 만든다 하여 '색지공예'라 부르기도 한다.

▲ 한지테마파크에서 전시 판매 중인 종이로 만든 다양한 공예품들.     © 김환기

한지의 고향

한지의 고향은 '전주와 원주'이다. '전주한지'는 한마디로 천 년의 숨결을 간직한 우리 고유의 문화이며 전통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 닥나무가 원주의 특산물인 것을 보면 '원주한지' 또한 만만치 않다.
 
원주에는 '한지의 역사'를 한눈에 엿볼 수 있는 '한지테마파크'가 있다. 2017년 7월 19일, 그곳에서 '원주 한지문화재' 부위원장을 역임한 '김종구 사관'과 함께 '한지개발원' 이사인 '김진희' 씨를 만났다.
 
'한지개발원'은 전통한지에 대한 역사와 가치의 체계화와 과학화로 전통한지의 보존 및 개발에 기여를 목적으로 2001년 1월 9일 설립된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사단법인이다.
 
그녀는 한지의 유래와 제작과정,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는 1층과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2층으로 안내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전시품 중에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있었다. '왕오천축국전'은 승려 혜초가 쓴 한국인 최초의 해외여행기로써,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정치, 문화, 경제, 풍습 등을 알려주는 세계 유일의 기록으로 그 가치가 높다.
 
안타깝게도 원본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지에 감탄하고 있는 나에게 그녀는 선물 하나를 건네주었다. 한지로 만든 '양말'이었다.〠

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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