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목사님을 그리며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4/30 [11:05]
▲ 추양 한경직 목사 ©영락교회 
추양 한경직 목사님 10주기를 맞이하면서 제 가슴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한 목사님과의 일들을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에 몇자 적습니다. 


저는 영락교회 기도원에서 7년간 사역을 했습니다. 그때 한 목사님의 목사관을 저의 사무실로 사용하는 특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사역할 때 목사님께서 비교적 자주 오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원에 가자”라고 하시며 예고도 없이 오셨습니다. 기도원에 오시면 제가 목사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교인들과 인사도 나눴고, 목사님 덕에 저도 점심 잘 얻어먹고, 그리고 오후에는 목사님이 쓰시던 방에 들어가셔서 기도하시면 저는 그 문 앞에서 목사님의 기도 소리를 듣곤 하였습니다.

연세가 너무 높으시니까 혹시라도 기도하시다 무슨 일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목사님 방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마치 엘리 제사장을 모셨던 어린 사무엘이 된 것 같은 그런 행복한 착각에 빠져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기도원에 다녀가시는 것이 그저 반갑고 마냥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연세가 너무 높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혹시 목사님이 그 때를 아시고 평생 설교 준비하며 기도하시던 자리를 다녀가시기를 원하셨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목사님은 늘 가시면서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며 “아마 이제 마지막일 게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잊을 수 없는 한 목사님의 눈빛

저는 한 목사님이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늘 많은 사람들 속에 계셨지만, 그분은 거기 있는 사람 전체를 한눈에 보신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한 사람 한 사람과 눈빛을 맞추며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그분과 눈이 마주치면 언제나 나를 향한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을 할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좋아했습니다. 

 
방언도 못하는 기도원 목사

당시 저는 매일 영락기도원에서 오전에는 집회하고 오후에는 찾아오는 교인들을 상담하고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고, 제게 기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특별히 병원에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고 사형선고를 받은 분들이 제게 오셔서 기도해달라고 하셨고,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들도 데리고 왔습니다.제가 무슨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 기도원 목사라는 직함 때문에 사람들은 저에게 그런 것을 기대했습니다.

만일 제가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초월적인 역사들이 나타났다면 저는 정말 신이 나서 이 사역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구름떼처럼 몰려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방언도 못하는, 능력하고는 거리가 아주 먼 목사였습니다. 방언도 못하는 사람이 기도원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사역을 하는 것이 제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마다 특별한 권능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모하고 기도하던 역사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한 목사님을 가까이 대하면서 그분의 힘이 어디서 왔는 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목사님도 무슨 특별한 은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신유의 은사가 있었던 분도 아닌 것 같고, 저처럼 방언도 못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설교가 그렇게 뛰어난 분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가끔 교인들이 한 목사님 설교라고 테이프를 가져다 주었는데, 시대가 많이 달라져서 그랬는지 목사님의 설교 때문에 영락교회가 있게 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교인들과 눈이 마주치면 교인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그 분 앞에서 모든 분들이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왔을까? 

 
무릎이 아파... 

목사님 생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제 아내가 목사 사모 중에서 가장 어렸기 때문에 목사님께 늘 꽃을 드렸던 화동(花童) 역할을 했습니다. 일 년에 겨우 한 번, 그것도 특별히 생신상을 따로 차려드리는 것도 아니고 당회 세미나 중에  잠시 점심식사 시간을 이용해서 촛불을 밝히고 생신축하 노래를 불러드리는 것인데, 그때마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아 교회에 부담을 드려 죄송하다”며, “내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제야 제대로 된 줄로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우셨습니다.

1999년 새해였습니다. 한 목사님 연세가 너무 높으시고 건강도 좋지 못하셨기 때문에 교인들이 새해라고 찾아뵙고 세배드리는 것도 목사님께는 큰 부담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교인들이 세배드리러 개별적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고, 교회 대표로 봉사부원들과 지도 목사가 올라가서 세배를 드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봉사부원들과 함께 과일과 고기를 준비해서 남한산성 자택에 올라갔습니다.

간단하게 예배를 드리고 나서 목사님께 세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께서 저의 절을 받으시고는 손가락으로 무릎을 가르키면서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이미 기력이 너무 쇠하셨고, 또 호흡이 일정하지 않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못 알아들으니까 곁에서 모시던 장로님께서 설명을 해 주셨는데, “이 목사님께서 절을 하시는데, 제가 무릎이 아파서 같이 절을 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묵직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목사님은 98세였고, 그 교회 원로목사였습니다. 저는 38세였고 그 교회에서 가장 어린 부목사였습니다. 98세 되신 원로목사님께서 병약한 몸으로 그 교회 부목사 중에서도 가장 어린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날 이 일이 제게는 한 목사님을 마지막으로 뵈었던 사건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날 남한산성에서 내려오면서 그동안 풀지 못한 숙제를 풀었습니다. ‘한 목사님의 권능은 낮아짐과 섬김에 있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문같이 드리던 저의 새벽기도가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능력 없어도 좋사오니,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게 해 주십시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이 기도를 받으시려고 저를 7년 동안 기도원에 붙잡아 두셨던 것 같습니다. 이 기도를 드린 이후에 하나님은 저를 교회로, 지금은 호주 시드니의 이민목회지로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이곳에 있게 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낮아짐과 섬김의 목회

얼마 전에 중국 선교지에 다녀오다가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서 한국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딱 하루라는 짧은 시간이 고국에서 저에게 주어졌는데, 저는 이 시간을 한경직 목사님 사시던 남한산성에서 보내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목사님을 만났던 그곳, 그곳에서 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제게 들려주셨던 그 음성을 다시 들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저 자신이 자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0여 년만에 다시 찾은 목사님 사택에 ‘한경직 우거처’라는 초라한 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앞에 한참 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무릎이 아파 같이 절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춘복/새벽종소리 명성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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