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다문화주의의 한계 (2)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7/11/27 [15:41]
이 시기에 영주권자가 시민권자가 되기 위한 시민권 부여기간도 15년에서 5년으로 대폭 수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아시아인들의 호주로의 이민은 여전히 높은 문턱에 가리워져 아시아인의 호주 이민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 2차 세계대전의 참여와 제한된 이민으로 인해 넓은 땅에서 점차 감소되어 가는 인구문제, 이로 인한 국방력의 약화에 대한 여론의 확산, 사회의 하부구조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동력의 절실한 필요, 국제여론의 악화로 인해 백호주의는 점차 다원화되어 가는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깨닫고 1973년 새로 들어선 고프 휘틀럼 노동당 정부의 이민 장관이었던 앨 그라스비가 ‘미래를 위한 다문화사회’(Multi-Cultural Society for the Future)라는 보고서를 공포함으로써 백호주의가 더 이상 호주의 사회적 통념과 국가적 이상으로써 설 수가 없게 되었다.
 
이처럼 호주의 백호주의 포기는 인간 존중에 대한 인류애적 접근보다는 호주사회가 당면한 실질적인 이유가 더 컸다.  그 주된 이유로 간주되는 것 중의 하나는 국제사회의 비난이었다.
 
과거 백인의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의 식민지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독립하여 대거 UN에 가입하게 됨으로 호주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을 비난했고 이로 인해 호주의 이미지는 국제사회에서 크게 악화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호주는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아시아 지역 국가들과의 무역 및 교류가 점차 늘어났고, 이들 아시아  국가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이들과 계속 원할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호주의를 고수하는 것이 외교와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최종렬, 2008: 92).
 
이외에도 인구 감소를 막고 국가 경제 개발에는 이민자들의 노동력이 절대 필요하다는 경제적 이유가 중요했다. 뿐만 아니라 인구증가가 국방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실질적인 이유도 작용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또한 아시아 이민문호 개방의 도화선이 되었다.
 
1972년, 12월 총선의 승리로 노동당의 고프 휘틀럼은 23년간의 보수 성향의 자유당 정권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호주 역대 최고의 진보 정당이라 할 수 있는 노동당의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는 대학 등록금을 폐지했고 국민의료 시스템인 메디케어를 시행한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법적 지원’을 설립했고, UN에서 인준된 ‘인종차별법’을 받아들이고 원주민에 대한 토지권리법을 통과시켰다.
 
3. 호주 다문화주의 채택과 다문화 주의에 대한 비판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호주 역사에 길이 남긴 업적은 바로 앨 그래스비 이민장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인종차별 정책의 종식’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현재의 호주 사회의 다문화주의의 초석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고프 휘틀럼 노동당 정권은 백호주의를 붕괴시키는 기반을 구축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보는 시각에 따라 1973년 고프 휘틀럼 정권 때 백호주의가 완전 폐지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휘틀럼 정권 하에서 차별적 이민조항은 철폐되었지만, 이것이 아시아 이민자들을 향한 완전한 문호개방으로 이루어지 않았다는 점에서 백호주의 완전한 철폐는 1975년 말콤 프레이저 정부 때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 시기에 베트남 전쟁이 종식되면서 보트 피플들이 호주에 대거 유입되었으며 그들에게 대 사면령을 통해 호주 영주권을 부여한 점은 아시아 이민자들에게는 경이로운 사건이었다. 사실 말콤 프레이저 정부가 시행한 대 사면령은 호주에 정착했던 재호 한인 1세대들에게도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베트남 전쟁 이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호주로 들어 왔던 많은 수의 한인 참전용사들과 기술자들은 그 당시 사면령을 통해 호주에 정착하게 되었고 호주 한인 동포 사회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호주 한인 50년사 편찬위원회,  2008:  59-65).
 
그러나 백호주의가 철폐되고 다문화주의 정책이 표방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호주 다문화주의 개념은 사실상 “백인 주류 사회와 문화로의 흡수 및 통합”이라는 관념이 더 강했다. 그러므로 이민문호가 더 개방된 1980년대까지도 호주인들의 대다수는 이민자들이 “호주 사회로 흡수 통합”되는 것을 기대했다.
 
이러한 생각이 반영하듯이 호주의 이민법과 이민자들에 대한 권리는 주류 호주 백인사회의 자국의 경제, 외교적 실리와 정치인들의 정치 당략으로 이용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민법 변화의 역사를 깊숙히 들여다 보면 정권이 바뀌게 될 때마다 호주의 이민법과 다문화주의에 대한 이슈가 정치인들의 정치적 목적과 정당의 당리 당략을 따라 움직이고 있고, 심지어 이민법을 이용하여 유권자들을 조정하려고 하는 움직임들도 볼 수 있다.
 
실례로 1970년대 초에 대거 이민온 그리스, 이탈리아인들 이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자 노동당 지지성향이 강한 이들의 유권자 표를 의식한 보수 자유당의 말콤 프레이저 정권은 다문화정책을 계속 추진함으로 이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던 것을 볼 수 있다(이규영/김경미, 2010: 452).
 
뿐만 아니라 1996년 보수 연합당의 존 하워드가 정권을 창출한 것은 노동당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불만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바로 전의 폴 키딩 총리의 노동당 정권이 다문화주의 정책을 통해 호주의 아시아적 정체성을 확보하고, 원주민들과 국민 대통합을 추진하자 호주의 많은 수의 백인들은 그들의 불만을 존 하워드의 새로운 보수 자유 연합당을 선출하는 것으로  표시했다. 
 
이것은 역으로 존 하워드 정권이 다문화주의 정책과 유색 이민자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호주 백인들의 정서를 이용한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문경희, 2008: 283). 그러므로 존 하워드 정권이나 폴린 핸슨은 호주의 다문화주의가 기치로 내건 문화적 다양성을 관용하는 백인들의 한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비판받는다(Ien / Jon, 2006: 23-24).
 
이것은 아울러 일부 호주인들이 다문화주의에 대해 관용하지 못하고 불만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지난 100년간의 호주 이민정책은 정치, 경제적 실리에 따라 움직여 왔다(이태주 외, 2006: 255-256). 물론 때에 따라 인간의 보편 권리인 인권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의식있는 시민들과 학생들 그리고 정치, 관료 일부가 동조하는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큰 그림으로는 호주의 이민법 제한의 역사는 인간의 탐욕스런 한계를 여실히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4. 호주 한인사회의 경험에서 비추어 본 다문화주의
 
호주가 다문화주의가 잘 정착된 국가이고 백호주의는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있지만, 필자가 이곳 호주에서 십년 넘게 살면서 느끼는 것은 아직도 일부 백인의 정서 속에는 ‘백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고 믿고 있다. 심지어 호주의 백인들 가운데 많은 숫자는 호주의 정치와 경제의 주된 물줄기(Main Stream)는  호주 백인들에 의해 유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필자도 맨 처음 호주에 도착했을 때 어디를 가도 친절하게 응대하는 호주 시민들의 환대와 친절에 감명을 받고서 호주는 다문화주의가 잘 정착된 나라라고 생각했다. 〠 <다음 호 계속>

*이글은 <현상과 인식 41권 3호(통권 132호)>에 실린 글을 허락받아 게재했으며, 각주와 참고서는 부족한 지면 관계상 생략했다. [편집자]

주경식|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전 시드니신학대학, 웨슬리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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