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은 가고, 2018년이 왔다. 2017년이 홀연히 떠난 것처럼, 2018년도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시몬느 드 보봐르'가 쓴 <모든 인간은 죽는다>란 소설이 있다.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죽지 않는 '포스카'와 죽어야 하는 '레진'. '불멸과 필멸'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한 작품이다. 작가는 '불멸은 축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영원히 살고 싶어 한다'고 했다. 죽음이 있기에 오늘의 삶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1.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닌 완성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한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다. 인간은 이 땅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유한한 인간의 시각으로 우연이라고 하지만, 무한한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존재 자체가 필연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우리의 사명이다. 죽음이란 사명을 완성하는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가지 말씀이 있다. 그 중 여섯 번째 말씀이 ‘다 이루었다’(요 119:30)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바울도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사명이 있다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사명을 마쳤다는 것이다. 2. 죽음과 삶의 이유는 같아야 한다 만약 “삶의 이유와 죽음의 이유”가 다르면, 죽음의 앞에 섰을 때 살았던 삶에 대해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살 수는 있지만 자신을 위해 죽을 수는 없다.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죽음의 순간이 올 때, 살았던 삶에 대해서 후회하며 눈을 감을 것이다. 바울은 살아야 할 이유와 죽어야 할 이유를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사람이다. 삶과 죽음의 이유가 동일하면,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결코 후회하거나 비겁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 3. 죽음으로 삶을 설명할 수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은 반대의 개념이 아닌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죽음이 없는 삶은 세상에 없으며, 삶이 없는 죽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왜곡을 통해 삶과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삶과 죽음은 같은 선상에 있다. 우매자는 죽음 없이 삶을 이해하려 하지만, 지혜자는 죽음을 통해서 삶을 이해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끝에서 시작을 바라보는 혜안이 있어야 하고, 헤어짐에서 만남을 생각할 수 있는 명철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에서 삶을 바라보는 자유함이 있어야 한다. 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본부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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