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

글|김환기,사진|성기덕 | 입력 : 2018/10/30 [12:19]
▲ 시인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가 한국교회 첫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 순교를 기념하며 시비를 세웠다.     © 크리스찬리뷰

▲ 한국 땅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래하도록 성경을 보급한 사람, 그리고 이 땅에 순교의 피를 적신 사람, 그 사람에 대한 기념관이 없다는 것에 주목한 박은배 교장(안산여자정보고)은 강화도 구하면 내하리에 2천 제곱미터의 땅을 마련했다. 박 교장은 토마스 선교사의 흉상과 그를 기리는 시비를 세우고 기념관을 건립을 진행하던 중 단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2009년 7월 27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사진은 토마스 기념관 부지에 조성해 놓은 각종 시설물들. 누가 이것을 완공할 것인가....?     © 크리스찬리뷰

호주에서 한국에 파송한 첫 선교사 데이비스 목사 순직 이후 더 많은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을 찾아와 부산과 경남 지방을 복음화하였다.
 
"남편은 토마스 기념관 건립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가는 것을 많이 아쉬워했습니다. 앞으로 기념관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도저히 저는 이 일을 추진할 능력이 없어요"
 
배 권사는 갑상선암으로 세 번의 대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큰아들 내외와 함께 김포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혹시 자녀 가운데 이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아빠가 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보였는지, 돌아가시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왜 박 교장은 토마스 선교관을 강화도에 건립하려고 했을까?"
 
토마스의 선교행적에는 강화도와 관련된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배 권사를 만나고서야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배 권사는 박 교장이 2009년 1월에 발간한 ‘하나님의 호흡 - 한국기독교 국내 유적답사기 1권’, ‘하나님의 거처 - 한국기독교 국내 유적답사기 2권’의 책을 서재에서 꺼내, 선교관 건립과 관련된 부분을 펼쳐 주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토마스는 1차 선교 여행을 떠났으나 거센 풍랑을 만나 간신히 베이징으로 돌아왔는데, 어느 곳에서 풍랑을 만났는지는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동시 교동도에서 살았던 박동엽의 집안에는 토마스가 백령도와 볼음도를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목을 밤중에 탐색하다가 풍랑을 만나 타고 온 배가 쌍여에 걸려 교동도에 대피하였을 때 그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중략)
 
조선시대에 교동도는 한강의 입구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배를 감시하던 섬으로 삼도수영이 설치된 전략적으로 중요한 섬이었다."
 
토마스는 박동엽의 집에 머물면서 배를 고치고 식량과 물을 채우는 등 도움을 받았고, 이튿날 밤에 몰래 교동도를 떠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선교관 부지에서 날씨가 맑은 날이면 '교동도'와 '쌍여', 그리고 북한의 개풍군이 보인다. 박 교장은 지금은 이곳에 기념관을 세우지만, 통일이 되면 기념관을 대동강변에 세우기를 원했다.
 
그는 믿었다.
 
"한 사람의 꿈은 망상이 될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이 같이 꾸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을..."
 
박 교장은 토마스 선교관을 건립하려는 이유를 이렇게 고백한다.
 
"단추가 잘못 꿰어지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꿰면 됩니다. 한국교회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우려섞인 지적이 많이 나오는데 이 문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해결됩니다. 대한민국의 신앙의 뿌리에 뿌리를 찾다보면 가장 마지막에 남는 단어가 '순교'입니다.
 
한국교회가 성공을 지향하고, 경영 마인드로 관리하고, 복을 강조하는 신앙으로 변질돼 가는데 이제는 순교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저는 토마스 기념관을 설립하는데 남은 생애를 바치고자 합니다."
 
박 교장은 선교관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피와 땀은 선교관 부지에서 숨 쉬고 있다. 박 교장의 뜨거운 숨결이 그 누군가를 통해서 이어지기를 소원한다.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이어 새롭게 거듭나야 할 때가 되었다.


▲ 헐버트 선교사 묘지     © 크리스찬리뷰
▲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세워져 있는 루비 켄드릭 선교사 기념비. 25세의 아름다운 한 자매의 죽음과 그 묘비 상단에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주어진다면, 그 모든 생명을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크리스찬리뷰

나는 한국에 갈 때마다 양화진을 찾는다. 순교자의 비문 앞에 서면 내가 보인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J. W. 헤론)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A.R. 아펜젤러)

  “주님!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G.A. 테일러)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J. E. P 켐벨)

'종말론적 삶'이란 무엇인가? 열심히 살다가 그날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삶을 오늘 사는 것이다. 그날을 알고 오늘을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곳을 믿고 이곳에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끝> 〠  

글/김환기ㅣ 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본부
사진/성기덕 크리스찬리뷰 객원사진기자(한국)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