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는 시급한 명령입니다

리뷰초대석 침신대 선교학 교수 이현모 박사

글|송기태,사진|권순형 | 입력 : 2018/01/30 [11:18]
▲ 대전 침신대에서 선교학을 가르치고 있는 이현모 교수     ©크리스찬리뷰
 
두 종류의 사람

“교회가 선교하지 않으면 많은 사역 중에 한 가지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역이 가치가 없는 것과 같다.” - 칼 바르트
 
굳이 이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사도행전 이래, 지상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준엄한 명령은 ‘땅끝까지 이르러 뻗어가야 할 선교’이다. 한국 교회가 70~80년대 ‘부흥의 시대’를 거쳐 8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한 ‘선교의 바람’은 지나가는 ‘바람’으로 그치지 않고, ‘선교의 시대’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에는 선교학자들의 혁혁한 공헌을 빼놓을 수 없다.
 
“87년 여름, 유학가면서 전공을 정할 때, 학교에서는 교회사를 원했고, 저에게 영향을 끼친 분들은 신약학을 권하셨습니다. 이론신학보다 실제로 영혼들과 부딪히는 선교학이 있음을 알고 선교학을 택했습니다.
 
미국 영사가 대사관에서 비자를 내줄 때 이해를 못할 정도로 생소한 분야였지요, 트리니티에서 막 선교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태웅 목사님께로부터 처음 선교학 소개받았습니다.”
 
침신대에서 선교학을 기경하고 접목한 이현모 교수는 이렇게 ‘평생학문’을 정했다. 필자를 그를 정확히 30년 전 만났다. 물론 실물로 만난 것은 아니다. 당시 필자는 창조과학에 관심을 갖고 여러 자료를 수집하던 중 미국 창조과학계의 태두인 헨리 모리스의 <현대과학의 성서적 기초>란 상당히 두꺼운 책의 번역자로 그를 만났다.
 
번역자 소개가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출신으로 소위 ‘지방’인 대전침신대학원으로 진학한 이력이 신기했다. 물론 당시 그가 유학생 신분으로 번역한 것으로 미루어, 골수 침례교단 출신이거나, 아니면 교수 요원으로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이었다.
 
30년 만에 ‘실물’로 만나 그 궁금증을 추적했다. 그러나 그는 ‘골수 침례교’ 출신도 아닌,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늦깎이’로 신앙을 가진 불신 가정 출신이었다.   
 
“신앙과는 상관없는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스무 살 때인 대학 2학년 때, 죠이(JOY)선교회(이하 죠이)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해 받았습니다. 저의 가족 중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당시 복음 받아들인 것은 단순한 설교 한 편에서였습니다. 그 단순한 설교 내용은,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종류의 사람은 빛 가운데 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안다.
 
그러나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은 잘 모른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 말씀 듣고 ‘내가 빛 가운데 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삶에 대해 굉장히 의미 있고,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 여러 번 질문해 보았습니다.
 
 ‘저 사람들과 내가 다른 것은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고(못하지만), 저 사람들은 알고 있지 않은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를 개인적으로 상담했던 분이 ‘형제가 생각한 물리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겠는가? 형제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으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게 신앙생활의 첫 출발입니다.
  이처럼 백그라운드 없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1년 동안 나름대로 갈등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크리스천 형제자매들이 모인 곳에 가면 계신 것 같지만, 혼자 있을 때는 그렇지 않고요. 그렇게 일 년 정도 불확실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 속에서 길을 찾다
 
이때 그가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었다. 물리학 교수들께 물어보면 ‘질량도 좌표도 없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 것이고, 목회자들은 ‘믿음이 없어 그렇다’라고 너무 뻔한 대답이 나올 것 같아 유일하게 택한 방법은 성경을 읽어보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제 책상에 몇 년 전에 사둔 성경이 있었습니다.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던 책이었습니다. 대학 3학년 올라가는 겨울방학 때 도서관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보다는 질문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성경에 남들처럼 은혜받은 것을 밑줄 친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물음표를 쳤습니다. 창세기부터 읽었으니 물음표가 엄청 많았습니다.
 
거의 한 달 동안 성경만 읽었는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은혜로운 이야기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숨기고 싶은 이야기도 많이 써있었습니다. 한 달이나 성경을 읽었는데 시편 정도까지 읽은 것 같습니다. 그때쯤 되었을 때 마음에 떠오른 것은, ‘성경은 누가 꾸며낸 것이 아니라 2~3천 년 전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성경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신약을 읽으면서 1년 전에 제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때부터 소위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고 신앙생활을 했다. 그리고 처음 신앙의 접촉점이었던 죠이 활동을 계속했다. 이태웅, 유용규, 홍성철 목사 등 좋은 리더들을 만난 것도 축복이었다. 그렇게 구원의 기쁨과 확신 속에서 신앙생활하다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다니다 군입대를 했다. 제대할 때쯤 소명을 느꼈다고 했다.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의미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헌신하여 시작한 것이 죠이 캠퍼스 간사였다. 숭실대에서 간사를 시작했다. 1년 조금 넘게 사역한 후, 84년 대전 침신 신대원에 입학했다. 졸업할 때 학교에서 교수요원이 필요하다는 도전을 받고 유학갔다. 92년에 학위를 받고, 93년 년 신학기부터 침신에서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가장 좋은 선택
 
여기까지 들으면 머리 좋은 한 모범생이 교수로 되기까지, 드라마틱한 이야기 별로 없는 순탄한 여정같다. 좀더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그가 캠퍼스 간사로 일할 때 서울대학 나와서 목사 된 사람은 드물지 않았지만 평범한 무명의 캠퍼스 간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 만큼 그에게는 ‘저(이) 형제가 서울대 나와서 헌신하여 사역자가 되었어’하며, 주변 사람들은 뒤에서나, 아니면 남들에게 소개할 때 이런 말을 노랫말의 후렴구처럼 붙여주었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한 강한 도전, 소명에 대한 재확인이 있었다.
 
어느 날 죠이 선배인 김인수 장로(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를 만나러 갔을 때였다. 김 장로에게 소개할 때도 누군가 그 ‘후렴구’를 붙여 소개했다.
 
“그때 김 박사님께서 빤히 보면서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형제! 서울대 다닌 것이 아깝게 느껴지는가? 그러면 그만두고 그 길로 가게.’ 그때 번쩍 정신이 났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한 것을 생각했는데, 마치 더 큰 것을 포기하고 안좋은 것을 생각했을까?’하는 마음이었지요. 그 이후로는 서울대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길이 가장 좋은 일, 가장 좋은 선택을 했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 몰링칼리지에서 열강하는 이현모 교수     ©크리스찬리뷰
 
자신은 그렇더라도, 그가 전공을 그만두고 사역자의 길을 간다고 할 때 불신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당연히 부모님들이 이해를 못하셨습니다. 캠퍼스 간사로 일한다고 할 때 부모님은 학교 관련 일인 줄 알고 순순히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입학하려고 할 때는 부모님이 강하게 반대할 것이란 생각으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원서 마감 3일 전에 아버지께 이야기 드리니 놀라시더군요.”
 
신앙이 전혀 없는 부친은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그에게 확인했다.
 
“나는 솔직히 네가 생각하는 게 이해가 안된다. 그런데 네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네가 결정한 것이 나중에 보면 항상 옳더라, 이번에도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네 생각엔 이게 정말 중요하고 해야 할 일이냐?”
 
(단호하게) “그렇습니다. 아버님!”
 
“그렇다면 해라,”
 
이렇게 신학을 정식으로 하게 되었다. 공부할 때 가정에서의 재정 도움은 없었지만 영어를 할 수 있었기에 미국 선교사들의 강의를 통역하면서 학교에서 시간강사처럼 급여를 받아 해결되었다. 그가 신학하게 된 동기도 단순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캠퍼스 간사로 사역했는데, 신학을 하지 않고 훈련받은 것으로 가르치려 하니 시간이 갈수록 성경해석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고, 어느 날 겁이 났습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내가 옳다 그르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침 그때 평생 하나님 사역을 하려면 가능한 한 젊을 때 신학을 마쳐두자.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보다, 훈련을 받아두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는 게 하나님 뜻인지 잘 모른 채 말입니다.”
 
곁가지를 자르기
 
이후 그는 학생들에게도 가끔, “인생에서 너무 빨리 한 가지 사역에 매달리지 말고, 너무 늦게 매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평생 해야 할 사역을 35~40세 사이에 시작했으면 좋겠다. 35세 이전에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은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40세가 넘도록 해야 할 구체적인 일을 못 찾았다면 좀 늦은 것이다. 그 정도 되면 몰두해야 할 때와 집중해야 할 때이다”라고 강조한다고 했다.
 
“우연인지 교수로 35세에 일찍 사역에 정착한 것 같습니다. 교수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한 다음에는 목회나 다른 곁가지를 의도적으로 다 잘랐습니다. 카톡과 이멜 외에는 SNS는 아무 것도 안합니다. 관리할 수 없는 것은 안합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35세 이전에는 목회에 마음이 많았습니다. 교수가 안되었으면 당연히 목회를 했을 것입니다. 1년 가까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지 않으셨지만 저의 길을 죽 돌아볼 때 교수가 맞다는 생각을 하고, 목회의 길을 버렸습니다.”
 
교수로서 25년째 재임하는 동안 4번 정도 목회 청빙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별로 어렵지 않게 거절할 수 있었다. 고민하지 않고 현재 걷고 있는 길이 하나님 뜻이라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신학의 여러 분야 중 당시에는 생소했던 선교학을 왜 택했을까?
 
“예수님을 믿고 나서 1년 반쯤 지나서 오엠(OM)의 로고스 배가 한국에 왔을 때 통역으로 섬길 기회가 있었습니다. 죠이선교회에 외국선교사들이 많이 있어서 영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78년에 두 달, 80년에 두 달 동안 로고스 배를 탔습니다. 그 배에서 떠날 때, ‘하나님, 원하시면 제가 선교사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하고 드린 약속은 제 마음 속에 계속 있었습니다. 그 뒤에 캠퍼스 사역, 부목회자 경험, 가르치는 일도 해보았습니다.
 
신학교 재학 시절 이사회에서 교수요원으로 뽑아,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아오면 교수로 임용한다고 결정을 해주었습니다.”
 
80년대 말까지 침신은 외국 선교사들이 강의할 때 통역요원이 유학을 마치고 교수로 된 케이스가 더러 있었다, 몇 달 전 시드니를 다녀간 정동섭 교수도 그 케이스였다.
 
마침 한국에서 선교붐이 일어나면서 선교학 교수의 임무도 중차대했다. 교수로서 학교 강의가 당연히 최우선이라 거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선교에 관련하여 ‘사람을 키우는 것’을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사람 키우기
 
먼저 교단적인 차원에서 젊은 침례교 대학생들을 위해 교단에 선교대학, 뱁티스트 비전 모임 등을 만들었다.
 
“선교에 관련해서는 월급을 받든 안받든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 한국교계는 선교사 파송 초기라 선교사들을 선교자원으로 키우는 데 미숙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침례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초교파적인 ‘선교한국’은 짝수 해에 개최했는데, 저희는 선교한국을 하지 않는 홀수 해에 선교대회를 개최하여 선교사들을 모집했습니다.
 
침례교단 3분의 1이 이 대회를 거쳐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750여 명의 선교사들은 침례교에서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발굴한 선교사 자원을 훈련하기 위해 학교 안에 세계선교훈련원을 설립하여 10년 동안 훈련원장을 맡았다. 그때까지 침례교단 차원의 선교사 훈련센터가 없었다. 이태웅 목사가 운영하는 GMTC에 위탁하다가 침례교단 차원에서 해야 할 필요를 느껴 시작했다.
 
 “훈련센터는 94년부터 준비작업을 하여 98년에 선교사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20년 동안 훈련했습니다. 일 년에 두 번씩 파송되는 선교사들을 훈련했습니다.
 
최근 들어 선교사 지망생이 줄어들어, 2년 전부터 한 번만 신임 선교사들을 훈련하고 한 번은 재교육을 합니다. 한 번에 10가정, 부부 20명이 기준입니다. 교단 선교부에서 선교사 나갈 분들 모집하고 시추까지 합니다. 그러면 그분들을 위탁받아 14주 동안 합숙훈련을 합니다. 2베드 10개, 싱글룸 16개, 가족이 다 들어와 공동체 생활하며 훈련받습니다.”
 
한국 선교사가 본격적으로 파송된 것을 79년으로 시작으로 본다. 당시 마린 넬슨 선교사가 처음으로 한국에서 파송한 선교사를 조사했을 때, 한국 파송 선교사가 90명인 것이 공식적인 통계였다. 그로부터 꼭 30년 만인 2009년에  2만 명을 돌파했다.〠  <다음 호 계속>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알파크루시스대 원격교육학부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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