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 자키에서 목장의 목자까지

시드니새생명교회 장용우 안수집사

글|주경식,사진|권순형 | 입력 : 2019/01/28 [17:50]
▲  고교 시절 항암치료를 받으며 나이트클럽에 갔다 18세에 DJ를 시작한 장요우 목자. 그는 10년동안의 DJ생활을 청산하고 시드니에서 예수를 만났다.© 크리스찬리뷰

 

장영우 목자(41). 앳되 보이는 얼굴에  장난기 그득한 그의 말은 순박하게 느껴졌다. 그는 좋은 집안에서 자랐다. 아빠는 의사요, 엄마는 약사, 위의 두 형들도 다 의대에 다니는 집안의 막내로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공부도 형들보다 잘했다. 그래서 모두들 치대에 가서 치과의사가 될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그에게 전혀 생각하지 못한 질병이 찾아왔다. 바로 혈액종양, 림프암에 걸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이 다 의사였던 그는 그게 그렇게 심각한 것인 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들도 그에게 암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고, 집안에는 아빠가 의사요, 엄마가 약사에 형들도 의대에 다니고들 있었기에 어떤 병이라도 아빠, 엄마가 다 고쳐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때 암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을 못했어요. 그리고 또 개인적으로는 아버지가 의사고 형도 의대에 다니고 있었고 어머니도 약사였어요. 그러니까 병원 쪽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저는 큰 문제를 삼고 살지 않았던 거에요. 그래서 제가 아파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치료해 주시겠지 그렇게만 생각했던 거에요.”

 

▲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2005년 9월 시드니에 첫 발을 디딘 장용우 목자. 그는 2006년 학생비자로 전환하고 2007년에 결혼했다. ©장용우    


 
그런데 혈액종양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도 어쩔 수 없이 항암치료를 받으며(그때는 본인이 받는 치료가 항암치료인 줄도 모른 채 받았다고 한다) 몸이 약해지고 머리가 빠지면서 그전과는 달리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 와서 보면 굉장히 큰 병이었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 그렇게만 생각하고 지냈는데 몸은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리고 통원치료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제가 겉돌았어요. 그렇게 겉돌게 되면서 몰래 친구들하고 놀다가 어느 날 우연히 나이트클럽에 가게 된거예요. 그런데 거기는 완전 딴 세상, 새로운 인생 같은 것이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그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새로운(?) 인생에 눈을 떴다.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학교 출석도 하기 어려웠고 우연히 발을 들여 놓게 된 나이트클럽의 세계가 달콤했다.
 
항암치료를 받는 과정이었기에 머리가 다 빠진 그는 모자를 쓰고 나이트클럽에 다녔다.  그리고 그곳에서 DJ (Disc Jockey)가 되기로 결심했다.

 
틴에이저 디스크 자키(Disc Jockey)

 

▲ 시드니새생명교회 음향팀에서 봉사하고 있는 장용우 집사. ©장용우     © 크리스찬리뷰

 

그 당시 그는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그리고 힘들고 지루한 항암치료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본인의 말대로 그는 세상과 겉돌았다. 그리고 우연히 가게 된 나이트 클럽에서 새 인생(?)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힘들고 긴 항암치료, 친구들과 같은 정상적인 학업생활을 할 수 없었던 그에게 나이트클럽은 새로운 인생의 동기부여를 준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모님에게 자신이 DJ가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모님은 그것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오래 못 살 것 같으니까 그래 네가 해보고 싶은 것 한 번 해봐라 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DJ를 하려면 집에서 같이 지낼 수 없을 것 같아서 나가서 혼자 살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러면 네가 나가서 하고 싶은 것 하면서 한 번 살아봐라. 그렇지만 돈은 10원짜리 하나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두 분이 많이 우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는 집에서 나와 DJ 생활에 빠져들었다. 다행히 어렸을 때부터 친숙했던 음악적 감각으로 인해 DJ를 배우는 데에는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이 바뀐 생활과 자연스레 익힌 술, 담배는 그의 익숙한 친구가 되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술 담배를 했어요. 그래서 어떤 날은 피를 토하는 날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했어요.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죠. DJ 직업이 주로 밤에 일하는 거니까 자연스레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했어요. 밤 늦게 일을 시작해서 거의 새벽 늦게 끝나니까  아침에 들어와서 잠을 자는 거죠. 그래서 은행 일을 보기가 어려웠어요. 은행은 5시면 끝나잖아요.”

 

▲ 해피 디너 크루즈에서 DJ를 맡았던 장용우 목자(가운데)가 강승찬 목사(오른쪽)와 함께했다. ©장용우    


그는 이렇게 10년을 살아왔다.  18세에 DJ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후 뒤를 돌아다 볼 겨를도 없이 나이트클럽에서 그의 일생을 소비했다. 잘 나갈 때는 지방 여러 나이트클럽에 정신없이 불려 다니기도 했다. 돈도 잘 벌었다. 그리고 불행 중 다행인지, 여전히 약을 먹으면서도 술 담배를 했음에도, 그의 항암치료는 초기 1~2년만 하고 림프암이 잘 다스려졌다. 초기 몇 년은 일 년에 몇 차례 그후에는 일 년에 한 차례씩 항암 검사만 하면 되었다.

 
다시 새로운 세계로

 

▲ 이사 예배를 마친 후 목장 식구들과 함께 기념 촬영. ©장용우   

 
일찍부터 밖에 나가서 DJ생활을 했지만 부모가 부탁한 것이 있었다. 불교와 유교적 배경을 지닌 집안 내력상 제사도 지내고 여러 유교적 가풍이 있었지만, 다른 것은 못 지켜도 아버지 생일은 꼭 함께 모이자는 부탁이었다.
 
그래서 그는 밖에서 막 살았지만 일 년에 한 번 아버지 생일 전 날은 꼭 집으로 들어와 함께 자고 다음 날 아버지 생일에 함께 식사를 하는 가족 풍습을 지켰다. 
 
DJ 생활을 10년 정도하니까 여러 나이트 클럽에서 인지도도 꽤 높았고 나름 잘 나가는 시절이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차례 정기적으로 받아야 했던 검진에서도 완치가 된 것 같다는 좋은 소식도 들었을 때였다. 그는 앞으로 자기 인생은 영원한 DJ라고 확신하고 있던 때였다.
 
그가 혈액종양, 림프암이 발병했었을 때가 1996년도였으니까 햇수로 딱 10년 되던 해인 2005년이었다. 아버지 생일에 함께 식사를 하는데 아버지가 호주로 여행을 다녀오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아마도 2004년에 친구분들하고 호주로 여행을 다녀오신 것 같아요. 그런데 호주의 자연환경이 너무도 좋고 젊은이들이 워킹홀리데이 비자 같은 걸로 많이들 와서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런다는 거예요. 그러니 너도 한번 휴가 내서 잠깐이라도 다녀오라고 그러셨어요.
 
그때 저는 여권도 없었어요. 그런데 형들은 대학 다니면서 해외로 배낭여행도 다니고 그랬는데 저는 오직 나이트클럽 생활만 하니까 전혀 외국에 나가기는커녕 전혀 알턱도 없었죠. 저는 DJ 일을 한 10년 정도 했으니까 잠깐 휴가를 갖고 싶기도 하고 아버지가 알아서 여권도 만들어 주고 비행기표도 사준다고 하시니까 잠깐만 갔다 오려고 했지요.
 
아마도 처음에는 제가 암에 걸려서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DJ 생활을 허락해주셨는데 이제 이 생활을 그만두게 하려고, 저의 눈을 다른 곳에 돌리려고 제안하신 것 같아요.”
 
이렇게 그는 2005년 9월, 호주에 도착했다. 맨처음 올 때는 2~3개월 머물다 가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체스우드에서 쉐어를 하면서 아버지가 끊어준 2개월짜리 영어학원에 다녔다. 그러다 노스 시드니의 영어학원에서 동갑내기 지금의 아내 조정예를 만나게 된 것이다. 
 
“호주에 처음 도착해서 바로 체스우드에 쉐어를 하게 되었는데 시드니의 하늘이 너무 예쁜 거예요. 그때가 9월이었는데 지금도 안 잊혀져요.
 
한국에서는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이라 오전 10시쯤 자고 오후 5~6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근 10년 동안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낮에 하늘을 본 날이 별로 없었는데 체스우드에서 보는 하늘이 너무 아름다운 거에요.  
 
그리고 그 당시 여기서 여러 사람들을 사귀게 되었는 데 모두들 영주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저는 영주권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 있는 아버지와 통화를 하면서 이왕 거기까지 갔으니 거기서 정착하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쉽게 정착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와 통화를 하는데 그러시는 거에요. 이왕 거기까지 갔으니 호주에 정착하는게 어떻겠느냐, 어떻게 하면 정착할 수 있느냐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에게 물어보니까 요리(cookery) 공부를 하면 쉽게 영주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요리 공부한 사람들에게 영주권을 막 내줄 때 였거든요. 그래서 그렇다고 말씀드리니 그건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처음 호주로 올 때는 2~3개월 잠시 쉬었다 가려고 계획을 한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이곳 시드니에 영원히 정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기자에게는 말을 안했지만 2~3개월 후에 돌아가려고 했던 그의 계획을 바꿔 요리(cookery) 공부를 하려고 했었던 연유에는 아마도 그가 그때 지금의 아내를 만나 헤어지기 싫었던 이유도 거기 있었으리라.

 

또 다른 인생의 새막(Chapter)

 

▲ 2007년 결혼한 장용우와 조정예 씨. 유학생 신분이었던 이들의 주례는 공인주례사가 맡았다. ©장용우  

 

그리고 그는 워킹홀리데이 비자에서 2006년에 학생비자로 전환하고 요리학교를 다녔다. 아내가 얼마나 좋았던지 아직도 학생 신분이던 그는 2007년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2008년에 예쁜 딸 ‘아라’를 낳았다. 어떻게 보면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된 것은 딸 ‘아라’의 덕이 클지도 모른다.  둘 다 젊은 신혼에 가족과 친지도 없는 만리 타국에서 막 낳은 아이를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으리라. 아이를 낳은 후 아내의 산후조리를 도와 줄 사람을 인터넷에서 찾았다.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는 전혀 생각지 못한 사건으로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아내의 산후조리가 그들에게는 또 다른 인생의 새 막(chapter)을 열게되는 접촉점이었다.

 

▲ 시드니에 있는 영어학원에서 장용우 씨를 만나 결혼한 조정예 집사.     © 크리스찬리뷰


“딸 ‘아라’를 막 낳을 무렵 아내의 산후조리를 해줄 분을 찾았죠. 저희는 이곳에 아는 사람도 없고 가족과 친척도 없기 때문에 아내가 아기를 낳은 후 산후조리를 해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마침 산부인과 전문 간호사인 그분의 어머니가 산후조리를 해주신다고 해서 저희는 산부인과 전문지식을 가진 간호사도 필요했고 산후조리를 해주실 분도 필요했는데  딱 그런 조건을 갖춘 김에스더 목자를 만나게 된 거에요.”

 

▲ 30여 년전 10살 때 장용우 목자가 유화 물감으로 직접 그린 ‘아라’ 캐릭터. 그는 결혼해서 아기를 낳으면 남자면 마루, 여자면 아라라고 이름을 지으려 했는데, 딸이라서 ‘장아라’라고 지었다. 이 그림은 어머니가 너무 좋아해서 보관하고 있다가 결혼 후 호주로 가져다 주었다.     © 크리스찬리뷰


김에스더 목자(시드니새생명교회 권사)는 성심으로 젊은 부부의 필요를 도왔다. 산후조리뿐만 아니라 육아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그들에게 개인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원래 2주 예정이었던 산후조리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만난 좋은 인연은 젊은 부부의 신뢰를 갖게 해주었다.
 
여기서 그의 아내 조정예 집사의 말을 들어보자.
 
“저는 아기를 낳고 너무 감사한 거에요. 제가 아기를 낳은 것도 감사하고 아기가 건강한 것도 감사하고 만약 신이 있다면 신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제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에스더 목자님을 만나게 된 것이죠. 그렇게 2주 산후 조리가 끝나고 조금 잊고 있었는데 3개월 후에 제가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에스더 목자 어머님에게 다시 아기를 맡기게 된 것이죠.”
 
조정예 집사는 헤어드레서이다. 남편 장용우 목자가 요리공부를 할 때 그녀는 일을 하며 남편의 학업을 도왔다. 다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형편에서 조 집사는 에스더 목자 어머니에게 다시 아기를 맡기면서 에스더 목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 조정예 씨를 목장으로 초대해 신앙을 갖게 해 준 김에스더 목자(권사) ©김에스더   


그때 에스더 목자는 조정예 씨를 목장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초대해서 같이 식사를 나누었다. 그때도 장용우(목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다. 조정예 씨는 에스더 목자의 목장에 참석하게 됨으로 먼저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열심히 교회에 참석하면서 남편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다. 장용우 목자가 있기까지는 부인 조정예 집사의 눈물어린 기도와 목장 식구들의 중보기도의 도움이 컸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이 교회가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부인의 교회생활에 대해서 냉소적이었던 그는 목장모임이나 교회 가는 일로 인해 자기에게 피해 주는 일은 하지 말라고 부인에게 분명히 경고했다고 한다.
 
“언제가였어요. 교회에서 ‘생명의 삶’ 공부하러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비가 어마어마하게 내리던 날이었는데 그때 제가 그랬어요. ‘공부하러 갈 때 아기도 데리고 가라고. 그리고 나에게 피해 주지말라’고.
 
그런데 그렇게 비가 엄청나게 내리는 날 에스더 목자가 와서 아기를 담요에 잘 싸서 본인의 차에 태우고 아내의 공부를 위해 대신 아기를 봐주러 오셔서 함께 데려다 주고 함께 데리고 오는 거에요.

 

▲ 장용우 목자 자택에서 열리는 목장 모임. 장 집사는 멕시코목장을 섬기고 있다.    



그때 공부 끝나고 아내에게 전화가 왔어요. 끝났는데 우리 데리러 안 올 거냐고. 그래서 제가 안 간다고 했죠. 그런데 또 에스더 목자가 아기와 아내를 태우고 집까지 잘 픽업을 해주시고 정성껏 섬겨 주시는 거에요.”
 
한송이 국화꽃을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던 것처럼 한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무한한 희생과 섬김과 돌봄이 필요하리라.
 
아내가 먼저 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편 장용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반대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아내가 목장모임 또는 교회에 갈 때는 친구들을 불러다 술잔치를 벌이고 나오지 않는 영주권 때문에 마음이 굳어져 갔다.

 

▲ 2011년 세례받고 신앙 생활을 시작해서 현재까지 믿음의 동역자로 함께 신앙 생활 중인 친구 노재현 안수집사(왼쪽) ©장용우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교회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바로 딸 ‘아라’가 유아세례를 받는 날이었다.
 
“목사님이 아내를 통해 그러셨어요. 그래도 딸이 유아세례를 받는데 아빠가 와서 함께 축하해주어야 하지 않느냐고요. 그래서 생전 처음 교회란 곳에 가봤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가 교회에서 VIP (매우 중요한 전도대상자)였더라고요.” 

 

▲ 미국 휴스턴에서 열린 평신도 세미나에 참석한 장용우 목자(왼쪽)가 동기생들과 함께. 앞줄 가운데는 이수곤 목사. ©장용우    


그 후 그는 가끔식 목장모임에 초대되었다.
 
그렇지만 영주권을 신청한지 2년이 지나가는데도 아직 좋은 소식도 없고 브릿징 비자로 3년이나 지내며 마음에 불평이 쌓이고 늘 답답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바로 2011년 3월 교회에 곽인순 목자 초청 간증집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분이 미국에서 오시는데 참석하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권면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참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게된 터닝 포인트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때 제 마음이 그랬습니다. 2010년에 영주권 신청을 했는데 소식도 없고 브릿징 비자로 3년이나 지나며 많이 지쳤던 것 같습니다. 호주에 살기는 하지만 영주권도 안나오고 비전도 없고 한국도 그립기도 하고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하나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나고 상담 한 번 받아 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곽인순 목자께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주시더라고요. 그리고 저한테 그러면 공부를 더 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실은 고3 때 암으로 ‘치의대’ 가는 것이 좌절된 후에 제 마음 깊은 곳에서 공부에 대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터치해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상담 끝나고 나가는데 환하게 웃으시면서 그러시는 거예요. ‘하나님 한번 믿어 보세요!’ 환하게 웃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제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는 이후로 목장모임과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치대’를 가려고 몇 군데 치대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비자 컨디션도 안되고 입학 조건이 어려워 치대 진학은 좌절되었다.
 
하지만 비슷한 학문인 치기공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치기공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과정 속에서 기적적으로 2012년 영주권도 얻게 되었다.

 

▲ 목자, 목녀 임명장을 받은 장용우 안수집사와 조정예 집사(2018. 11.25)     © 크리스찬리뷰

 

목자들의 목자

 
장용우 목자는 신앙생활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영주권 신청을 하고 난 후 결과를 기다렸는데 오히려 비자 컨디션이 훨씬 어려워졌다. 신앙생활을 새로 시작했는데 오히려 힘든 상황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승찬 목사(시드니 새생명교회)의 말을 빌리자면 ‘순종’의 사람이다. 목사가 신앙생활을 안내하는 대로 잘 순종했다. 장 목자는 신앙이 어렸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기도해야 한다는 목사의 말을 믿고 순종함으로 새벽기도를 꾸준히 참석했다.

 

▲ 2018년 3월 안수집사로 임직받은 장용우 목자는 가정교회 목표인 신약 교회의 회복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추운겨울에도 오들오들 떨면서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와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 비자 컨디션이 바뀌어 영주권 받는 것이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28일 후에 호주에서 나가라는 추방 편지를 받고 나서 기적적으로 영어점수가 나와 영주권을 받았다.
 
그 후에도 그는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2014년 치기공 학교를 졸업한 후 장용우 목자는 호주 직장에서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다. 지금도 카슬힐에 있는 직장으로 출근하기 전에 새벽마다 꼬박꼬박 교회에 들려 기도한 후 출근한다고 한다. 
 
마태복음에 보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마 20:16)는 말씀이 있다. 그는 확실히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순종적이고 성실한 삶은 공동체의 여러 목원들과 목자들에게 좋은 신앙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늦게 믿었지만 공동체에서 목자들의 목자로까지 인정받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앞으로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순박하게 대답한다.
 
“신앙생활한 이후 저에게 많은 호칭이 붙었습니다. ‘목자’‘안수집사’ ‘초원조장’ ‘목회행정부장’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호칭은 역시 ‘목자’입니다.  ‘시드니새생명교회의 장 목자’ 그렇게 불리울 때 제일 기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저의 꿈은 제가 섬겨야 할 목원들을 목자로서 열심히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목자에 대한 그의 소명과 자부심이 뜨겁게 느껴진다. 목장 시스템은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목자들의 삶을 보고 배우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배웠듯이 말이다.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설교자들이나 교사들의 말을 듣고 배우는 시스템이었다. 말은 모두들 유수같이 잘 하는데 희생과 진정으로 섬기는 모범을 볼 수 없었다.
 
기자는 개인적으로 교회마다  열심으로 따라하는 무슨 무슨 프로그램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교회마다 열심히 여러 프로그램들을 도입하지만 희생과 섬김의 모범없이는 말의 종교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목자들의 희생과 섬기는 모습을 보고 신앙을 배울 수 있다면 말만 앞세우지 않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글/주경식|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