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과 행복

홍관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8/12/26 [17:31]
새해가 되면 만나는 사람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한다. 이것은 한국인의 인사다.
 “Happy New Year!”
 
서양 사람들의 인사다. 동양인의 복 개념은 물질적인데 비해 서양인들에게 개념은 정신적인 면이 강하다. ‘Happy’의 의미는 복을 누리는 기쁨과 평안이다.
 
문학 박사 이희승 편의 국어사전에 보면 복을 “아주 좋은 운수, 큰 행복과 오붓한 행운”이라고 정의하였는데, 운과 수가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의 개념은 불교와 유교의 종교적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본다.
 
불교는 ‘삼재팔고 (三災八苦)에서 벗어나는 것이 복이요, 유교는 ‘오복’(五福)을 얻는 것이 복이다. 돈 많고 건강하면 복 받았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돈이 없어지면 복이 나갔다고 한다. 물론 사업이 잘되고, 건강을 되찾고, 좋은 일자리가 생기고, 자녀가 없던 가정에 자녀가 태어나면 행복하고, 셋방살이 하던 사람이 자기 집을 마련하면 행복하고, 찢어지게 가난하던 사람이 복권이라도 당첨되면 행복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행복하기를 비는 대로 되었으면 좋겠는데, 다 비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행복을 사이비 (似而非)한 것에 두면 사주팔자의 운수로 풀어야 한다. 이런 쪽으로 복을 추구하면, 신발 한 짝이 뒤집혀도 재수가 없다고 한다. 단추 하나가 떨어져도 재수가 없을 것이고 불안해 한다.
 
새 사람이 들어와 3년 안에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재수가 없는 사람이 들어왔다고 하여 공연이 새색시를 구박하는 경우가 우리의 문화였다.
 
복이 나에게 떠나지 않기 위해 온갖 미신에 사로잡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산 것이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었다. 결혼날도 받아야 하고, 이삿날도 받아야 하고, 심지어 현대 문화권에 살면서도 아직 악귀가 가까이 못하게 한다는 소위 ‘부적’을 몸에 지니고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과연 그런 것이 행복의 열쇠가 될까? 사람은 미래를 모른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점이다. 그래서 요행을 바라게 되고, 여기에 미신이 생겨나게 되고, 사탄에게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
 
우리는 복의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복은 받고 얻는 것이 아니다. 복은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데서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의 개념이다. 
 
우리 믿는 성도들의 삶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신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가난하고 병들어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찬송하며 감사한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사람이지 물질 소유의 사람이 아니다.
 
성경은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한다(딤전 6:6).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지만, 그곳에서도 감사하며 찬양하였다. 이것이 기독교인이 누리는 복이다. 우리 모두 그러한 수준에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 2019년 한 해를 행복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게 하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

홍관표|본지 편집고문, 시드니중앙장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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