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손 잡은 선교사들 있어 미래가 밝다

D1르포 캄보디아 헤브론메디컬센터, 눈물의 찬양 6

글|김명동,사진|권순형 | 입력 : 2018/04/23 [17:27]
▲ 헤브론병원은 지난해 개원 10주년을 맞아 병원 입구에 환자 대기실을 신축했다.     © 크리스찬리뷰

오늘도 헤브론병원에는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는 환자들로 북적였다. 갓난아이를 안고 온 어린 엄마부터, 주름에 삶의 고단함이 짙게 밴 노인까지 신축 대기실은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런데 세상에! 마주치면 활짝 웃는 얼굴의 반가운 인사. 눈이 마주치는 환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합장을 하며 수줍게 웃어준다. 사람을 향해 웃어주는 것, 이보다 더 큰 기도가 또 있을까. 넉넉지 않아도 소박한 삶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이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제대로 된 병원진료를 받을 돈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헤브론병원은 정말 생명이었고 희망이었다.

▲ 5층 규모의 헤브론 간호대학 전경.     © 크리스찬리뷰

(사)위드헤브론(이사장 김해수 목사) 상임이사 김재수 장로(73)는 “매일 약 3백여 명의 외래 환자를 돌보고 있고,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에게 크고 작은 수술을 매년 1천여 건 정도 시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김 장로는 “개원 10주년을 맞은 헤브론메디컬센터는 현재 40병상에 12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으며 자비량 선교사로서 의사, 약사, 간호사가 30명 정도이고 현지인 스텝들이 90명 정도이다.”면서 “현재 심장수술센터와 간호대학이 있고 3개의 수술실과 중환자실 그리고 40여 병상을 갖춰 연간 5만 명을 진료하는 병원으로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김 장로는 “현지인 의료인을 세우기 위해 간호대학과 레지던트 수련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사람을 길러 세우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면서 “특히 2014년부터 3년 과정 수련의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그 결과 세 명의 전공의가 수료했고 현재 10여 명의 전공의가 수련을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연건평 1천100평 5층의 간호대학 건물이 지난 5월에 준공되어 입주를 했는데 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현재 64명의 현지인 학생들이 수업 중에 있는데 특히 올해 첫 졸업생 29명을 배출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졸업생 29명 중 1명만이 크리스찬이었는데 졸업을 앞두고 12명이 세례를 받았다는 겁니다. 이건 사건이에요.”
 
김 장로의 얼굴은 뭐랄까, 좋아서 죽겠다는 그런 얼굴이다. 신이 나서 얘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좋아하는 헤브론병원이면 그렇게까지 신나 할까 싶다.
 
▲ 지난해 9월 충남대 병원 로비에서 열린 ‘헤브론병원 24시’ 사진전 개막식에서 테이프 커팅하는 본지 권순형 발행인(왼쪽 6번째)과 김재수 장로(8번째). ©크리스찬리뷰

‘사람 살리는 일’에 참여하고 싶어
 
김재수 장로는 진지한 표정에다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어갔다.
 
“현지인 의사 심콘도 여기에 와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의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구나’ 생각하게 된 거죠. 그때부터 열심히 성경공부도 하고 주일예배에 참석하면서 그 좋아하는 술도 끊고, 그로 인해 가족이 다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집안 전체가 다 불교신자였거든요. 그뿐만 아닙니다. 마을 전체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인데 그를 통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 간호대학은 수업 전에 교수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 후 강의를 시작한다. 사진은 금년에 첫 졸업한 29명의 학생들이며, 전원 취업했다.     © 크리스찬리뷰

언젠가 이런 감격스러운 일도 있었다.
 
“심장수술을 한 아이의 마을을 찾아갔어요. 집안으로 들어 가보니 살림살이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아, 솥밖에 없어요. 눈물이 절로 났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손님이라고 방석을 내놓는데 그것도 옛날 우리가 선물했던 방석이에요. 어디다 잘 뒀다가 손님만 오면 내놓는다고 그래요.
 
그런데 감격스러운 것은 그 동네가 다 불교여서 절에 가고 하는데 그 집만 주일성수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건 기적이에요. 심장수술한 아이가 막 뛰어다니는 걸 보니까 정말 보기에 흐뭇하대요. 어머니가 예수 믿고 난 후 동네사람들에게 전도를 한다는데 힘들다면서 웃어요. 병원 중환자실에까지 부적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인데 주님을 믿게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참 보람이 있더라고요.”

▲ 레지던트 수련프로그램에 참가중인 10명의 캄보디아 의사들. 앞줄 3명은 지난해 6월, 3년 과정의 레지던트 프로그램을 수료한 의사들이다.     © 크리스찬리뷰

김 장로는 서울에서 캄보디아를 오가며 헤브론병원에 대한 행정관리지원 사역을 하고 있다고 했다.
 
“헤브론메디컬센터의 규모가 커지다 보니 체계적인 행정관리가 필요했어요. 비전과 미션을 수립하여 그에 따른 중장기 계획을 세운다든지, 각종 규정을 작성한다든지, 예산을 세우고 집행하는 일 등등, 서울 위드헤브론 이사회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제가 이곳 헤브론메디컬센터를 오가며 파악하는 일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내부규정이 없었거든요. 직원 임명이라든지 현지인 대우라든지 이제부터 체계적으로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저희 위드헤브론은 헤브론메디컬센터를 지원하는 비영리 사단법인입니다. 현지의 사역을 보다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2014년 설립되었죠. 현지 의료선교에 필요한 후원금을 모금하는 일이 주 임무이고요. 그 외 각종 약품이나 현물로 후원받은 물품, 기타 소모품 등을 챙겨 보내드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 헤브론병원 김우정 원장은 최근 한국 방문 중 전립선암이 발견되어 서울 성모병원에 입원, 수술받은 후 병세가 호전되어 지난 4월 15일 퇴원하여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어떻게 헤브론병원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일까.
 
“헤브론메디컬센터 김우정 원장 형님이 분당샘물교회에서 저하고 같이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선교여행을 다니거든요. 그 형님이 캄보디아 헤브론메디컬센터를 소개하면서 한번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선교여행팀이 방문을 한 후 해마다 찾아왔어요. 그러니까 10년 전 병원이 막 세워지고 나서부터 선교여행을 이곳으로 온 거죠.
 
그러다가 병원을 지원하는 위드헤브론 법인체가 설립이 되고, 제가 상임이사로 임명이 되면서 저에게 행정관리를 부탁하게 된 겁니다. 제가 지금은 은퇴를 했지만 샘물교회에서 사무처장으로 재정관리 일도 했었거든요. 아마 이 경력 때문에 저에게 부탁을 한 것 같아요.”
 
김 장로는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라 믿고 순종하기로 했다.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도 김 장로의 눈시울을 붉히는 잊지 못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김우정 원장님을 볼 때면 인간적으로 존경심이 납니다. 분당에서 병원을 크게 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병원 문을 닫았어요. 멀쩡하게 잘 되는 병원을 문 닫다니, 어떻게 된 일이지? 알아보니까 캄보디아로 갔대요. 캄보디아는 왜? 선교하러 갔다는 거예요. 사모님은? 같이 갔대요. 캄보디아로 단기선교 다녀 와서 결정한 일이래요.
 
캄보디아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아니, 나이도 50대 한창 젊은 분이 그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 다들 내려놓지 못해서 선교를 못하고 있는데, 그 자체가 감동인 거예요. 아, 세상에 이런 사람도 다 있구나. 보면 볼수록 재목인거야. 그런데 나중에 만나 보니 글쎄 내 친구 동생이지 뭡니까.”

▲ 캄보디아 어린이의 해맑은 눈동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 크리스찬리뷰

사역하면서 어려움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김우정 원장 얘기를 다시 꺼냈다.
 
“사실 저는 돈 때문에 늘 걱정이거든요. 돈이 있어야 약도 사고 병원 운영이 되잖아요. 그래서 걱정스러워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장로님, 돈이 없어 진료를 중단해본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그래요. 현실을 보면 걱정 안하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런데 이 분은 걱정을 안해요. 늘 하는 말이 ‘걱정 마세요’입니다. 다들 걱정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분 언론에 본인이 나오는 것도 굉장히 꺼려해요. 자기를 안 내세우는 거지요. 지난번에 한 인터넷신문 편집장하고 인터뷰를 한 것이 신문에 났는데 이 분이 ‘왜 거기에 냈느냐’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참고적인 말만 간단히 했는데 나온 걸 어떻게 하냐고 하니까 ‘그런 데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러더라고요.”
 
연신 흥분하여 얘기를 하는 김 장로의 잠긴 목소리는 기자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김 장로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33년간 근무하면서 전산화를 주도한 장본인. 이후 경기대학 교수로 은퇴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사람 죽이는 무기를 만드는 곳입니다. 어떻게 하면 경제적으로 단 시간 내에 사람을 많이 죽이느냐 연구하는 곳이거든요. 이제는 ‘사람 살리는 일’에 참여를 하고 싶습니다.”
 
김 장로는 사람이 계획을 세우더라도 그 일을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 헤브론병원 안경점에서 안경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이무익 장로.     © 크리스찬리뷰

희미하던 눈 뜨고 비전의 삶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눈에는 빛을, 마음에는 복음을 전해주고 있는 이무익 선교사(62).
 
이 선교사는 결코 캄보디아에서 사역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딱히 마음에 새길 만큼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헤브론병원은 그에게 낯설고 아득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헤브론병원에 거처를 정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가벼이 말한다. 삶은 곧잘 예기치 못한 곳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그는 예기치 못한 헤브론병원을 향해 이야기한다.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예비해두신 사역의 현장이라고.
 
“캄보디아는 더운 날씨와 강한 자외선 등의 원인 등으로 백내장 환자가 많아요. 또한 말라리아나 장티푸스 등 전염병으로 편두통이 심한 편이라 시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때에 치료하지 못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시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 선교사는 “이곳 의료 현실들, 시스템이나 장비, 인적자원들이 없다보니까 손을 쓸 수 없는 환자들이 너무 많다”며 “그런 환자들을 볼 땐 의기소침이 되고 내내 마음이 무겁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보람도 많다.

▲ 이무익·이호석 선교사 부부가 캄보디아 직원들과 헤브론 스튜디오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 크리스찬리뷰

“부부가 왔는데 남자 분은 두 눈이 다 안보여요. 여자 분은 한쪽 눈이 거의 빛만 보일정도고요. 남자 분이 이틀에 걸쳐서 수술을 했어요. 이분이 나중에 눈이 다 보이니까 울면서 하는 말이 나 이제부터 교회에 나가겠다고 그래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에요. 그럴 땐 감동을 합니다. 아, 저 사람이 스스로 교회를 나가겠다고 그러네. 우리가 더 은혜가 되는 거지요.
 
마을 사역을 나가보면 평생 안경이 뭔지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아요. 눈이 잘 안 보이는데도 그냥 사는 거예요. 안경을 해줘도 이미 시신경이 죽어 잘 안보일 때는 안타깝고 서글플 때가 참 많습니다.”
 
이 선교사는 직원 ‘쩨인’을 소개했다.
 
“저희와 함께 일을 시작한지 2년이 된 믿음이 좋은 아가씨에요. 7년 만에 성경통독을 7번이나 했어요. 원래 불교신자였는데 며칠 전 세례를 받았어요. 그런데 교회 친구들이 자기를 위해서 기도를 하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너를 무척 사랑해서 선교사님을 만나게 해준 거다’ 그런 말을 했대요. 내가 꿈이 뭐냐고 물었어요. 돈 벌어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거래요. 여기 캄보디아 아이들은 부모님께 효도를 잘해요.

▲ 시골 마을 이동진료를 나가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검안하는 이무익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그런데 어느 날 90이 넘은 고승이 안경검사를 하러 왔어요. 수행하는 여승도 있고 아주 유명한 사람이래요. 캄보디아 사람들은 그 고승만 보면 다 머리가 땅에 달 정도로 절을 해요. 쩨인에게 검사를 하라고 맡겼지요. 그때 감동을 했어요. 옛날 같으면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했는데 이번에는 꼿꼿한 자세로 검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참 흐뭇했어요. 나의 열매지요.”
 
그가 헤브론병원을 사역 현장으로 삼은 사연이 궁금해졌다.
 
이 선교사는 임상병리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경희대병원에 근무하면서 안과와 검안사를 공부했다. 이후 안경점을 차렸으나 IMF로 문을 닫게 되면서 199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안과병원을 거쳐 월마트에서 근무했죠. 좋았습니다. 하루 매출 7천500불을 올릴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월마트에서 신기록을 세운 거죠. 사실 콘택트렌즈, 안경, 검안 이 세 가지를 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나의 자부심이죠. 벌써 30년이 넘게 검안사로 일을 하고 있네요.”
 
이 선교사는 “캄보디아 헤브론병원에서 봉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단기의료선교를 여러 나라로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안경선교를 하시는 선교사를 만났어요. 그분이 안경선교를 많이 하는데 자기는 비전문가이니까 안경 나눠주는 일밖에 할 수 없으니 도와달라는 거예요. 일주일만 선교하고 오자. 비전문가가 안경선교를 한다는데 어떻게 할까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흔쾌히 승낙을 했죠. 보니까 선교지가 캄보디아에요.
 
2010년 10월, 30시간을 걸려 도착을 했는데 멀미로 아무것도 못 먹고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런 후 4-5개 마을을 돌아가며 사역을 했지요. 모든 사역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 어떤 분이 헤브론병원에 안과가 생겼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여기까지 왔는데 가보자고 그랬죠. 선교사님은 가볼 것 없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가보고 싶어지는 거예요. 와보니까 건물하나만 서있고 벌판이었어요. 원장님은 안 계시고 안과가 있다 해서 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관련기기 두 개 정도만 있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이제 준비하는 중이라고 그래요. 구경하고 난 후 바로 미국으로 떠났죠.”
 
이 선교사는 문제는 그 다음날 일어났다고 했다.
 
“무엇을 먹기만 하면 계속 설사가 나는 거예요. 주위에서는 보통 선교지 갔다 오면 2-3주는 설사를 한대요. 그때 생각난 것이 고아원이었어요. 고아원에 가서 밥을 먹는데 파리가 들락날락하며 음식에 붙어있는데 아이들이 보고 있잖아요. 안 먹을 수도 없고 파리를 쫓으며 음식을 먹었어요. 그래서 그런가? 했는데 약을 사먹어도 한 달간 지속이 됐어요.
 
음식을 먹으면 토하고 급기야 몸무게가 10kg이나 빠졌어요. 꿀을 먹어봤는데 꿀이 써요. 정말 죽을 병에 걸렸나보다. 믿을 것은 하나님밖에 없으니까 기도를 했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병원에 갔어요. 검사를 했더니 큰 병원으로 가라는 거예요.”
 
병원에서 그는 청천벽력과 같은 식도암 진단을 받았다.
 
“식도하고 위 사이에 혹이 생겼다는 거예요. 암으로 의심된다. 암이니까 그렇지.  집 사람은 울고 야단이에요. 울지 말라.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간다. 기도하면서 준비했어요. 약도 안 먹고요.”
 
지난날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동안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도전해온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디서부터 회개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쏟으며 기도했다. 전 인생을 회개하며 기도했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김밥 한 줄을 꼭꼭 씹어 먹어봤다. 김밥이 맛있게 넘어갔다. 절대자의 개입이었다. 하나님께서 고통의 현장에까지 찾아오신 것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우리교회에서 단기선교를 간다고 그래요. 함께 가기로 했어요. 그랬더니 주위에서 멀쩡한 사람도 병들어 오는데 왜 가느냐고 난리에요.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가문의 영광이고 전 갑니다, 그랬죠. 코스타리카를 다녀왔어요. 그런데 건강이 더 좋아진 거예요. 밥도 잘 먹고 체중도 올라가고요.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보니 의사 선생님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혹이 없어졌대요. 전이도 안 되고요.”
 
이후 그의 삶은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변했다. 덤으로 얻은 인생을 선교사로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선교를 준비하면서 중남미 도미니카를 위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요. 2014년 8월 헤브론병원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안경부가 세워졌는데 여기에 헌신할 사역자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뜻밖이었죠. 곰곰이 생각하니까 2010년 10월 헤브론병원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기도한 것이 떠오르는 거예요. ‘하나님, 이곳에 안경부나 안과가 세워지면 여기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아, 내가 그런 기도를 했었구나. 아주 선명했어요. 그렇게 서원했었구나. 4년 동안 아파서 관심도 안 가졌었는데요.”
 
시절에 따라 우로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리라고, 그는 돌이켜 생각한다. 지금의 자리 역시 세월의 풍상을 두루 겪어 모난 부분이 깎인 후에야 허락하신 사역이다. 의욕과 혈기만으로 감내할 수 없는 문제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무익 선교사가 아내 이호석 선교사와 함께 캄보디아에 온 것은 2015년 2월이다. 이호석 선교사는 회계를 담당하며 주일학교 어린이 사역도 돕고 있다. 그러나 선교지 사역은 쉽지 않았다.
 
“마귀가 엄청나게 역사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정리하고 기도를 하고 들어왔는데 병원 내 숙소에 있지 못하고 밖에서 있어야 했어요. 물론 밖에서 일 년을 살고 병원 내 숙소로 들어왔는데 그땐 좀 섭섭했죠. 뚝뚝이를 타고 운전하는 사람과 가격을 흥정하면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출퇴근을 해야 하는데 힘이 들더라고요.
 
한 번은 아침에 연합예배를 드리러 병원으로 오는데 길이 막혀버렸어요. 뚝뚝이가 안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가자. 못 간다. 그럼 돈은 깎아준다. 그랬더니 난리를 치는 거예요. 뚝뚝이를 탈 땐 값을 흥정해서 타거든요. 그럼 가자, 못 간다. 말도 제대로 안 통하지요. 결국 포기하고 걸어오는데 한심한 거예요.
 
그 날 예배가 끝날 때 도착했어요. 나는 잘해 보려고 하는데 환경이 안 따라주는 거예요. 처음엔 사람과의 관계도 힘들었어요. 하나님이 훈련을 시키신 거죠.”
 
이 선교사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달았다. 그는 어린이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다.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한 후에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 이동 진료를 나가 안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검안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사실 여기까지 온 것이 아내의 협력과 기도 덕분입니다. 아프기 전 까지는 제 말이 곧 법이었어요. 무엇을 결정할 때도 상의 없이 혼자 결정했고요. 결혼해서 37년 동안 이사를 30번 했어요. 수술은 10번 이상 될 겁니다. 내가 교만하니까 하나님이 치신 거죠. 나중에 깨달았어요. 그러니 아내가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지금은 아내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이 선교사는 껄껄 웃었다.
 
고린도후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자신의 육체적 가시를 자만하지 않게 하려시는 하나님의 뜻이었노라던,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던 사도바울의 고백을.
 
이곳에 올 때 자녀들의 반대는 없었느냐고 물었다. 
 
“처음엔 반대했죠. 우리가 떠날 땐 대학 졸업반이었거든요. 우리 딸애의 이름이 여경인데요. 잠언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라는 성경구절이 나오잖아요. 여기에서 여경을 따서 이름을 졌어요. 지금은 미국 존스 흡긴스대학교 법대를 졸업해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죠.”
 
어쩌면 당연했다. 곧 졸업을 앞에 두고 훌쩍 먼 길을 떠난다니 서운할 법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이다.
 
이 선교사는 “아직 누구일지는 모르지만, 캄보디아 복음화를 위해 뒤따라올 사람들을 생각하면 길을 잘 다져놔야 한다는 책임감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 이무익 선교사 부부가 월요 직원예배에서 캄보디아 직원들과 특별찬양을 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바람은 사역지를 넓혀가는 것인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급한 과욕은 부리 않으려한다. 언제까지라는 기한이 없기에, 성과에 집착하는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그 욕심에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고집이 깊이 스며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선교사는 이를 “차근차근, 천천히, 장기간의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헤브론메디컬센터라는 베이스 기지가 있고, 한국의 실명예방재단의 지원이 있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허락하신 기술이 함께하여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쓰임 받게 하심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이러한 일들이 가능한 것은 동역자들의 간절한 사랑과 후원 덕분입니다. 이동진료를 나가면 함께 간 말씀사역자는 말씀을 전하고, 어린이 사역 스텝들은 아이들에게 찬양과 게임을 하며 복음을 전하고, 다른 의료진들과 저희는 주민들의 건강의 필요를 도와드립니다.
 
제가 단독으로 일을 한다면 언어도 서툰 저희가 어떻게 복음을 직접 전할 수 있겠습니까. 헤브론 안경부가 없다면 어디에서 안경 제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재정 지원이 약한 저희가 어떻게 자동차를 준비하고 이동진료를 다닐 수 있겠습니까. 거대한 톱니바퀴의 작은 한 부분처럼, 조그만 그러나 빠지면 안 되는 중요한 부분을 감당하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비록 나의 하는 일이 작아 보여도 헤브론메디컬센터가 하고 있는 일들과 영향력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합력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실지 생각해 봅니다.”
 
기자는 이 말씀이 미치도록 좋았다.
 
선교지에서 사는 법, 오직 믿음과 합력이다.
 
누구에게나 한번 주어진 인생,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재능을 의료선교를 통해 인생의 2모작 3모작하는 이무익 선교사의 발걸음이 아름답기만 하다. 〠 <계속>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