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

글|김환기,사진|성기덕 | 입력 : 2018/09/27 [17:39]

▲ 평양과학기술대학 기초공사를 하던 중 토마스 기념교회 유적이 발견되었다.(위)아래 사진은 평양과기대 착공식(2 002년 6월 12일). ©크리스찬리뷰DB   

토마스와 김진경 총장

2001년 1월 '연변 과학기술대학교' 김진경 총장은 북한에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북한 대표단이 김 총장을 찾아 뵙겠다는 내용이다. 찾아온 대표단은 김진경 총장을 평양으로 초청한다는 내용문을 전달했다.
 
평양을 방문하니 김일성 종합대학 총장과 김책 공대 대표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김 총장에게 연변과 똑같은 과기대를 평양에도 세워 줄 것을 요청했다. 북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평양과학기술대학 부지를 조사하던 중 김 총장은 대동강변을 택했다.
 
그곳은 군부대 땅이었다. 북한 교육청 관리들은 깜짝 놀라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김 총장은 "최고지도자가 뭐든 다 들어주라고 했으니까, 일단 우리 안을 올려나 보라"고 말했고, 얼마 후 군대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군대를 옮기고 평양과기대의 기초공사를 하던 중,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땅을 파던 중 토마스 선교사의 기념교회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토마스 선교사의 기념교회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순교자의 피는 한국의 영적부흥을 일으킨 '장대현교회'에서, 통일의 물고를 트는 '평양과기대'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허가 후 8년 만인 2009년 9월 16일, 마침내 '평양과학기술대학'의 준공식 및 총장 임명식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2010년 10월 25일에는 평양과학기술대학 학부와 대학원이 강의를 시작했다.
 
2011년 8월 25일에는 북한 정부가 김진경에게 '평양 명예시민증'과 '교육학 명예박사증'을 수여하는 행사를 가졌다. 북한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에게 '명예시민증'을 준 것이다. 그는 4개국 시민증이 있다. 미국, 중국, 북한, 한국이다. 모두가 김진경 총장의 순수한 '사랑주의'(Loveism)에 감동받았다.
 
하노버교회 앞에서 김진경 총장의 자서전을 쓴 '스텔라 프라이스' 부부를 만났다. 두 사람은 웨일즈 출신으로 보스턴에서 살았다. 우연히 웨일즈 홀라노버에 있는 한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 교회에서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들은 토마스 선교사의 삶을 더 깊이 알고 싶어 그의 생애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의사인 남편 스티븐 프라이스 박사와 함께 '중국과 북한'에 의료 선교를 가면서 토마스의 발자취를 따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스텔라는 ‘조선에 부르심을 받다’(Chosen for Chosun)라는 제목으로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 기념 책자를 발간했다. 두 사람은 지금 토마스 선교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하노버교회 사택을 구입하여 살고 있다.
 
하노버교회의 예배 후 주차장으로 가는 중에 마당에 나와 있던 스티븐 박사를 만났다. 부인이 쓴 "조선에 부르심을 받다"란 책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 후, 집에 들어가 한 권의 책을 가지고 나왔다.
 
김진경 총장의 자서전인 '하나님의 동역자' (God's Collaborator)이었다. 번역본이 없어서 미안하다며, 책을 선물로 주었다. 스티븐 박사 부부는 중국과 북한 선교를 하면서 오래 전부터 김 총장을 알고 있었고, 스텔라는 그의 '사랑주의'(Loveism)에 감동받아 책까지 쓰게 된 것이다.
 
▲ 1866년 9월 2일, 27세 나이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기념해 설립된 토마스 기념교회. 한국교회는 1927년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토마스 목사가 묻혀있던 쑥섬에서 1천여 명의 교인이 모인 가운데 추모예배를 드렸다. 1932년에는 토마스 목사의 이름 첫 스펠링 ‘T’자 모형으로 기념예배당을 건립했다. ©크리스찬리뷰DB    
 
책에는 '평양과기대' 부지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북한 정부는 '평양과기대'와 관련된 대부분의 권한을 김 총장에게 위임했다. 북한은 김총장에게 과기대 후보지를 세 군대를 보여주며 선택하라고 했다.
 
김총장은 기도 후에 대동강변 부지를 택했다. 김 총장 자신도 놀랬다. ‘토마스 선교사 기념교회터’였다. 과연, 우연이라고 해야 하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토마스와 박은배 교장

 
박은배 교장은 1995년 호주 멜본에서 열린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 총회에 참가했다가 그곳에서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1856∼1890)의 순교 이야기를 듣고 한국교회 역사에 눈을 뜨게 됐다.
 
2008년 9월 호에 크리스찬리뷰와 인터뷰했던 글이 실려 있다.
 
“나는 호주한인교회에 많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1995년 멜본한인교회에 갔다가 호주의 첫 한국 선교사 데이비스의 순교 이야기를 듣게 됐다. 남들은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너무도 큰 감동을 받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데이비스는 복음을 전하려고 40일간 배로 태평양을 건너 한국을 찾았지만 폐렴과 천연두로 입국한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떴다.
 
이 사건은 당시 호주교회에 대단한 영적 각성을 불러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150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을 향하게 된다. 역사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이 사실을 듣고 큰 감동과 반성을 하게 됐다. 그래서 기독교 유적지를 찾아 나서다가 결국 토마스 선교사의 기념관까지 세우게 됐다."
 
그는 데이비스의 순교 이야기를 듣고 '평범한 교사'에서 '복음의 투사'로 변했다. 그후 '한인기독교유적지'를 답사하고 글을 통해서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그를 '안산여자정보고 교장'으로 승진시켜주셨다.

▲ 강화도에 토마스 선교사 기념관을 세우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고 박은배 교장.     © 크리스찬리뷰

"남편이 교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박 교장을 쓰시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평교사였을 때는 윗사람의 눈치 보느라 자유롭게 시간을 내지 못했습니다. 교장이 되고 남편은 자유롭게 선교지를 방문하고 글도 쓰게 되었습니다."
 
2018년 7월 9일, 부인인 배수옥 권사와 함께 강화도에 있는 '토마스 선교사 기념관'을 찾아갔다. 교사 퇴직금을 털어 산 '기념관 부지'이다. 박 교장은 부지를 조성하고 토마스 선교사의 흉상을 동으로 제작했고,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원로목사)는 시비를 세웠다.
  
그러나 기념관을 세우기까지는 많은 난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 구입한 곳이 맹지라 강화시청의 허락을 받아야만 길을 낼 수 있다. 둘째 교계에서는 기념관 건립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셋째 학계에서는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있었다.
 
"참 많은 노력을 했어요. 강화도는 지방색이 아주 강한 곳인 것 같습니다. 외지 사람이 땅을 사서 길을 낸다고 하니 허락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허락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 시인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가 한국교회 첫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 순교를 기념하며 시비를 세웠다.                       © 크리스찬리뷰
 
▲ 한국 땅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래하도록 성경을 보급한 사람, 그리고 이 땅에 순교의 피를 적신 사람, 그 사람에 대한 기념관이 없다는 것에 주목한 박은배 교장(안산여자정보고)은 강화도 구하면 내하리에 2천 제곱미터의 땅을 마련했다. 박 교장은 토마스 선교사의 흉상과 그를 기리는 시비를 세우고 기념관을 건립을 진행하던 중 단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2009년 7월 27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사진은 토마스 기념관 부지에 조성해 놓은 각종 시설물들. 누가 이것을 완공할 것인가....?     © 크리스찬리뷰

배 권사는 답답함을 감추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만약 토마스 선교사가 미국 출신의 감리교나 장로교 선교사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 '회중교회' 목사였다. 이제 영국에는 '회중교회'란 교단은 없다. 장로교, 회중교회, 그리스도 교회 등 여러 교단이 연합하여 URC(United Reformed Church)라는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하노버교회' 역시 작은 시골교회로 전락하여 도와줄 여력도 없다. 다행히 토마스 선교사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박 교장은 실망하지 않고 기념관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에 통증이 있었다.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을 했지만, 결국 병원에 입원해 정밀검사를 받게 되었다.
 
아뿔싸, 담도암 말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3개월 후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날은 2009년 7월 27일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은퇴를 얼마 앞두고 일어난 사건이다. 은퇴 후 자유롭게 기념관 사업에 매진하려고 했는데!
 
박 교장은 자신에게 비전을 보여준 '데이비스 선교사'와 같은 길을 걸었다. 데이비스는 이역 멀리 호주에서 배를 타고 1889년 10월에 도착해서 6개월간 한글을 배우고, 부산 복음화를 위해서 1890년 4월 4일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인 4월 5일 순직했다.〠 <계속>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본부
사진/성기덕|크리스찬리뷰 객원사진기자(한국)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