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으로 구악을 집도하는 구약학자

한세대 차준희 교수

글|송기태,사진|권순형 | 입력 : 2018/03/28 [10:59]
▲ 한국 구약학계 최전선에 서 있는 차준희 교수     © 크리스찬리뷰

차준희 교수(한국구약학연구소장)는 ‘구악’과 ‘적폐’로 날이면 날마다 펑펑 터지는 사건과 사고로 지축이 흔들릴 듯한 한국에서 ‘구약’이란 ‘청진기’를 들이댄다. 아니 그에겐 구약은 ‘만병통치 의료기기’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내시경 초음파 탐지기로, 때로는 수술용 칼로, 때로는 엑스레이 촬영기가 되어 한국사회, 아니 현대사회의 병리를 진단하고 치료한다.
 
마침내 구약은 그의 손에 들리어 사회와, 교회, 그리고 성도의 회복제요 치료제요, 보약이 되기도 한다. 인간과 성도의 정체성을 성경을 토대로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의 맥락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오늘의 한국 구약학계의 최전선에 선 학자답게 49권의 저역서와 기독교계 방송의 가장 인기 있는 강사로, 일 년에 40여 회 집회 초청강사로 한국뿐만 아닌, 지구촌을 무대로 활약하고 있다.
 
이번에 호주 방문도 알파크루시스대 70주년 학술포럼과 집중강의로, 3년째 연속 초청받은 강사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그렇게 ‘큰 무대 체질’이 되기엔 신체적인 제약조건이 있다. 그 제약도 오래 전 훌쩍 뛰어넘었다.    
 
“여덟 살 때지요. 초등학교 입학한지 며칠 안된, 3월 초였습니다. 찻길 건너다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가 절단됐습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남은 부분 절단 수술을 받고 6-7개월 입원했습니다. 학교도 못 다니고 재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해 다시 1학년 입학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을 재수한 셈입니다.”
 
당시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 중입 전문 종로학원 원장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수송초등학교 1학년 재수생이 되었다. 입학하기 전에 학원장 아들답게 미리미리 ‘다 떼었던 공부’를 계속 공부하니 성적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모친은 그를 ‘지켜주지 못한’ 마음의 고통으로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어머니가 교회에서 예배 드리면 마음의 안정을 찾으신 듯했습니다. 그러나 단둘이 있을 땐 ‘죽자’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어머니와 저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습니다. 19살 차이입니다. 학교에서 저를 데리고 오다 건널목에서 어머니보다 먼저 건너가다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저를 지켜 주지 못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셨습니다.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 몰라 자주 ‘같이 죽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겨우 8년밖에 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죽나? 반바지 안 입고, 수영장 안가면 되지 않느냐?’하며 제법 어른스럽게 대꾸를 했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소명
 
그에게 장애는 장해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 반장도 했다. 그때부터 리더십이 검증(?)되었는지, 중학교 3학년 때는 교회에서 중등부 회장도 했다. 어디서든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장애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도 불꽃처럼 일었다.  
 
“언젠가 부흥회 강사 목사님이 기도하지 않는 죄에 대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기도하면 잘린 부위의 뼈도 자랄 수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 바람에 회개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제 몸에 대해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저의 절단된 부위에 뼈가 자랄 수 있도록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지만, 전혀 다리는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변화가 아닌 수용’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제 몸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저를 받아들이고 나니, 저를 살려두신 ‘하나님께서 뭔가 다른 뜻이 있지 않은가?’ 생각하며 미래를 향한 새로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여 처음으로 세웠던 소망이 의사였다.
 
“초등학교 때 병원 의사선생님과 가까이 하면서 의사 선생님 되면 사람들을 가장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의사가 될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의사가 되는데 막아선 복병은 다른데 있었다. 고3 때 의대 진학이 막혔다. 성적이 아닌 ‘지체 부자유자’는 지원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던 그 당시 후진적인 입시제도 때문이었다. 다시 방황했다. ‘방황의 끝’에서 발견한 것이다. 신학교였다. 
  “누군가 도와주는 직업이 의사 밖에 없나? 하여 목사가 되고 싶어 신학교 문을 두드렸습니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불러야 된다는 것을 선배들이 이야기할 때 처음에 저는 소명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 아니라 제가 가고자 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소명은 강압적 소명이라면, 이사야 소명은 자발적 소명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사야식 소명’을 받은 셈입니다. 직접소명이 있지만 간접소명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소명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구약에 필이 꽂히다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목사보다 학자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면서 학자의 꿈을 꾸었다. 그가 공부할 당시 80년대 초반 대부분의 한국 신학교는 정식 박사 학위 소지자가 태부족이었다. 무엇보다 구약에 소위 ‘필’이 꽂힌 것은 그가 구약을 필생의 학문으로 정하게 되었다. 
 
“1학년 1학기 때 최종진 교수님의 구약개론 시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때 ‘나도 구약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 ‘교수가 되려는 꿈’을 꾸었습니다. 교수가 되려면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영어, 독어,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공부를 체계적으로 준비했습니다. 오전에 독일어 공부하면, 오후엔 영어를 하고,  방학 중엔 매일매일 5과목을 공부했습니다. 
 
4년 동안 언어를 충실히 준비했습니다. 그때 학자의 꿈을 가진 친구들과 1년 선배들과 함께 학교에 ‘신학 독일어’ 과목을 개설해 달라고 건의했습니다. 그런데 신학 독일어 강의할 교수가 안계셨습니다. 10명의 학생들만 데려오면 해주겠다 하여 과목이 개설되었습니다.
 
그 다음 학기부터 적당한 교수가 없어 전성률, 유석성 교수님 등 당시 막내 교수님들이 억지로 공부하여 맡았습니다. 신학독일어 책도 없어 독일어로 된 신학원서를 가지고 공부했습니다.”

▲ 알파크루시스대학 개교 70주년 기념 한·호 신학포럼에서 강의하는 차준희 교수.     © 크리스찬리뷰

그렇게 학부 졸업했더니 지도교수였던 김갑동 교수가 그를 학자로 키우려고 당시 한국 최고의 구약학자였던 연세대의 박준서 교수를 소개해 주었다. 박 교수는, 이대 총장으로 여성 최초로 국무총리에 지명된 장상 교수의 남편으로 서울법대, 하버드, 예일 등 최고학부 엘리트 코스만 밟아 온 중견학자였다.
 
‘구약을 제대로 배우려면 그분에게 가라’는 지도교수의 권면으로 연세대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석사(MA)과정을 마쳤다. 그곳에서도 그의 왕성한 학구열은 채워지지 않았다.
 
“아쉽게 생각했던 문제가 해결 안됐습니다. 성경을 배워 성경전문가가 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성경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 성경에 대한 내용만 공부했습니다. 학부 때부터 해소되지 않았던 것이 대학원 과정에서 더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외국 학자들의 서적으로 성경 변두리만 하니 해소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또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독일 유학이었다. 이를 위해 또 차근차근 준비했다. 대학원부터 남산에 있는 독일문화원에서 개설한 괴테인스티튜트 1년 반 과정 다 마치고, 국가 유학생 시험을 치렀다.
 
“88올림픽 이전, 그러니까 유학 자율화 이전이었으니까 이 시험을 패스해야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저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의 치열한 학업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숙명과도 같은 장애가 또 한 번 그를 단단히 훈련시키는 제련과정을 거쳐야 했다.


▲ 차준희 교수     © 크리스찬리뷰

장애는 장해가 아니다
 
바로 결혼이었다. 결코 건너기 쉽지 않아 보였던 홍해와 같았다. 그러나 홍해의 기적처럼 그에게도 기적의 길은 열렸다. 당시 서울신대는 학교 측에서 의도적으로 신학과와 여학생이 많은 학과를 함께 졸업여행을 보냈다고 한다. 장차 목회자의 배우자로 동일한 교정에서 동일한 컬러의 신앙, 동일한 꿈과 비전을 품은 사람을 만나게 하려는 배려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렇게 만난 부부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아내는 학부 4학년 때 기독교교육과와 함께 4학년 졸업여행 가서 만났습니다. 저희 때는 학부 시절 결혼이 유행이었습니다. 군대갔다 와서 3-4학년 때 결혼하지요, 학교에서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졸업 여행을 보냈는데,  1차 후보로 종교음악과가 인기였고, 기교과가 그 다음 인기였습니다.”
 
그렇게 만난 이후 같이 수업 듣는 과목이 많았다고 했다. 서로 학자가 되려는 꿈도 동일했다. 4학년 2학기부터 독일어 공부 같이 하며, 대학원 때 괴테인스티튜트도 함께 다녔다. 그러나 ‘둘만의 사랑’이 결혼이란 바다를 건너기엔 너무나 깊은 장해물이 있었다. 첫째는 그의 장애가 장해였다.  
 
“장모님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5년 정도 반대하셨으니까요. 유학 가기 직전까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는 저희를 아끼는 보수신학자인 교수님이 ‘둘이 유학 가서 살아라. 아기 낳고 살면 허락하실 거다’라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물론 저희를 아끼신 나머지 하신 말씀이지만 저희는 끝까지 기다리고 축복 속에 가정을 이루기로 했습니다. 허락 동기는 함께 유학을 준비했고, 유학 시험 통과하고, 입학허가서를 받은 것입니다. 또 하나 교제 초기 결혼을 결정하기 전 약간 망설인 것이 있습니다. 아내는 가난한 시골 교회 목사 딸로서 그때까지 사생활이 없는 삶을 살아온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물건을 교인들이 함부로 쓰면서도 ‘교회 건데 네 것이냐?’ 이런 식의 말에 목회자 자녀로서 상처가 커 목사와 결혼 안하겠다고 했는데 신학생과의 결혼이 고민되었던 것은 사실이지요.
 
그래도 아내 마음이 확고했었기에 우리의 결혼은 가능했습니다. 유학 날짜 받고 10일 전에 결혼, 신혼여행 갔다 와서 바로 유학을 갔습니다.”
 
공짜는 없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한 사람의 걸출한 학자는 그저 세워지는 게 아니었다. 그는 결혼 전날까지 과외를 하여 유학 자금으로 모은 돈았다. 그렇게 모은 돈이 3백만 원, 독일에서 생활비 6개월 정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1년을 살아야 했다.
 
 “1년이란 학교에서 하는 어학과정입니다. 1년 뒤에 수업 들어가고, 박사과정 지도교수가 정해지면 횃불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게 안됐습니다. 그때 뒤셀드로프 순복음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섬기고, 아내가 한글학교 교사로 일하고, 모교회인 서부성결교회에서 저를 위한 장학금, 그리고 성결교회 교단 장학금이 연결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눈물겨운 것은 서울신대 저의 동기들이 당시 전도사 사역비가 5만 원이었데 십일조 5천 원씩 모아서 150만원을 30명 정도가 ‘동기장학금’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모인 돈이 독일에서 생활비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거룩한 부담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더 할 생각이었는데, 만 5년 안에 끝날 수 있도록 기도 부탁했습니다.
 
특히 유학 중 가장 큰 위기는 독일에 가자마자 부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었다. 68년도 중학교 입시가 없어져 학원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남은 자금으로 인쇄업에 뛰어들었다 가세가 기울었다. 고등학교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어려웠던 시절이 평생 가더군요. 제가 유학갈 때도 힘들게 지내셨는데,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것입니다. 장남으로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유학은 사치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가정 책임으로 한동안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막 도착한 독일에서 지금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뾰족한 수가 나는 것도 아니라, 차라리 빨리 공부 마치고 돌아가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유학기간 단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부친의 소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가족 누구도 비행기 값을 보내줄 여유가 없었다고 했다. 장례식 중간쯤에 연락이 왔다고 했다. 굉장한 부담과 미안한 마음, 빨리 공부를 끝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고 했다.
 
독일 본(Bonn)에서의 본격적인 공부가 재미있었다. 부친의 소천은 오히려 ‘빨리 가야 한다’는 이유가 없어진 것과 같았다. 
 
“공부는 재미있었습니다. 배우고 싶었던 성경을 배웠습니다. 창세기를 히브리어 성경을 놓고 읽으면 독일어로 번역하고, 설명 본문의 문제를해결하는 방법으로 풀어 주었습니다. 기존의 문제를 해결했던 학자들도 소개해 주었습니다. 본문을 볼 때 학자의 눈으로 본문의 문제를 제가 발견하고, 그 문제를 기존의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가를 찾아가는 작업입니다.
 
독일에서는 본문을 객관적으로 본인이 만나고 문제를 찾아내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성서학의 맛을 알고, 성서학이 재미있어 갔습니다.”
 
본대학은 개신교와 가톨릭 학부가 복도 하나를 두고 붙어 있고, 각각 5명씩 교수가 있었는데, 한 학기에 두 과목씩, 개신교 10개 가톨릭 10개 20과목, 한 번 개설하면 10년 동안 반복되지 않는 시스템이었다. 매학기 20과목 새로운 과목 쏟아져 나오니 논문보다 수업듣는 것이 더 좋았다. 책에도 안 나오는 내용들을 만끽하는 시기였다.
 
공부가 재미있다
 
4년 쯤 되었을 때 지도교수가 ‘왜 논문 안쓰냐?’고 경고했다. 비자연장을 1년씩 갱신하는데, 박사과정은 지도교수가 추천서를 써주어야 했다. 그런데 지도교수가 ‘너는 공부 안했다’고 하면서 못 써주겠다고 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위기였습니다. 비자 갱신이 안되면 독일을 떠나야만 합니다. 학위 끝내지 못하면 떠나야 합니다. 엄청난 회의가 몰려왔습니다. ‘내가 능력이 안되면서 유학을 무모하게 도전한 것은 아닌가’하는 회의감, 열등감이 몰아오면서 급우울증에 걸렸습니다. 본대학 도서관 라인강 주변을 몇 번 맴돌았습니다. 실패한 모습으로 한국으로 못가겠다고 강변으로 갔던 것입니다.”

문득 예레미야 29장 4절 말씀이 떠올랐습다. 바벨론 포로 끌려간 사람이 무능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계획 속에 보내졌다는 사실이었다. 독일로 그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란 확신이 드니 지도교수 만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지도교수 만났더니 ‘너는 믿을 수 없고 학부형을 보시고 오라’고 하였다.
 
“아내가 갔습니다. 편지로 지난 4년 동안 어떻게 공부했는지 적어갔습니다.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새벽 1시까지 하루 13시간씩 공부한 것을 쓰면서,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논문 안쓴 것이라고 탄원했지요. 교수는 아내 말을 믿고 써주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그는 자존심이 엄청 상해 논문만 썼다. 보통 논문 10페이지 통과에 3-4개월 걸리는데, 교수의 요청에 2-3주일 걸리는 수정 사항도 하루 만에 고쳐 나갈 정도로 몰두했다. 교수가 ‘너는 잠도 안자나?’ 할 정도였다. ‘네, 잠도 안잡니다’할 정도로 1년 만에 논문을 완성했다, 논문 통과되고, 구술시험이 통과되면 끝이었습니다.
 
졸업식은 없고 9시부터 12시까지 구술시험 통과하면 A4용지에 졸업장(학위증) 주는 것이 끝입니다. 모든 것을 다 통과하고 끝났습니다. 한 마디로 너무 허무했습니다. 토요일, 아내와 3개월 된 우리 아이만 참석한 학위수여식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 1년 전 ‘너는 왜 공부 안하니?’하고 경고하던 지도교수와 함께 동일한 요일, 동일한 시간에, “1년 전에 공부 안하느냐고 하신 말씀은 평생에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습니다. 공부는 제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그때 왜 그러셨습니까?”
 
(웃으며) “그게 내 교육 방식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은 논문 안 쓰고 수업만 들었을 것이오.”
 
더 놀라운 사실은, 학위를 마친 그날이 바로 만 5년째 되는 날, 그의 나이 33세였다.
 
또 하나의 풀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아내도 논문 쓰는 중이었습니다. 조금만 제가 애를 봐주면 1년 안에 학위 마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독일 정부에서 아내 비자는 연장해 주지만 저의 비자는 연장을 안해 주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아내까지 다 한국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연 같은 필연
 
모교인 서울신대에서 교수할 계획을 품고 귀국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목사 안수가 없으면 서울신대 교원 임용이 불가능했다. 그러던 차에 ‘우연 같은 필연’적인 일이 생겼다.
 
“학위를 마칠 즈음 조용기 목사님께서 독일 집회 인도차 오셨습니다. 본순복음교회 김희일 장로님께서 조 목사님과 약속을 해놓으셨습니다. 호텔에서 뵈었는데, 뭔가 압도되는 것을 느낌, 어떤 사람에게도 없는 영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그러셨어요. ‘자네, 우리 순신대(한세대 전신)에 와서 일할 생각없나?’ ‘예 알겠습니다’ 이런 준답이 오갔습니다. 그분의 입장에선 일종의 스카웃 제의였고, 저는 영혼 없는 대답을 한 것이지요. 한국에서는 안수가 없으니 2년 단독목회 자리를 찾았는데, 자리가 안났습니다. 그때 여의도 순복음교회 임종달 목사님이라고 예성 출신 목회대학원장께서 연락이 와서 조용기 목사님과 다시 만났습니다.”
 
당시 순복음신학대학(순신대)가 한세대학교란 종합으로 확대되면서 정규 박사학위 소지자가 필요했다. 그에겐 몇 가지 난관이 있었다. 먼저 교단(성결교)을 옮길 수 없다. 주말엔 목회하는 것이었다. 이 두 조건은 모교로 돌아가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 둘을 허락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 또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아내가 3년 동안 왔다갔다 하면서 드디어 논문을 완성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마지막 논문 4개월 동안 애기를 두고 독일에 혼자 가서 공부했습니다. 박사학위를 97년도에 받았습니다.
 
마침 서울신대 보육학과 초대 교수로 임용공고가 나고, 아내가 지원하여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작은 대학에 부부교수는 좀 부담스럽지요. 성문법이 아닌 불문율로 자연스레 서울신대 집입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세대에 공채 1호로 둥지를 튼 그는 23년째 머물고 있다. 그가 한세대 들어갈 당시 신학교는 마치 교회와 비슷했다. 반지성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다. 수업에 들어오지 않고, 군포역에 들어가 ‘예수천당’하며 전도할 정도였다. 출석을 부르면 ‘전도 갔어요, 기도 중이에요’하는 대답이 너무나 자연스런 학교였다.
 
학교가 학문하는 곳이 아닌 목사 안수 자격증을 받기 위한 통과의례장 같은 것 같았다. 명색이 신학교인데, ‘신학은 목회에 도움이 안된다. 기도 많이 하고, 전도훈련만 해라’는 선교단체에서나 할 법한 말들이 떠돌아다녔다.   
 
나름대로 엘리트 코스 밟은 학자로서 그런 분위기에 충격을 주었다. 강하게 몰아붙였다. 절반 이상 F를 주었다. 그러자 ‘차 교수는 차다’는 이상한 평판이 떠돌아다녔다. 특히 신학을 학문으로 대해야 하기 때문에 모세오경의 문서설도, 수용할 수 없지만 알고 비판해야 한다며 소개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열린 복음주의로
 
“어떤 학생이 ‘조용기 목사님의 신학과 목회를 배우려 왔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니다’하며 투서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저의 신학 검증 교수회의를 할 정도였습니다. 당당히 말했습니다. 신학을 학문으로 대해야지 신앙으로 대하고 있다고요. 반지성, 반학문은 안된다고요. 수용하지 않아도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근본주의가 아닌 다들 열린 복음주의로 가야 한다면서 새로운 이론과 신학을 많이 오픈하게 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는 학자가 되고 싶다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그의 뜻에 동조하여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 사람들이 92학번 94까지인데, 눈물로 키웠습니다. 독일어, 영어 개인 스터디를 하면서 교단의 학자로 키워냈습니다. 지금 교단의 실력자들이 되어 쓰임받고 있습니다.” 
 
주일엔 거의 초청설교로, ‘교수 부흥사’로 쓰임받고 있다. 그것도 초교파적으로 나간다고 했다. 순복음 교단이 크고 제자들이 많은데다 성결교는 친구들이 많아서 그렇다고 했다. 또 하나는 한국의 현실과 정곡을 찌르는 그의 책을 통해 소개되면서 그를 부르는 성경세미나도 계속 늘어나는 실정이다.
 
그의 매니아층이 형성되면서, 그가 출판사에 의뢰하는 것이 아닌, 출판사에서는 원고를 독촉하는 편이다. 그의 한결같은 소망은 단순했다.  
 
“목회자가 성도를 섬겨야 한다면, 신학자는 목회자의 설교를 섬겨야 합니다. 신학자로서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닌, 목회 현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을 저술하려 합니다. 교회 목회자들을 돕는 신학자가 되자는 것이지요. <창세기 다시 보기> 등의 시리즈도 예화만 붙이면 설교가 될 정도로 씁니다..”

초고속 정보사회인 오늘 우리 시대에 소홀하기 쉬운 자칫 구약을 ‘가장 현대적인 고전’으로 다시 세상의 구악을 집도하는 그에게서, 구약이 이제는 ‘가장 편안한 휴게실’같은 책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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