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서 사는 법, 오직 믿음과 합력이다

캄보디아 헤브론메디컬센터, 눈물의 찬양 (마지막회)

글|김명동,사진|권순형 | 입력 : 2018/05/28 [14:50]
▲ 캄보디아 국립기술대학교 김성철 총장. 2008년 2백 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3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 캄보디아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자리 잡았다.     © 크리스찬리뷰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저 사람 좋게 웃고 마는 얼굴. 그 얼굴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지낸 시간으로 온통 훈장 같은 주름이 달려있다. 하지만 웃음만은 함박웃음이다. 순박한 얼굴 어디에도 세상을 거스르는 억척스러움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헤브론병원 개원 10주년 기념행사장에서 뜻밖의 만남을 허락해 주셨다. 캄보디아 국립기술대학 김성철 총장(75)이다. 김 총장은 헤브론병원이 세워졌을 때부터 함께 기도해 온 하나님의 동역자다.
 
“옆 동네에 헤브론병원이 세워진다고 해서 관심을 갖고 기도하면서 지켜 보다가 김우정 원장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죠. 그런데 보니까 김우정 원장은 고등학교 후배이고 원장님의 장인 되시는 박종렬 목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저와 함께 교수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되더라고요. 그런 후 가끔 모여서 음식도 나누고 찬양도 하고 그렇게 지내오고 있습니다. 김 원장이 음악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제 아내도 음악을 전공했고요. 세상 참 좁습니다. 허허.”
 
김 총장은 “10년 전 조그마한 건물 앞에서 헤브론병원 개원예배를 드릴 때 축하 메시지를 전한 것이 엊그제 같다”며 “헤브론병원이 캄보디아에서 국민적 사랑을 받으며 10년간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김우정 원장님을 비롯한 의료진들과 선교사들이 환자를 돌보며 순수하게 헌신한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 헤브론병원 개원 10주년 기념식에서 (사)위드 헤브론 이사장 김해수 목사로부터 장기근속 표창을 받는 눈 리닌 전도사(왼쪽).     © 크리스찬리뷰


김 총장은 헤브론교회 리닌 전도사(37) 이야기도 꺼냈다. 
 
“이번 헤브론병원 10주년 행사 때 리닌 전도사가 감사패를 받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저희 학교 2년제 전기학과를 졸업했거든요. 제가 영어를 가르치고 제 자동차를 운전했었는데 구김살 없는 청년이라 신학을 권유했죠.
 

▲ 캄보디아 국립기술대학교 교사 전경. ©NPIC 


리닌이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한 후 김우정 원장에게 소개했어요. 그런 후 헤브론교회가 세워지면서 전도사로 헌신해왔죠. 리닌 전도사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큰 격려가 됩니다. 리닌 전도사는 올해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캄보디아 국립기술대학교 김성철 총장
 
헤브론병원에서 차로 20분쯤 달려 도착한 ‘캄보디아 국립기술대학(National Polytechnic Institute of Cambodia). 한국의 카이스트와 같은 곳으로 캄보디아에서 최고의 명문대학이다. 대형 아치형 교문을 들어서면 12만여 평방미터의 붉은 벽돌의 캠퍼스가 등장한다. 학교 축구장에는 유일하게 잔디가 깔려있다.
 
캄보디아 학생들이 선망하는 이 대학을 움직이는 것은 김성철 총장을 비롯한 한국인 교수들이다. 한국의 교육프로그램을 도입해 커리큘럼을 편성하고, 학사운영 계획을 짜 학생들을 지도한다. 해외 교육수출 1호인 셈이다.
 
“3천여 명의 학생들이 농업국인 캄보디아를 산업국가로 변모시키기 위해 오늘도 향학의 불을 태우고 있습니다.”
 
이 학교는 운영이 독특하다. 총장이 두 명이다. 김 총장 외에 캄보디아인 총장(피어린)이 있다. 김 총장은 외국인 교수 인사권과 교육 콘텐트 지원, 교수법 개발 등 대학운영의 핵심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김 총장은 “학교의 급성장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동반 성장했다”며 “이러한 기여에는 교수들의 헌신과 노력이 컸다”고 말했다. 교수들은 열정과 헌신으로 학생들을 사심 없이 대했고 전문지식을 쏟아놓았다. 이러한 모습은 학생들에게 전달돼 한국인 교수를 신뢰하게 만들었다.
 
김 총장도 그런 교수 중 한 명. 교수진 200여 명 가운데 20명인 한국인 교수들은 캄보디아 정부로부터 한 푼도 받지 않는다. 모두 자원봉사자다. 은퇴한 교수나 안식년을 받은 현직 교수가 자원봉사 방식으로 이곳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는 교수를 뽑을 때 많은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신앙심을 먼저 봅니다. 한국의 대학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대학은 무급으로 이루어집니다. 본인이 살집도 알아서 구해야 하고, 자녀들도 알아서 키워야 합니다. 다만 1년 장기체류비자만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 캄보디아 국립기술대학교 수업 장면들. ©NPIC  


국립기술대학에는 14개의 학과가 있다. 전자, 전기, 자동차, 요리, 기계, 컴퓨터, 관광, 토목, IT, 산업설비 등. 전 과정이 영어로 진행된다.
 
“처음에는 호텔경영, 조리, 제과 제빵 등 11개 학과로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어학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언어학과가 생겼고요.”
 
김 총장은 “현장실습 위주로 짜인 맞춤 취업 프로그램은 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며 “졸업생 95%가 취직돼 현지 언론에 크게 보도가 났다”고 설명했다. 김 총장은 “해외파견근로자를 위한 단기기술 교육과정도 운영한다. 한국으로 나가는 근로자들에게는 어학, 문화교육도 해준다”고 덧붙였다.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으로 가려는 캄보디아인이 많아졌기 때문.
 
“우리학교 교수들이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쳐서 전주대학이나 순천향대학, 울산대학, 관동대학 등 기독교대학으로 유학을 보냅니다. 이곳에서 2년 배우고 한국에서 2년 배우고 하는 걸로 공동학위를 줍니다.
 
그중에 지난 2월에 박사가 2명 나왔어요. 한 사람은 지금 전북대학교 정교수로 있습니다. 동남아 학생이 한국에서 국립대학 정교수가 된 것은 처음일 겁니다. 한 학생은 돌아와서 프놈펜왕립대학교 교수로 있고요. 석사는 많아요.”

▲ 전주대 고건 총장 동부인 일행이 해외 공동 운영대학인 캄보디아국립대학 방문했다. (2012. 3.9) ©전주대


대학 1년 등록금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1년에 5백 불인데 거저지요. 지금 학교 기숙사에 800여 명이 있는데 기숙사비가 한 달에 10불입니다. 식사는 본인이 해결하여야 되고요. 주로 지방학생들이지요.”
 
재정 507달러로 개교

 
국립기술대는 2002년 한국정부가 총사업비 3천470만 달러 가운데 2천770만 달러를 제공하면서 태동하게 됐다. 2005년 한국기업이 건물을 완공하고, 같은 해 5월 16일 훈센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개교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캄보디아 훈센 총리가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을 때 직업훈련원 하나 세워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한국 정부가 아예 기술대학을 세워주겠다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훈센 총리는 직업훈련소쯤 생각했는데 그게 3천400만 달러 프로젝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당시 캄보디아 정부 1년 총예산이 3억 달러가 안 되었을 때니까 엄청 큰 프로젝트였지요.”
 
김 총장은 “하드웨어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제공했다”고 말했다. 캄보디아 정부가 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교수진까지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훈센 총리가 처음에 자그마한 직업훈련원쯤으로 생각하고 한국정부에 지원요청을 했는데 기술대학으로 세워지니까 운영을 감당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캄보디아 정부가 한국의 몇몇 대학교로 지원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원 요청을 받은 한국의 대학교에서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철회되기 전, 마지막으로 제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전주대학교에 지원 요청을 해왔어요. 전주대학교는 기독교대학으로서 기회라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총장 이하 교직원들이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누가 갈 거냐. 교수들 중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했어요. 모두 한국에서 생활을 하려 하지 어려운 나라에 가서 생활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학교에서 저한테 ‘교수님, 동남아를 전공하신 분인데 경험도 많으시고 학교에서도 국제협력 과목을 오랫동안 담당하셨으니까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하고 저에게 물어 보더라고요.
 
한국정부의 원조를 받아 시설이 훌륭한 학교를 짓고 있는데, 제대로 운영할 사람이 없어 걱정이라는 얘기를 듣고 이곳 현장을 방문했지요. 그런 후 아내와 한 번 더 방문하면서 결정을 했어요. ‘우리가 와서 돕도록 합시다. 여기 와서 봉사도 하고 선교도 하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기쁘게 작은 씨앗을 뿌리게 되었습니다.”
 
김 총장과 그의 아내는 선교의 열정만을 가지고 캄보디아에 들어온 겁 없는 노인네였다.  김 총장이 아내 엄경숙(74. 교양학부 학장) 교수와 캄보디아에 온 것은 2004년 11월.
 
“와보니까 그 넓은 땅에 건물만 덩그러니 있더라고요. 건물만 세워놓고 2005년 5월 16일 준공식 겸 개교식을 한 거죠. 그리고 그해 10월, 1학년을 처음 모집했는데 130여 명이 왔어요.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학교였잖아요. 사실 이 나라 아이들은 공학계열 학문이 뭔지도 몰랐어요. 문과를 우대하지 이과 계통은 의사 말고는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엔 학생들이 안 왔어요. 시골학생들이 태반이었죠. 컴퓨터학과 학생들만 보더라도 30명 중에 25명이 시골에서 온 아이들이였어요. 컴퓨터가 뭔지 실물도 못 본 아이들이었으니까요. 어떻게 알고 컴퓨터를 배우려고 하느냐고 하니까 사진에서 봤대요.”
 
김 총장은 겸연쩍게 웃으면서 초창기 학교운영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했다.
 
“학교가 개교하는 날, 훈센 총리가 봉투를 하나 줬어요. 열어보니까 500달러가 들어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재무장관도 봉투를 내밀기에 보니까 7달러가 들어있었고요. 그러니까 학교운영을 507달러로 시작한 거죠.
 
현지인 교수들이 월급을 못주니까 데모를 했어요. 당시 초등학교 선생 월급이 45달러였으니까 교수들은 최소 100불은 줘야 하는데 정부에서는 알아서 하라는 거예요. 현지인 총장은 자기 부인한테 돈 구하러 오라고 하고 총장 부인은 저희만 보고 있는 거예요. 안 되겠더라고요. 우리 선교사들이 모여 기도하고 장학재단을 만들고 후원금을 모아 학교를 운영해야만 했습니다.”
 
“아니 명색이 국립대학인데 한 푼도 정부지원이 없었다니요.”
 
“처음엔 그랬습니다. 하기야 당시 정부예산이 3억 달러도 안 되었을 때니까요. 다행히 전주대학교에서 가끔 이곳을 방문할 때면 후원금을 내놓고 가는데 그게 큰 힘이 되었어요.”
 
“지금도 정부지원이 없나요?”
 
“생색낼 정도죠.”
 
“그럼 어떻게 학교운영을 하고 있습니까?”
 
“학생들의 등록금이 얼마 안돼도 학생수가 3천여 명이나 되니까 이것이 주 수입원이 되고요. 또 원래 캄보디아정부가 산업연수생 명목으로 한국으로 많이 인력 송출을 했어요. 그런데 한국으로 간 캄보디아인들이 비리를 저질러서 송출이 끊어졌죠.
 
이런 사실을 알고 한국 정부 요인들이나 국회의원들이 캄보디아를 방문할 때면 꼭 인력 송출 문제를 거론하며 재고해 달라고 설득을 했어요. 굽실거리고 힘들었죠. 그 결과 2007년 1,050명이 다시 한국으로 인력 송출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한국으로 가는 산업 연수생들은 송출 자격시험을 봐야 하거든요. 아무나 안 보내요. 이때 저희 학교에서 실습을 시키면서 송출 자격 시험을 보도록 정부에서 지정을 해줬어요. 이것이 짭짤한 재정 수입원이 됐죠. 자격증이 있어야 한국으로 갈 수 있거든요. 요즈음은 1년에 8천 명에서 1만 명 정도가 한국으로 가는데 자격시험을 보려고 우리학교에서 훈련받고 시험 치르는 사람들은 보통 3만에서 5만 명이 됩니다.
 
그런데요. 한국으로 인력송출이 자꾸 늘어나는데 그 이유가 있어요. 베트남 사람들은 일 잘하고 머리는 좋은데 조직을 잘해서 폐업이나 데모를 잘 한대요. 몽골이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힘이 좋고 일을 잘 하는데 술을 잘 먹고 결근이 많대요. 특히 월요일 날에요. 반면에 캄보디아사람들은 양순해서 한국 정부에서 인력 정원을 늘렸다고 그래요.”
 
“송출 자격 시험에서 들어오는 수입은 정부에서 감사를 하지요?”
 
“정부에서 지출한 재정 외엔 일체 감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들어오는 수입은 일체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알아서 하라는 겁니다. 정부에서 제대로 보조를 못해주니까요.”
 
기자가 큰 소리로 웃자 그도 따라 웃었다.
 
김 총장은 “이제 학교가 재정자립을 했다”며 “교육과 기자재의 질이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 김성철 총장과 부인 엄경숙 교수(교양학부 학장)     © 크리스찬리뷰


“우리학교는 초창기에 이미 실습기자재로 1천200만 달러 분이 들어왔고요. 컴퓨터만 해도 550대 정도 들어와 있었어요. 당시 이 나라 왕립대학 컴퓨터학과의 경우 컴퓨터가 20-30대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다른 학교에서는 상상도 못했어요. 사실 당시 한국의 사립대학에서조차도 실험실습기자재가 천 만 달러 되는 학교는 없었습니다.”
 
“장학금 후원회도 있는 것 같은데요.”
 
“그래요. 우리 집 사람이 후원 회장인데 참 그동안 고생 많이 했어요. 모금이라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캄보디아 사람들은 받기만 좋아하지 잘사는 사람도 기부라는 걸 몰라요. 그러니까 장학금후원자들은 주로 한국, 미국, 영국 등 해외 후원자들입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현지인인데 외무 분과위원장이에요. TV방송국도 소유한 어마어마한 부자에요. 장학금 좀 내라고 하니까 얼굴색이 변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가난한지 아느냐는 거예요. 그때 느꼈어요. 이 나라 사람들은 돕지를 않는구나.”
 
선교센터 운영, 짬족마을 최초교회 개척
 
2008년 2백여 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3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국립기술대학은 캄보디아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한국이 아닌 캄보디아 정부가 내린 평가여서 더욱 의미가 있다. 캄보디아 정부는 국립기술대학이 캄보디아 고급인력 양성의 산실로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한국 같으면 매년 학위증 수여식을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게 참 힘들어요. 저희 학교는 12년 만에 한꺼번에 학위를 줬어요. 국립대학이기 때문에 총리가 와서 학위를 줘야하는데 그동안은 도로사정이 나빠서 총리가 못 온 겁니다.  이번에는 총리가 바빠서 못 오고 총리 아들이 와서 대신 학위증 수여를 했습니다.”

▲ 캄보디아 국립기술대학교 졸업식 정경 ©NPIC  


김 총장은 껄껄 웃었다.
 
그는 “학생들이 변화하는 모습에 뿌듯함을 느낀다”며 “무기력해 보였던 학생들이 이제는 나라를 생각하고 정의롭게 살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김 총장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학생들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학생 사이엔 ‘더불어 산다’는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김 총장은 “학생들이 자기 자신밖에 몰랐다”며 “하지만 학교생활을 통해 더불어 사는 법을 익히면서 캄보디아의 국가자산이 되고 있다. 그런 모습이 가장 보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복음으로 학생들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김 총장 부부에게는 또 다른 꿈이 있다. 선교센터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새로운 꿈을 심어주는 일이다.
 
“학교 뒤에 4년 전에 전주대학교에서 선교센터를 지었는데 그동안 사용도 안하고 관리도 안 해서 문을 닫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풀에 뒤덮여 엉망이 되었어요. 저희 부부가 지켜보다가 안 되겠다싶어 깨끗이 청소하고 수리해서 2년 전부터 저희들이 맡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주일날에는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주일학생이 80여 명이 됩니다. 주일설교는 제가 하고 있고요. 그리고 평일에는 인근에 있는 봉수초등학교와 MOU를 체결하고 영어와 컴퓨터를 가르치고 있는데 학생이 60여 명이 됩니다. 이외에 태권도, 공작, 음악, 캄보디아어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글을 모르는 캄보디아인들이 많거든요.”

▲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기독교 영화를 감상하고 있다. ©김성철    


김 총장의 신앙고백은 이어진다.
 
“하루는 모르는 캄보디아 사람이 찾아와 대뜸 교회를 지어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우리를 알고 찾아왔겠죠. 자기는 8년간 경찰 마약단속반이었다면서 무슬림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했대요.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이 무슬림 마을인데 교회가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3년 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자동차로 6시간 걸리는 ‘짬족’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 모스크를 개조해 세운 ‘로힘교회’ 헌당 감사예배 기념촬영. 왼쪽 앞줄 첫 번째가 엄경숙 교수이며, 가운데가 김성철 총장이다. ©김성철  


바탐방 지역에 있는 짬족은 캄보디아의 소수민족으로 모두가 무슬림이에요. 가보니까 마을 한가운데 모스크(이슬람 예배당)가 덩그러니 있더라고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야한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 그곳에 교회를 세우게 됐습니다. 교회 이름은 ‘로힘교회’인데 ‘로힘’은 짬족 말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주일날 예배에 90여명이 모이는데 어린이들이 60명이 됩니다. 무슬림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지요. 하나님이 일을 자꾸 맡겨주시네요. 허허.”

들녘에 선 농부 같은 느낌
 
‘캄보디아의 카이스트’를 지향하는 김 총장은 ‘들녘에 선 농부’같다고 요즘의 느낌을 말한다.
 
“지금이 바로 씨앗이 뿌려지고 자라 꽃이 피어나는 순간이 아닌가 해서 감개무량합니다. 기쁘다기보다 역사적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더 커요.”
 
사실 김 총장은 이 학교의 출발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 보고, 또 맨 앞에서 이끈 사람이다. 총장으로 내정된 후 교수를 초빙하는 일부터 커리큘럼을 편성하고 학사운영계획을 짜고 장학재단을 만드는 일까지 그의 손이 안 거친 일이 없다.

▲ 캄보디아 현지법인 KB국민은행의 4호점 ‘떡뜰라 지점’ 개점식에 참석한 김우정 원장, 이우환 KB국민은행 글로벌사업본부장, 소반나락 캄보디아중앙은행 이사, 김성철 총장, 박용진 KB 캄보디아 은행장. ©KB국민은행    


“처음에는 그냥 벙벙했어요. 참 중요한 일이다, 라는 생각만 들고요. 우선 좋은 교수진과 재정을 확보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힘들었죠. 참으로 감사한 일은 아내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습니다. 더욱 감사한 일은 이 모든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캄보디아 정부의 간섭이 없었다는 겁니다. 행정적인 절차야 불가피하겠지만 전반적인 학교운영은 모두 저에게 일임해 주었어요.”
 
그가 가장 섭외하기 어려웠던 교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김 총장 자신과 아내 엄경숙 교수이다. 평생을 보장받은 거나 다름없는 전주대학 교수로서, 한창 제자들을 키우는 재미에 빠져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전북대에 정식으로 사표를 낼 때는 눈물도 나더라고 했다.
 
“전주대를 떠나게 되리라는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가르치는 일이 바로 나의 천직이고 더구나 20년을 전주대에 있었어요. 그리고 60이 넘은 나이에 옮긴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에요? 이 일을 맡고 보니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표를 딱 내니까 이제부터는 제2의 인생이 시작이구나 하는 것이 실감났습니다. 이전의 모든 경험과 지식을 총 집약해 한 번 도전해 보자는 결심이 서더군요.”
 
그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과 서울대학교대학원, 필리핀국립대학(동남아시아의 사회문화)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를 거쳐 전주대학교 법정학부 교수로 재직 중 20여 편의 동남아관계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 헤브론병원 개원 1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성철 총장(앞줄 왼쪽)     © 크리스찬리뷰

 

▲ 총장 집무실에서 김성철 총장과 부인 엄경숙 교수. ©문선연   

 
김 총장은 보통 새벽 5시쯤 일어나 경보와 같은 빠른 걸음으로 ‘조깅’을 한다. 한 시간쯤 조깅을 하면  온몸이 흠뻑 땀에 젖는다. 샤워와 세수가 끝나면 그날에 필요한 자료를 챙겨 정리를 하고 책을 잠깐씩 펼치기도 한다. 그런 후 그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아내’와 아침식사를 하고 함께 집을 나선다.
 
오후에는 주로 책을 읽고 저녁에는 운동으로 긴장을 풀고 때때로 기도회에 참석한다. 저녁식사 후에는 개 운동을 꼭 시키고 밤 8시쯤이면 반드시 잠자리에 든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집무실에는 여러 운동기구가 있다.
 
“매일 30kg 되는 역기를 30번 이상을 듭니다.”
 
“네에? 30kg의 역기를요?”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라고는 하지만 칠순 노인이지 않는가. 그는 기자에게 운동시범을 흔쾌히 보여줬다. 역기, 곤봉(야구방망이)체조, 다리 꺾기 등등.
 
“이곳에 오기 전 전주대학에 있을 때는 승마도 하고 평행봉도 했습니다. 허허.”
 
사실 김 총장은 전주대학 승마반을 키워낸 인물이다. 마장마술로 전국대회 3등을 차지했고, 아시안게임에도 참가했다. 전북승마협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전북대학에서 20년 동안 말 조련을 담당했다.
 
그의 취미는 색소폰 연주.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이다.
 
김 총장은 대단한 명성에 걸맞은 권위를 내세울 만도 했지만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태도와 소박하면서도 시원스러운 말투로 처음 만나 대화하는 사람 사이에 필연적으로 생기게 마련인 긴장을 녹이고 거리를 대번에 좁혀주었다.  
 
“언제까지 학교 일을 계속하실 겁니까?”
 
“글쎄요. 우리가 빠져 나간다면 누가 올 수 있을까? 하여튼 대학총장은 별정직이어서 은퇴가 없습니다. 건강이 허락되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죠.”
 
그는 “매일 창조적 긴장 속에 살게 되어 기쁘다”고 말한다.
 
캠퍼스 사역을 꿈꾸고 떠났던 캄보디아. 그곳에서 하나님은 선교센터의 꿈을 그에게 주셨고, 연단을 거치며 교회도 일구게 하셨다. 김 총장은 “캄보디아 아이들이 미래의 꿈을 말할 때 가장 인상에 남는다”며 “어린 사무엘들이 ‘하나님 없는 학문과 하나님 없는 삶’속에서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도록 눈물로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총장과 교수 출신의 아내, 두 사람은 평생 교육자로 살면서 최선을 다해 가르쳤고 끊임없이 전도했고 그 삶이 정말 좋았다. 옆에서 보니 알겠다. 이들 부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평이 나올 법하다는 걸.

헤브론병원 건물은 기도의 응답
대원건설 우청갑 대표

 
“이런 건축 현장은 처음입니다.”
 
병원 본관 건물 4층과 5층 증축공사를 맡아 일하고 있는 대원건설 우청갑(64) 대표의 말이다. 그는 헤브론병원건물을 지은 장본인.
 
“왜요?”
 
“이 병원건물이 지어졌다는 것은 정말 기적입니다. 연락을 받고 와서 보니까 공사비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건물을 지으라는 거예요. 그리고 100달러 생기면 100달러어치 짓고 중단하고, 1천 달러 생기면 1천 달러어치 짓다가 중단하고, 그러다 보니까 공사 인력을 철수시켰다가 다시 모으고 또 철수시키고. 그런데요, 인력을 철수시켰다가 다시 일하는 아이들을 모으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 2007년부터 헤브론병원 건축을 시작하며 지난 11년 동안 선교사 숙소, 간호대학 등 크고 작은 헤브론병원 건축을 담당해 오고 있는 대원건설 우청갑 대표.     © 크리스찬리뷰


여기 아이들은 일급으로 하루하루 생활을 해야 되거든요. 게다가 2007년 9월 착공을 했는데 10월 외환위기가 온 거예요. 그때 진짜 고생 많이 했어요. 온 스텝들이 매일 모여 함께 통성기도를 했는데 저도 줄곧 건축현장을 지키면서 평생에 이처럼 많이 기도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구슬 같은 눈물을 흘렸다.
 
“ 이 건물은 기도의 응답으로 지어졌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역사하셨어요. 패물을 팔고 원장님은 해외로 강연 다니시면서 모금을 하셨어요. 백방으로 안 다니신 곳이 없어요. 한국, 미국, 캐나다로, 저는 일하는 아이들을 잘 활용해서 일을 시키는 것이 참 중요했어요. 어떻게 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요. 헤브론병원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지금 4층, 5층을 올리는 증축공사를 하고 있는데 어려움은 없습니까?”
 
“한국에 사시는 분들은 병원 건물을 볼 때 허접한 분위기를 줄 거예요. 그래도 당시 최소한의 금액으로 최대효과를 누리기 위해 참 많이 신경을 쓴 건물입니다. 이 본관건물은 지을 때 돈이 안 맞으니까 3층까지만 짓자, 그런 후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 때 2층을 더 올리자고 미뤄왔던 거거든요. 4층은 병실 50여 개가 들어설 거고요. 5층은 반으로 해서 호스피스 병실과 직원식당으로 짓고 있습니다.

▲ 헤브론병원은 현재 3층 건물을 2개층 증축하여 5층으로 확장 공사 중에 있다. 우 사장과 함께 일하고 있는 현지 직원들.(아래 오른쪽)     © 크리스찬리뷰


이곳에서는 인력수급이 제일 문젠데 처음에는 어려웠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행히 10년 동안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세 명이나 있어서 별 어려움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동안 돈 때문에 애로사항이 많았죠. 10년 전에는 일급이 2달러 정도 했는데 지금은 보통 8달러를 줍니다. 어려웠어도 이 사람들의 주급은 한 번도 미루지 않았어요.
 
이 나라 사람들은 일급으로 생계유지를 해야 하거든요. 먹고 자는 데만 이 돈을 쓰기 때문에 주급을 미룰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11년 동안 일을 해오고 있어도 주급을 미뤄 본 적은 없어요.”

헤브론병원과는 어떻게 인연이 됐을까.
 
“대학졸업 후 30년 동안 현대건설에 있었는데 한 10년은 베트남에서 근무했어요. 그 후 건설 회사를 설립했고 베트남으로 가서 교량공사를 하고 있을 때인데 캄보디아에서 연락이 왔어요. 어느 선교사가 국제학교를 지을 계획을 하고 있는데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와보니까 아무 것도 안 돼 있었어요.
 
측량을 하고 베트남으로 가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다시 다른 분한테서 연락이 온 겁니다. 김우정 원장이셨어요. 국제학교는 취소되었다.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측량성과표를 들고 김우정 원장을 처음으로 만났어요. 원장님께서 설계도를 보여주시면서 병원을 지을 테니 도와주십시오, 그러시는 거예요.”
 
그는 김우정 원장을 “기도 응답도 빠르고, 탁월한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기억했다. 
 
“자기 주장보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종합해서 결정을 하시는 분이셨어요. 원장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일을 나에게 맡기시는구나. 아, 아 이것이 소명이란 거구나.”
 
그는 모태신앙이다.
 
“전 서대문 토박이입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서대문에 있을 때 부모님이 그 교회를 다니셨어요. 그러니까 순복음교회가 우리 놀이터인 줄 알고 놀았죠. 그런데도 그동안 크리스찬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 많이 했습니다. 술 담배까지 했는데 헤브론병원 건물을 지으면서 술 담배 모두 끊었죠.”
 
우 대표는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힘이 된다는 사실을 헤브론병원 건축을 하면서 인지했다고 말했다.
거룩한 하나님의 터치였다.
 
 보디아 헤브론병원으로 떠나는
 신참 선교사 이형석 집사


▲ 헤브론병원에서 진료부장을 맡고 있는 내과전문의 이형석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시드니로 오는 길에 서울에 잠시 머물며 위드헤브론 사무실을 찾았다. 마침 그곳에서 함께 금요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형석 집사(55. 서울남교회, 내과전문의)를 만났다. 곧 캄보디아 헤브론병원으로 떠나는 이 집사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는 선교사로 떠나기 위해 안정이 보장된 생활기반을 모두 포기했다. 주위에선 의사로서 왜 좋은 직업을 놔두고 인생을 허비하느냐는 만류도 있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걸까?”
 
이 짤막한 질문이 이 집사의 가슴을 두드린 것이다. 한창 바쁘게 사회생활을 하던 그는 돌연 인생에서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봉사하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이 곧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린 것이 캄보디아 헤브론병원이다.
 
“일반 공과대학을 나와 직장생활을 7- 8년 했습니다. 집안이 할머니도 그렇고 어머님도 그렇고 독실한 크리스찬이신데 어려서부터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모든 직업이나 사회활동이나 항상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고 제 머릿속에는 그것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집사의 목소리에는 아이 같은 설렘과 묘한 떨림이 동시에 묻어났다. 세상 사람들은 가벼이 말한다. 삶은 곧잘 예기치 못했던 곳으로 흘러 가게 마련이라고. 그는 예기치 못했던 헤브론병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직장생활을 남들은 괜찮은 직장이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직장으로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렇게 7- 8년 살다보니까 삶이 뭔가? 내가 잘 살려고 다니고 월급 받아서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해 제가 의미를 못 찾았던 것 같아요.
 
크리스찬으로서의 삶이 이렇게 살아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다고 느끼면서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걸까, 생각을 하면서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었죠. 그렇다면 의사를 하면 힘든 분들이나 오지에 있는 분들이나 의료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한테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을까, 그래서 32살에 다시 의대를 갔습니다.”
 
이 집사는 “그렇게 해서 의사로 생활해 오면서 의대 갈 때 초심을 생각하게 됐다”며 “젊을 때 힘이 남아 있을 때 일을 해야 되지 않느냐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집사람하고 많이 얘기를 했어요. 그동안 의사 생활을 하면서 가지 않은 길이 없거든요. 그런데 가지 않은 길이 하나 남아 있더라고요. 바로 선교사의 길입니다. 글쎄요, 하나님이 원하셔서 계속 그 길을 가시게 하실지 아니면 어떤 다른 길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제 마음속에 그려왔던 그 길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마침 헤브론병원 김우정 선교사님이 잘 갈고 닦아온 병원에 저 같은 사람이 기회가 된다면 가서 동역자분들과 섬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결정을 한 거죠.”
 
어떻게 해서 헤브론병원과 인연이 되었을까?. 
 
“2003년인가요. 미얀마로 의료선교를 간 적이 있습니다. 태국선교도 준비하고 그랬는데 그러면서 동남아지역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작년에 미국에 있는 동생 교회에서 캄보디아 선교사를 몇 년 동안 후원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단기선교를 간다는 거예요. 그때 서로 연락이 돼서 같이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 후 이상하게 캄보디아에 마음이 끌리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도 같이 가려고 제가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아예 캄보디아 지역으로 가서 의료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알아봤습니다. 선교사들이나 단체 , 그 중에서 작게나마 의료사역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는지 찾아봤어요. 북쪽지역에 있는 선교사가 학교사역을 하고 작지만 클리닉 사역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잠깐이나마 섬길 수 있는 사역이 있을까 하고 메일을 보냈는데 그분이 한국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답장을 기다렸는데 한 달 넘게 답장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이에 인터넷상에서 헤브론병원을 알게 됐어요. 혹시 내과의사인데 제가 잠깐이나마 봉사할 부분이 있을까  메일을 보내봤죠. 그랬더니 바로 답장을 주시더라고요. 오랫동안 기도해왔던 제목이라고, 내과의사가 필요하대요. 저는 그냥 처음에 가벼운 마음으로 말씀드렸는데 오랫동안 기도해왔던 기도제목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아, 이거 너무 기대를 많이 하시는 게 아닌가, 마음에 부담이 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이거든요. 제가 할 수 있는 부분 안에서 섬길 것이고 만약에 더 필요한 분이 있으면 하나님이 보내주실 거고, 저는 그냥 하나의 일원으로 할 수 있어요.”

▲ 캄보디아 어린이를 진료 중인 이형석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그러면 김우정 선교사는 아직 뵙지를 못하셨네요.”
 
“그렇죠. 통화 한 번하고 메일 한 번 주고 받았을 뿐입니다.”
 
“직접 만나 뵙지도 않고 가겠다 결정을 한 이유가 있습니까?”
 
“김우정 선교사가 오랫동안 잘 운영하셨고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상황을 보면 판단할 수 있거든요. 그동안 저는 대학병원도 있어 보고 여러 병원에서 있어 봤지만 분명히 선교지가 열악할 거라고 예상을 해요. 제가 닥쳐서 보고 적응하고 하는 문제이지 미리 가서 보고 나름대로 판단하는 게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몇 년 있겠다는 말씀은 안 드리고 1년 정도 생활하면서 제가 있어야 할 자리 같으면 가족들하고 상의를 한 번 더 해보고 장기적으로 있을 것인지 결정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가족의 반대는 없었나요?”
 
“아내는 저에 대해 적극적인 후원자입니다. 사실은 결혼을 하고 나서 제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의대로 편입하겠다고 얘기를 했는데 그때도 100퍼센트 동의를 해줬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거, 원하는 거 마음껏 하라. 지금도 사실은 제가 가장이니까 마음의 부담이 많죠. 아이들이 아직도 교육 중에 있는 상황이니까요. 그런데 집사람이 지금 경제적인 지원을 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래요.”
 
그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성경책을 바라보았다. 꿈을 꾸듯 아련한 눈길이었다.
 
기자는 그를 향해 “이형석 선교사님”하고 불렀다. 맙소사, 순간 이 집사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 집사의 잠긴 목소리. 
 
“선교사요? 처음으로 들어봅니다.”
 
함께 있던 헤브론가족들이 좋아라, 박수를 쳤다.
 
이 집사를 만나면서 뭔가 머리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이 가슴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신학적 지식은 왕성해졌으나 삶으로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더 퇴보해진 시대에 하나님께서 그와 만남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 이 말씀은 기자의 가슴에 격랑을 일으켰다. 경건의 모양으로 승부하는 시대는 끝났다.
 
에필로그
 
기자가 캄보디아에 관심 한번 가져본 게 언제던가.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아래 이 땅을 다시 밟았기에 이제 마음이 동할 때, 기도할 수 있는 애정이 생겼다. 모든 나라와 선교지가 그렇다. 같이 밥 한 그릇 나눈 정으로, 어려움을 나눈 위로로, 희망을 공유하는 기쁨으로 현지 상황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그곳을 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헤브론병원을 다녀온 사람들은 감격하고 눈물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도대체 왜’ 헤브론병원이 어떤 곳이기에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감격하게 되는 걸까?
 
눈물과 땀과 부르짖음으로 다져지는 헤브론병원. 헤브론병원 분위기는 한마디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스러움에 감싸여 있다. 목회자이든,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든, 좌절에 빠져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이든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은 헤브론병원의 신앙과 가르침에 저도 모르게 동화된다.
 
헤브론병원을 다녀 와서 다시 꿈을 가져본다. 복음으로 변화될 이 땅에 사랑의 예수님이 함께 하기를. 그리고 은혜로 또 만날 수 있기를.〠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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