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신앙의 여정... ‘나는 역사다’

호주의 ‘마스터 리’ 이춘봉 사범

글|김명동,사진|권순형 | 입력 : 2018/03/27 [17:49]

▲   4월호/2018 표지   © 크리스찬리뷰

▲ 아들레이드에서 45년째 Lee’s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춘봉 사범. 태권도 9단인 그를 호주인들은 ‘마스터 리’라고 부른다.     ©크리스찬리뷰
 
남호주 아들레이드에는 45년 역사를 자랑하는 태권도장이 있다. ‘Lee's 태권도장’이 바로 그곳. 이곳 관장인 이춘봉(74. 9단) 사범.
 
호주인들은 그를 ‘마스터 리’(Master Lee)라고 부른다. 무술을 섭렵했다고 해서 붙여진 존칭이다. 그는 태권도를 통해서 호주의 주류사회에 진입한 인물이다. 당연히 스타대접을 받는다. 그가 45년간 배출한 제자는 만 명이 넘는다. 블랙벨트만 해도 800여 명. 이민성 장관, 축구 선수, 크리켓 선수, 국회의원, 골퍼, 기업가, 은행 임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그로부터 운동을 배웠다.
 
이 사범은 79년까지 호주 태권도 국가대표팀 코치로 재직하며 여러 국제대회에서 호주가 상위권 성적을 거두는데 기여했다.

▲ 1974년 한국에서 개최된 제1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 대회에 호주 대표팀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한 이춘봉 단장을 신림도장에서 환영하고 있다.    © 이춘봉    
 
특히 74년 한국에서 처음 개최된 제1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 때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 은메달 1개와 동메달 3개를 획득하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또한 이 사범은 96년부터 2000년까지 남호주 경찰학교에서 예비 경찰관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고, 2000년 호주 정부로부터 ‘스포츠 공로상’(↓아래 사진)을 받았다.

▲ 2000년 호주 정부로부터 ‘스포츠 공로상’ (훈장)       © 이춘봉

특히 2016년에는 호주정부 후원을 받아 St. John Community Care에서 발행한 ‘The Long Road’ (이민자의 삶)에 이 사범의 인생스토리가 소개되기도 했다. 이 책은 호주 공공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
 
지난 3월 7일 그를 만난 곳은 아들레이드 Lee's 태권도 도장. 하얀 도복을 입은 파란 눈의 어린이들이 ‘차렷’ ‘준비’ 한국말 구령에 맞춰 태권도 훈련에 한창이었다. 세상 구경거리 중에 사람 구경이 제일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차렷,‘마스터 리’께 큰 절

▲ 도장을 운영하며 어린이반을 지도하고 있는 큰 아들 태원 씨(46). 4살부터 태권도를 시작해서 42년간 수련했으며 금년에 7단으로 승단한다.       ©  크리스찬리뷰
 
▲ 아들레이드 시내에 위치하고 있는 Lee’s 태권도장        ©  크리스찬리뷰

▲ Lee’s 태권도장에서 수련 중인 유단자들         © 크리스찬리뷰

이춘봉 사범이 도장에 들어서자 ‘차렷’ 사범의 한국말 구령에 따라 일제히 훈련을 중단했다. 이어 “마스터 리께 큰 절”하니 모두들 이 사범에게 고개를 숙였다. 같이 온 부모도 덩달아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2층 건물에서 거침없이 울려 퍼지는 한국말은 세계 속의 한국을 실감케 했다. 이 사범은 훈련하는 개개인을 찾아다니며 자세를 고쳐줬다. 호주인에게 태권도는 바로 한국을 의미하고 그 정신은 한국의 정신을 의미한다. 이는 이 사범이 제자를 키우며 유달리 태권도의 역사와 기본정신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 사범에게 사진촬영을 위해 시범을 요청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태권도 고수라지만 칠순 노인이지 않은가.
 
“연세가 많아 요즘은 웬만해선 시범을 하시지 않는다”는 측근의 귀띔이 무색하게 그는 취재진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도복으로 갈아입었다.
 
먼저 발차기 동작. 오른발 앞차기를 했는데 쭉 뻗은 발이 머리 위로 솟구쳤다. 그런 다음 왼손으로 발끝을 잡고 한동안 균형을 유지했다. 그런 다음 옆차기를 선보였다.
 
왜소한 체구. 그러나 무술인 특유의 강단이 서려있다. 하지만 눈매가 부드러워서인지 전체적으로 푸근한 인상이다. 대단한 명성에 걸맞은 권위를 내세울 만도 했지만, 적어도 겉보기에 그는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 이춘봉 사범은 칠순을 넘겼지만 젊은이 못지 않은 체력을 과시하며 하루도 쉬지 않고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격식을 차리지 않는 태도와 소박하면서도 시원스러운 말투로 처음 만나 대화하는 사람 사이에 필연적으로 생기게 마련인 긴장을 녹이고 거리를 좁혀주었다. 왜일까. 바로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흔히 무술과 싸움은 별개라고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묻자 그는 정신력을 강조했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정신력입니다. 꼭 이겨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이기게 돼 있어요. 주먹 잘 지른다고 이기는 게 아니라, 스포츠에서는 기술이 앞선 사람이 이기지만, 정말 죽고 사는 문제가 걸린 싸움에선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이겨요.”
 
“운동 잘하는 애가 싸움 잘하는 애한테 못 당한다고들 하잖아요.”
 
“내 말이 바로 그겁니다. 깡패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잖아요. 정신력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거지요.”
 
“젊을 때 발차기 실력은 어느 정도였냐”고 묻자, 그는 “나, 지금 젊은데”하며 껄껄 웃었다.
 
“이제는 나이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무슨 행사 같은데서 시범을 보여 달라고 하면 아직도 발차기가 나오더라고요. 매해 11월이면 음식축제를 해요. 그날은 호주의 장관도 오고 총독도 오고 그래요. 거기에서 해마다 태권도 시범을 해왔어요. 올해도 한인회에서 ‘장로님, 이번에도 꼭 시범해 주세요’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요, 사람이 시범을 하면 힘이 나요. 안되던 것도 쭉쭉 올라가구요.”
▲ 조지 폴라이츠(George Polites, 64)씨를 개인지도하는 이춘봉 사범. 1979년부터 태권도를 시작해서 2012년에 7단으로 승단했고 2020년에는 한국 국기원으로 8단 심사를 받으러 갈 예정이다. 그는 일 주일에 3번 이 사범으로부터 개인지도를 받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지금도 길 가다 젊은 애들이나 깡패와 붙으면 이길 수 있나요?”
 
“뭐 주먹이 있으니까. 한방이면 돼요. 그런데요, 난 상대방을 가격할 때 손바닥으로 가격해요. 그러면 상대방이 정신은 잃을 수는 있지만 뼈나 뭐 몸이 상하지는 않거든요.”

▲  호주 태권도 잡지에 커버스토리로 소개된 이춘봉 사범. 이 사범이 상대방(큰아들 태원 씨)을 손바닥으로 가격하고 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바닥으로 가격하는 시범을 보였다. 태권도 도장에서는 볼 수 없는 자세다.
 
“손바닥 가격 동작은 사범님이 직접 개발한건가요?(웃음)”
 
“주먹을 잘못 쓰면 상대방이 다치니까.”
 
그는 껄껄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어요. 마침 이곳 아이들이 탄 자동차가  신호등에 멈춰 섰는데 나를 보더니 야유를 하며 손짓으로 놀리는 거예요. 당시 이곳에는 아시안들이 별로 없었거든요. 꾹 참다가 계속 욕설을 퍼붓기에 달려가 자동차 운전석 문을 열고 한 방 날려버렸지요. 그랬더니 정신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어요.
 
같이 타고 있던 친구들은 겁에 질린 채 구급차를 부르고 난 즉시 도망쳤어요. 좀 떨어진 골목길에서 숨어서 보니까 구급차가 와서 응급처치를 하고 곧장 병원으로 싣고 갔어요.”
 
“손바닥 가격이었죠?”
 
“맞아요. 손바닥으로 가격하면요 한방 맞고 정신은 잃을지언정 몸에 상처는 없어요. 이와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났었죠. 제 아내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아이들이 탄 차가 우리 차 앞을 막 가로막는 거예요. 앞질러 가면 또 따라 와서 내 앞에서 차를 막으면서 욕하고 놀리더라고요. 안 되겠다싶어 속도를 내어 다시 앞질러 가서 차를 세운 다음 뒤에 멈춰 있는 아이들의 자동차로 달려갔어요.
 
그런데 운전석 문을 열려고 하니까 잠겨서 열리지를 않는 거예요. 순간 유리창을 깨뜨리고 한방 갈겼지요. 그러고 나서 차를 얼른 빼서 골목으로 이동해 숨어서 보니까 구급차가 오더라고요.”
 
“이때도 손바닥 가격이었겠죠?”
 
“허허, 다 지나간 얘기고요. 지금은 안 그래요. 태권도를 하면 참을성을 기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때 태권도를 하면서 겨루거나 싸우게 되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많은 수련을 하면 싸우기보다는 참고 능숙하게 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태권도 외에 다른 무술에서도 최고의 고급기술은 피하는 겁니다.”
 
제자 만여 명 중 유단자만 8백여 명
 
“도전받은 적은 없나요?”
 
“도전받은 것이 아니라 젊은 때는 누가 세다하면 내가 찾아갔어요.”
 
“한 방에 보냈나요?”
 
“내게 잡히면 끝났지. 체격은 작지만 싸움은 잘했어요. 그런데요, 다 젊은 때 이야기고요. 예수님 제대로 믿고 난 후에는 싸움 같은 거 안하고 젊잖게 타일러요. 그래도 안 되면 그냥 눈빛으로 경고하지요.”
 
조용한 성품에서 배어나오는 대쪽 같은 의지가 그의 눈빛에 담겨있다. 강렬한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웬만한 상대는 싸움도 하기 전에 주눅이 들 것 같다.
 
“몇 명까지 상대로 싸워봤나요?”
 
“7-8명 정도요. 10명 20명 상대해도 해치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령이 필요합니다. 다 상대하는 게 아닙니다. 딱 봐서 덩치 큰 놈 한 놈 쓰러뜨리면 게임 끝입니다.”
 
우리는 잠시 인터뷰를 중단하고 도장 인근거리를 걸었다. 우리가 막 코너를 돌았을 때 그가 한 2층 건물을 가리켰다.
 
“저 건물이 이곳에 처음 도착해서 8년간 도장을 했던 건물입니다. 그런 후 지금 도장을 구입한 거죠. 45년 전 일이 생각나네요.”
 
“도장을 시작해서 8년 후 건물을 구입했다면 수련생들이 꽤 많았나 봐요.”
 
“그 당시 도장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수련생도 늘어났지만 도장 옆에 헬스클럽을 차렸거든요. 지금은 헬스클럽이 24시간 하는 곳도 많고 한데 그땐 시내에 헬스클럽도 하나 뿐이였으니까요. 건물 구입도 그래요. 내 수입으로는 어림도 없지요. 그때도 은행에서 돈 빌리기가 어려웠던 때인데 은행 매니저를 찾아갔어요. ‘오, 마스터 리, 무엇을 도와줄까’ 빌려줘 돈. 날 믿지? 그러면 빌려줬어요.”

▲ Lee’s 태권도장은 도장 입구에 헬스클럽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제자 중 블랙벨트만도 8백여 명이나 되는데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나요?”
 
“그럼요. 만 명이 넘는 제자는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유단자들은 모두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요. 70, 80넘은 사람도 있는데 지금도 만나요. 가족 같죠. 이들 자녀들이 입관하고 손자들까지 입관하는 경우는 참 기쁘죠.”
 
그는 “치과를 가도 ‘오, 마스터 리’ 병원을 가도 ‘마스터 리!’ 소리에 보람이 있다”고 흐뭇해했다.
 
“5년 전 장로 은퇴하면서 아파트를 샀거든요. 아파트 내 수영장에 갔는데 경비가 저를 보고 ‘오, 마스터 리’ 그래요. ‘넌 누구냐’ ‘당신 제자요’ 그 후로 자주 만나요. 제자들이 각지로 퍼져 있으니까 가끔 이런 식으로 만나요.
 
한국 사람들 하고 바닷가로 가서 게를 잡았어요. 잡는 양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두 자루나 잡았다가 감시원에게 걸렸어요. 감시원이 두 사람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마스터 리’하며 인사를 해요. ‘넌 누구냐’ ‘제자입니다’ 그러더니 한쪽으로 가서 둘이 속닥거리더니 한 자루만 빼앗아 벌금을 물리고 한 자루는 봐주더라고요.
 
제자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래서 아들레이드를 떠나기 힘들어요. 허허.”
 
1970년대만 해도 호주사회에는 ‘백호주의’가 강해 황색인종인 이 사범이 태권도를 전파하기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소룡 영화가 호주에서도 인기를 끌면서 태권도에 대한 관심도 자연 늘었다고.
 
“제 성이 ‘브루스 리’와 같아서 그 덕을 좀 봤습니다.”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태권도를 하면서 혜택을 얻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싸움을 컨트롤하게 됐습니다. 항상 누구든지 제압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어요. 또 태권도를 하니까 사람들에게 자신이 있으니까 항상 사람을 웃으면서 대하게 되고요. 사람들이 나를 섭섭하게 할지라도 아무렇지 않아요.”
 
어머니 홍병숙 권사와 교회 개척

▲ 아이들이 어렸던 시절 어머니 홍병숙 권사와 함께 찍은 이 사진은 이춘봉 사범 자택 거실에 걸려 있다.                      © 이춘봉

이춘봉 사범은 1973년 호주무술협회 초청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남호주로 이민을 왔다. 이 사범이 교민 1호. 이민을 오기 전까지 그는 한국에서 영어선생으로 교편을 잡고 있었으며, 동시에 태권도 도장도 하고 있었다. 
 
“막상 와보니 가라데 클럽이었어요. 호주인 매니저가 일본인 사범을 계속 초청을 했는데 오래 있지 못하고 귀국을 하니까 안 되겠다, 한국인 태권도 사범을 초청해야겠다고 해서 호주 대사관으로 연락을 했던 거래요. 그런데 이 사람이 알코올중독자였어요. 교회도 데리고 다니고 그랬는데 결국 죽었어요. 그런 후 ‘Lee's 태권도장’이 시작이 된 거죠.”
 
“초기에 생활비 마련하고 도장 꾸려 나가느라 힘들었겠습니다.”
 
“힘들긴 했지만 닥치면 다 하게 돼 있어요. 처음엔 관장, 사범, 청소부, 비서 노릇을 다 했으니까요. 그런데요, 한국에서 올 때  미화 500불을 가지고 왔는데 은행에서 바꾸니까 300불 밖에 안 되더라고요. 당시 환율이 호주 돈이 미국 돈보다 더 높았어요. 처음엔 매니저 집에서 먹고 자고 했죠. 그런데 3개월 동안 돈을 안 주는 거예요. 한국에도 돈을 보내야 하는데요. 아내는 1년 후에 왔거든요. 할 수 없이 그 집에서 나와 교회를 찾아갔는데 마침 장로교회사택이 비어 있어 6개월 동안 그냥 빌려줬어요.
 
그런 후 6개월이 지나 교회 사택에서 나와야 하는데 갈 데가 없잖아요. 마침 제자가 유럽으로 여행 간다고 자기 집을 봐 달래요. 거기 가서 일 년을 살았어요. 그리고 미국에 있는 작은 형수님께 신세를 많이 졌지요.”

▲ 남강중학교 교사로 재직할 당시 결혼한 이춘봉 선생이 제자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기념촬영을 했다. (1971. 9.16)  © 이춘봉      

그런데 한국을 떠날 때 이 사범이 함께 가지고 온 무엇이 있다. 바로 목숨보다 귀중한 신앙이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신앙의 기둥을 단단히 잡으라는 권면을 그대로 간직한 채 호주로 왔다. 이 사범은 이민 초창기에 한인회며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등으로 활동을 했지만 교회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세상 일은 다 끊었다고 했다. 

▲ 아들레이드장로교회 헌당예배 후 전 교인 기념촬영 (1994. 1.22) ©이춘봉    

“김포공항을 떠날 때 어머니께서 ‘막내야, 네가 지금 호주로 이민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 잘 살라고 보내는 것이 아니다. 너를 통해서 사명을 주신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저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기는 했지만 막상 와서 보니 먹고 살기에만 급급했어요. 생활이 좀 나아지니까 세상 일에 더 마음을 뒀고요.”
 
이 사범은 한인사회에서도 존경받는 ‘어른’이다. 초창기 교민이 늘어나면서 한인들을 모아놓고 무료로 영어를 가르쳤다. 사건이 생겼을 때 나서서 통역을 하고, 한국 사람들이 이민을 오면 빠른 시간 안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등 교민 일에 앞장서 동참했다.
 
그동안 그는 75년도에 모친을 76년도에 장인, 장모, 처제, 큰처남 등등 연고자들을 수십 명 초청했다. 무엇보다 이들 가족의 정착으로 아들레이드장로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아들레이드장로교회는 가장 보수적이라 할만한 ‘순장측’ 교단으로 신사참배 반대와 순교 등의 한국교회의 고귀한 전통과 더불어 온전한 주일 성수를 고수하고 있다.

▲ 공주순장로교회 낙성식 © 이춘봉   

이춘봉 사범의 모친 홍병숙 권사는 평양에서 3대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한 한국 기독교 초대교회 출신이다.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세례 받은 그는 신사참배 반대로 가정에서 7년 동안 예배를 드리다가 해방 이후 출옥한 성도들과 재건교회를 세웠다. 6.25 때 피난하여 공주에 재건교회를 세우고, 미국에 사는 둘째 아들 가정에서도 교회(뉴욕장로교회)를 세웠다.
 
덕천신학교를 졸업한 모친은 아들레이드로 이민을 오던 해 콜롬보플랜에 참여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이 모임은 1986년 문광식 전도사가 부임함으로써 본격적인 교회가 됐다. 창립 멤버는 20명이었다.
 
“사실 어머니가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교회를 개척해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난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내 생각으로는 그때 당시 한국인이 늘면 얼마나 늘겠느냐,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었거든요.
 
교회개척 후 어머니는 미국을 자주 왔다 갔다 하셨어요. 그리고 한동안 어머니가 미국에 오래 머물고 계셨을 때 큰집을 한 채 샀는데 참 좋았어요. 대지가 6천 평이나 되는 숲속이었으니까요.
 
그런데요, 미국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집을 보더니 호통을 치시는 거예요. 어머니는 집 사기 전에 먼저 교회를 봉헌하시는 분이셨어요. 공주에서도 그러셨고, 미국에서도 그러셨고, 이곳에서도 그러셨어요. 어머니의 호통 한마디에 당장 처분해야 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사실 시드니 쪽으로 마음이 있어 옮기려고 했어요. 도장을 낸 지 10년 되던 해였어요. 시드니로 가서 지관을 내겠다고 하니까 도장 아이들이 적극 말렸어요. 걱정하지 말라. 내가 가더라도 3개월마다 와서 심사를 하고 가겠다고 그랬죠. 집도 내놓고, 토요일에 송별회 하기로 했어요. 이미 시드니 센트럴지역에 건물도 계약을 한 상태고요.
 
그런데요, 어머니가 수요일 미국에서 갑자기 오신 거예요. 보통 떠나시기 전에 연락을 주시는데 그날은 전화도 안주시고 ‘나, 지금 공항이다’ 하고 전화를 하신 거예요. 다음 날 어머니에게 말씀드렸죠. 어머니 제가요, 시드니로 갑니다. 시드니에 건물을 계약했습니다.
 
그랬더니 성경을 펼치시는 거예요. 어머니는 무슨 말씀을 하실 때에는 항상 성경을 펼쳐놓고 말씀하셨는데 그날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해 말씀을 하세요. ‘네가 지금 밥을 굶을까봐 그러느냐, 네가 여기에 교회를 세우고 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는 거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셨는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사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교회 생각은 하지 않았거든요.”
 
이때 이 사범은 어머니에게 따지듯 물었다고 했다.
 
“호주교회를 나가고 있는데 왜 한국교회를 세웁니까?”
 
“앞으로 한국 교민들이 늘어날 텐데 그땐 어떻게 하겠느냐. 모든 한국 교민들이 영어를 다 잘 할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어머니. 제가 순종하죠.”
 
이 사범은 결국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 가족은 지금껏 어머니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어요. 평생 복음사업에 헌신하신 분이시잖아요. 사실 어머니는 미국과 호주를 오가시며 한국 교민이 늘어나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거예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는데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어요.
 
다음 날  도장에 가서 아이들에게 시드니 안 간다고 하니까 좋아서 막 박수를 쳐요. 그날 계획되었던 송별회 파티는 태권도 10주년 기념파티로 바뀌었습니다. 그 후 교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10살 이춘봉, 태권도를 만나다
 
그는 교회건물 구입 과정에 대해서도 한마디를 보탰다.
 
“어머니께서 남의 교회를 빌려서 예배드리는 것이 합당치 않으니 교회 건물을 구입하자고 하셨어요. 저는 그때 교인이 몇 명 안 되는데 조금 더 기다리자고 했죠. 그러나 어머니는 ‘너는 집도 있고 사업하는 건물도 있는데 하나님 집은 어디 있느냐, 네 집이라도 팔아서 교회를 사라’고 책망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요?”
 
“순종했죠.”
 
“시드니 건물은 어찌 됐습니까?”

▲ 공주중학교 재학 시절인 10살부터 태권도를 시작한 이춘봉은 13세에 1단으로 승급(사진 왼쪽)했고, 64년 동안 쉬지 않고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 이춘봉      

“시드니로 해약을 하러 갔어요. 해약하면 계약금을 빼앗기잖아요. 가니까 건물 매니저가 잘 왔다, 아래층 가라데 클럽 사범이 만나자고 그런데요. 그 건물 1층에 가라데 클럽이 있었거든요. 전화해서 만났어요. 그 사범이 호주사람인데 부동산 일도 해요. 내가 당신을 잘 안다. 당신이 여기 오면 내가 힘들다. 내가 좋은 장소를 얻어 줄 테니 해약을 하라. 해약금은 내가 다 물어주고 호텔 비용, 비행기 요금 다 해주겠다. 그래서 해약을 했죠.”
 
어떻게 태권도를 시작하게 됐을까.
 
“6.25전쟁 때 평양에서 공주로 피난을 왔는데 학교를 금방 못 들어가 밖에서 놀고 있었어요. 그런데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지나가다가 자꾸 이북에서 온 빨갱이라고 놀리니까 걸리면 때려주곤 했어요. 맨날 싸움질을 하니까 큰형님 생각에는 나를 태권도 도장에 집어넣으면 싸움을 안 하겠다 생각을 하고 경찰서 체육관으로 데리고 가서 구경을 시켜줬어요.
 
보니까 벽돌이 깨지고 기와들이 깨진 것이 있어서 무엇으로 깼느냐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손으로 깬다고 그래요. 어린 마음에 해보고 싶어서 시작을 한 거죠. 이때 운동신경 하나는 타고 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해서 64년을 쉬어본 적이 없어요.
 
대학교 재학 중에도 그룹으로 태권도를 가르치고 군 입대하여 미군부대 카투사에 근무할 때도 태권도 교관이었죠. 제대 후에는 남부경찰서 무술사범으로 형사들에게 호신술도 가르치고 대학교 졸업 후 남강중학교 영어선생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도 점심 때를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어요.”
 
“군 제대 후 한양대 전기공학과에서 영문학과로 전과 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영어 때문이었어요. 어렸을 때 어머니는 늘 넓은 나라로 가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나라가 미국으로 생각했죠. 그래서 그때부터 영어공부를 죽어라 했습니다. 그 영어 덕분에 군 입대 후 카투사로 배치 받을 수 있었고 이곳까지 오게 된 거죠.”
 
생과 사를 넘던 ‘그 해 겨울’
 
이춘봉 사범의 삶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 한다. 그는 이제 일흔넷이다. 일흔네 번의 겨울 중 가장 추웠던 겨울은 ‘그해 겨울’이었다. 작은 옷 보퉁이를 짊어진 7살의 소년. 엄마의 손을 잡고 시리게 언 대동강을 건너며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디로 가는 거지?’ 아이의 마음은 손과 발처럼 푸르게 얼어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 소년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겨울’의 일만큼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 겨울을 기점으로 그는 소년에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양 홍천마을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모태신앙인 그는 교회 본당이 놀이터였다.
 
“어머니는 여섯 살 되던 해 미국 선교사가 세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를 믿기 시작하셨어요. 시집을 안 가시고 선교사가 되고 싶다고 하셨다는데, 1932년 어머니가 18세 되던 때에 일본인들이 여자를 공출(일제의 전시 여자정신대 의미)한다는 소문에 서둘러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어요. 그런 후 평양 서문밖교회에 다니셨지요.

▲ 블랙 밸트 제자들과 시내 도장에서 기념촬영 (앞줄 가운데 이춘봉 사범) © 이춘봉      

아버지는 평양에서 양말, 장갑, 모자 장사를 하시면서 사업이 잘돼 부유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그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 국민을 황국신민(일제강점기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하된 백성이라 하여 일본이 우리나라 국민을 이르던 말)이라 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했어요. 부모님은 신사참배 반대로 가정에서 7년 동안 예배를 드리다가 해방 이후 출옥 성도들과 재건교회를 세웠어요.
 
교회를 새로 건축한다고 해서 집을 팔아 전액을 건축헌금에 바치실 정도로 신앙심이 깊으셨어요. 그런데 해방 후 김일성 공산당이 북한을 다스리면서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감옥에 갇혀 순교당하셨지요. 이때 아버지도 잡혀가셔서 순교당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 6. 25전쟁이 터졌다. 그는 ‘전쟁’이 어떤 재앙을 가져올 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 지 몰랐다. 그러나 그날의 공기, 낯설고 이해할 수 없었던 총소리, 그렇게 그의 삶은 서서히 전쟁의 포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1951년 1월 14일 피난을 나섰다. 그러나 대동강 다리는 이미 폭격 맞아서 무너져 있어 건널 수 없었다. 겨울 추위는 피난민들의 몸과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옷가지 몇 개만 들은 보따리를 든 가족들은 대동강에서 길이 막혔다.
 
“마침 같은 교회 집사님이 작은 배를 구해 오셔서 그 배를 타고 강을 건널 수가 있었어요. 하지만 배가 너무 작아 큰형님과 작은형님은 함께 탈 수 없었는데 두 분은 헤어져 끊어진 강물줄기를 따라 나중에 건너오셨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합니다. 그렇게 헤어진 후 그 수백만 명의 인원들 사이에서 나중에 서로 다시 만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강을 건넌 후 형님들과 헤어진 거군요.”
 
“그래요.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다릴 수가 없었죠. 또 언제 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어머니는 교회가 나타나기만 하면 교회 입구마다 편지를 써서 붙여놨어요. 그걸 형님들이 보신 거죠.”
 
그러나 피난길은 쉽지 않았다. 자동차가 다니는 다리란 다리는 폭격으로 모두 무너졌다. 붉은 불기둥. 무서운 폭음의 제트기 편대의 기총소사. 피난민들은 기차 철로를 따라 모여들었다.
 
“한참 가다 보니 기차가 서 있었어요. 그런데 피난민들이 필사적으로 창문에 매달려 서로 밀치고, 화차 지붕꼭대기까지 피난민들이 빽빽하게 매달려 있는 거예요. 어머니가 그냥 걷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 걸어서 내려오는데 나중에 소식을 들으니 그 기차가 운행 도중 폭격을 맞아 폭파되었다고 해요.”

▲ 시범경기에서 발차기로 송판을 격파하는 이춘봉 사범. (1975) ©이춘봉    

피난민들은 육로로 다니지 못하고 몰래 숨어서 논두렁이나 밭길 도로로 다녀야만 했다. 인민군들이 피난을 가지 못하게 총살을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가족은 사리원을 거쳐 황주에 도착했다.
 
“기찻길 굴다리가 나타났어요. 우리는(친구들과 작은형, 누나) 장난을 치며 굴다리 밑으로 걸어 들어갔고, 어머니와 큰 형은 굴다리 위 도로로 걸어갔는데 나중에 굴다리를 통과해서 나와 보니 어머니와 큰 형님이 사라지신 거예요. 알고 보니 인민군들이 도로로 걷는 사람들을 막고 되돌려 보냈대요. 그래서 또 헤어지게 됐죠.
 
그때 저는 나이가 어렸었음에도 교회를 찾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편지를 써서 붙여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물어물어 교회들을 찾아가 편지가 있는지 일일이 확인해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황주교회에 가보니까 큰형님이 ‘어머니와 방금 점심 먹고 떠났으니 재령교회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써놓고 떠나셨어요. 재령으로 가는 길에는 빈집들이 많았어요. 모두 피난을 간 거죠.

▲ 아들레이드장로교회 문광식 목사 안수식과 이춘봉 장로 장립식. (1991. 1.19) ©이춘봉    

그곳에서 잠시 지내면서 음식을 찾아 먹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빈집에서 묵고 떠날 때, 다른 피난민들을 위해 음식이나 쌀을 남겨놓고 떠났거든요. 재령교회로 찾아가는 길에는 아주 큰 개천이 있었어요. 그 개천을 건너는데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송봉아!’라고 작은형님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큰형님이었어요. 그 수천 명 피난민 행렬에서 큰형님이 우리를 찾아낸 것이 참 신기했어요. 기적이죠.”
 
이 사범은 어머니가 틈만 나면 기도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고 기도문을 귀담아 들었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이 어려운 처지에서 구원해 주시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여 주시면 주님을 위하여 주님 기뻐하시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큰 아들은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서원기도였죠.”
 
피난길은 고됐다.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가족은 해주에 도착했다. 피난을 가 텅 빈 도지사집에서 일행들과 몇 주 머물렀다. 바깥은 조용했다.
 
“전쟁이 끝났구나, 생각했지요. 그런데 작은형님이 나갔다가 헐레벌떡 돌아왔어요. 인민군(당시 인민군이 남쪽으로 밀고 갔다가 다시 밀려 후퇴하는 상황)을 보았다는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밤새 총성이 그치지 않았어요.”
 
다음날 아침 가족은 다시 피난길에 나섰다. 피난 행렬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거리에는 냄새를 풍기며 이름 모를 시체들이 즐비하게 누워있었다. 다행히 연안 백석포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인민군은 만나지 않았다.
 
백석포 항구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를 기다렸다. 작은 돛단배가 다가왔지만 배 값이 없었다. 머뭇거리고 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배 주인은 어머니의 ‘아멘’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재고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저 무사히 인천까지 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배주인은 가족을 인천까지 태워다주며 손을 흔들어줬다.
 
이 사범은 이때 상황을 떠올리며 “피난을 떠나게 된 것도 대동강 사건도 굴다리 사건, 기차 사건, 돛단배 사건도 모두가 어머니의 기도와 진실한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믿고 있다”고 말했다.
 
“나중에 소식을 들어보니 피난길에 오르지 않고 교회에 남았던 사람들은 인민군들에 의해 교회가 폭파되어 거처를 잃거나 사망하게 되었다고 해요.”

▲ 신천교회 장년부 ©이춘봉      

천신만고 끝에 북한 지역을 벗어난 가족은 막막한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지만, 어디로 향할지 몰랐다. 행선지도 돈도 연고도 없었다. 그저 남으로 내려갈 뿐이었다. 한참을 가다보니 오산이었다. 평택, 천안, 유구를 거쳐 공주까지 갔다. 무겁고 힘겨운 피난 보따리를 공주에 내렸다.
 
“공주에 도착하자마자 읍사무소로 가서 주먹밥 배급을 받아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어요. 주민들이 피난민 도우려고 협력했겠죠. 집은 각자 알아서 마련했어야 했는데 계속 돌아다니다가 마침 봉황동 공주고등학교 교장 사택이 비어 있어서 임시로 그곳에서 살게 되었죠.”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이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머니가 우리를 큰형님에게 맡기고 봇짐장사를 시작했어요.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시면서 팔고 먹을 것과 필요한 물건들을 바꾸어 생계를 꾸려가셨죠. 그러는 중에서도 가는 곳마다 전도를 하셨습니다. 한두 사람의 결신자를 찾게 되면서 가정예배로 모이기 시작했고 수가 날로 늘게 되니 교회를 개척해야 되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죠.”
 
이 교회가 바로 평양 재건장로교회의 효시인 ‘공주교회’이다.
 
은퇴란 없다

▲ 막내 아들 이춘봉 사범이 아들레이드 자택에서 어머니 홍병숙 권사의 90세 생신을 맞아 케익을 나누며 축하했다.    © 이춘봉         


▲ 이춘봉 사범은 노년에 배운 색소폰 연주로 교회에서 찬양연주 봉사도 하고 있다. 자택에서 연습중인 이 사범.         ©크리스찬리뷰

 
▲ 6.25 때 사선을 넘은 이춘봉 사범 3형제. 왼쪽부터 둘째 형 이송봉 장로(뉴욕교회 은퇴장로), 큰형 이죽봉 목사(서울동천교회 원로목사), 막내  이춘봉 장로(아들레이드장로교회 은퇴장로) © 이춘봉
 
이춘봉 사범은 요즘 ‘꺼지지 않은 불꽃 에너자이저(energizer)라는 별칭이 생겼다. 그에게 있어 은퇴란 공적 업무가 종결된 형식일 뿐이며 사역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장로 은퇴할 때 소감을 말하라 해서 그랬어요. 은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기력이 있을 때까지 선교를 하셨는데 어머니 근처라도 갔으면 좋겠다고요.”
 
어머니 홍병숙 권사는 2014년 5월 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 사범은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하나님 품에 안긴 후 말씀과 기도생활이 그의 삶에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100세이셨는데 하나님께서 장수의 축복을 주셨어요. 임종은 못 봤지만 장례식에 참석하여 그 자리에서 제가 색소폰 연주를 했습니다. 다 함께 춤추고 장례식장이 마치 잔치집 분위기였지요.”
 
“유언은 없으셨고요?”
 
“내가 먼저 주님께 올라갈 테니 따라 오라, 모두들 예수 잘 믿어라 하시고 찬송을 부르시면서 눈을 감으셨대요. 지금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부르셨던 마지막 찬송이 가끔씩 떠올라 흥얼거리지요.”
 
“어떤 찬송인데요?”
 
“성신바람 불어서 높이 올라가...”
 
“어떤 어머니로 기억되세요?”
 
“기도의 어머니셨죠. 평생 복음사업에 헌신하신 분. 피난 나와서 우리 식구들 먹을 게 없어 주먹밥 배급을 받아 먹어도 한 번 어머니께 짜증내 본 일이 없어요. 지금까지요. 우리 생활이 그랬어요.”
 
어머니의 기도로 자란 자녀들은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고 승리의 삶을 각자 나름대로 살고 있다. “악한자의 집은 망해갔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잠언 14장 1절)는 말씀대로다.
 
큰형 이죽봉(83)목사는 서울 동천교회 원로목사요, 둘째형 이송봉(80. 미국 뉴욕교회)장로는 중국에서 탈북민 선교활동을 끝으로 은퇴했고 셋째 누님 김명란(77) 권사는 뉴욕에서 탈북난민정착돕기 선교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 사범은 아내 문희순(68) 권사 사이에 3남을 두고 있다. 큰 아들 태원(46)은 도장 일을 도우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가고 있고, 둘째 아들 태성(43)은 중국 상해국제대학 영어교수로 있고, 막내 아들 태영(43)은 신학공부를 하면서 시드니중앙장로교회 전도사로 봉사하고 있다.

▲ 믿음의 동반자인 아내 문희순 권사와 함께 한 이춘봉 사범(장로)     © 크리스찬리뷰

특히 아내 문희순 권사는 그에게 믿음의 동반자다. 이 사범이 아무리 승승장구한다 해도 이역에서의 삶은 때론 곤비하고 때론 외롭다. 그들 부부는 삶의 초점을 믿음생활에 두고 반 세기의 이민생활을 다정한 오누이처럼 경영해 오고 있다. 그래서인가. 오누이처럼 닮은 이 부부를 보면 ‘부럽다’는 탄성이 절로 나오면서 마음이 평온해 진다.
 
사람을 섬기며 사는 요즘이 가장 행복하고 기쁘다고 말하는 이춘봉 사범. 그는 아내와 함께 캄보디아 선교를 다니며 교회도 세우고 물질적으로도 지원해 주고 있다.
 
그는 오늘도 소망하며 기도한다.
 
“날마다 새벽에 잠이 깨면 편한 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생명호흡을 지켜주셔서 맑은 공기를 마시게 하시니 감사, 나이 70이 넘었음에도 일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니 감사, 감사할 일이 너무 많아요.
 
앞으로도 교회에서 할 일을 찾아 힘닿는 데로 일하고 싶습니다. 제가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고, 교회가 진리 안에서 굳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부모의 충성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으니 그 이상의 큰 교육이 또 어디 있겠는가. 반드시 자녀들도 부모처럼 살아갈 것이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평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모를 잘 만나는 게 가장 큰 축복이라 했다. 더욱이 기도하는 어머니의 만남은 일생을 하나님께서 보장하신다.
 
에필로그
 
전쟁과 피난은 아주 오래전 기억이지만, 여전히 생생하다. 그도 그럴 것이다. 이춘봉 사범은 7살에 아버지가 순교당하셨다. 그리고 전쟁을 경험했다. 살얼음 위를 넘어 피난을 왔고, 한 걸음씩 어머니의 신앙을 배우며 조심스럽게 살아왔다.
 
갑자기 소년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할아버지에게 삶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범의 회고는 시종일관 담담했다. 세월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을 나쁘게 말하는 경우도 없었다.

▲ 이춘봉 사범은 3대에 걸쳐 태권도 가족을 이루고 있다. 아들 태원 씨와 손주들.           © 크리스찬리뷰

장장 이틀 동안의 인터뷰에서도 그의 흔들림 없는 신앙이 그대로 보였다. 그 마음이 느껴지니 그가 ‘자식들을 잘 키운 게 아니다’라는 말이 어쩌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어른의 말이 아니라,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한다. 이 사범의 형제들은 평생을 그렇게 어머니의 신앙의 모습을 보며 바르고 올바르게 걸어왔고, 또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자식들도 자연히 올곧게 잘 자랐을 것이다. 삶은 그렇게 시간을 넘어, 계속되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생애 기간도 주님과 더불어 멋진 인생을 펼치시기를 기도한다.


글/김명동- 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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