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 보이시는가?
일반 계시의 가치
 
주경식/크리스찬리뷰
천문학자나 생물학자 가운데 스스로 돌이켜 신앙에 귀의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이유는 자연의 일정한 법칙과 체계를 연구하다 보면 자연의 질서와 법칙에 외경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절대자가 없이는 컴퓨터보다 더 정확하고 빈틈없는 인간의 생체와 우주의 법칙들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의 오묘함과 신비로움을 보고 스스로 깨달아 신앙으로 귀의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에의 신비 또는 인간 역사의 섭리 등은 절대자를 발견하게 하는 자연에 새겨진 하나님의 발자국과 손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과 역사 그리고 인간의 양심에 드러난 하나님의 손길을 신학적인 용어로 ‘일반계시’라고 정의한다.
 
일반계시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께서 ‘종교의 씨앗’ 즉 핑계하지 못할 표시를 인생들에게 심어 놓으셨다고 묘사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매일 자신을 나타내신다. 뿐만 아니라, 칼빈에 따르면 인간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지식이 있음을 주장할 뿐 아니라  배우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자연에 계시된 하나님의 그 기술의 탁월성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무수하면서도 분명한 질서를 갖추고 있는 하늘의 별들 속에서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의 지혜를 풍성하게 보여 주시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인체의 구조에 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곧 우리가 갈렌(Galen)의  기술을 사용하여 인체의 관절과 균형, 아름다움, 그리고 그 용도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재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듯이, 인간의 몸은 과연 그 지으신 이의 탁월하신 지혜를 선포하기에 충족하리만큼 정묘하고 독창적인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성경도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당신의 존재하심을 자연과 만물 속에 새겨 놓아서 핑계하지 못한다고 경고하신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20)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창조물을 통해서 피조물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또한, 자연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되어가도록 역사해 가신다. 따라서 자연과 역사는 신의 전능과 신성, 지혜와 온전하심,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배우는 책이다.
 
이러한 것을 ‘자연계시, 혹은 일반계시’라고 한다. 그래서 “자연계시 혹은 일반계시는 모든 시대의 모든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연과 만물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러 시대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들에게 하나님 자신에 대해 계시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1-2)
 
그러나 일반계시를 말할 때 보통 일반계시는 언어의 형태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언어가(verva)가 아니라 사물(res)로 된 것이 일반계시이다.
 
그러므로 일반계시는 자연, 역사, 인간의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시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일반계시는 모든 시간 속에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보편적 계시라고도 부른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일반계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역으로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일반계시를 무시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칼바르트(Karl Barth)는 신정통주의 학자이면서도 일반계시와 자연신학 모두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를 떠나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견해의 밑바탕에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계시를 지나치게 강조하고자 했던 생각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운 계시 밖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제거하게 될 위험성이 있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생각과는 달리 일반계시에도 유용성이 있다는 것이 많은 개혁주의 학자들의 주장이다.
 
특히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일반계시의 유용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상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신에 대한 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모르는 체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신 되심에 대해 약간의 관념을 부여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에 대한 기억을 늘 새롭게 하시려고 신선한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이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생활을 바쳐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양심에 의해 정죄를 받게 하셨다.
 
일반계시의 가치와 유용성
 
사실,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일반계시가 특별계시(성경)로 대치되었다는 것 때문에 일반계시의 중요성이 간과될 수 있다. 또한 자유주의 신학에서 일반계시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때문에 이에 대한 역작용으로 복음주의 신학에서는 일반계시의 가치와 유용성에 대해 부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칼빈의 사상을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일반계시가 나름대로 가치를 가지고 있고 유용하다는 입장에 대해 긍정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반계시가 가지고 있는 유용성과 가치는 무엇인가? 일반계시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일반계시의 가치와 유용성은 신적존재에 대한 가장 생생한 증거가 인간 내면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숭배에 대한 관념도 이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방세계와 관련하여 이방인들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느끼고(행 17: 28),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기도 하고(행 17:27), 만물에 펼쳐진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기도 하며(롬1:19-20),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기도 하는 것(롬2:14)이 바로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실례를 든다면 모든 인류에게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감각들을 제공하는 것이며, 진리와 거짓, 선과 악, 의와 불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 어느 정도 각성이 있게 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우리 인간이 짐승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인간 안에 어떤 통제장치를 통하여 억제를 받는 것은 모두 이 일반계시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세계에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기독교 안에 있는 생명의 모방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일반계시의 가치와 유용성은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해서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일반계시를 통하여 유익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일반계시를 믿음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읽음으로, 자연에서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발자국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주위의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볼 수 있으며, 세상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이해하고 볼 수 있는 혜안이 생기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일반계시를 통하여 불신자와 만나 토론할 수 있는 접촉점을 가질 수도 있다.
 
이상은 일반계시가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가치와 유용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은총
 
이외에 일반계시와 관련해 더 깊이 논의될 사항으로는 일반은총이 있다. 불신자들에게서도 여저히 참된 지식과 참 도덕성이 발견된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성취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은혜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이루어 놓은 문화적 유산과 산물들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서 아름다움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k)는 일반은총을 받는 외방 세계가 단지 진리의 단편을 갖는 것만으로 온 진리를 다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단편적인 것이라도 그것이 진리요 좋은 것이라고 했다. 
 
즉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 의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의식없이 이루어진 문화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총을 제대로 구현하고 하나님의 선을 드러내면 우리가 향유할 수 있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F. Shaffer)도 일반은총을 특별히 예술에 적용하여 예술 자체가 – 그것이 종교적인 주제를 가지고 종교예식의 수단이 되지 않더라도 –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술의 잘못은 그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방법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세상, 성과 속, 성직과 세속직, 육과 영등 모든 것을 지나치게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려고 하는 태도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없다. 〠

주경식/호주비전국제 대학 Director, 전 시드니신학대학, 웨슬리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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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0/30 [14:22]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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