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은 부산에서, 영혼은 천국에서

멜본으로 떠나는 그린 중령의 미망인 올윈 그린 여사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17/11/27 [15:25]
▲ 건강미 넘치는 94세의 올윈 그린 여사. 그녀는 현재까지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박사 과정 중에 있다.     © 크리스찬리뷰


11월 1일, '그린 중령'(Lt. Colonel Charles Green) 서거 67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호주 육군 제3대대 대대장으로 참전하였다.
 
제3대대는 1950년 9월 28일 부산에 상륙했고, 영연방 제 27연대에 소속되어 '연천전투', '박천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다. 이후 북진을 거듭하여, 1950년 10월 29일 정주의 치열한 전투 끝에 또 한 번의 승전고를 울렸다.
 
10월 30일 달천강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을 때 북한군이 쏜 포탄의 파편이 그린 중령의 복부를 관통했다. 안주에 있는 미군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1950년 11월 1일 오후 8시에 전사했다. 고향 비문에는 그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1919년 12월 16일에 Swan Greek Clarence Valley 에서 태어나서, 1950년 11월 1일 한국 달천강 정주에서 전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주경야독을 하며, 16년 동안 군복무를 하면서 호주군의 가장 모범적인 장교가 되었다. 그는 Clarence Valley 청년들에게 영원한 감동으로 남을 것이다."

김기덕 중령 (Lt. Colonel Paul Kim)

▲ 6.25전쟁에 참전하여 작전 중인 찰스 그린 중령(왼쪽). 한국 전쟁의 영웅으로 불리는 그는 1950년 10월 30일, 북한군이 쏜 폭탄의 파편으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30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 크리스찬리뷰


오늘 올윈 그린 여사(Olwyn Green)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녀는 드럼모인(Drummoyne)에 산다. 도착하니 김기덕 중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 중령은 ROTC 출신으로 월남전 참전용사이다. 한국에서 주요 보직을 거친 후 중령으로 예편하고, 92년 호주로 이민왔다.
 
1997년 한인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호주와 한인사회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특별히 그는 참전용사들과 유가족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한인신문에서 그린 여사의 인터뷰를 접하게 되었다. "6.25 전쟁은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이다." 이차대전의 대승과 월남전의 대패 사이에서 아무런 결과 없이 끝난 6.25 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라는 기사를 보고, 그녀를 찾아가 위로와 감사를 전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13년 전부터 참전용사들과 함께 그린 여사의 생일잔치를 주선하였다. 올해도 9월 21일 총영사를 비롯한 참전용사 등 40여 명이 함께 모여 그린 여사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녀는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 대한민국 6.25 참전 유공자회 호주지회 회원들과 함께 한 올윈 그린 여사.     © 크리스찬리뷰


특별히 해금으로 'Moon River'를 아름답게 연주한 'Maria Au'에게 힘찬 박수도 보냈다.
 
그린 여사는 딸이 살고 있는 멜본으로 이사할 예정이다. 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얼마 전, 딸에게서 멜본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이사하기로 결심을 했다. 아직 머물 곳이 정해지지 않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 많은 살림을 어떻게 할 지 내가 심히 걱정이 된다.
 
시드니에 사는 큰 손자는 웨스트 시드니 대학 교수이다. 부인도 일을 하고 있고 두 손주들도 어리기에 자주 찾아오지 못한다고 한다. 오히려 김 중령과 같은 분이 실질적으로 그린 여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김 중령은 그린 여사를 'Mum'이라고 부른다. 김 중령은 그린 여사의 딸과 나이가 비슷하다. 
 

▲ 그린 여사의 자택 거실은 온통 그린 중령의 사진과 그림으로 전시되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올윈 그린 여사 (Olwyn Green)
 
올해 그녀는 94세이다. 그린 중령이 전사할 당시 그녀는 27살이었고, 3살 된 외동딸 앤시아(Anthea)가 있었다.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그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녀의 집은 거실, 침실, 응접실, 부엌까지 집안 남편의 사진과 액자로 걸려 있다.
 
그녀는 남편에게 많은 미안함을 갖고 산다. 그린 중령이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은데 반대였다. 그린 중령의 유해는 부산에 있는 '유엔군 기념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때가 되면 그녀도 남편 곁으로 갈 예정이다.
 
필자는 7년 전 '크리스찬리뷰 6.25 특집 기사'를 쓰기 위해서 그녀를 방문했었다. 그녀는 87세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식사를 초대했으나 수업이 있어 가지 못한다고 했다.
 
놀랍게도 7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계속 공부를 하고 있다. 그녀는 결혼할 당시에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다. 남편이 죽고 마음을 둘 곳이 없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금 박사 과정 중이다. 상상이 가는가! 94세의 할머니가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며 논문을 쓰고 있는 것을!
 
내가 들어 올 때 거실에 있는 컴퓨터가 켜져 있었다. 아마 도착하기 전까지 뭔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최영길 선생'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최 선생은 한인사회에 그린 여사와 제3대대의 활약상을 알린 최초의 인물이다.
 
한국전쟁 당시 최 선생은 소년병으로 제3대대의 일원이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하여 호주 제3대대는 1968년 최 선생 가족을 초청하였다. 최 선생 가족은 공식적인 한인 이민 제1호로 오게 되었다.
 
1973년이 돼서야 호주는 백호주의 정책을 포기했다. 2007년 4월 7일 최 선생이 하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장례식에서 그녀는 눈물로 조사를 읽기도 했다. 그린 여사는 최 선생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아마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 부산 UN묘지에 잠들고 있는 찰스 그린 중령. 그린 여사는 이곳에 묻힐 예정이다.                  © 크리스찬리뷰


그린 여사 전도 
 
사실 오늘 나는 인터뷰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왔다. 그녀를 전도하는 것이다. 그녀는 종교가 없는 불신자(Atheist)이다. 지난 번 인터뷰할 때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니체'라고 할 정도로 철저한 인본주의자이다.
 
그녀는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의 집에 불상이 있다. 나는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에 대하여 설명했다.
 
"불교는 자력종교이고, 기독교는 타력종교입니다. 불교는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 죽음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죽음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오웬 그린 여사(가운데)와 함께한 양아들 김기덕 중령(왼쪽)과 본지 영문편집위원인 김환기 사관.                          © 크리스찬리뷰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주만물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 아닐까요!"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모든 것이 죽지 않고 변한다는 말입니까?"
 
그녀는 한 번 더 생각을 정리했다.
 
“잘 모르겠고, 육은 죽지만 아마 영이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서 천국이란 개념은 믿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죽으면 영이 어떤 곳으로 간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지옥으로 보낸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영이 있다고 믿는 것이군요?"
 
그녀는 웃으며 대답한다.
 
"믿으려고 노력(try to)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녀의 말에 힘을 얻었다. 이어서 그녀는 한 가지 고백을 했다.
  
"남편이 포탄을 맞아 아파하는 시점에 나도 같은 아픔을 느꼈습니다.  왜 그런지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Wisdom of God)
 
 

▲ 16세 소년 최영길(가운데)은 6.25전쟁 중 그린 중령을 만나 소년병으로 호주군 제3대대에 입대하여 종군했다.       © 크리스찬리뷰


하나님은 내 입에 할 말을 넣어 주셨다.
 
"Charles는 분명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입니다. 70년 전 호주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크리스찬이었습니다. 여사께서 돌아가시면 육신이 찰리와 함께 합장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영혼도 찰리와 함께 있으려면 예수를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분명 천국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를 믿지 않으면 사랑하는 남편을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결혼 후 찰리와 함께 교회를 다녔습니다."
 
드디어 그녀는 마음을 열었다.
 
"우리 집에 성경이 있습니다." 
 

▲ 올윈 그린 여사에게 복음을 전하는 김환기 사관     © 크리스찬리뷰


그녀는 성경을 가지고 왔다. 이때다 싶어서, 나는 구원과 관련된 성경구절을 알려 주었다.
 
요한복음 3:16절, 요한복음 20:31절, 행 4:12절, 행 16:31절 등. 그녀는 한 구절 한 구절 공책에 적어 놓았다. 이제 나는 씨를 뿌렸고, 멜본에 사는 그 누군가가 물을 주면, 하나님은 그린 여사의 마음을 아름답게 가꿀 것이다. 
 
함께 동행한 본지 권순형 발행인은 즉시 멜본에 사는 민보은 선교사(Dr. Barbara Martin)에게 전화하여, 그린 여사와 통화하게 하였다. 마틴 선교사는 산부인과 전문의로 32년(1964-1995) 동안 부산 일신기독병원에서 사역한 분이다. 그린 여사와 통화한 후 그녀는 아래와 같은 글을 보내왔다.
 
"좋은 소식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린 여사를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 생전의 최영길 회장. 최 회장은 2007년 4월 소천했다.     © 크리스찬리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모르겠네요. 마지막으로 교민들에게 한 말씀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마 제가 처음 만난 한국인은 최영길 선생일 겁니다. 그는 6.25 전쟁 때 남편 부대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는 한국인의 삶과 문화, 전통을 존경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 올윈 그린 여사     © 크리스찬리뷰


한국 사람들은 호주에서 많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은 예술적인 재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호주를 고향으로 생각하시고 모두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본부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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