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

한국 개신교 첫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 (상)

김환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8/07/26 [10:20]

▲   8/2018 표지  ©크리스찬리뷰
 
▲ 웨일즈에서 공부하던 한국 학생이 석사 학위 작품으로 제작한 토마스 선교사의 형상이 하노버교회 벽에 걸려 있다.     ©크리스찬리뷰
 
한국 기독교 역사는 '순교자의 피'로 점철되었다. 천주교는 1784년 이승훈이 최초로 영세를 받은 해를 선교의 시작으로 보고, 개신교는 1884년 9월 20일 의사인 알렌이 조선에 입국한 해로 보고 있다.
 
천주교는 정확하게 개신교보다 100년이 앞선다. 천주교 선교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개신교 선교는 미국 선교사들이 주도하였다.
 
서울에 천주교와 개신교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마포의 '양화진'이다. 양화진에는 천주교의 '절두산 성지'와 개신교의 '외국인선교사묘원'이 있다. 양화진은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모양 같다고 해서 '잠두봉'(蠶頭峰)이라고도 불렀다. '양화진'의 공식적인 명칭은 ‘양화나루’이다.

▲ 절두산 입구에 있는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 크리스찬리뷰

이곳을 '절두산' (切頭山)이라고도 부른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가 이곳 양화진까지 진입했다. 프랑스 함대는 10월 14일 한 달 동안 강화도를 점령하고 11월 10일 군대를 철수했다. 프랑스 함대를 물리친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로 더럽혀진 한강의 물을 천주교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고 하면서 수많은 신자들을 붙잡아 양화진의 '잠두봉'에서 목을 잘랐다. 잘린 목은 그대로 한강에 던져졌고, 머리가 산을 이루고 강물은 핏빛으로 변했다고 한다.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에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있다. 외국인 묘지가 조성될 수 있는 근거는 '한영 수호조약' 제4조 5항의 조문 때문이다. '한영 수호조약'에 명시된 내용에 따르면 “조선국 관원은 각 통상 지역에서 적당한 지역을 외국인 묘지로서 설정하되 그 묘지의 지대·지세 혹은 기타 수수료 지불을 면제한다. 그리고 그 묘지의 경영은 신동공사에 위임 한다”라고 했다.
 
1890년 7월 국립병원인 제중원의 책임자였던 미국인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헤론'(John Heron)이 전염성 이질로 사망하였다. 헤론은 개항 이후 조선에서 활동하다가 사망한 첫 번째 서양인 선교사였다. 미국 공사는 7월 24일 헤론의 시신을 묻을 장소를 지정해 달라는 공문을 보내고, 동시에 한영수호조약 제4조 5항을 들어 외국인 묘지를 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조선의 적극적인 대처 없이 시간이 흐르자, 임시로 미국 공사관 경내에 묘지를 만들었다. 외국인의 시체를 도성 안에 묻자 정부뿐 아니라 민심도 크게 동요하고 반대 여론이 일어났다.
 
결국 양화진 일부 지역에 경계를 만들어 외국인 묘역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선정부와 외교사절 간에 타협이 이루어지자, 미국 공사관의 임시 묘지에 있던 헤론의 시신을 양화진으로 옮겼고, 이후 서양인이 국내에서 사망하면 이곳에 묻힐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외국인 선교사와 그 가족 145명이 안장되어 있다.
 
▲ 한국인 최초로 영세받은 이승훈 동상     ©크리스찬리뷰


▲ 미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헤론의 묘비     © 크리스찬리뷰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한국 개신교 역사를 알렌이 입국한 1884년으로 보고 있지만, 그 단초는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1866년으로 보는 것이 옳다. 1866년 8월 9일 토마스 선교사는 미국 무장상선인 '제너럴 셔만호'의 통역관으로 조선으로 향했다. 입항을 불허하는 평양감사 박규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거슬러 올라가다가 대동강 변에서 좌초되어 '제너럴 셔만호'는 불타고, 토마스 선교사는 참수당한다.

▲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순국한 어재연 장군 수자기(진품). 미군에 약탈되어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해 오다가 2007년 한국으로 돌아온 진품 수자기는 현존하는 유일의 장군기이다.     © 크리스찬리뷰

▲ 강화전쟁박물관 전경     © 크리스찬리뷰

5년이 지난 신미년(1871)에 미국은 배상과 통상을 요구하며 함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온다. 조정은 어재연 장군을 임명하여 강화도 광성보에서 수비케 하였다. 그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우세한 무기를 가진 미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전투 중 장렬한 전사를 한다. 하지만 미군은 조선군의 강렬한 저항에 부딪쳐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으로 철군했다.
 
강화도 입구에 '강화전쟁박물관'이 있다. 그곳에 어재연 장군기인 '수자기'가 전시되어 있다. 신미양요 때 미군에 의해 약탈되어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대여 형식으로 2007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퍼즐을 맞추어 보면,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와 다른 사건들이 일련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했고, 5년 후인 1871년에    '신미양요'가 일어났고, 18년 후인 1882년에 미국은 서양 최초로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2년이 지나 알렌이 공식적으로 입국하면서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 있다. '조미수호통산조약'에는 '선교'란 용어가 없다. 고종은 '선교사'가 아닌 '의사와 교사' 만을 인정한 것이다. '선교'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다.
 
조약의 중요내용은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모방하였으나, 전문 제9조 2항에 ‘교회’(敎誨)의 항목을 넣어 조선정부로부터 포교권을 인정받았다. 이것은 기존에 체결된 다른 나라와의 조약과 다른 점이었다. 프랑스 측은 이것을 선교의 자유를 얻은 것으로 해석하여, 선교를 통한 교육 문화에 신국면을 타개한 것이다. 이 조약 체결 후 점차 개신교, 천주교에 대한 지금까지의 금압정책을 폐지하여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 하노버교회 앞마당에는 교인들을 위한 묘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1백여 개의 비석들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토마스를 찾아 하노버교회로 
 
2018년 6월 19일, 토마스를 찾아 영국으로 떠났다. 영국의 공식 명칭은 UK(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4개의 '왕국'(Kingdom)을 합해서 만든 나라이다. 아일랜드는 독립해서, 지금은 북아일랜드만 영국에 속해 있다. 잉글랜드의 수도는 런던(London), 스코틀랜드의 수도는 '에든버러'(Edinburgh), 웨일스의 수도는 '카디프'(Cardiff), 북 아일랜드의 수도는 '벨파스트'(Belfast)이다.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하노버교회' (Hanover Church)는 웨일스의 수도인 '카디프'(Cardiff)에서 30여 분 정도 떨어진 시골에 있다.
 
과거의 영광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순회 전도자들에 의해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는 교회가 되었다. 20여 년간 담임목사가 없다가, 지금은 모로코 선교사였던 유재연 목사가 자원하여 2013년 말부터 지금까지 하노버 교회를 섬기고 있다.
 
그는 목사가 되기 전에 고등학교 영어교사였다. 장로교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전주신흥고등학교 교목으로 봉직하다, 단기선교를 모로코로 갔었다. 그곳에서 부르심을 받고 교목을 사임하고 바로 모로코로 떠났다.
 
그는 13년 동안 모로코에서 사역하다가 5년 전 하노버 교회로 선교지를 옮겼다. 영국에서 선교한다는 말이 조금은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분명 이곳은 선교지이다.
 
하노버교회의 10여 명의 교인들은 모두 다 참 많은 사연들을 가지고 있다.
 
유 선교사를 만나자마자 나는 기도회에 참석했다. 매주 토요일 ‘폴’(Paul)의 집에서 기도회가 열린다. 유대인인 폴과 부인 ‘레베카’ (Rebekah)가 기다리고 있었다.
 
폴의 집은 입구부터 심상치 않았다. 벽에는 나무로 만든 다윗의 별 안에 십자가와 샬롬(Shalom)이라 쓴 장식물이 걸려있다. 옆에는 트럼프 대통령 사진이 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 트럼프를 침이 마르도록 칭송한다.
 
그 밑에는 히틀러 집권 시절 '게토'(Ghetto)에 사는 유태인들이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다윗의 별도 있었다. 당시에 사용하던 진품이라고 강조했다. 폴은 이스라엘 중심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신앙의 시금석'(Touchstone of Faith)은 '이스라엘 사랑'이라고 주장했다.
 
처남인 Jacob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 유 선교사는 기도회 후에 정신요양소에 있는 Jacob을 방문했다. 그의 각별한 배려로 Jacob은 많이 호전되었다.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순서를 맡아 성경봉독도 한다.
 
Jacob이 사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Jacek이 산다. Jacek은 마약 중독자였고, 건강이 좋지 않아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묘지를 찾던 중에 하노버교회를 방문했다. 하노버 교회의 뒷마당에는 교인들을 위한 묘지가 있다. 교인이 되어야 묻힐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열심히 교회를 다니다가, 지금은 예수를 영접하고 많이 건강해졌다.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를 배출한 '하노버교회'를 한국 선교사가 담임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의미 깊은 일이다. 한국은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해 주는 나라, 선교 받던 나라에서 선교하는 나라가 되었다. 유 선교사가 담임하면서 더 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6월에 이어 7월에도 음악인들이 모여 이곳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교회 안에는 토마스 선교사의 사진이 걸려있다. 그 옆 대리석 판에는 그를 기리는 글이 쓰여 있다.

▲ 하노버교회 목회자와 성도들과 함께 한 필자 김환기 사관(왼쪽). 김 사관(오른쪽 옆으로) 야곱, 야첵, 유재연 목사     © 크리스찬리뷰

"중국 베이징에 파견한 선교사, 하노버교회의 로버트와 로이드 토마스 목사의 둘째 아들, 조선에 두 번째 선교 사역 중에 1866년 27살의 나이로 순교하다."
 
그는 1839년 9월 7일에 태어나서 1866년 9월 5일 대동강 가에서 순교했다. 반대편 벽에는 한반도가 그려져 있고, 그 안에는 글귀가 쓰여 있는 목판이 걸려 있었다. 
 
▲ 교회당에 걸려 있는 토마스 선교사 사진     ©크리스찬리뷰
 
"2000년 6월, 한국 기독교인들이 1866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기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2000년 6월에 누군가 이곳을 방문하여 기증한 것 같다.
 
교육관에는 토마스 선교사와 관련된 사건들이 사진과 함께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타고 갔던 '제너럴 셔만호'도 있고, 그에게 성경을 받았던 '최치량'에 관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최치량은 토마스 선교사에게 성경 세 권을 받았다. 금서임을 알고 영문주사(營門主事)인 '박영식'에게 성경을 주었다. 박영식은 성경을 모아서 자기 집을 도배했다. 최치량은 후에 그의 집을 샀고, 그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
 
최치량의 사진도 있다.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교회 이름은 '널다리골교회'이고, 이 교회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일으킨 ‘장대현교회’가 되었다. 
 
교회 밖으로 나가면 정문 앞에 토마스 선교사의 아버지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묘비가 있다. 그는 1810년 5월 22일 웨일즈 북부의 전형적인 웨일스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인구 80%는 웨일스어를 사용했다.

▲ 하노버교회에 토마스 선교사를 기리는 대리석 판이 걸려 있다.     © 크리스찬리뷰

▲ 한반도 지도 위에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기리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목판이 하노버교회 벽면에 걸려 있다     © 크리스찬리뷰

1800년대 북부 웨일스의 어린이들은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많은 어린이들이 탄광에서 채탄 작업 등 고된 일을 했다. 그는 '윌리암 윌리엄스' 목사의 인도함으로 중부 웨일스 뉴타운에 있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1937년 4월 19일에 스완지에 있는 실로교회에 청빙을 받았다. 스완지는 웨일스 남단에 있는 가장 큰 항구 도시이다. 웨일스에서 생산되는 석탄들은 대부분 스완지로 실려와 전 세계로 수출되었다. 스완지는 축구선수 기성룡이 소속되었던 도시로 익숙한 곳이기도 하다.
 
1839년 4월 ‘라야더’(Rhayader)의 타버너클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고, 그해 9월에 둘째 아들인 '저마인 토마스'가 태어났다. 1848년 하노버 교회의 청빙을 받고 37년간 하노버 교회를 섬기다 1884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토마스와 웨일스
 
웨일스는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이중 언어 체제이다. 모든 표시판에는 영어와 웨일스어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1904년 웨일스 부흥을 선도했던 '모리아 교회'의 '이반 로버츠'(Evan Roberts)의 기념비도 웨일스어로 기록되어 있다. 안내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웨일스는 20세기 초까지 영어보다 웨일스어를 더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 하노버교회 교육관 게시판에 전시해 놓은 한국 선교 관련 사진 자료들     © 크리스찬리뷰

▲ 토마스 선교사의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묘비. 그는 18 48년 하노버교회 청빙을 받고 37년간 하노버교회를 섬기다 1884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크리스찬리뷰

수도인 카디프에서 차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웨일스 문화와 전통이 그대로 보존된 지역이 있다. 한국의 민속촌과 같은 곳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켈트족의 전통을 지키며 웨일스어로 대화한다.
 
웨일스에는 일찍부터 북해 방면에서 온 켈트인이 정착해 있었다. 1세기부터 5세기 전반에 이르는 동안에는 로마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16세기경에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통합되었다. 그 후 수 세기에 걸쳐 문화가 점차 잉글랜드 식으로 변하자 웨일스 사람들은 위협을 느끼면서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저마인 토마스'는 1839년 9월 7일 라야다에서 태어났다. 1848년 아버지가 하노버교회로 이동할 때 '토마스'는 8살이었고, 토마스는 하노버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토마스의 교육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최초의 공교육이 이루어 진 곳은 ‘란도버리’(Landovery) 칼리지에 3년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그는 헬라어와 라틴어, 그리고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에서 세관 통역관으로 근무할 정도로 중국어에도 능통했고, 그곳에서 조선 사람을 만나 단기간 내에 한글을 배워 '제너럴 셔만호'의 통역관이 될 정도로 언어 능력이 탁월했다.

▲ 하노버교회 입구 전경     © 크리스찬리뷰

토마스는 런던 리전트 공원 북쪽에 위치한 런던대학교의 신학부인 '뉴칼리지'에 입학했다. 토마스가 뉴칼리지에 간 이유는 중국 선교사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뉴 칼리지에 입학한 직후인 1857년 9월 23일 런던선교회로 보낸 선교사 후보생 신청서가 바로 그 증거이다.
 
뉴 칼리지에서 토마스의 학교 친구였던 블룸필드는 훗날 토마스 선교사를 연구한 오문환 장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토마스는 외국어를 배우는 데 뛰어난 소질이 있었습니다. 모험적인 기질이 있던 그는 중국과 같이 머나먼 지역에 선교사로 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자주했다.
 
학교의 교육 과정은 인문학 2년과 신학 3년으로 5년이다. 그는 입학한 지 2년 만에 학사 학위를 받았고, 휴학 후 복학하여 신학부 과정 3년은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1863년 5월 토마스는 뉴칼리지를 졸업했다. 휴학 기간을 포함해 무려 7년이나 걸렸다.
 
5월 29일 그는 '캐롤라인 고드프리'(Caroline Godfrey)와 결혼했고, 6월 4일 목사 안수를 받고, 7월 21일 토마스는 아내와 함께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하노버교회에서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1863년 5월 졸업과 결혼, 6월 목사 안수, 7월 중국 선교사로 파송.
 
1863년 7월 21일, 런던에서 30km 떨어진 '그레이브젠드' (Gravesend)항에는 중국으로 떠나는 8명의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알렉산더 윌리암슨' (Alexander Williamson) 부부를 만났다. 윌리암슨 부부는 이미 중국 사역에 많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건강상 문제로 고국으로 왔다가 6년 만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으로 중국으로 가는 길이다. 훗날 윌리암슨 부부는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으로 선교 여행을 떠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에 가지고 간 성경은 윌리암슨 선교사가 지원해 준 것이다. 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에 감동을 받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소속인 '존 로스'(Jone Ross)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도움을 받아 1882년 최초의 한글 성경을 번역했다.
 
토마스가 선교의 꿈을 꾸게 된 것은 '귀츨라프'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토마스는 귀츨라프의 항해기를 읽은 것으로 보이는데, 귀츨라프가 서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성경을 보급했듯이 후일 토마스도 동일한 방법을 선택했다. 또한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소속의 ‘록하트’ (Lockhart)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의 설교 또한 선교사의 길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귀츨라프'는 독일 출신의 의사이자 한국 첫 해외 선교사이다. 그는 네덜란드 선교회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중국 선교의 개척자 모리슨의 영향으로 1830년 런던 선교회의 소속으로 일하게 되었다.
 
모리슨으로부터 중국 선교의 이야기를 듣고 귀츨라프는 중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귀츨라프는 모리슨을 만나며 한국의 서해안과 일본 해안을 비롯한 50여 개의 섬에 선교를 하는 비전도 품게 된 것이다.
 
귀츨라프는 1832년 7월 24일부터 8월 17일까지 한 달 가까이 고대도에 머물렀다. 7월 24일에 충남 보령시 오천면 고대도 앞바다에 정박을 하였는데, 처음 보는 커다란 서양 군함의 등장에 조정에서는 큰 충격을 받아 자세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그는 한문 성경과 책자와 망원경을 비롯한 선물들을 순조에게 진상하고 통상을 청원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순조는 선물을 돌려보내며 즉시 떠날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선물을 돌려받지 않고 떠났지만, 남긴 선물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토마스와 중국
 
영국 '그레이브젠드' 항을 떠난 범선 ‘폴이스 호’는 4개월 반의 긴 항해 끝에 1863년 12월 첫 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상하이는 1842년 아편 전쟁에서 중국이 영국에 패하고 체결한 '난징조약'에 의해 상하이는 개항장이 된 이래로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열강들은 특정 지역을 나누어 점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중국 도착 4개월 후인 1864년 3월 11일 런던선교회의 '그리피스 존'(Griffith John) 선교사가 있는 한커우(漢口)를 방문했는데, 그 기간 동안 임신 중이던 부인은 유산하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1864년 3월 24일 2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1904년 웨일즈 부흥을 선도했던 모리아교회의 이반 로버츠 기념비.     ©크리스찬리뷰
 
토마스는 중국에서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맞게 되었고, 이 일로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토마스는 통곡하였다. 자제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아내의 죽음 앞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런던 선교회에 보낸 편지에 통해서 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제가 느낀 상실감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제 마음을 바꿔 줄 새로운 사역지를 찾아야만 합니다. 제 사랑하는 아내는 받을 수 있는 고난을 다 받았습니다. 곁에서 보살펴 주신 분들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편지를 쓸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을 상세하게 말하려 하니 슬픔이 또 다시 복받쳐 오릅니다." (당신의 신실한 로버트 저마인 토마스 1864년 4월 5일 런던 선교회 상하이 지부) 
  
사별의 아픔이 치유되기도 전에 토마스는 또 다른 고뇌에 빠졌다. 상하이 지부장 '무어헤드'와의 갈등이었다. 무어헤드는 영국인 중심의 사역을 하기 원했고, 반면에 토마스는 중국인 중심의 사역을 원했던 것이다.
 
런던 선교회에 내륙 지방인 한커우로 사역지를 옮겨 달라고 요청했으나 답신은 늦어지기만 했다. 결국 토마스는 1864년 12월 7일 런던선교회를 사임하게 된다. 사임 후 그는 지금은 '엔타이'(煙臺)라고 불리는 '지푸'(Chefoo)로 이동하여 세관의 통역관 및 감독관으로 일했다. 그 후 그는 런던 선교회를 사임한 것은 자신의 경솔한 행동이었음을 인정하는 몇 번의 편지를 보냈다.
 
▲ 토마스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런던 리전트공원 북쪽에 있는 런던대학교 신학부인 뉴칼리지에 입학했다. 사진은 리전트 공원.     © 크리스찬리뷰
 
"지난번 편지를 보낸 이후로 편치 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무어헤드가 제게 한 행동 때문에 화가 나고 괴로워서 모든 상황을 침착하고 냉정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중략) 지난 시간에 대하여 이사회에 용서를 빕니다. 저는 다시 받아 주실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저급하고 불손한 동기로 사임했던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성급하였음을 고백합니다.(중략) 다른 단체에 소속될 수도 있겠으나 저는 무엇보다도 여러분과 연결된 것을 특권이자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중략) 더 이상의 말은 아끼고, 오로지 인내하면서 이사회의 결정을 기다리겠습니다.(중략)" (당신의 신실한 로버트 저마인 토마스 1865년 1월 31일)
  
그가 쓴 편지를 보면 지푸에서 세관 통역관 및 감독관으로 일했지만, 친구인 윌리암슨 선교사와 함께 선교사로서 사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항구에는 있는 선교사들이 매달 한 번씩 모이는 회합에서 지난달 세관 중 한 중국인이 기독교인이 된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중략) 주일마다 중국어로 드려지는 예배는 나와 윌리암슨(Alexader Williamson) 선교사가 번갈아 맡고 있으며, 나는 또한 영어 예배도 책임져야 합니다. 정말로 너무도 할 일이 많아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나는 날이 갈수록 선교 사역을 더욱 더 사모하고 있습니다." (1864년 3월 15일)
 
정황상, 토마스는 윌리암슨이 있어서 상하이에서 지푸로 간 것 같다. 토마스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조선인을 만나게 된다. 1865년 초여름, 윌리암슨은 즈푸 항에서 우연히 조선인 두 명을 보게 되었다. 작은 체구에서 흰 옷을 입은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했던 윌리암슨은 아는 중국 관리로부터 그 두 사람을 소개받고 인사를 나누었다. 윌리암슨은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는데, 토마스도 그 자리에 함께 했다.
 
지푸는 한반도에서 볼 때 가장 가까운 중국 항구로, 조선의 백령도와도 겨우 2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를 활용하여 조선인들은 은밀하게 지푸 항을 오가며 무역을 하고 있었다.
 
윌리암슨이 집에서 만난 두 명의 조선인은 바로 천주교인인 '김자평과 최선일'이었다. 윌리암슨과 토마스는 그들로부터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게 되었는데, 조선 땅에서 천주교 신자가 5만 명이나 되며, 11명의 천주교 신부들이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다고 했다.
 
비록 교회는 없지만 가정에서 미사를 드리며 복음에 관한 책들을 돌아가면서 읽고 있다고 했다.
 
토마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선에 성경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토마스는 무언가 도움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을 했다. 토마스는 윌리암슨에게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 조선으로 갈 성경을 요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윌리암슨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토마스는 그 날 이후로 두 명의 조선인들과 정기적으로 만나며 조선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조선 땅으로 선교 여행을 떠날 준비를 시작하면서, 8개월간 일해온 세관업무를 그만두기 위해 사직서를 제출했다.
 
"저는 다가올 8월 31일부로 세관원직을 사임하고자 사표를 제출합니다."(1865년 7월 27일) 〠 <다음호 계속> 

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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