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조연, 목회자의 고품격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담임목사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세계 최대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 2대 담임목사로 시무 중인 이영훈 목사                    © 크리스찬리뷰

인정할 건 인정하자.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조용기 목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미 한국교회사를 넘어서 세계교회사에서 유례없는 ‘독보적 존재’이다. 그만큼 교회의 일거수일투족엔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주 최근까지 호사가들의 ‘반찬이 되는’ 대형교회들의 후임자 문제이다. 후임자 선정 문제를 이미 10여 년 전에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민주적인 방법으로 아주 모범적으로 깔끔하게 해결했다.
 
이달에 우리의 초대석에서 만난 이영훈 목사는 소위 60년 전통의 세계 최대교회 2대 담임목사이다. ‘그가 어떤 면에서 그토록 큰 교회 지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후임자 투표에서 두 번이나 최다득표를 했을까? 아니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조용기 목사의 후임이 되었을까? 어떤 비결이나 노하우라도 있었을까?’
 
‘탁월한 설교? 범접하지 못할 카리스마? 리더십? 출중한 지성? 걸출한 외모? 매너? 대인관계술?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호기심이 발동한 것도 사실이었다.
 
‘빙산의 일각’이란 말처럼 그에겐 보이지 않는 내면이 더 깊었다. 첫인상은 둥글둥글한 마음씨 좋은, 낙오자에게도 날카로운 말을 하거나 내치지 않을 듯한 ‘우리 시대의 바나바’같은 인상이었다.
 
두툼한 손은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며 끌어당길 수 있는 자석처럼 보였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는 이미 증조부 때부터 내려온 신앙의 뿌리가 아주 깊게 그리고 아주 넓게 퍼져있었다.  
 
▲ 순복음세계선교회 산하 오세아니아총회-아시안총회 연합총회가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123명의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드니에서 열렸다. 이영훈 목사가 선교사들과 블루 마운틴을 찾았다.     © 크리스찬리뷰
 
‘오벳에돔의 축복’
 
“저희 가정은 감사하게도 한국에 선교사가 처음 들어왔을 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 바탕 위에서 ‘믿음의 신대륙’을 건설한 축복의 가문이었습니다. 복음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주의 종을 극진히 섬기고, 교회의 거룩성과 영광성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을 가문의 전통으로 여겼습니다.
 
베어드(Baird/한국명 배위량) 선교사님께서 저의 증조할아버지에게 복음의 씨앗을 처음 심어주셨습니다. 그 축복의 땅은 평양 신양리입니다. 신양리는 고 장기려 박사님께서 꿈에도 그리워하고 사모하시던 고향입니다. 그곳에서 베어드 선교사님은 13명의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학문과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땅, 그 자리에, 그 분이 처음 세운 미션스쿨이 바로 숭실고등학교입니다. 증조할아버지께서는 신양리에서 베어드 선교사님 일행을 만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전주 이씨 가문의 8대 독자인 증조할아버지(정종의 4남 선성군의 16대손 이재식)는 복음의 흡수력이 왕성했습니다. 옹가의 8대 독자라면 얼마나 귀한 존재였겠습니까? 그럼에도 증조할아버지께서는 거침없이 예수를 믿으셨습니다.
 
교회를 건축할 때는 직접 산에 올라가 도끼로 나무를 찍어서 건축 자재를 마련하실 정도였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헌신하셨습니다. 8대 독자라면 고집도 좀 세고, 이기적일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전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저희 가문은 자손이 귀했습니다. 아마 9대 독자인 할아버지(이원근 장로)에 대해서도 주위의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을 것입니다. 증조할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은 신앙적 열정은 인정하지만, 9대째 독자로 이어 내려온 것에 대해서는 내심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에게 태기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완공하는데 앞장선 증조할아버지 독자 아들의 가정에 태의 문을 여시고 ‘다산과 번성’의 복으로 채워주셨습니다. 9대 독자인 할아버지는 9남매(4남 5녀)를 얻는 복을 누렸습니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9남매를 얻은 것은 상상을 초월한 축복이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의 기독교 전래 당시 선교사의 전도로 복음 받아들인 이후, 그의 조부는 평양 서문밖교회 장로로 섬기다 48년에 월남했다.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세운 영락교회 마당에 큰 천막을 치고 정착할 당시 그의 조부도 한 달 천막에 거주하다 남영동으로 옮겨서 정착하자 다시 교회를 하나 세우는데 바로 남영동교회이다.
 
이후 계속 그의 조부는 남장로교 선교사의 요청으로  제주도로 건너가 통합측 교회인 남원교회를 설립하기도 한다. 2년 반 남원교회를 섬겼는데, 지금은 큰 교회로 변모했다고 한다. 6.25전쟁 때는 부산에서 한경직 목사와 그의 조부는 부산영락교회 설립 때 힘을 합쳤고, 그의 백부는 평생 영락교회를 섬기면서 수석 장로로 은퇴했다.
 
그는 복음을 처음 받아들인 후 성전건축에 전념했던 증조 할아버지의 삶이 그의 가문에 ‘오벧에돔의 축복’으로 다가왔다고 회상했다.
 
▲ 말씀 전하는 이영훈 목사     © 국민일보

장감성순의 완벽한 에큐메니컬 가문
 
“할아버지의 아들 넷 중 하나는 목사, 셋은 장로가 되었습니다. 딸 다섯 중 하나는 목사 사모, 셋은 권사가 되었습니다. 9남매 중 출가했던 딸 하나만 북한에 남고 나머지는 모두 아버지(할아버지)와 함께 신앙의 자유를 찾아 복음의 신대륙인 남한으로 넘어왔습니다. 아버지는 그 중 둘째였습니다.”
 
그의 외가 쪽도 만만치 않은 신앙의 명가를 이루고 있다. 오히려 친가보다 더 열정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머니(김선실 목사)는 신실한 목사님의 따님이십니다. 외할아버지(김종삼 목사)는 황해도 장연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시골의 일곱 개의 교회를 맡아 사역하셨지요.
 
한국교회사의 거목 민경배 교수님, 소망교회 원로목사 곽선희 목사님이 장연 출신이십니다. 언젠가 곽선희 목사님이 제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고향이 바로 장연입니다. 목사님의 외할아버지를 내가 잘 알지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셨지요. 아주 훌륭한 어른이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외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외삼촌(김선경)도, 외삼촌의 두 아들(김성규, 김일규)도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또 목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으니 4대에 걸친 ‘F4 목회자’인 셈인데, 아마 130년 한국 기독교회사에 4대에 걸친 목회자 배출은 거의 드문 일일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의 모친의 신앙과 인생여정 또한 그의 신앙에 큰 버팀목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모친은 서대문순복음교회 시절부터 최자실 목사와 전도 파트너가 돼 매주 교도소를 찾아 복음을 전했던 인물이다. 나중에 여의도순복음교회 구역장, 지역장을 거쳐. ‘조용기 목사님 말씀을 더 듣고, 복음을 더 깊이 알고자’ 순복음신학교에 청강생으로 학교에 다녔다.
 
그러다가 ‘등록하지 않으면 더 이상 수업을 들을 수 없다’는 학교 방침에 ‘마침내 신학생’이 된 계기가 됐다고 한다. 시부모를 모시는 며느리, 4남 1녀의 어머니, 재봉틀을 판매하는 사업가로 도저히 신학교를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배우고 전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모든 상황을 뛰어넘었다. 남편에게도 미리 말하면 반대할까봐 숨기고 신학생이 되었다고 한다.
 
가정을 돌보기에 빠듯한 삶을 살면서 자녀들을 위해 날마다 새벽기도회 때 ‘이 자녀들은 주님의 자녀이니 주님이 키우시고,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고 주님이 맡아서 해 주세요’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그런 모친은 세계 최대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아들에게 “늘 겸손해라, 섬기는 자세로 교회와 성도들을 잘 섬겨라.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섬기러 왔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양떼들을 섬기는 자세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교회, 십자가를 높이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는 소망을 잊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가족에게서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이 있다. 이토록 신앙으로 번성한 가문인데, 모두가 한 교단되어 있지 않고, 여러 교단 소속이라는 점이다.
 
“저희 가정(순복음)을 제외한 친가 쪽은 큰아버지(이경화 장로)를 포함해 두 분의 작은아버지(이경준 목사, 이경섭 장로)와 고모부(윤명호 목사) 모두 장로교 통합 측에서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외가 쪽은 모두 장로교 합동 측 교회에 출석하십니다.
 
오촌 아저씨 한 분은 성결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군종감(양영배 목사)으로 사역하셨습니다. 동생(이영찬 선교사)은 뉴저지연합감리교회에서 파송을 받고 현재 아프리카 케냐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그야말로 장감성순(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이 조화를 이룬 완벽한 에큐메니컬(교회연합)인 셈입니다.”
 
▲ 이영훈 목사는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 조용기 목사라고 강조한다. 조용기 목사(왼쪽)와 함께 기도하고 있는 이영훈 목사     © 국민일보

순복음과의 만남
 
어릴 때부터 그의 가정은 매일 가정예배, 성수주일, 십일조생활을 체질화했다. 충현교회에 출석하던 그의 가족이 64년 1월 서대문으로 이사했다. 새벽기도가 평생의 습관이던 그의 조부는  5분 거리에 있는 순복음중앙교회를 발견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모체로 여의도로 이전하기 이전이었다. 
 
“그렇게 1월부터 3개월간 새벽기도를 다니시더니 석 달 후엔 순복음교회로 교적을 옮기셨습니다.  64년 4월인데, 제가 10살 때 순복음교회에 처음 발을 디딘 것입니다,”
 
이렇게 순복음과의 첫 만남에서 받은 첫 인상은 어땠을까?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장로교에서 느껴지 못했던 것이지요. 박수치며 통성 기도하고 찬양하던 것이 익숙하지 않아 어색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영향으로 성령충만, 성령세례, 방언을 받았고, 초등학교 5학년 때인 66년 2월에 성령체험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 성령체험하니 살아계신 예수님이 오셔서 얼마나 강하게 임하셨는지 등하교시 한두 시간씩 교회 가서 기도하고 친구들 전도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반장을 했는데, 60여 명 전체를 다 예수 믿게 해달라고 한 시간씩 일찍 가서 기도했습니다. 순복음교회 성령체험이 일생 동안 저를 붙들어준 체험적 신앙이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배우고 알아도 성령체험 없으면 안된다는 확신이 그를 평생 이끌어온 신앙의 핵심이었다.
 
“성령체험하면서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령 체험은 예수 십자가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령체험은 그 사람에게 예수의 흔적이고 십자가 신학과 성령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그때 결혼도 하지 않고, 불철주야 전도하고 목회하던 총각 목회자였던 조용기 목사를 만나 ‘영원한 멘토이자 영적 아버지’로 모셔온 그의 소감을 육성으로 들어보자.
 
“조 목사님은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신 분입니다. 제 개인적 믿음의 세계에 눈을 띄게 해주신 분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절대 긍정의 믿음을 배웠습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조차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축복이라는 믿음입니다. 조 목사님께서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가장 크게 미친 것은 긍정적인 믿음의 힘입니다,
 
조 목사님께서는 성경에 어떤 경우에도 부정적으로 말하고, 보고, 판단하는 것은 단 한 번도 쓰임 받은 적이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는 절대 긍정과 절대 선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긍정적인 믿음에서, 죽음조차도 부활신앙으로 이겨내는 것이 십자가의 부활신앙입니다.
 
철저히 말씀을 붙잡고 긍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조 목사님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성령 충만한 신앙, 믿음의 역사, 십자가 신학, 이 세 가지가 평생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조 목사님을 생각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엄청난 기도생활입니다. 조 목사님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성령체험이 기도생활과 어우러질 때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미 열 살 때부터 조용기 목사의 ‘긍정적 믿음과 기도생활’의 영적 유산을 DNA로 물려받은 그는, 성령 체험한 이후 늘 교회서 살다시피 했다. 예배 부흥회 빠진 적은 당연히 없었다. 친구들 사이에 별명도 ‘목사’였다.
 
“한 번도 딴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성령 체험을 한 것을 계기로 평생의 방향이 정해진 것입니다.”
 
▲ 매년 성탄절을 앞두고 펼치는 희망나눔에 동참하는 이영훈 목사(오른쪽 앞)     © 국민일보

이민교회 경험
 
신학의 지평을 넓히고자 먼저 진보적인 연세대학교 신학과로 진학했다. 그리고 교단신학교인 순복음신학교(한세대)를 마치고, 82년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쳐 템플대학교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종교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언뜻 보면 엘리트 코스만 숨가쁘게 달려온 것 같다. 그러나 박사 과정을 마치기까지 시간이 많이 지연되었다. 박사과정을 공부할 때 이민목회를 병행했기 때문이다. 
 
“평생 처음으로 하는 목회였기 때문에 젊음의 열정으로 잠을 하루 서너 시간씩 자면서 올인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한 주간의 전반부 3일은 공부하고, 후반부 3일은 교회사역을 하여 공부가 늦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워싱턴에 땅을 3천 평 사서 교회 건축을 했습니다.”
 
이 또한 쉽게 목회하고 쉽게 부흥하고 교회 건축했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눈물로 뿌린 씨앗을 추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곳에나 마음밭이 돌밭 가시밭이 있기 마련인데, 특히 이민교회에는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이민교회들은 교인을 붙잡기(?) 위해 신앙을 보고 제직임명하는 게 아니라 너무 쉽게 하다 보니 섬김의 직분인 교회 직분을 감투로 생각하고, 계급이 올라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적폐 중의 하나로 꼽았다.
 
특히 장로를 ‘목회 장로’와 ‘행정치리 장로’로 구분하여 목사와 장로 사이를 대등하게 하고 견제하는 경우도 지적했다. 그의 지론은 장로는 아론과 홀처럼 목회자를 돕는 관계여야지 견제하거나 비판하면 안된다고 하였다.
 
“건전한 야당이 되겠다고 하는데 야당이 교회에 있으면 안됩니다, 교회는 여당도 야당도 아닌 ‘예수님 당’이어야 합니다. 이민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장로와 주의 종들의 섬김의 리더십입니다. 섬김의 태도가 아닌 권위의 힘에서 성도들을 호출한다고 생각하는 한 문제는 계속 발생합니다.” 

이민교회는 결국 사람문제가 개선되어야 하고, 제직과 장로는 목회 도움을 주는 아론 홀의 역할을 해야지, 감시자가 되고, 늘 충동하면 교회에 늘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했다,
 
“이민목회의 가장 큰 어려움은 삶이 바뀌고,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하니 돌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쉽게 상처 받고, 쉽게 교회를 옮기고,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입니다, 워싱턴 교민이 8만 명이 채 안 되는데 100개 넘는 많은 교회가 끊임없이 분열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80년대 말) 이민목회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워싱턴순복음제일교회 예배당을 5년 동안 건축하며 너무나 고생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정말 맨땅에 헤딩이었습니다. 은행 융자를 전혀 받지 않고, 헌금 나오는 만큼 건축을 해나갔습니다. 300명의 교인이 매달 10만 불씩 헌금하는 등 열정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두세 달 건축이 지연되기도 했고, 체크가 바운스 되는 아픔도 있었습니다. 엎드려 눈물로 기도한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주신 기적의 이야기도 많습니다. 특히 한 미국인이 새벽에 기도하러 교회에 나왔는데, 예배당 건축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감명을 받아 집 3채를 기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성도들도 감동을 받아 예배당 건축이 축복 속에 진행됐습니다. 그 미국인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고 간증하기도 했습니다.”
 
어디에서나 이민교회의 어려움은 ‘분열’인데, 그는 한 교회가 14번 갈라지는 경우도 보았다고 한다.  그런 이민사회의 분위기 속에 교회를 건축한 자체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그 당시 7천여 명 모이던 워싱턴 중앙장로교회, 이동원 목사가 담임하던 지구촌교회와 더불어 순복음제일교회가  ‘80년대 후반 워싱턴의 트리오 이민교회’로 서로 강단 교류도 하며 행복하게 목회했다고 회고했다.
 
“순복음에 한 번도 안 와봤다가 우리 교회 와서 이미지가 바뀌었다고들 하시더군요. 워싱턴 목회 할 때 좋은 에큐메니컬을 경험했습니다.”
 
▲ 추운 겨울철에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 운동에 앞장서서 기부를 호소하며 종을 치고 있는 이영훈 목사.     © 국민일보

순복음 오순절신학 정립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귀국해 국제신학연구원장을 맡으면서, 순복음신학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한국 순복음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로 활약했다. 
 
당시 한국교회 안에서 한때 이단시비에 휘말렸던 조용기 목사의 ‘3박자 축복’과 뜨거운 성령운동을 신학적으로 정리해 주류교회와 접목시켜, 순복음 오순절신학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제신학연구원장을 8년간 지내면서 1년에 20권씩의 책을 펴냈습니다. 먼저 조 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해서 ‘순복음 오순절신학’으로 정립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또 1년에 한 번씩 하버드대학 하비 콕스 교수와 몰트만 등 세계적인 신학자들을 대거 초청해 국제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1980년대 말에 예장통합 총회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사이비성을 거론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 목사님의 설교 메시지 등 모든 자료를 연구위원회에 제공하고 적극적인 답변에 나섰습니다. 결국 예장통합 연구위원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신학적 정체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정기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순복음교회에 신학이 없다는 목소리가 쏙 들어갔습니다. 조 목사님의 오순절 운동에 대한 신학적 정립에 조금 기여했다는 뜻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영훈 목사가 한기총 회장 당시 한기총을 방문한 현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 국민일보

새벽기도, 능력 부여받는 가장 중요한 시간
 
워싱턴의 처녀목회지에서 부흥의 경험으로 그는 어려운 이민교회의 소방수로 불려 다녔다. 어느 이민목회지에 부름받아 부임할 당시상황을 들려주었다.
 
“전임 목사님을 떠나시도록 한 교회에 목사님의 반대그룹과 지지그룹이 원수처럼 지내던 교회에 청빙받아 갔을 때입니다. 청빙을 원치 않던 장로들이 ‘여기 왜 왔느냐?’고 질문을 해요, 담임목사로 갔는데 목사가 거할 숙소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루에 50불 정도 되는 모텔에서 한 달 보내면서 아파트 보러 다녔습니다. 장로 10여 명 중 딱 한 분이 어떻게 지내는가 와보셨지, 아무도 와보지 않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접(?)에 섭섭할 수도 있었지만, 섭섭해 하지 않았다. 20만 마일 넘게(30만 킬로) 뛴 차를 몰고, 교회 떠날 때까지 묵묵히 사역했다. 민들레는 밭을 가리지 않듯 그는 목회환경을 가리지 않았다. 마침내 장로들을 모아놓고 소신을 밝혔다.  
 
“저는 싸우면 집니다. 백 번 싸우면 백 번 다 집니다. 대신 제가 잘 섬길 터이니 장로님들이 성도님들을 잘 섬겨 주시고, 장로님들끼리 화목하십시오. 화목할 때까지 당회 정지하겠습니다.
 
9개월 동안 은퇴하신 장로님 혼자 섬기는데도 교회는 부흥했습니다. 장로님들이 당회 복귀 못할 것 같으니 화해하겠다고 하여 부부 동반하여 바베큐하며 9개월 만에 화해했습니다. 원수처럼 지내다가 화목하니 교회는 더욱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새벽기도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만 하던 것을 토요일에도 다시 시작했고, 주일도 새벽 4시부터 7시까지 강단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9개월 동안 모든 것이 해결되고 상처들이 치유되었습니다.”
 
이민목회 시절에 경험한 에피소드들도 들려주었다.
 
“부흥회 강사 선정 등에 제직들이 터치하려는 부분이 있었는데, 강단권에 절대적인 원칙이 없으면 어려워집니다. 성도들이 추천하는 강사를 모셔왔다가 큰 혼란이 있었지요, 제가 모르는  ‘쓰러뜨리는’ 목사가 강사로 왔다가 풍비박산 날 뻔했습니다.
 
그 분도 서울대 나오고 박사했다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없는 그 어떤 것도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에 없는 것을 자꾸 시도하면 성도들에게 신비감을 줄 지 모르나 큰 혼란을 가져옵니다. 신사도, 금가루 등등 성경에 없는 이야기하면 안됩니다. 주의 종이 기도 많이 하고, 늘 인내하고, 말씀 준비 철저히 해야 합니다.
 
토요일에는 장례식 결혼식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예배 준비해야 합니다. 한두 시까지 설교 원고 다듬고, 성령의 역사가 있고 뒷받침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성령체험 없이 제자훈련 하면 그것도 어렵습니다. 인간의 지성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하려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체험 후 말씀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새인처럼 되기 쉽습니다. 이민교회가 바쁘다 보니 다른데 신경 쓸 데가 없습니다. 결국 주일 하루에 승부를 거는 것 아닙니까? 새벽기도, 예배, LA에서 목회할 때 매주 장로님들과 성경공부 했습니다. 장로들이 앞장서서 모범 보이지 않으면 미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성도들의 아픔과 갈등을 교회가 잘 감싸주며, 성령체험과 성령충만을 이루며 교회가 부흥해 갈 즈음 ‘엄청난 소식’을 들었다.
 
“한국에서 조용기 목사님 후임으로 조 목사님께서 4명을 추천하시고, 장로님들이 3분 추천하셔서 7명을 두고 투표했는데,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를 했다더군요. 추천된 줄도 몰랐고, 70명의 운영위원들과 950명 장로님들이 모여 한 2차 투표에서도 표가 제일 많이 나와 2대 담임목사로 선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맡게 된 그는, 1년 반 동안 서리목사를 지낸 다음 공동의회 투표에서 99.5% 찬성을 받아, 2008년 제 2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조용기 목사님 제자로서 두 가지 사역의 큰 축은 성령의 사역과 믿음의 사역입니다. 제 신학의 가장 핵심은 십자가 대속사건을 통한 믿음 사역과 성령 사역입니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속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회입니다.
 
이미 그것을 57명으로 시작하여 7년 만에 1천 명이 되는 것과 목회자 쫓아낸 교회 가서 7년 만에 13배 부흥하여 건축한 경험이 있는데, 다른 비결은 없고 새벽기도 4시부터 7시까지 오직 기도한 것입니다. 새벽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는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또 신앙에서는 타협이 없어야 합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목사와 장로인데, 혼연일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저희 교회 장로는 현재 1천300명으로 강한 분들이 있지만 목사와 다툰 분은 없습니다. 지난 9년 동안 목회하면서 200명을 뽑아 운영위원 당회 기능을 대신합니다.
 
모든 회의는 30분 만에 끝납니다. 교회에 회의 많은 게 문제입니다.  어떤 교회는  3시간씩 하고, 속회하여 다음 날 하는 교회도 있다는데, 우리는 3시간 내에 끝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후임목사, 영원한 조역
 
영적 거장인 후임목사로서 그의 과제는 무엇일까? 또 사역하는가?
 
“후임목사는 무조건 아무 것도 바꾸면 안됩니다. 찬양 기도하는 순서를 약간 바꿀 정도였습니다. 건물도 리모델 정도 외에는 바꾸면 아무리 좋아도 천천히 때가 될 때까지 하나하나 조금씩 눈에 안보이게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주보, 예배 스타일도 바꾸면 좋지 않습니다. 지금도 조 목사님 좋아하는 성도님들 많이 계시기 때문에 변함없이 담임목사 때와 똑같이 해드립니다.
 
그런데 조 목사님께 가서 저와 오해되는 말을 해서 점수 따려는 사람이 있더군요. 후임이 목회할 때 이간질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그런 분들도 이해합니다. 전임 목사님들께 충성하다 보니 이해합니다. 누구나 그런 것 초월하지 못하면 목회 못합니다. 저는 후임으로 평생 부목사 같은 마음을 갖고 합니다. 53년을 조 목사님 밑에서 살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습니다.”
 
▲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성소수자들의 축제인 퀴어문화축제 반대 시위에 나선 이영훈 목사(오른쪽 2번째)          © 국민일보

초대형교회 목회자로서 그의 역할과 사명은 무엇일까?
 
“큰 교회와 작은 교회 사명이 다릅니다. 먼저 우리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 돌보는 일에 3분의 1, 즉 300억 정도는 선교와 구제 쪽으로 씁니다. 그리고 70년대의 이슈였던 사회구원 쪽 즉 민중신학적, 혁명적인 것보다는 이제 큰 교회들이 힘을 모아 사회적 이슈, 즉 인권차별이라는 기치 아래 동성결혼 합법화 시도에 함께 대처해야 합니다.
 
동성애 빠진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만, 성경적 창조원리와 한국 전통 가치와도 위배되는 이런 이슈에 대한 이중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동성애자에게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동성결혼은 어떤 경우에도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최근 이슬람이 한국에 30만이 들어왔습니다. 6개이던 모스코가 20년 만에 120개로 늘어났습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자리를 굳히면 기독교가 가장 큰 타격을 입습니다. 기독교가 영국처럼, 이슬람에 의해 무너지고 사회적인 어려움 겪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또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등 이단들이 정치권과 야합하여 세력 확장하면서 기독교를 파괴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박태선 전도관 뿌리, 이단의 계보인 문선명 계보와 박태선 계보의 뿌리가 16만 가지나 갈라졌다고 합니다.
 
이런 이단들이 불과 몇 년 사이에 교회 내에 침투하여 믿음이 약한 사람을 도둑질해 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10개월 배우는 동안 세뇌가 됩니다, 두 번 정도 가서 교육 받으면 80%는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그 20%가 남아서 16만이 되었다면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장로 권사들이 가까운 지인들을 뺏어간 숫자가 얼마나 된다는 말입니까? 그런 이단들은 요한계시록만 가지고 합니다.
 
장로교는 칼뱅이 유일하게 계시록 주석을 안썼기 때문에 성령론과 종말론 쪽이 약합니다. 신천지가 그것을 교묘히 파고 들어가 종말론으로 유혹합니다. 지인 중에 1년을 모르고 그런 데를 다녔어요, 희한하게 교회에서 못듣던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껴 1년을 나가니 가까운 친구가 세뇌된 줄 알고 이만희 동영상을 띄우더라는 것입니다.
 
교회 내 문제점들을 자꾸 지적하고 기독교를 고발하는 세력들이 대부분 신천지입니다. 특히 신천지가 이름 도용하여 목회자를 공격합니다. 그런 일들이 계속 될 것입니다. CBS, 한기총, 우리 교회, 기독교들이 이단을 강력히 대처해야 합니다.”
 
여기서 잠깐 최근 원래 목적에서 많이 벗어난 한기총 이대위에 대하여, 한기총 대표를 역임한 그의 의견을 들어볼 필요를 느낀다.
 
“제가 한기총 대표를 할 때 개혁하려고 정관 바꾸려 할 때였습니다. 문제시 된 교단에서 법정 소송을 했습니다. 한기총은 개혁되어야 합니다. 이단성 있다는 교회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고소고발로 얼룩지다 결국 마무리 못하고 물러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이미 빠듯하게 짜인 하루하루의 일정 속에 분초 단위로 워낙에 바쁘게 움직이는 그의 일정 가운데 그에게 유일한 시간은 새벽 4-7시까지라고 하였다.  이 시간을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능력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풋풋한 인간적인 냄새’를 맡기 위해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을 해보았다. 
 
- 만약 순복음교회가 없었더라면?
 
“평범한 장로교회 목사로 남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시대적인 요청이 성령운동인데 성령 체험을 접목시켜서, 특별히 장로교와의 여러 가지 일들이 협력하여 잘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 가문이 장감성침순의 에큐메니컬의 모델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교권주의 물량주의 탈피하고 섬기는 교회로 탈바꿈하여야 합니다. 큰 교회들이 앞장 서서 펼치면 가능합니다,”
 
- 가장 영향력을 끼친 책은?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추구하기보다 보편적 사랑으로 섬김의 삶을 산 사람이 천국의 열쇠를 가진다는 여운이 진한 스토리입니다.”
 
- 목회철학은?
 
“예수님을 닮은 목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마지막 목회 사역이 마쳐질 때 저라는 존재는 다 지워지고 예수님만 남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예수님이 머리 되신 교회로, 예수님만이 높임받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 가장 좋아하는 성경말씀은?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입니다.”
 
- 이민교회 문제와 바람직한 방향은?
 
“이민교회에 갈등과 분쟁이 많은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물질의 풍요로움은 있지만, 정신적 황폐함이 심각합니다. 성도들의 상처가 깊고 성숙하지 못한 신앙이 원인으로 꼽힙니다. 가정과 자녀 문제도 많습니다. 뜨거운 예배와 영적 분위기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민교회는 한국교회와 달리 소규모가 상당수이고 성도 접촉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민목회는 메시지와 인격이 잘 조화되어야 합니다. 이민교회의 또 하나의 약점은 연합이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책임의식을 갖고 앞장서서 주도적 역할을 해주어야 합니다. 이민교회와 한국교회가 선교를 위해 하나되는 네트웍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 한인교회와 성도들에게 당부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어 망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영성을 회복하고 기도에 열심을 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하나님께서 참 기뻐하는 삶을 살기를 당부드립니다. 호주 이민교회도 이제는 주류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주류사회의 정치와 경제, 교육 등에 들어가기를 기대합니다.”〠 <사진제공= 국민일보>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알파크루시스대 원격교육학부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copyright ⓒ 크리스찬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입력: 2017/11/27 [15:14]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포토 포토 포토
들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