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과 속이 달랐던 배교자 ‘율리아누스’
 
최성은/크리스찬리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은 뒤 우여곡절 끝에 제국의 권력은 율리아누스 황제의 손에 들어갔다.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촌 동생이자 여동생 헬레나의 남편이다.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린 나이에 사촌 형 콘스탄티우스 2세가 일으킨 끔찍한 살해의 피바람을 보았는데 이는 그로 하여금 기독교를 버리고 배교자의 길을 걷게 하였다. 
 
그는 <숭배하는 신들의 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다신교 신봉자였고 <조상들의 종교>를 회복하는 일을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교회는 그를 배교자 율리아누스(줄리안)라고 불렀다.
 
그는 노골적으로 교회를 박해하지는 않았다. 절제가 남달랐던 그의 인격과 특히 그리스의 철학에 정통했던 그의 지성이 그를 겉과 속이 다른 교묘한 박해자가 되게 하였다. 그가 교회에 내린 가장 센 명령은 다신교를 믿는 동료 시민들을 우상숭배자, 또는 이단자로 몰아 괴롭히는 것을 금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교회를 참혹하게 박해하는 것이 결국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고 자신의 명성만 추락시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기독교를 따르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미워하였다. 공식행사 때 어쩔 수 없이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는 집에 마련한 유피테르와 메르쿠리의 사당에 향을 피웠다. 그리스도와 콘스탄티우스는 자기의 철천지 원수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할 때까지 약 10년간 자신을 간교하게 위장하였다
 
그는 제국의 모든 주민들에게 자유롭고 동등한 종교적 관용을 선포하였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와 신도들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이는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정책을 크게 후퇴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서로 적대적인 기독교 종파의 지도자를 황궁으로 불러 토론케 하고 그들의 격렬한 논쟁을 즐겼다. 겉으로는 진지한 척 했으나 속으로는 비웃고 경멸하였다.
 
그는 국가의 축일이 되면 신전으로 가 몸소 향을 피우고 제사하였다. 제물의 배를 갈라 염통과 간을 꺼내 상태를 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복점관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다른 종교에 힘을 실어 주려는 고도의 계산된 행동이었다. 그는 제단에 직접 제물을 바치는 것을 좋아했다. 어떤 날은 수소 100마리를 직접 죽여 바치기도 하였다. 율리아누스의 정성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신교 신앙은 쉽게 부흥되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사제들과 비교하여 다신교 사제들의 무지와 무능에 몹시 실망했다고 한다. 기독교인들에 비해 다신교 신자들의 신앙심과 열정부족을 안타까와 했다고 한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해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유대인들의 소원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것이었다. 율리아누스는 유대인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기독교에 대한 제압의 효과가 크다는 것을 알았다. 유대인들은 황제만세를 외치며 성전건축에 열을 올렸지만 겨우 6개월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율리아누스가 그 사이에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인을 크리스찬이라 부르지 말고 갈릴리 사람이라 부르라 명했다. 크리스찬이 구세주의 이름에서 나온 명예로운 명칭임을 못마땅히 여기고 경멸하는 조로 갈릴리 사람이라 부르게 했던 것이다.
 
그는 문법과 수사학을 가르치는 일을 기독교도들이 담당해서는 안된다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어린이들이 비기독교 교사들로부터 그리스 로마의 신화를 배운다면 다신교 부흥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갈비뼈를 관통한 장창이 간에 박히는 중상을 입고 전사하였다. 그의 나이 32세요 황제에 오른지 겨우 1년 8개월 만이었다. 그로서는 애석한 일이겠으나 교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배교자를 처단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였다.〠 

최성은|시드니선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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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0/23 [12:16]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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