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캄보디아 헤브론메디컬센터, 눈물의 찬양 4
 
글|김명동,사진|권순형
▲ 어린아이를 무척 사랑하는 김경우 선교사가 퇴원하는 아기 환자를 안고 기뻐하고 있다. 왼쪽은 최수상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많은 사람이 교회를 비판하지만 지금도 이곳 캄보디아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못 이겨 인생을 바쳐 봉사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그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세상 사람들도 신앙의 참된 가치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내게 현장취재를 보내신 것도 그 이유라고 믿는다.

하루하루가 은혜
 
헤브론병원 총무 일을 감당하고 있는 김경우 선교사(65). 그의 이력은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만큼이나 변화무쌍하다.
 
국제상사-교육자재 사업-주물공업 운영-자동차부품 판매-단체급식 운영-건설회사-IT 사업-캄보디아 고무농장- 캄보디아 선교사

왜?
 
그의 “일하기 싫어서”라는 간단한 이유가 그 동기였다.
 
이를 어떻게 이해할까.
 
그의 표현을 빌리면 자신은 ‘탕자’였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아내 유정임 선교사(59)와 함께 부산 수영로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캄보디아에 온 것은 2016년 1월이다. 유정임 선교사는 주방일과 헤브론교회 예배 반주자로 헌신하고 있다.
 
김 선교사는 “처음 이곳으로 올 때는 꿈을 가지고 그저 여기 사람들을 사랑으로 돕고 싶었다”며 “그런데 2년이 되면서 돌이켜보면 이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사람들을 통해서 많이 배우고 있다”라고 말했다.
 
“선교사님들이나 캄보디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제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얼마나 개성이 많은 사람인지 또다시 알게 됐습니다.
 
여기에 오지 않고 한국에서 살았으면 여전히 제가 괜찮은 크리스찬으로 착각하며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선교현장에 와서 여러 가지 일들을 부딪치면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무엇이든 할 수가 없구나, 많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공동체를 통해서 나 자신이 성숙해지고 있는 거죠.”
 
선교지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선교사 간의 불화도 생겼다. 그래도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했던 김 선교사는 이 과정에서 민낯의 자아를 발견했다. 불같은 성격인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깨닫고 무릎관절을 꺾었다. 그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다.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한 후에는 할 일이 명확해졌다.
 
“선교현장은 영적전쟁터입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사탄이 갖고 놀아요.”
 
김 선교사의 솔직한 간증을 들으며 기자는 그 완전무결하지 못한 인간적인 측면에 오히려 친근감이 느껴졌다. 어차피 성장의 조건 속에는 방해와 질병, 모순들이 있게 마련이지 않은가.
 
헤브론병원과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을까.
 
“농어촌교회에 관심이 있어서 교회 농어촌선교팀 일원으로 수년간 섬겼습니다. 그런데 2010년 여름 농어촌선교팀이 필리핀으로 선교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수상 가옥촌의 비참한 환경과 주민들의 소망 없는 눈을 보고 처음으로 선교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런 후 그해 겨울 처음으로 캄보디아 고무농장에 비즈니스선교로 가게 되었죠. 그곳에서 농장관리업무를 하게 되었는데 준비되지 않는 상태로 갔기 때문에 농장관리와 선교를 동시에 조화롭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실패를 자인하고 귀국하였어요.”
 
김 선교사는 “그곳에서 고생을 많이 해야 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캄보디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선교훈련도 받는 기회가 됐다”고 고백했다.
 
“캄보디아에서 돌아온 후 아내와 함께 교회 내 선교부서 중 캄보디아 예배부를 섬기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선교지를 두고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헤브론병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물론 고민을 했죠. 의료인이 아닌 우리들이 헤브론병원에 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무작정 왔어요.”
 
그는 김우정 원장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하나님이 가라해서 왔습니다.”
  
“그랬더니요?”
 
“기가 차시던지 웃으시더라고요. 사실인데 어쩝니까, 그랬죠.”
 
“그랬더니요?”
 
“그러면 여기서 며칠 계셔보셔요. 그러시더라고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행정파트에서 일하던 선교사님이 갑자기 귀국한 거예요. 며칠 만에 바로 투입이 됐다니까요.”
 
김경우 선교사가 이렇게 섬김의 사람이 된 데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 그의 고향은 부산이다. 아버지는 성철 종정과 만날 정도로 철저한 불교신자였다.
 
“동네에서 제일 부자였어요. 그런데 제가 놀기 좋아해서 물려준 유산을 다 까먹었습니다. 정말 방탕생활을 했어요. 결혼 후에도 놀기를 좋아해서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뛰쳐나오고 사업을 해도 벌이에는 신경을 안 쓰고 손해 안 볼 정도로만 대충대충 했어요. 그러니 집사람이 얼마나 괴로운 생활을 했겠습니까?


▲ 김경우·유정임 선교사 부부     © 크리스찬리뷰
 
그런데 집안에 계속 불화가 생기니까 집사람하고 상의를 했죠. 우리 종교를 갖자고요. 그렇게 해서 성당을 3년 정도 다녔어요. 그래도 안 변하니까 집사람이 에이 이 인간아! 하면서 잠시 별거하기도 했어요. 이혼한 건 아니고요.
 
그런 후 집사람이 교회를 무척 싫어했는데 이상한 꿈을 꾸었대요. 갑자기 나를 이끌고 수영로교회로 간 거예요. 그래서 수영로교회를 다니게 됐는데 집 사람이 나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데 ‘아, 하나님 저런 인간을 왜 그냥 놔둡니까’ 그런 소리가 크게 들리는 거예요. 그러더니 잠시 후 조용해지더니 ‘하나님, 저를 위해서 우리 남편을 용서하여 주세요.’라는 기도소리를 듣고 섬뜩했어요.”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용서’라는 말이 청천벽력처럼 그의 마음을 내리쳤다. ‘나는 이  나이껏 살아오면서 누구에게 무엇을 베푼 적이 없다. 누구에게 져 준적도 없다. 누구를 너그러이 용서해 본적도 없다. 오직 내 위상과 안전을 위해서만 이를 악물고 아등바등 살아오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지난 시절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는 그렇게 교회에 첫발을 디뎠다.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교회를 섬기며 복음을 마음껏 포식했다. 허기진 영육의 배를 채우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때부터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놓고 기도했다.
 
그의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 때 커피 목사(양순식 선교사)가 직접 커피를 내려 우리에게 건네줬다. 김경우 선교사는 커피를 마시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 퇴원하는 아기와 기념촬영을 해 달라며 스튜디오를 찾아온 김경우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집 사람이 헤브론교회 피아노 반주자로 섬기고 있잖아요. 전 한국에 있을 때 아내가 피아노를 치는지 몰랐었다니까요. 워낙 집안일에 신경을 안 쓰고 밖으로만 돌아다니는 생활을 했으니까요. 저한테는 집사람이 예수님 같아요.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해줬으니까요. 철이 드니까 볼 면목이 없다니까요.”
 
30대 초반 김 경우 선교사는 간경화말기 환자였다.
 
“간이식수술을 받고 지금까지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작년에는 피부암이 생겨 한국에 나가서 수술을 받고 왔어요. 다행히 전이가 안 돼 감사한 거죠.”
 
그는 ‘절망의 강’을 건너는 법을 알고 있다. 그자신이 너무 나약했기 때문에 나약한 이들에 대한 애정이 깊다. 이제 자신도 남에게 감화를 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니 일할 수 있는 힘도 생겼다고 말한다.
 
헤브론 살이 2년이 된 김경우 선교사는 이제 헤브론가족 대열에 끼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두운 과거는 덕지덕지 페인트로 도색하기 바쁘지만, 그는 스스럼없이 자신을 까내어 보인다. 이력으로 봐서야 닳고 닳은 사람 같지만 수줍음을 많이 탄다. 해 저녁 토담 위에 핀 박꽃처럼.
 
“하나님이 부르신 곳으로 오니까 일하는 것도 즐겁고 참 좋아요. 하나님이 저에게 제일 잘 맞는 일을 주신 거죠. 헤브론병원 일이 저에게 딱 맞아요.”
 
김 선교사는 “이곳에 있는 것이 너무 좋다. 하루하루가 은혜다”며 “내 인생에 가장 감사한 일은 선교사가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헤브론으로 가라
 
▲ 병리사 이종숙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이종숙 전도사(68. 병리사)를 만나기 위해 3층 병리실로 올라갔다. 병리학 분야는 캄보디아 의료분야 중 가장 낙후되어 있는 분야다. 병리사 자격증을 가진 이 전도사가 헤브론병원에 온 것은 2012년 6월. 
 
“교회 목사님이 저에게 캄보디아 헤브론병원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헤브론병원에 병리사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걸까. 기도를 시작했죠. 사실 당시 병리사자격증을 가진 선교사는 드물었거든요.”
 
하나님의 뜻은 이 전도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전해졌다. 그날따라 이상한 기분이었다. 거룩하고 충만한 성령이 느껴졌다. 그때 마음속으로 사무엘하 2장1절 말씀이 들려왔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헤브론? 순간 가슴이 뛰었다. 결코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주님께서 그녀를 캄보디아 선교사로 부르고 계신 것이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거실바닥에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선교사역을 놓고 기도하고 있었거든요. 하나님, 의료선교를 가고 싶은데 병리사는 없네요. 간호사나 의사는 일할 곳이 많은데 전 해당병원이 없네요.”
  
사실 그녀가 선교사의 길을 주저 없이 선택한 것은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곧바로 멕시코 선교를 하면서 서원했던 일이다. 그녀의 꿈은 중국선교를 다녀오면서 구체화됐고 선교사훈련을 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렸던 것.
 
이종숙 전도사는 성령에 이끌려 가벼운 행색으로 캄보디아 길에 나섰다. 그 첫 걸음은 얼마나 비장한 발길이었을까?
 
“무작정 왔습니다. 와보니 원장님은 안 계셨어요.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제 이력서를 보고 선뜻 수락해주셨던 서인수 장로님을 오자마자 만났죠. 서인수 장로님은 경북의대 병리학과 교수로 은퇴하신 후 이곳으로 오셔서 헤브론병원 병리센터를 만드시고 병리검사 담당을 기다리고 계셨어요.”
 
이 전도사는 “처음 왔을 때는 병원에 방도 없었고 시설도 없어 마치 군대 야전병원 같았다”며 “구비 안 된 것이 너무 많아 전쟁터 같은 분위기였다”고 회고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이원검사센터에 부탁을 했지요. 이사장님이 시약이며 소모품, 장비 등을 기부해 주셨어요. 그 후로 신청을 하면 1년 동안 사용할 소모품, 시약 등을 대주셨습니다. 그렇게 한 계단 한 계단 일을 이루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죠.”
 
이 전도사는 “하나님이 이곳에 와서 내가 해야 될 일들을 하나하나 보여주시는 것 같다”며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됐다. 그 일들을 계속 해나가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 전도사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젊은 시절 이원의료재단 검사센터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직장 휴가 중이었는데 고등학교 친구가 한얼산기도원 집회에 저를 초청했어요. 예수님에 대해 몰랐고 관심도 없었죠. 하도 조르기에 휴가 가는 셈치고 따라갔어요. 딱히 갈 곳도 없고 해서요.
 
집회는 일 주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하루에 네 번 예배를 드리더라고요. 그런데 삼일이 지나니까 영적으로 혼란이 오면서 ‘아, 이게 뭐지? 다른 세계가 있네?’ 거기에서 영적인 체험을 했어요. 그런 후 예수님에 대해 알고 싶어졌어요. 하나님이 뭐지? 죄가 뭐지? 구원이 뭐지? 교회를 찾아다니며 설교 한두 시간 들어도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없었어요.
 
그런데 천주교 신자인 후배가 ‘언니, 세미나가 있으니까 가보자. 언니는 강의 듣는 것 좋아하잖아. 한 번 들어봐.’ 그러는 거예요. 천주교? 선뜻 내키지 않았어요. 주워들은 소리는 있으니까요. 일 주일에 한 번 하는 세미나인데 7주 완성이거든요.

▲ 헤브론병원에 처음 왔을 때 야전병원같이 너무나 시설이 빈약하여 전쟁터 같은 분위기였다고 이종숙 선교사는 회고했다.     © 크리스찬리뷰

처음에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제목을 보니까 제가 알고 싶은 게 다 있는 거예요. 그 당시 직장이 화곡동에 있었는데 그 먼 종로 4가 성당을 오가며 7주를 끝냈어요. 겨울이었는데 날씨는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요. 그런데요. 7주 가지고 안 되겠더라고요. 7주 세미나를 5번이나 들었어요. 정리가 되면서 성령체험을 확실하게 했죠.”
 
이 전도사는 “이후 성당을 다니면서도 원래 하나님을 만난 곳은 한얼산기도원이었기 때문에 주일날 교회도 나갔다”고 겸연쩍게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이렇게 6개월간 양쪽으로 나가다보니까 안 되겠더라고요. 기도했죠. 하나님 어디로 정하지요?  어느 날 새벽에 잠에서 깼는데 누가 뒤통수를 탁 치는 느낌이 오면서 마태복음 13장 5절 말씀이 떠오르는 거예요. 성경을 찾아보니까 돌밭에 떨어진 씨앗 이야기였어요. 아, 내 신앙상태가 바로 이렇구나. 듣기는 들어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성당에서 교리공부를 더 하면서 영세를 받았어요.”

▲ 헤브론병원 병리과를 창설한 서인수 선교사. 그는 경북의대 병리학 교수, 대한병리학회장을 역임한 병리학 연구의 권위로 불렸던 학자이다.     © 크리스찬리뷰

그 무렵 그녀는 늦은 나이로 백석신학대학교에 입학해 2003년 졸업했다.
 
“그러니까 천주교 신자면서 백석대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셨군요.”
 
“그래요. 주위사람들에게는 성당 다닌다는 얘기는 안 했어요. 혼란스러워 할까 봐요. 신부님이 가서 공부만하고 오세요. 아주 가지는 마세요. 그러시더라고요.”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후원하는 단체는 있나요?”
 
“아뇨. 아버님이 6.25때 전사하셨거든요. 보훈가족입니다. 연금이 나오는 게 있는데 그 연금으로 생활합니다. 하나님이 풍족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채워주셔서 걱정은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나이다’ 이것만 되뇝니다.”
 
“외롭지 않으세요?”
 
“전 성격상 외로움을 안탑니다. 무서움도 안타고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잖아요.”
 
캄보디아에서의 적응이 쉽지 않았을 텐데 지난 5년을 회상하는 그녀에게서는 그런 어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신뢰가 깊어 매우 단단해 보였다. 누구에게나 한 번 주어진 인생,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재능을 의료선교를 통해 인생의 2모작 3모작 하는 이종숙 전도사의 발걸음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병리과 창설이 큰 기쁨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반가이 손님을 맞는 서인수 선교사(72). 평생을 경북의대 병리학 교수로 보낸 그는 대한병리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병리학 연구의 권위자로 불렸던 학자다. 그런 명성에 현재의 삶이 썩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 조그만 방,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이제는 편안하게 노후를 즐길 수 있는 그가 질병과 빈곤으로 고통받는 척박한 캄보디아를 찾아오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힘이 그를 이곳으로 오게 했을까.
 
“경북의대 교수로 있으면서 단기의료선교를 많이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라오스로 갔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단기선교를 다니다보니 은퇴 후 장기선교사로 나가야겠다고 막연한 생각을 갖게 됐어요. 농어촌에 가서 봉사할까도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선교 쪽으로 마음을 주시더라고요. 나를 선교사로 이끄시는구나. 어떨 때는 저항도 해봤죠. 꼭 해야 됩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쪽으로 더 몰아가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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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2/28 [10:24]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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