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브론 땅에서 시작되는 복음의 열풍
 
글 김명동/사진 권순형
▲ 지난해 11월부터 헤브론병원 로비 벽면에 상설전시 중인 ‘헤브론병원 24시’ 다큐멘터리 사진전. 65점이 전시되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물 축제’(본 옴뚝)기간 중이어서인지 거리와 병원이 한산했다. 매년 11월에 열리는 이 ‘물 축제’는 음력 10월 보름달이 차오르는 때를 기점으로 메콩강에서 톤레삽강으로 흐르던 물이 역류하여 바다로 되돌아가는 시기에 열리는 연중행사다.
 
통상 ‘물 축제’ 기간 중에는 인기가수들과 코미디언이 총동원이 되는 등 다양하고 화려한 볼거리와 이벤트가 펼쳐진다. 하지만 축제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단연 ‘보트경주대회’다.
 
해마다 전국에서 지역 예선을 거친 3백여 개 팀이 참가한다. 대부분 자발적으로 마을 주민들끼리 팀을 구성하지만, 유명 정치인의 후원을 받아 급조해서 참가하는 팀들도 더러 있다.
 
일부는 맥주나 통신회사 등 후원기업 광고를 붙이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고 팀을 구성해 대회에 참가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LG 광고를 단 보트도 해마다 참가한다고 한다. 올해는 한국의 하이트진로가 메인 스폰서로 나섰다.
 
크마에 주일예배에 참석하다
 
크마에 주일예배(현지인 예배)에 참석했다. 4년 전 시작된 크마에 예배는 병원건물 3층에서 예배를 드려오다 정문입구에 신축된 환자 대기실에서 드린다. 크마에 예배에는 병원 직원들뿐 아니라 입원 중인 환자들 그리고 직원들 가족과 동네사람들도 참석하고 있다.

▲ 지난해 헤브론병원 입구에 신축한 환자 대기실에서 주일에는 캄보디아인들과 선교사들이 크마에 예배를 드린다.     © 크리스찬리뷰


▲ 환자 대기실 건물 전경.     © 크리스찬리뷰

병원이 있는 지역은 한 눈에 봐도 고단한 삶이 반복될 것 같은 빈민가.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이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해 가는 것은 분명 기적 같은 일이다. 사방팔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사찰 뿐, 어떻게 동네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 교회를 세울 수 있었을까.
 
현지 주민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어떤 전략이나 시스템만으로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 변화는 무엇을 가르치고 강요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깨닫고 행동할 때,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진다. 캄보디아인들이 감동한 것은 헤브론 의료진들이 가진 사랑과 헌신의 정신이었을 것이다.
 
사실 캄보디아인들의 마음 문을 여는 데만 수년이 걸렸다. 물론 우여곡절도 많았다. 오랜 시간을 들여 그들을 웃게 한 건 다름 아닌 진심. 즉 진리로 무장된 복음과 그 복음이 향하는 한 영혼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다. 거기에 필요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놓는 일, 아무나 할 수 없다.
 
김우정 원장은 큐티와 예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일의 중심에 말씀이 놓여져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초창기부터 전 의료진과 직원들이 큐티에 참석하고 예배드리는 것부터 진료의 시작으로 삼았다. 의료진들은 진료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직원들과 환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함께 기도를 하며 전도했다.
 
심장 수술을 해야 하는 등 특별한 케이스의 환자에게는 개별 상담을 하고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병이 더 중한 경우에는 집을 일일이 방문해 처한 상황을 살피며 기도하고 말씀을 전했다. 한 사람 한 사람 기막힌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고 육체뿐 아니라 마음의 병이 든 사람도 많다. 그래서 의료진들은 ‘의사와 환자’로만이 아닌 인격과 인격이 깊이 만나 사랑하고 섬겼다.
 
▲ 크마에 예배 찬양팀에서 찬양을 인도하고 있는 싸디 씨(왼쪽).     © 크리스찬리뷰

 헤브론병원은 병원 내에 크마에 교회가 세워지자 선교사들은 현지인 자신들이 스스로 세워나갈 수 있도록 먼저 지도자들을 세워 가르쳐서 봉사하고 섬기도록 했다. 교회 운영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자립하도록 가르쳤다. 자립하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답답하고 안쓰러운 일이다.
 
차라리 선교사들이 직접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쉽고 편한 일이다. 그러나 처음이라고 해서 선교사가 해주기 시작하면 자립은 그만큼 늦어진다. 아니 자립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참고 기다리며 자립을 도왔다.
 
예배는 정말 신났다. 차라리 축제였다. 찬양하는 목소리는 우렁찼다. 크마에 찬양은 귀에서 머리로 들어오기 벅찼지만 완벽하게 기자의 심장까지 전해졌다. 은혜로 다가왔다. 기타를 치며 찬양을 인도하는 싸디(25)씨는 헤브론병원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처음 그녀를 만난 건 2년 전, 깜뽕 스프 지역으로 함께 어린이 사역을 하러 갔을 때였다. 그때 기자에게 한 말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모든 선교사님들이 우리에게 꿈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축복을 받기만 하고 그대로 있을 순 없잖아요. 꿈이 현실이 되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겠지만 분명히 우리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환한 미소로 찬양을 부를 수 있는 것일까?
 
▲ 헤브론병원의 리닌 전도사는 환자 전도를 위해 환자 대기실, 병실을 순회하며 전도에 힘쓰는 한편 한국어에 능통한 그는 한국어 설교 통역도 담당     ©크리스찬리뷰
 
 
▲ 리닌 전도사     ©크리스찬리뷰
 
설교는 현지인 리닌 전도사(36)가 맡았다. 곱상한 외모에 조용하고 나긋한 말투. 편한 인상이다. 리닌 전도사는 캄보디아대학을 다니면서 한인 선교사의 자동차를 운전했다. 이때 처음으로 복음을 들었다.
 
리닌 전도사는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잘못한 일이 생각나며 눈물과 회개기도가 나왔다”고 회고했다. 이후 수시로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
 
한인 선교사는 리닌이 대학교를 졸업하자, 김우정 선교사에게 소개했다. 리닌 전도사는 2011년 8월 김우정 선교사의 주선으로 프놈펜 장로교신학교에 입학, 공부를 마쳤다. 현재 장로교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으로 내년 목사안수를 받는다. 리닌 전도사는 “먼저 복음을 접한 만큼 책임감을 갖고 민족 복음화에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미소는 여전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다. 아직도 기자를 기억해줘서 기뻤다. 크마에 예배 참석자 중 일부는 한 달에 한 번씩 깜뽕 스프와 깜뽕 짬 지역으로 시골 어린이 사역을 다니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진해서 시골의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이들로 인해 마을에 찬양이 울려 퍼지고 복음이 점점 깊이 세워져 가고 있다. 
 
헤브론 현지인교회는 고통 속에 살아가는 캄보디아인들에게 마음의 안식처이자 사랑을 알게 해주는 둥지이다. 삶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지펴주는 곳이기도 하다. 헤브론교회를 통해 빈민가의 영적회복이 일어나고 있다. 동시에 마을 아이들의 교육기관이 되어 자기 자녀를 보내며 미래를 기대하고 있다.
 
처음 교회가 생겼을 때 눈을 돌리며 냉담했던 사람들이다. 친절을 경계했던 사람들이다. 이젠 한결 같이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헤브론가족들을 친구로 삼았다. 아, 그리고 복음을 듣기 시작했다.
 
헤브론병원에서 겨자씨만 한 믿음으로 시작되는 복음, 이 복음이 캄보디아의 내일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기대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하기엔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한국어 예배 2015년 7월 시작

▲ 헤브론병원은 매 주 월요일 아침 직원예배를 드린다. 직원예배에서 찬양하는 한국인 선교사들.     © 크리스찬리뷰

  오전 11시. 한국어로 드리는 예배다. 병원 3층에서 드리는 한국어 예배는 2015년 7월 시작됐다. 헤브론 병원에 참여하는 선교사 가족들이 늘어나서 한마음으로 한 장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현지인과 함께 예배를 드렸었다.
 
이날 예배는 이무익 선교사가 사회를, 헤브론병원 원목 문선연 목사(62)가 성경봉독을, 캐나다 밴쿠버한인장로교회 박철순 목사가 ‘안식 후 첫날’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박철순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장을 지낸 고 박종렬 목사의 차남으로 1983년 캐나다로 이민갔다. 그러니까 헤브론병원 김우정 원장의 처남으로 사모 박정희 선교사의 동생이다. 한국장로회 신학대학, 캐나다 닉스 칼리지(Knox College)를 졸업하고 1993년부터 토론토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간 시무한 그는 캐나다 장로교회 총회장을 역임했다.
 
캐나다 장로교는 캐나다를 대표하는 개신교단 가운데 하나로 1890년대 말부터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 복음화에 앞장섰다.
 
기자는 박철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김우정 원장이 가진 리더십의 모습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 헌신하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 둘째, 아낌없이 내어놓고 나누어주면서도 군림하지 않는다. 셋째, 상대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듣는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보살핀 사람들에게 오히려 감사한다. 자신이 많은 것을 배웠다며 그들을 섬긴다. 김우정 원장 리더십에는 거창한 구호가 없다. 말보다 실천이다. 헌신과 겸손 그리고 진정성, 이것이 헤브론의 기적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헤브론병원 개원 10주년에는 고 박종렬 목사의 부인 엄순애 권사를 비롯해 강남대 교목인 큰아들 박형순 목사도 함께했다. ‘헤브론병원’이란 이름은 박종렬 목사가 충무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당시 만들어진 ‘헤브론목회’의 신앙이 이어져 헤브론병원이라 이름 짓게 된 것이라 한다.
 
설교를 마친 후, 기도하는 시간. ‘먼 곳에서부터 기도하라.’ 광야를 다니던 기자가 삼는 기도의 방법이다. 나부터 기도하면 사사로운 요구 충족을 위한 기복주의로 흐르기 쉽다. 번영신학의 정점에서 때론 하나님은 곧 ‘소원 자판기’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의 은혜를 세상의 가치로 재단해 값싸게 만드는 것은 그의 진리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직무유기다. 그래서 멀리부터 기도한다. 물리적인 거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캄보디아의 소외된 이웃뿐만 아니라 어쩌면 부모, 이웃, 친구가 가장 멀리 있는 사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도하다 스스로를 위한 차례가 오면 자신의 문제는 되레 작아 보일 때가 있다. 외롭고, 힘들어 기도하려했는데 오히려 위로와 감사가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감사와 행복을 다 헤아리지 않은 채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는 건 하나님께서 온전히 맡겨야 할 인생의 주도권을 세상에 빼앗기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런 마음에 기도를 통해 무엇인가를 구하기보다 자신을 저울질해 본다.
 
헤브론병원 가족들의 한결같은 기도제목이 있다. 그것은 헤브론병원의 비전이기도 하다 즉  △부족한 의료진 △캄보디아 의료인 리더 양육(간호대학, 의과대학) △특성화 병원( 암 센터, 호스피스사역  등) △심장 수술 케어 애프터 프로그램 △현지인에게 병원 이양 △라오스와 미얀마로 헤브론메디컬센터 확대 등이다.
 
참석자들은 헤브론병원과 캄보디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모든 선교사들을 위해 간절함과 절박함으로 기도했다.
 
▲ 헤브론병원 원목 문선연 목사     © 크리스찬리뷰

올해로 원목 문선연 목사는 헤브론병원 사역을 시작한 지 3년째를 맞았다. 그동안 날마다 병실을 찾아다니며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돌보느라 지칠 법도 한데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한다.
 
“복도나 밖에서도 저를 만나면 기도해달라는 환자들이 많아요. 돌아볼 곳이 많다 보니 힘들 때도 있지만, 환자들을 만나면 오히려 제가 은혜를 받고 영성이 채워지는 것을 느낍니다”라며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문 목사는 “한국선교사들의 영성관리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며 “이를 위해 2년 전부터 한국어 주일예배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 말씀을 전하는 문선연 목사.     © 크리스찬리뷰

 
▲ 심장수술 받을 어린이 가정을 방문하여 어린이를 품에 안고 기도하는 문선연 목사.     © 크리스찬리뷰

“이곳에도 평신도 선교사들이 많아요. 한국에서는 교회도 있고 동료들도 있어 믿음의 교제와 영성관리가 가능한데 이곳은 현장이다 보니 누가 돌봐주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영성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형편입니다. 믿음으로 사역을 감당한다고 하지만 영적인 공급이 필요하잖아요.”
 
문 목사 역시 자비량선교사이지만 이곳에서 사역할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한다.
 
“낮은 자리에 항상 환자들과 함께 있으니 외로운 선교현장이지만 즐겁게 지냅니다. 때때로  먼 시골 마을에까지 가서 기도하며 말씀을 전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저를 귀하게 사용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첫 한국인 선교사가 캄보디아에 파송된 것은 1993년도. 캄보디아에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것은 이미 90년 전의 일이지만,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로 오랫동안 정치적. 사상적 단절이 이루어지는 바람에 한국교회의 진출은 타지에 비해 늦어졌다. 
 
수도 프놈펜을 비롯해 캄보디아 내에서 운영되는 한인교회는 대략 20여 곳이다. 이들 한인교회는 이제 막 캄보디아에 발을 들인 선교사들이 사역을 준비하거나, 장기간의 직무에 지친 선교사들이 잠시 머물며 재충전하는 정거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선교 현장으로서 캄보디아의 변화는 선교사 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한인선교사회에 가입한 선교사가 2000년대 초반 1백여 가정에 불과했으나 현재 7백여 가정에 달한다. 또 현재 선교사회에 가입하지 않은 채 사역하고 있는 독립 선교사들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예수님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선교사들과 함께 예배를 드려서일까. 그들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었다. 고향땅을 버리고 부모와 친척을 등지고 인생의 소욕과 그 설계를 신앙 속에 묻은 뒤, 성령께 이끌려 낯선 땅 캄보디아로 온 것이다. 예배는 상한 마음을 만져주고, 교만함을 털어내게 했다. 눈물 없이도 뜨겁게 감동을 줬다.
 
거룩한 하나님의 터치였다.
 
고 박종렬 목사의 일화
 
박종렬 목사는 1921년 5월 청주시 내곡동의 한 완고한 유교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한학으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사서삼경을 줄줄 외울 정도로 동네에서 신동이라 부를 만큼 총명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대동아전쟁이 한참 치열할 때였다.
 
그 동네에 작은 교회가 세워지고 교인이 한두 사람씩 몰려올 때 그는 열다섯 나이에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러자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에 부닥쳐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지만 후에 어머니도 아들을 따라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목사나 전도사가 희소했던 시대였다. 그래서 예배당은 세워졌지만 순회전도사 한 사람이 한 달에 여러 교회를 순회해야 하기 때문에 주일이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배 인도자가 안 오는 주일은 박 목사가 예배를 인도했다고 한다. 그때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신학문에 눈을 뜨게 된 박 목사는 평양 요한신학교에 입학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였다. 그는 신사참배에 불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감옥에 갇혀 고문을 받았다. 일경은 그를 몽둥이로 때리고 또 때렸다. 시멘트 바닥에는 핏자국이 흥건했다.
 
박 목사는 출옥한 후 몇 년 동안 신부전증으로 죽음의 문턱을 오갔다. 그는 건강을 찾은 이후 중앙신학교를 거쳐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과 풀러신학대학원에서 공동학위 과정을 마쳤다.
 
청주 YMCA초대총무를 시작으로, 청주 세광고등학교에서 교목으로 사역하며 국어과목을 지도해 후학을 양성했다. 청주 서남교회를 개척 시무하고, 충무교회 제5대 목사로 부임한 뒤 청주맹아학교 재단이사장과 학교법인 정신학원 이사장을 맡았다. 충북노회장과 서울노회장 그리고 대한에수교장로회 제 69회 총회장, 한국기독공보 이사장을 역임하고, 헤브론목회 후원회를 조직, 후원회장을 맡았고 충무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됐다.
 
박 목사는 한국교회가 1백주년을 기념해 기념관건립과 유적지조성, 기념대회 등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결실하는 시기에 총회회장을 맡아 진행했다.
 
특히 박 목사는 총회뿐 아니라 목회현장에서도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원칙과 신앙 인격에 입각한 목회자로 시무하는 교회들을 원만히 이끌었던 목회자로 알려졌다. 박 목사는 명예와 물질에 대해서는 항상 초연한 사람이었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항상 청렴결백을 삶의 목표로 살았다. 그래서 호를 우백(又白)이라 정했다. 주께서 깨끗하게 희게 해주신다는 뜻이다.
 
‘헤브론 스튜디오’에서 펼치는 사진선교
 
권순형 발행인이 지난 5월 헤브론병원 3층에 스튜디오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사진선교의 장을 새롭게 열어가고 있다. 스튜디오에 필요한 조명과 반사판, 카메라 등은 호주와 서울을 오가며 마련했다. 장비를 갖춘 뒤 ‘헤브론 스튜디오’라고 이름 짓고 작은 간판도 달았다.
 
사실 캄보디아에서 ‘사진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꺼내며 ‘사진선교’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데 헌신할 포부를 밝혔을 때 기자는 귀를 의심했었다. 아무리 전문인 선교사들이 늘어나는 추세지만 사진선교사는 기자에게는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선교현장에 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 스튜디오는 사진을 찍으러 온 환자들로 북적였다. 개인으로부터 환자가족, 병원직원, 선교사들까지 줄을 섰다. 7cm 크기의 갑상선 종양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은 7남매의 어머니 민니 씨(36)도 스튜디오를 찾았다. 바쁜 일정 속에서 잠시 마주칠 때마다 기자를 활짝 웃게 만들었던 ‘헤브론병원의 스타’들이다.
 
권 발행인은 그동안 헤브론병원을 방문하면서 카메라가 귀한 나라에서 사진을 통한 선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캄보디아 사람들이 사진 찍히기를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까지 알아차렸다. 가난해서 사진 한 장 찍을 수 없는 사람들. 사진선교 사역은 이렇게 시작이 됐다.
 
▲ 갑상선 수술을 받은 7남매의 엄마 민니 씨가 남편과 함께 스튜디오를 찾아와 아이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 크리스찬리뷰

권 발행인은 “캄보디아는 카메라 구경하는 게 쉽지 않다. 당연히 사진 찍는 것도 어렵다”며 “어쩌다 사진을 찍더라도 인화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사진은 헤브론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하며, 환자가 진료를 마치고 돌아갈 때 A4사이즈로 프린트 해준다. 촬영부터 보정, 인화까지 모든 게 무료다. 복음을 전하는 스튜디오답게 A4용지 크기의 사진 하단에는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이 크메르어로 적혀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말씀은 ‘환자 고객’에게 전하는 축복의 기도이기도 하다.
 
▲ 헤브론 스튜디오를 찾은 모자.     © 크리스찬리뷰


▲ 헤브론 스튜디오에서 환자를 촬영하는 권순형 발행인.     © 크리스찬리뷰

▲ 입원 환자 가족들에게 사진을 전달하고 기념촬영.     © 크리스찬리뷰


▲ 수술을 담당한 의사와 간호사와 기념촬영한 환자.     © 크리스찬리뷰

사진 속의 주인공들에게 찍은 사진을 건네주면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잔칫날처럼 웃음꽃이 핀다. 갑상선암 환자도 유방암 환자도 탈장 환자도 아픈 내색도 없이 사진 속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웃고 웃는다. 하지만 어떤 사진은 그들의 주민등록 사진이 되고, 어떤 사진은 그들의 영정 사진이 되리라. 어쨌든 환자들이 기뻐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자도 참 행복하고 감사했다.
 
헤브론 스튜디오의 일손은 늘 부족하다. 권 발행인은 “손님이 오는 대로 접수해 사진을 촬영하고 파일을 보정해 출력까지 하려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면서 “헤브론 스튜디오가 사진 선교사를 모집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밝혔다.
 
현재 계획은 사진을 찍고 보정까지 할 수 있는 자비량 선교사 100명을 모집하는 것이다. 사진 촬영하는 봉사자와 보정하는 봉사자가 2인 1조로 일주일 동안 봉사할 경우 1년이면 100명의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계산이다.
 
권 발행인은 헤브론 스튜디오 운영에 대해 “세계 각국의 크리스찬 사진가들에게 취지를 알려 각자 편한 시간에 방문할 수 있도록 사전 신청을 받아 선발하고 있다.”면서 “기본적인 스튜디오 장비와 물품(프린터, 노트북, 인화지, 대지) 등을 제공하고 자비량으로 섬기는 형식”이라고 설명했다.
 
“사진 선교에 헌신할 사진가는 일 년에 100명(2인 1조)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최소한 일주일 이상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촬영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헤브론 스튜디오에서 실내 촬영을 하며, 환자가 돌아갈 때 프린트 해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토요일과 주일에는 어린이 마을 사역팀과 이동진료팀 등과 동행하여 촬영을 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고요. 이외에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캄보디아 선교사들의 사역에도 협력할 수 있을 겁니다.”
 
사진선교에 헌신할 사역자는 왕복여비와 숙식비용을 자비량으로 섬겨야 한다. 숙식은 병원 내 선교사 숙소를 저렴한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평일에는 아침, 점심, 저녁을 제공하고 토요일과 주일에는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 병실을 찾아 사진을 전달하는 권순형 발행인     © 크리스찬리뷰

권 발행인은 말미에 이렇게 제안했다.
 
“제가 사진 선교사들께 드릴 수 있는 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사진을 받아든 이들의 표정이 얼마나 밝고 환한지,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사진 선교를 통해 복음을 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진 작품 활동을 위해 1987년 호주로 이민 온 권 발행인은 한국 월간지 ‘크리스찬타임즈’의 호주 지사장을 거쳐 1990년 1월 크리스찬리뷰 창간호를 발행했다. 발행인으로서 ‘문서 선교’를 해온지 어언 28년째. 권 발행인은 현재 헤브론병원 심장병 어린이 돕기 모금운동도 전개하고 있으며, 캄보디아의 열악한 학교 후원 등 자선활동에 호주 한인들을 동참시키는 가교역할도 하고 있다.
 
여생은 캄보디아 사진선교로
 
3층 스튜디오에서 병원 로비로 내려오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벽에 걸려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까르륵 웃어댔다. 지금 헤브론병원 벽에 걸려있는 사진들은 호주와 한국에서 ‘헤브론병원 24시’제목으로 전시됐던 사진들이다.
 
기자도 다시 한 번 사진들을 둘러봤다. 굉장히 새로웠다. 느닷없이 감동이 밀려왔다. 그 사진 속에서 권 발행인이 보였다. 어떻게 보면 사진은 넓은 의미에서 창작자의 자화상이다. 이곳에서 보는 것은 모두 권 발행인의 흔적이자 발자취라 할 수 있다.
 
이때 시구가 하나 떠올라 수첩에 이렇게 썼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대물림/ 엄마는 소리 없이 흐느끼고/ 아이들은 배고픔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곳/이 순간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다.
 
수첩에 끄적거리고 있을 때 “권 작가님이세요?” 누군가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한국 매일경제 TV에서 취재차 나온 기자였다.
 
“사진 좀 저희들이 쓸 수 있을까요?”
 
“아이고, 그렇습니까. 제가 아니고요, 3층으로 올라가시면 스튜디오가 있는데 거기에 작가님이 계실 겁니다. 그리로 가보세요”
 
▲ 심장수술 받은 어린이 가정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밑에는 전도를 위해 사도행전 16장 31절을 크메르어로 넣어 준다.     © 크리스찬리뷰

사진 전시회 이후 권 발행인이 더욱더 바빠졌다. 지난번에는 KBS 방송국 강지원 PD가 성탄 특집 ‘어꾼 헤브론’ 다큐멘터리에 사용할 사진을 부탁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캄보디아와 한국에서는 권 발행인을 ‘권 작가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지난 번 인터뷰 도중 권 발행인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 호주이민을 결심하며 꿈꾸었던 사진작가의 꿈을 이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작품전 ‘헤브론 24시’를 열고 28년간 해온 ‘문서 선교’ 대신 ‘사진 선교’의 장을 여는데 생을 바치고 싶습니다.”
 
2014년 9월, 권순형 발행인은 시드니를 방문한 캄보디아 헤브론병원 원장 김우정 선교사와 만났다. 권 발행인은 김 선교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호주인들이 선교했던 부산, 경남지방을 취재하면서 느꼈던 감동이 헤브론병원에도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면서 사진을 통해 이 감동의 현장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에 그는 2015년 2월부터 2016년 9월까지 7차례에 걸쳐 헤브론병원을 찾아가 24시간 동안 병원에서 생활하며 병원의 일상을 담는 작업을 시작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투병 중인 환자와 가족들, 선교사들의 헌신과 사랑의 실천 현장에서 하루 종일 생생한 현장을 담아내고자 희망의 카메라를 들고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고, ‘헤브론병원 24시’라는 사진 전시회 제목이 바로 떠오를 만큼 큰 울림을 받았다.

 
권 발행인은 ‘사진선교’의 시발점으로 호주와 한국에서 ‘헤브론병원 24시’ 다큐멘터리 사진전을 열었다.  그가 이런 사진전을 개최한 목적은 두 가지였다. ‘헌신과 사랑’의 감동적인 의료현장을 사진으로 전달함으로써 헤브론병원에 절대 필요한 의료진 동원과 재정적 후원에 일조하기 위함이었다.
 
사진전은 장기 순회전으로 이어졌고, 헤브론병원을 방문하면서 취재, 기록, 촬영한 ‘헤브론병원 24시’ 단행본과 도록 등 2권의 책자도 출간했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포옹 한 번 해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그의 카메라는 앞으로도 수많은 ‘역사’와 ‘희망’을 쓰기 위해 그와 함께 하리라.
 
의료봉사 드림팀 ‘블루크로스’
 
기자 일행이 머무는 동안 ‘블루크로스 의료봉사단’ 일행이 여덟 번째로 헤브론병원에 왔다.
 
블루크로스 의료봉사단의 영어 이름은 ‘Dr. Chang's Medical Camp'다.
 
헤브론병원 직원과 선교사들은 이들을 '장기려 팀'이라고 불렀다. 여러 병원의 의료진을 한데 모은 사람이 1995년 84세로 타계한 성산 장기려 박사이기 때문이다. 치료비가 없는 환자 몰래 병원비를 내주고, 스스로는 청빈한 삶을 살았던 장 박사는 '한국의 슈바이처' '가난한 사람들의 주치의'로 불린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부산 영도의 천막진료소에서 무료진료를 시작했고, 이곳이 현재 고신대 복음병원의 모태가 됐다.
 
장 박사는 1943년 우리나라 의사로는 최초로 '간 부분절제'에 성공할 만큼 실력 있는 의사였고, 1968년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모태가 된 청십자의료보험을 설립하는 등 굵직한 족적과 숭고한 가르침을 남겼다. 한국이 변방의 나라가 아니었다면 적십자(Red Cross)보다 청십자(Blue Cross)가 유명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그의 업적은 독보적인 것이었다.
 
생전 장기려 박사와 인연이 있는 베테랑 교수들이 뜻을 모으고 이에 공감한 젊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합류해 매년 ‘의료봉사 드림팀’이 꾸려질 수 있었다.
 
이번 봉사단을 이끈 장여구 교수는 장 박사의 손자다. 중학생 때부터 오지 의료봉사를 함께 다녔던 장 박사의 증손자 지인 씨(의대 재학중)도 함께했다. 조부의 가르침을 받들어 수십 년째 오지를 찾아다니며 해외봉사를 하고 있는 장 교수에게도 헤브론병원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2010년 12월 이 병원에 처음으로 전신마취 수술을 세팅한 것이 의료봉사 드림팀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헤브론병원은 심장수술 등 수백 건의 수술을 진행하는 의료봉사의 상징이 됐다.
 
해외에서 매년 40여 개 의료팀이 헤브론병원을 찾아오지만, 갑상선과 유방암 수술을 하는 의료진은 블루크로스가 유일하다. 진료비는 부르는 게 값이고, 의사를 한 번 만나려면 월급의 3분의 1을 써야 하는 캄보디아 환자들 입장에서는 평생 한 번 찾아 올까말까 한 소중한 기회인 셈이다.
 
한국의료진을 태운 빨간 버스가 병원 입구로 들어서는 오전 8시, 대기실을 가득 메운 200여 명의 눈길이 일제히 버스로 쏠렸다. 헤브론병원은 금세 활기찬 의료진들의 움직임과 부산 사투리, 서울말로 가득 찼다.
 
8살 소년 부다 쏙 후에이는 탈장수술을 받았다. 후에이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들의 탈장 증세를 알았지만 돈이 없어 몇 년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아픈 내색도 없이 이틀간 씩씩하게 병원에 있던 후에이는 수줍게 웃으며 ‘어꾼 찌란’(감사합니다라는 뜻의 캄보디아어)이라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좌석에 후에이를 두 팔로 안은 어머니가 타고, 흙먼지라도 먹을세라 커다란 초록색 천으로 아들의 얼굴과 상반신을 덮은 채였다. 세 식구는 그 자세로 2-3시간을 달려야 하는 베트남 쪽 1번국도 인근 마을 끼은 스와이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맨발로 헤브론병원을 천방지축 휘젓고 다니던 6남매도 한국 의료진의 덕을 톡톡히 봤다. 7남매의 어머니 민니 씨(36)는 7cm 크기의 갑상선 종양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민니 씨 가족은 한국 의료진에게 무료로 수술받을 수 이야기를 듣고 캄보디아 북서쪽 태국 국경에 인접한 마을 뽀이 뺏에서 봉고차를 빌려 타고 8시간을 달려 병원을 찾았다.
 
올해 스물 한살인 큰아들 혼자 집을 지키고, 부부와 6남매가 병원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수술을 마친 민니 씨는 한쪽 갑상선만 절제해 평생 호르몬제를 복용하지 않아도 되는 행운을 얻었다. 원칙대로라면 퇴원하고 일주일 후 오래진료를 위해 다시 와야 하지만 병원 측의 배려로 6남매와 함께 병원에 머물다가 실밥을 뽑고 집에 갈 수 있게 됐다. 눈만 마주쳐도 까르륵 웃던 6남매는 한국 의료진이 건넨 과자를 엄마에게 가져다주기도 하고, 혹이 없어진 수술 부위를 신기한 듯 들여다보기도 했다.
 
이들 외에도 유방암 6명, 갑상선 8명, 대장 절제수술을 받은 후 소장 복원술 1명, 탈장 2명 등 총 17명이 블루크로스 의료봉사단에 무료로 수술을 받았다. 블루크로스 의료봉사단은 8년째 헤브론병원과의 약속을 지켰다. 봉사단 18명은 바쁜 일정을 쪼개 자비를 들여 참여했고, 항생제와 갑상선 호르몬제, 결핵 시약세트 등 수백만 원 상당의 의약품도 기증했다.
 
아이들을 도와주세요
 
기자는 병원 로비를 지나다 슬픈 탄식이 터져 나왔다. 위급 상황에 처한 한 아이를 보게 된 것이다. 아이 이름은 ‘껀 스라이 놋’. 9살인 아이는 2013년 헤브론병원에서 어려운 TOF 수술을 받고 잘 회복이 되고 있었지만 이제 2차 수술을 다시 받아야 한다.
 
아이는 비쩍 마른 몸에 얼굴과 손은 새까맣다. 힘겹게 숨만 쉴 뿐 날아드는 파리 한 마리조차 쫓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아이 엄마가 이 상황을 타개할 어떠한 능력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이의 아빠는 오래 전 사망했고 엄마와 단둘이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엄마는 남의 밭에서 농사를 도와주거나 논에서 게와 고동을 잡아서 팔아 살아간다. 스라이 놋은 4학년으로 아이의 꿈은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는 것이다.
 
기자는 병원로비를 빠져나오면서 이곳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본다. 이들의 가난은 누구의 책임일까. 가지지 못한 자들의 무능력을 탓해야 할까. 아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손 내밀지 않고, 가난한 이들 역시 교회 문을 감히 두드리지 못한다면 그건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다. 이 아이들을 구제할 ‘선한 지혜’는 없을까.
 
말과 혀로 하는 사랑은 쉽다. 그러나 그것이 소외된 이웃을 위해 땀이 되고 눈물이 되는 것은 어렵다. 뭔가 계산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하나님과 멀어진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보내신 이유를, 스라이 놋을 통해 묵상하게 되었다.? (계속)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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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2/28 [12:02]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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