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교리의 중요성과 성경해석의 오용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8/04/26 [11:24]
왜 우리는 성경 교리를 강조해야 하는가?

교회 역사를 살펴볼 때 각 시대마다 이단들이 끊임없이 출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이단들은 믿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미혹케 하고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종류의 이단들이 난무하고 있고 그들의 사이비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믿는 사람들을 혼란시킬 뿐만 아니라, 가정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많은 신자들이 왜 이러한 이단 사설들과 잘못된 사이비 가르침에 미혹되고 빠져들게 되는가? 그것은 이단에 미혹되는 신자들에게 바른 교리(doctrine)와 바른 성경해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교회 안에는 “신앙이면 되지 교리가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하며 신학과 교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1970-80년대에도 이단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는 교회마다, 교단별 학습, 세례 문답서가 있었고, 대부분의 장로교회는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서 등으로 교리 공부들을 철저히 시키는 바람에 이단들이 교회에 발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198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교회에 소위 “QT”와 ‘경배와 찬양’ 바람이 불면서 퀘퀘묵은 교리보다는 삶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러한 인간의 정서를 중요시하는 신앙태도는 점점 신앙을 감정과 정서 중심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QT’와 ‘경배와 찬양’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필자도 QT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를 맛볼 수 있었고 신앙의 성숙 또한 어느 정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배와 찬양은 어떠한가? 많은 경우 젊은이들을 교회의 예배로 이끌고 찬양 가운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데 많은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바른 교리가 없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이러한 신앙의 정서적 부딪힘은 사람들을 감정중심의 신앙으로 이끌고 신앙의 견고한 토대 위에 세워놓는데 한계가 있는 것이다.
 
사실 철저한 신앙은 확실한 지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자신이 믿는 바를 정확하게 진술하고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적 정서에서는 오히려 신앙적인 질문을 하면 의심이 많고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인식이 박혀 있는데 그것은 바른 태도라 할 수 없다.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서 그의 몸을 만져보기 전까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요 20:20-26)는 도마의 태도는 ‘의심많은 도마’, ‘회의적인 도마’등 믿음이 부족한 자의 표상으로 한국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평가되어져 왔다.
 
그러나 그의 의심을 예수는 결코 꾸짖거나 나무란 적이 없다. 오히려 요한복음 기자는 도마를 다양한 믿음을 소유한 제자들 중 한 사람의 예로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마는 솔직하고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믿음은 철저한 신앙적인 고민과 질문을 통해서 확립되어져 왔다.
 
사실 신앙은 “무조건 믿나이다”식의 맹목적인것이 아니라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처럼(행 17:11) 성경을 간절한 마음으로 대하고 날마다 깊이 상고하는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태도가 더 바람직 하다고 볼 수 있다.
 
성경 해석의 오용과 성경에 대해 기계적인 접근 태도
 
우리는 흔히 신앙을 영위하거나, 신학훈련을 하는데 있어 성경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고 그 뜻이 온전히 다 이해되면 좋겠냐마는 그렇지 않은데 어려움이 있다. 교회에서는 ‘성경’을 강조하지만 성경을 그냥 읽는다고 믿음이 저절로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먼저 이해하고 설명해줄 도구와 설교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목회자들이라고 해서 모든 성경 의 내용을 다 알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성경을 바로 해석해 주기 위한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는 끊임없는 연구와 질문들을 해야한다.
 
성경은 성경으로 푼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 되지도 않은 내용을 마구잡이식으로 가르치거나 자기의 주관적 해석을 성도들에게 아무렇게도 쏟아내서도 안된다. 현대 한국 교회의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성경을 왜곡해서 전달함으로 생긴 병폐라 할 수 있다. 실제적으로 한국교회에서는 문맥에 맞지않는 해석을 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전에 한 기도원을 갔었던 경험이 있다. 거기에서 한 목사님이 이사야 58장 6-8절의 본문을 가지고 ‘금식의 효능’이라는 주제의 설교를 했는데 설교를 듣다가 성경의 내용과 전혀 다른 설교를 하는 것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하는데 설교의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금식기도를 기뻐하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기도를 하면 본인의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응답을 받는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가르치는 것이 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자세히 읽고, 국어만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엉터리 설교인가를 간단히 알 수 있다. 
 
오히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식’을 하지말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그들의 종교적 위선으로 ‘금식’을 하면서 오히려 서로 다투고, 온갖 오락을 향유하며, 약한자들을 때리고 괴롭히는 그러한 행위에 하나님께서 구역질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행위가 아니라, 너희가 압제하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어려움을 도와주며, 그들을 옭아매고 있는 잘못된 법제들을 풀어주며, 너희의 종들을 놓아주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이 라는 말씀이다.
 
금식을 아무리 해도 사회적으로 정의를 행하지 않거나 인권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종교적인 외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 다.
 
또 하나 우리가 무심코 오해하는 말씀 중의 하나인데, 고린도전서 15:31의 ‘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많은 목사들은 성도들에게 “여러분도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의 육의 성정, 육체의 정욕을 죽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원래 이 본문의 의미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나는 날마다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물론 우리 자신의 육욕을 죽여야 한다는 말은 옳지만 본문의 정확한 의미와는 상관없이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고 고민하지도 않고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억지로 끌어 대면 안될 것이다.
 
이외에도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욥 8:7)는 말씀은 사업을 새로 시작하거나, 이사를 하거나,  교회를 새로 시작할 때 선물로 사가지고 가는 액자의 단골 말씀이다. 이것 역시 욥의 친구 빌닷이 욥을 해하기 위해 와서 전해준 말이다.  이 성경글귀는 성경에서 나왔지만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욕망을 달래는데 성경을 왜곡하게 하는 대표적인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성경말씀이 오용되거나 잘못 해석되어 성도들의 신앙에 해가 되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무조건 많이 읽는다고 기계적으로 신앙이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또 성경을 필사하면 저절로 믿음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른 태도는 아닐 수 있다.
 
물론 성경을 읽고 필사하다 보면 성경말씀에 익숙하게 되니까 유익이 올 수 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성경을 읽고 필사한다고 저절로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주경식|호주비전국제 대학 Director, 전 시드니신학대학, 웨슬리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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