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는가?

글|정윤석,사진|권순형 | 입력 : 2018/09/27 [17:34]
▲ 창원공원묘원에 2010년 10월 개관한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전경.     © 크리스찬리뷰

“여기가 원래 가족들 묘로 쓰려고 했던 자리 아니었나!”
 
“근데 와 선교사 기념비가 세워졌는데?”
 
“가족묘로 쓰려고 했는데, 글쎄....”
 
경남 창원의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지난 9월 8일 예장 통합측 부산광진교회(정명식 목사) 성도들 40여 명이 찾아왔다. 삼삼오오 모여서 기념관 뒤편, 호주 선교사들의 순직 묘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맥피 선교사가 의신여학교를 세우고 이 땅에서 돌아가셨는데, 이OO 시인의 묘와 같이 있었거든. 그 묘지를 시인의 상속인이 팔고 미국으로 가버렸다 아이가. 그 묘지를 매입한 사람이,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이야. 선교사를 지가 알게 뭐꼬. ‘묘지 파가라! 내 알바 아이다! 이장하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 한기라.
 
그 얘기를 전해 듣고 교회마다 이 문제로 간절히 기도했다. 가족묘로 쓰려했던 신성용 이사장이 결국 이 얘기를 전해 듣고 자기 가족묘로 쓰려던 땅 3천 평을 경남성시화운동본부에 기증했고 이기 기념관이 된기라.”
 
가을 볕 가득한 공원묘지, 창원시에 위치한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이하 기념관)이 세워진 배경을 교인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기념관을 설립하게 된 기폭제를 마련한 맥피 선교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과연 누구였기에 경남의 교회와 성도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묘지를 이장하고 기념관 건립까지 하게 된 걸까?
 
기념관 내부엔 경남에 뿌리내린 선교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여정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들은 한두 명이 아니다. 둥글게 마감한 벽면을 타고 호주 선교사들의 이야기들이 빼곡하다. 벽면만이 아니라 기둥을 비롯해 기념관 요소요소가 모두 선교사들의 이야기다. 얼굴 형태도, 피부빛도 다르지만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뜨겁게 대한민국을 위해 살다갔다는 점이다. 그들은 데이비스를 비롯, 제임스 맥케이, 멘지스, 퍼셋, 페리, 걷루드 네피어, 아이다 맥피, 윌리엄 테일러 등 80여 명에 이른다.
 
▲ 기념관 뒷편에 호주 선교사 순직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이 기념관에서 가장 독특하게 발견되는 건, 경남에 뿌리내린 선교사들 거의 대다수가 한국에서 2만리나 떨어진 호주에서 온 선교사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지역엔 ‘태양신’인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꼿꼿한 신앙이 전수됐다는 점이다.
 
호주선교사들과 경남은 어떤 관계
 
기념관 건립의 신호탄이 된 맥피 선교사(1881년~1937년)는 호주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선교사훈련을 받은 후 30세가 되던 1911년, 한국에 들어온다. 맥피 선교사는 한국의 미래가 다음 세대 교육에 있음을 꽤 뚫어본 선각자였다. 나아가 다음 세대에 희망을 걸려면 여성들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맥피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한 일은 여성 교육이었다. 남녀공학을 기피하던 문화를 존중해 창신학교에서 여학생을 분리해 1913년 ‘의신여학교’를 설립했다. 그녀는 “어린아이는 조선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고, 여성을 정복한 자는 나라를 정복한다.”고 강조했다.
 
경남지방 신여성교육과 여성개화를 위해 26년간 독신 교장으로 봉사하다가 1937년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무덤 이장 문제로 경남성시화운동본부가 나서 결국 기념관을 세우고 호주선교사들의 사역을 기리게 된 것이다.
 
경남 선교와 호주 선교사들의 관계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맥피선교사의 순교적 헌신에 불을 댕긴 선교사가 이미 있었다. 호주 선교사로서 한국 땅에 최초로 발을 디딘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1856년~1890년)다. 그는 경남 선교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됐다.
 
1889년 40일간에 걸쳐 배를 타고 호주에서 한국으로 입국한 그는 5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그리고 경남지역이 일본과의 교역의 중심지임을 알고 부산을 선교지로 정했다. ‘그는 선교지에 가게 되면 하려고 했던 옛 사도들의 방법대로 도보전도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데이비스는 모두가 만류하던 육로를 통해 서울에서 다시 부산까지 걸어 내려갔다. 3주간에 걸쳐 수원, 천안, 전주, 남원, 하동, 사천을 지나 부산까지 갔고 그를 맞이한 건, 과로속에서 얻은 극심한 폐렴이었다. 결국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인 1889년 4월 5일 순직하고 만다. 그걸로 끝이 날 것만 같은 경남 선교와 호주와의 인연은 오히려 그의 죽음으로 호주 전역에 알려진다. 이는 호주 젊은이들의 선교 열정에 불을 지피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후 호주 선교사들의 선교 열정이 한국을 향해 봇물 터지듯 열렸다. 그해 5월 5일 멜본 시내 스카츠교회에서 거행된 데이비스의 생애를 감사하는 예배에서는 데이비스의 자기 희생적인 모범이 강조되었고 한국 선교를 중단될 수 없는 사명임을 확인하였던 바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운동에 정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당시 이 연합회의 회장이었던 질레스피(Gillespie)는 데이비스의 선교 자취를 따라가자고 호소하였고, 1891년에는 존 맥케이(Rev. J.H. Mackay) 목사 부부, 1894년에는 앤드류 아담슨 목사(Rev. A. Adamson) 부부, 1902년에는 커렐 의사(Dr. H. Currell) 등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운동을 계속하였다.
 
기념관 뒷편 묘원에는 이들 선교사 중 8명의 순직기념비와 묘지를 볼 수 있다. 조셉 헨리 데이비스, 사마 메카이, 애니 아담슨, 엘리스 고든 니븐, 알렌, 걷루드 네피어, 아이다 맥피, 윌리엄 테일러 등이다.
 
이는 경남의 교회들의 뜻이 하나로 뭉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칫했으면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맥피 선교사의 묘는 간 곳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도 그의 귀한 뜻 마음에 하나가득 이어받아 후세뿐 아니라 다른 나라까지도 고이고이 전하려는 크리스찬들이 힘을 모은 곳이 기념관이다.
 
곳곳에 선교사들을 기리려는 뜻이 새겨져 있다. 가슴이 식어진 자, 누구든 이곳에 와보라. 바람결에 전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는 누군가를 위해 이토록 뜨거웠던 적이 있는가?’
 
기념관(창원시 마산 합포구 진동면 공원묘원로 230, 창원공원묘원내)과 더불어 연계 탐방코스를 방문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을 관람하는 부산 광진교회 교인들.     © 크리스찬리뷰

같은 창원시에 주기철 목사 기념관(창원시 진해구 웅천동로 17-4)이 있다. 그리고 그가 다녔던 웅천초등학교(진해구 웅천동로 33), 주기철 목사 고향교회인 웅천교회(웅천중로 65번길 10), 마산문창교회(노산동구길 21), 무학산 십자바위를 함께 순례하면 좋은 코스다.
 
기념관에는 13명의 문화해설사들이 교대로 근무하고 있다. 성시화운동본부 구동태 감독, 윤희구 목사, 이종삼 목사, 이인식 장로와 기자가 찾아간 날은 박선미 해설사가 함께했다.
 
박 해설사는 교육도, 의료도, 낙후한 한국 땅에서 순교의 각오로 살아간 선교사들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오늘도 방문하는 교인들이 있다며 그들의 순직을 기념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 속 한켠이 따뜻해진다고 말했다.
 
그들의 발자취는 1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글/정윤석|크리스찬리뷰 한국주재기자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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