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

최성은/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7/11/27 [15:43]
주전 753년 테베레 강변의 카피톨리나 언덕에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가 세운 로마는 거침없이 뻗어나가 마침내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 갈리아, 소아시아, 아프리카 등을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그때는 아무도 로마의 쇠퇴와 멸망을 상상할 수 없었지만 주후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1453년에는 동로마 제국마저 멸망하였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은 진리이다.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였다. 건국자의 위대한 이름을 취했으나 이름 값을 하지 못했다. 오도아케르라는 바바리안 장군에 의해 축출당하고 나라를 망하게 한 못난 후손이 되고 말았다.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11세이다. 1453년 5월 29일 야만적이고 방종했던 무슬림 술탄 메메드 2세에 의해 정복당했다. 메메드가 거대한 대포를 만드는 동안 콘스탄티누스는 열렬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했고 서방교회 또한 도움을 외면하였다. 혼자 분전하던 황제는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시체더미에 깔려 있던 황제의 시신은 신고 있던 황금 독수리가 그려진 신발로 인해 신원이 확인되었다.     
 
로마의 쇠퇴와 멸망의 원인에 대하여는 이미 충분할 정도로 연구되었다. 잘 알려진 이유들만 해도 목욕탕, 납중독, 성적인 문란, 광기어린 유흥등 선정적인 것에서부터 “진정한 라이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시오노 나나미의 명석한 언급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남긴 고찰은 몇 번씩 읽고 반추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제국의 거대한 규모가 가져온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과였다. 정복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파멸의 원인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연이어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인위적인 지지대를 압도하는 순간 거대한 구조물은 그 자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기 마련이다. 로마의 멸망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지탱한 것이 경이이다. 
 
로마군의 기강 해이로 빚어진 결과이다. 폴리비오스가 지적한 대로 로마군은 무기, 훈련, 복종, 행군, 군영 등 군사적인 모든 면에서 최강이었다. 그들은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알프스를 넘고 유프라테스강, 도나우강, 라인강, 대서양을 향해 진군했다.
 
로마군은 때로는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으나 전쟁에서는 언제나 이겼다. 그 로마군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황제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군대의 기강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승리한 군인들이 정복한 땅에서 악행을 배워 군기가 어지러워졌기 때문이다.
 
로마의 안전을 위하여 고용한 용병들이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한 것도 모자라 황실의 장엄함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무너진 군대의 기강을 속속들이 파악한 바바리안들이 엄습했을 때 로마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로마가 동서로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제국의 힘은 손상되었고 이중통치의 악행은 더욱 만연하게 되었다. 두 배로 늘어난 억압적이고 전제적인 제도들이 시민들을 옥죄었다.
 
적대적인 신하들은 로마의 공동의 적들 앞에서 서로를 배신했다. 비잔티움 궁정은 로마의 치욕, 이탈리아의 불운, 서로마제국의 상실을 무심하게 혹은 은근히 즐기면서 바라보기만 했다. 또한 로마의 베드로 성당의 무심함이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아 성당을 무너지게 했다.
 
기독교의 도입 혹은 남용이 로마의 쇠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사제들이 인내와 무기력의 교리를 가르치자 나라를 지키려는 용기는 억압되었고 얼마남지 않은 상무정신은 수도원의 회랑 속에 묻혀 버렸다.
 
군인들의 봉급으로 나가야 할 돈이 쓸데없는 대중들에게 분배되어 낭비되었다. 교회는 물론이고 국가조차 이단으로 인해 혼란을 겪었다. 갈등은 때때로 유혈적이었고 언제나 타협불능이었다. 황제들의 관심은 군영이 아니라 종교회의였다. 〠 

최성은|시드니선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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