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찾는 곳이면 어디든 갑니다

대금주자 이우희 집사(시드니영락교회)

글|주경식,사진|권순형 | 입력 : 2018/10/29 [17:07]
▲ 시드니영락교회 주일 오후예배에서 복음성가 ‘하나님의 은혜’를 연주하는 이우희 집사. 그는 영혼으로 드린 이 찬양이 자신에게 가장 큰 감동이 되었다고 간증했다.         © 크리스찬리뷰

순박한 말투, 동양적인 얼굴, 무엇보다도 그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모임에는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는 착한 남자 이우희. 그를 시드니의 이스트우드 한 카페에서 만났다. 아마도 독자들도 그의 사진을 보는 순간 ‘아, 이사람!’ 하며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필자도 그를 시드니의 다양한 모임에서 그동안 여러 차례 만났다. 
 
시드니 촛불집회 때도 그는 모인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대금’ 연주를 멋드러지게 연주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시드니 세월호 추모모임,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건립모임, 이러한 사회적 이슈들이 있는 모임에는 여지없이 그가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웨스트미드 아동병원 자선음악회 등 여러 자선 음악회에도 자주 불려 다녔다.  이렇듯  사람들이 부르면 어디든 마다 않고 찾아가서 한국의 대금소리를 들려 주었다.  
 
소리에 끌리다

▲ 우희 군에게 대금을 가르쳐준 신수용 선생. 자신이 운영하는 합천호 앞의 전통찻집 입구에서 대금을 품고 포즈를 취했다. 그는 국악뿐만 아니라 성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이용해 퓨전 국악 작업을 하고 있다.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강백천류 대금산조 이수자이다.     © 크리스찬리뷰

어떻게 그는 이러한 전통악기에 끌리게 되었을까?  경상남도 거창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자란 그는 중학교를 다니기 위해 거창읍에서 자취를 하며 지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거창읍의 중학교를 오가는 도중 한 집에서 구슬프게 흘러나오는 ‘대금’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끌렸다고 한다. 중학교 1학년생의 귀에 들려왔던 ‘대금’ 소리가 무슨 이유로 13세의 사춘기 학생의 가슴을 후벼파며 들어왔을까? 

▲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기림의 날 을 맞아 에쉬필드연합교회에서 진행된 문화행사에서 사물놀이팀과 공연하는 이우희 집사     © 크리스찬리뷰

“모르겠어요. 그 소리가 하도 구성지고 좋아서 6개월 여를  매일 선생님 집 앞을 지나칠  때마다  담밖으로 흘러나오는 소리에 이끌렸어요.  그러다가 6개월 후에 용기를 내어 찾아 들어갔습니다.  저희 선생님 이름은 신수용입니다.”
 
중학교 1학년생의 당돌한 모습에 신수용 선생은 놀랬을까?  ‘대금’ 소리가 좋아서 찾아 들어 왔다는 그에게 신수용 선생은 전통차를 대접해 주었다고 한다. 

▲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기림의 날에 대금 연주하는 이우희 집사.     © 크리스찬리뷰

우희 군은 그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6년을 개인사사로 배웠다.  궁금했던 필자는 신수용 선생에 대해 찾아 보았다.  그 선생에 그 제자라고 했던가?  신수용 선생  역시 중학교 때부터 유랑극단에서 들려오는 판소리, 대금, 해금 등 전통악기 소리에 푹 빠졌다고 한다. 특히 대금소리가 얼마나 좋았던지 유랑극단에 숨어 들어가 연주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중학교 때부터  바로 단소부터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     © 크리스찬리뷰

뿐만 아니라 대금소리가 좋아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국악인 대금산조 예능 보유자인 김동표 선생을 찾아가 개인교습을 받았다. 이우희 집사의 스승 신수용 선생은 현재 퓨전 국악인으로 통한다.  <서편제>의 소리꾼으로 유명한 오정해 씨가 신수용 선생이 작곡한 ‘나그네’와 ‘가시리’를 불렀다.  

사실 ‘대금’을 바로 배우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금’보다 짧은 ‘단소’를 보통 먼저 배운다. 이우희씨 역시 ‘단소’를 6개월 동안 먼저 배웠다.  필자의 중학생 시절을 되돌아 보았다.  그 당시 유행하던 팝송을 라디오로 들으며,  전통음악보다는 팝과 서양밴드에 더 친근했던 세대가 아니었는가? 어떻게 이우희는 그것도 중학생이 전통음악 소리인 ‘대금’소리에 빠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러기에 이것은 그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우희 집사가 연주하는 각종 전통 악기들. 왼쪽부터 산조대금, 개량Dkey 대금, 정악대금, 태평소, 개량 Ab 단소, 우조단소.     © 크리스찬리뷰

한 번은 그가 고등학교 시절 야간학습을 하다 말고 울적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대금을 가지고 근처 ‘영호강’에 나갔다. 그리고 강가에 앉아 구슬프게 대금을 연주했다고 한다. 그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참 운치있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이 대금을 가지고 강가에 앉아 구성진 산조를 대금으로 뽑아내는 그림은 자연과 어울어진 한폭의 수묵화 같이 연상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한국의 전통악기 종류는 훨씬 많다. 그 중에서도  입으로 부는 관악기 종류만 해도 다양하다. ‘피리, 해서, 소금, 중금, 대금, 초적, 소관자, 퉁소, 태평소’ 등 얼마나 다양한지 모른다. 
 
이우희 집사는 이렇게 입으로 부는 악기는 거의 다 연주할 줄 안다. 그는 중학교, 고등학교 6년을 신수용 선생에게 개인교습을 받은 후에 대학은 다른 전공인 ‘산업공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가 연주를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군대에 가서도 전통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취타대’에  뽑혔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운이 좋았죠, 물만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금도 원없이 불었죠. 그리고 마침 제 바로 위 고참이 ‘태평소’를 전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고참이 처음에는 저를 많이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태도가 바뀌더라고요, 그리고 저에게 ‘태평소’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입으로 연주하는 한 가지 관악기를 터득하면 다른 관악기들도 대부분 연주할 수 있다. 그 역시 대금뿐만 아니라 태평소를 비롯해 단소, 소금, 중금 등을 연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좋아하 는 소리는 역시 애절하고도 한국의 한이 서린 ‘대금’소리이다. 
 
시드니와 대금
 
이우희 집사가 시드니에 온 것은 1998년이다.  한국의 IMF가 막 터졌을 때 관광비자 신분으로 호주에 왔다.
 
“당시만 해도 워킹 홀리데이 비자 받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잔고증명도 해야 하고 여러 가지 서류들도 까다롭고 해서 그냥 관광비자로 들어왔습니다.”
 
평소에도 영어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젊은 나이에 무엇인가 도전해 보고자 무작정 온 것이다.  아무런 인척도 없이 시드니에 도착한 그는 당시 시드니의 ‘사물놀이’단체의 회원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전통악기 연주자인 그는 자연스레 ‘사물놀이’패와 인연이 닿았던 것이다. 
 
그 후 학생비자로 전환하고 그 단체의 회원들을 통해서 직장도 소개받고 정착을 잘 할수 있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모았다. 그리고 열심히 번돈으로 드디어 TAFE 과정에 들어가 ‘부동산 감정평가’ 과정을 공부하였다.  그 공부를 통하여 영주비자도 받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실 아는 사람도 없이 왔는데 제가 대금을 불 줄 몰랐다면 사물놀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분들의 도움으로 직장도 구하고 살 집도 소개받고, 많은 도움을 받았죠.”

▲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 보은 오찬 행사에서 대금 연주하는 이우희 집사.(2016. 11)     © 크리스찬리뷰

그는 현재 호주 직장에 다니고 있다. 그의 직업은 ‘감정평가사’이다.  하지만 그의 사명은 시드니 구석구석을 다니며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물불을 마다 않고 찾아가서 한국의 ‘소리’를 들려준다. 한민족의 애환과 고유한 정서가 묻어나는 ‘대금’소리를 통하여 사람들의 가슴을 애잔케 해 주고 있다.
 
그는 연주한 것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시드니의 많은 모임들에 초청되어 불려 다녔다. 그뿐만 아니라 해마다 정부의 공식적인 모임에도 한국의 전통적인 소리로 초대되어 한국의 소리를 들려 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감명깊은 기억 중 하나는 ‘채널 9’이 주최한 2000년이 시작되는 밀레니엄 행사에 ‘사물놀이패’로 초대되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전통 한복을 입고 연주했을 때라고 한다.
 
생각해 보라. 또 다른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2000년 첫날에 불꽃놀이 축제가 펼쳐지는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전통 한국의상을 입고 한국의 소리가 전 호주에 울려퍼지게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다문화국가인 호주에서 한국의 소리를 전 호주에 알리는 문화대사의 역할도 감당한다.
 
▲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대금 연주하는 이우희 집사.     ©크리스찬리뷰
 
시드니는 서양음악이 강한 동네이다. 사실 교회음악도 따지고 보면 다 서양악기, 서양음악 일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호주에 와서 한국 전통악기인 ‘대금’을 분다는 것은 어딘지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교회에서 연주되는 ‘대금’하면 왠지 잘 어우러지는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대금으로 연주하는 찬송은  오히려 성도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셔준다고 확신한다.
 
실제로 그가 대금으로 연주하는 찬송가와 복음송을 듣노라면  구구절절이 사람들의 가슴속을 애잔하게 파고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역발상으로 모두 서양악기만 연주하는 시드니이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 전통악기인 ‘대금’의 소리를 들려 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사실 필자를 비롯한 대다수의 한국사람은 한국 전통악기 보다는 서양음악에 오히려 더 친숙하다. 그래서 한국의 전통악기들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많지 않다. 심지어 어떤 악기의 종류가 있는지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전통악기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할 수 있는 나라가 별로 없어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전통악기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전통음악에도 서양음악에서 소리낼 수 있는 모든 악기가 다 있습니다. ”   
 
이희우 집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하면 서구음악에 익숙하고, 소리도 그동안 서양음악 소리에 길들여져 전통음악 소리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었는데 우리의 고유전통을 의도치 않게 무시한 것은 아닌지 반성이 일었다.
 
서양악기가 절대 표현하지 못하는 우리 한민족의 고유한 정서와 음색이 있다. 더우기 호주는 ‘다문화국가’를 지향하는 나라가 아니던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와 플릇의 소리는 얼마나 자주 들을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 고유의 전통의 소리를 이곳 시드니에 서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신앙이 회복되니까 소리가 달라집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자랐던 경남 거창군 남상면 임불리에는 교회가 없 었다. 그런데 그가 중학교 때 서울 영락교회에서 전도대가 내려와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착실히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부터 열정적인 신앙생활이 소원해졌습니다. 그래서 대학 수능을 본 후 하나님께 감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교회 안 다닐랍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안 나갔습니다.”
 
그는  뭔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체험을 주셨으면 기대했는데 그런 게 없으니까 신앙생활이 습관화되면서 별로 의미를 못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꽤 오랜 세월을 방황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술도 먹고 담배도 하고 그렇게 하고 싶은 것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시드니에 와서 결혼도 하고 자녀도 생기고 나니 이렇게 살아서 안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사실 그가 신앙생활을 회복한 것은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고 한다. 다시 교회를 정해서 규칙적으로 참석하면서 QT 모임도 열심히 하고 말씀의 의미가 깨달아지면서 어렸을 때의 감정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말씀중심의 성숙한 신앙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사실 신앙이 회복되니까 제 대금 소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제 스스로 그것을 깨닫습니다. 예전에는 사실 전통음악만 연주했거든요, 산조나 정악곡이나 전통음악만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니까 복음송이나 찬송가도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가끔 교회에서 찬송가나 복음송을 특송으로 연주하고 나니 사람들이 그러는 거예요, 가슴을 적시는 소리를 들었다는 거 예요. 그때부터 복음송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 캔버라 대사관 공연 때 함께 한 이우희 집사 가족사진. 큰아들 재현(오른쪽)군과 둘째 아들 재하 군. 그리고 부인 임견정 씨.     © 이우희

그는 요즘 외부의 여러 모임들에도 많이 불려 다니지만 시드니의 여러 교회에서도 초청이 끊이지 않는다. 대금 소리는 한민족 고유의 가슴을 적시는 감동이 있다. 그가 연주하는 찬양은 영혼으로 드리는 그의 몸기도이다.
 
“이 근래의 일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 복음송을  특송으로 연주하는데 저 스스로 얼마나 은혜가 되던지참으로 제 자신에게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순박하게 표현하는 그의 고백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고 진실로 와닿는다. 그가 고백하듯이 어느 때는 그 스스로 드리는 자기 연주에 감동되기도 하는 것이다.
 
“복음송은 스킬만 가지고는 되는 게 아닙니다.  크리스찬이 아니어도 복음송은 연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으로 드리는 찬양은 안되는 거죠.” 
 
그의 고백대로 우리 신앙과 찬양도 습관화되어 영혼없는 울림으로 허공만 쳐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신앙이 회복되니까 소리가 달라진다는 그의 말이 그렇게 강렬하게 와닿는 것은 그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고백 때문이리라.
 
마지막으로 시드니 교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던진 질문에 쭈뼛쭈뼛 망설이더니 어렵게 말을 이었다.
 
“누구에게 들었는데,  사명이라는 것이 사실 자기가 잘하는 것으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누구든 잘하는 것이 한 가지씩은 있을 거예요. 그것으로 열심히 봉사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혜있는 척하지 말고 다 내려 놓고 그림자처럼 사시면 좋겠습니다.”  

▲ 캔버라 한국 대사관 Korea Day Festival 때 시드니 어린이 풍물 패 ‘비빔밥’과 공연 후 촬영한 기념사진.(2017. 11) ©이우희    

 
▲ 군시절 취타대에서 대금 연주하는 이우희 씨(왼쪽) ©이우희    

그림자처럼 살면 좋겠다는 그의 말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 여러 봉사들을 하더라도 결코 내세우지 말고 겸손하게 제 할 일을 묵묵히 하라는 말일 것이다.  그림자처럼 살라는 그의 말이 대금 소리처럼 가슴을 울리게 한다.〠

글/주경식/크리스찬리뷰 객원기자, 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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